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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이동(2)<연재> 임영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의 역정’ (8)
임영태  |  ytlim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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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11  13: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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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상하이서 첫 걸음을 시작해 일제의 패망으로 1945년 11월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 27년간 고난에 찬 투쟁을 이어갔다. 그 사이 임시정부는 상하이,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 등 중국 대륙 곳곳을 누비며 1만3천리(5,200㎞)를 이동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초기 활동 지역인 상하이와 첫 피신처였던 항저우의 임시정부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상하이・항저우 유적지 답사기와 함께 임시정부 역사를 10여회에 걸쳐 정리하고자 한다. 이 답사기는 매주 화요일 연재된다. / 필자 주

 

물 위에 떠다니는 정부

상하이를 떠난 뒤 한동안 임시정부의 처지는 ‘물 위에 떠다니는 정부’처럼 매우 어려웠다. 정정화의 ‘강물 위에 뜬 망명정부’라는 표현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주1)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의 추적을 피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하는 처지였고, 임시정부의 중심이 되어야 할 김구는 회의조차 참석하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임시정부는 최선을 다해 활동을 이어갔다. 1933년 12월 말 임시의정원은 전체역량을 군사 활동에 집중하여 전 민족으로 하여금 실전시기로 돌진케 한다고 선언했다.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경로가 오직 군사행동에 있을 뿐이므로 정부는 이를 위한 ‘군사상의 직무’를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주2)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재정기반을 확보는 것이 시급했지만 임시정부는 해결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윤봉길 의거 후 중국 국민당정부에서 음으로 양으로 지원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버티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미국 동포사회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신뢰가 식어가고 있었다. 외국의 원조 외에는 미주 동포들의 재정지원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던 임시정부로서는 대한국민회의 불신이 큰 타격이 되었다. 미주 한인사회에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 사이에 알력이 발생하면서 임시정부는 더욱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임시정부는 비상상황에 맞게 조직을 간소하게 운영했다. 국무회의는 정식회의인 정기회의·임시회의와 간담회 혹은 비공식협의회 성격의 담화회가 열렸는데 출석인원의 과반수로 의결 처리했다. 이동 시기 임시정부는 비상내각의 형태로 운영되었고, 비서장이 일상적인 운영과 안전을 책임지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윤봉길의거 이후 실력자로 부상한 김구가 임시정부 운영의 일선에서 물러나 피신 중인 상황에서, 의열단과 ‘재만’한국독립당, 그리고 임시정부 여당인 한국독립당 내의 일부세력이 연합하여 새로운 독립운동정당 창당을 위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조직했다. 임시정부는 민감하게 반응하며 방어적으로 대응했다. 윤봉길의거 후 임시정부의 최고 실력자로 부상한 김구 또한 신당창당을 반대하였다. 김구와 임시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선민족혁명당’이라는 신당 창당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35년 6월 20일 난징에서 각 혁명단체 대표회의가 열렸고, 6월 28일에는 예비회의가 개최되었다. 예비회의에는 전권을 위임받은 의열단과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대한독립당 대표들을 비롯하여 의결권이 없는 뉴욕교민단, 재미국민회, 하와이국민회, 하와이동지회 등 9개 단체 38명이 참석했다. 7월 4일에는 전권대표 13명이 신당창립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신당 조직 절차를 통과시켰고, 7월 5일 민족혁명당 결당식이 거행되었다.

이렇게 해서 1930년대 전반의 협동전선운동은 민족혁명당 창당으로 결실을 보았다. 김원봉은 민족혁명당 창당 과정에서 조소앙・이청천 등의 우파 민족주의 세력과의 제휴를 통해 반임시정부・비김구 세력의 결집에 성공하였고, 이후 민족혁명당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1930년대 중반기 한국독립운동의 주요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 고수파의 격앙된 감정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앙금으로 남아서 서로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 민족혁명당 창당 주요 인물들. 왼쪽 아래에서 시계방향으로 김규식, 최동오, 김원봉, 조소앙, 유동열(사진 KBS 방송화면 캡쳐)

민족혁명당의 창당과 분열

1935년 7월 5일 결성된 민족혁명당의 명칭을 두고, 당초 의열단과 조선혁명당에서는 조선민족혁명당을, 한국독립당과 대한독립당·신한독립당에서는 한국민족혁명당을 각각 주장했다. 논란 끝에 중국정부에 대해서는 ‘한국민족혁명당’으로, 국내를 상대로 해서는 ‘조선민족혁명당’으로, 영문명으로는 ‘Korean Revolution Association’을 사용하기로 했다. 또 당내에서는 ‘민족혁명당’으로 부르기로 하였다.

민족혁명당 창당은 1930년대 전반기 협동전선운동의 결실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독립운동가들은 독일·이탈리아·일본 등에서 파쇼체제가 등장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이는 일본 등 파쇼체제가 붕괴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세계정세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민족운동전선의 통일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던 것이다.

민족혁명당의 정강과 정책에는 1930년대 중반까지의 민족운동의 경험들이 종합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볼 때, 1919년에 제정된 「대한민국임시헌법」에서는 국민기본권을 바탕으로 한 민주공화국 수립이 기본 지향점이었으나 민족혁명당의 정강・정책에서는 지방자치제와 민주집권제를 추가로 도입하고 있다. 경제정책의 측면에서는 민족혁명당이 사회주의적 정책을 도입하고 있는 점이다. 1919년과 1935년 사이에는 민족운동의 흐름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고 이러한 사정이 반영된 결과인 셈이다. 또한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에 놓여 있던 국내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다.

   
▲ 정당통일운동과 민족혁명당 결성(사진=임영태)

민족혁명당 강령은 사회·경제정책의 큰 방향에서 대기업과 토지의 국유화, 노동운동의 자유를 강조하였다. 민족혁명당 창당과 정강・정책 작성에 임시정부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던 우익민족주의세력이 참가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민족혁명당의 정강・정책은 1930년대 후반기의 중국지역 민족운동의 향후 발전 방향을 합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민족혁명당 창당 당시의 간부는 서기부장 김원봉(부원 윤세주 외 2명), 조직부장 김두봉(부원 김학규 외 2명), 선전부장 최동오(부원 신익희 외 2명), 군사부장 이청천(부원 김추당 외 2명), 국민부장 김규식(부원 신익희 외 2명), 훈련부장 윤기섭, 조사부장 진의로 등이었다. 조직구성을 놓고 볼 때 통일전선적 면모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원봉은 서기장으로서 당 운영을 관장하였고, 구부와 지부, 특별지부가 설치되었다.(주3)

   
▲ 독립운동단체 통합운동(사진=임영태)

민족혁명당은 해외독립운동전선과 국내대중투쟁세력의 연대투쟁을 주요 활동방향으로 설정하였고, 군사공작·당원훈련·정보수집 및 자금조달이 주요 활동 내용을 이루었다. 민족혁명당은 남경을 ‘책원지’, 만주를 ‘활동지’, 국내를 ‘최후결전지’로 상정하고, 만주의 한인무장대오를 ‘민족혁명군’으로 편성한다는 군사방침을 정했다. 또한 “민족독립해방” “전체 민족적 혁명당의 강력하고 유력한 전투” “제국주의 일본의 섬멸” 등을 당원훈련의 기본원칙으로 정하였다. 민족혁명당은 계급혁명을 지향하는 전위정당이 아니고 반제·반파시즘·반일을 최우선시하는 통일전선적 민족정당이었고, 국내민족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부단히 국내정세를 분석하면서 운동방향을 잡아나갔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에 참여한 인물들은 개성과 사고에서 차이가 컸고 독립운동 방법에 대한 편차도 적지 않아서 창당 2개월만에 분열되고 말았다. 1935년 9월 25일 조소앙·박창세 등은 민족혁명당을 이탈하여 한국독립당의 재건을 선언했고, 계파 사이에 주도권을 둘러싸고 당내 갈등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한독립당계는 의열단계의 독주를 비난하였고, 특히 기관지 <민족혁명> 3호의 ‘의열단기(旗)’ 게재를 둘러싸고 균열이 커져갔다. 양측의 주도권 싸움은 1936년 말까지 이어졌고, 1937년 1월 남경에서 소집된 제2차 전당대표대회에서 파국을 맞이했다. 대회에서는 당명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결정하고 김원봉을 총서기에 선임하였다. 김원봉의 승리였다. 이에 이청천 등 신한독립당계는 1937년 4월 하순 민족혁명당을 탈당해 조선혁명당을 결성하였다.

김구의 복귀와 한국국민당 창당

1935년 7월 민족혁명당 창당은 김구와 임시정부 고수파에게 큰 위기감을 주었다. 민족운동진영을 통합한다는 취지로 임시정부의 여당이었던 한국독립당 일부 세력까지 참여한 가운데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었지만, 한국독립당의 중심세력이었던 송병조・김구 등은 임시정부 고수를 분명히 하였다. 더욱이 민족혁명당에 참여했던 조소앙 등도 두 달만에 탈당하고 말았다. 김구・송병조・조소앙의 3개파는 다소의 이견이 있었지만 ‘임시정부 존치론’을 바탕으로 연합을 모색하였다.(주4)

그러나 세 계파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조소앙계가 배제된 가운데 송병조・김구의 연대가 적극 추진되었다. 송병조는 임시정부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김구의 복귀를 적극 추진하였으나 조소앙은 이를 반대했다. 송병조는 결국 조소앙과의 제휴를 포기하고 김구와 합작을 추진하였고, 이를 통해 임시정부의 새로운 여당인 한국국민당을 1935년 11월 항저우에서 창당하였다. 이와 함께 김구가 국무위원으로 복귀하면서 임시정부도 그간의 침체 국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주5)
 
김구는 1932년말 이래 민족운동진영의 통합 활동에 대해 방관자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그는 “통일하자는 대원칙은 같지만 한 이불 밑에서 다른 꿈을 꾸는 것은 반대한다”며 민족혁명당 참여를 거절했다.(주6) 임시정부고수 의사가 확고했던 김구는 임시정부 폐지를 주장하는 민족혁명당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그는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자연인에 대하여는 몇 번이라도 질책할 수 있지만, 법인인 임시정부 자체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손을 댈 수 없음을 정중하게 언명한다”고 말했다.(주7)

그러나 민족혁명당의 창당은 현실이 되었고 임시정부에는 매우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임시정부에서 여당 역할을 수행해 온 한국독립당이 와해된 상황에서 임시정부 지지 세력을 재결집하여 임정의 활동기반을 새롭게 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김구는 ‘임시정부 유지’를 명분으로 임시정부세력 분열의 일차적인 책임이 ‘재건’한국독립당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임시정부의 기반이 될 한국국민당 창당의 당위성을 이끌어냈다.(주8)

김구가 복귀할 당시 임시정부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당시 국무위원이었던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송병조, 차이석, 양기탁, 유동열 등 7인 가운데 송병조, 차이석을 제외한 5명이 민족혁명당 창당에 가담하기 위해 사퇴하는 바람에 국무회의도 진행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임시정부는 자싱 남호 선상에 배를 띄우고 회의를 진행한 가운데 이동녕, 조완구, 김구 3인을 국무위원으로 보선하여 송병조, 차이석과 함께 비로소 국무회의를 진행할 수 있었다.(주9)

   
▲ 자싱 남호 선상회의와 김구의 임시정부 복귀(사진=임영태)
   
▲ 임시정부 고수파의 주요 인물들. 앞줄 왼쪽부터 조완구, 이동녕, 이시영. 뒷줄 왼쪽부터 송병조, 김구, 조성환, 차이석 선생(사진=독립기념관)

이후 임시정부와 한국국민당은 중국국민당정부의 수도인 난징 근교 전장(鎭江)으로 이동하여, 차이석을 상해, 김붕준을 광동으로 파견하는 등 조직 재건에 착수했다. 한국국민당에는 한인애국단·한국특무대독립군·학생훈련소로 이루어진 김구의 항일특무조직 소속대원들과 “공산주의단체와는 합작할 수 없다”며 민족혁명당 합류에 적극 반대한 한인특별반 출신의 일부 신한독립당 소속 청년당원들도 참가했다. 창당 당시 당원은 100여명에 이르렀다.(주10)

1932년 4월 윤봉길의거 후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임시정부에 대한 재정・군사적 지원을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김구는 1933년 5월 안공근・엄항섭을 대동하고 난징으로 가서 중앙군관학교에서 장제스를 만났다. 이때 김구는 군사간부 양성을 요청하였고, 장제스는 낙양군관학교 내에 한인훈련반(한인특별반)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의 중추가 될 장교 육성 책임자로 만주에 있던 한국독립군총사령관 지청천을 정하고 그를 중국 관내로 오도록 했다. 이후 상하이, 난징, 베이징, 텐진 등지에서 모집한 한국인 청년 99명이 입학, ‘국민정부군관학교낙양분교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로 편성되었다. 지청천 외에도 김구와 김원봉이 경영에 참여하였고, 이범석, 오광선, 조경한, 윤경천 등이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중국·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섰던 독립군 지도자의 대부분이 낙양군관학교의 교관이나 장교 후보생으로 훈련을 받았던 인물들이었다.(주11)

   
▲ 임시정부의 외교・재정・군사 활동(사진=임영태)

한국국민당은 당강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사이비 이론과 행동을 배격할 것, 임시정부를 옹호 진전시킬 것”이라는 조항을 포함했다. 김구가 단일신당의 불참 이유로 ‘사상적 차이’를 내세운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이는 또한 민족혁명당 창립대회에서 “임시정부의 헌법을 개정할 것”을 결의한 것에 대해 반대의사를 천명한 것이기도 했다. 한국국민당은 당의에서 “혁명적 수단으로 일제의 모든 침략세력을 박멸함으로써,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광복하고, 정치・경제 및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하는 신민주공화국을 건설하여, 안으로는 국민 각자의 균등생활을 확보하고, 밖으로는 민족 대 민족, 국가 대 국가의 평등을 실현하고, 세계일가의 진롤 향해 나아간다”고 천명해,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수용하고 있다.(주12) 하지만 당강을 통해 운동노선상의 경직성과 폐쇄성을 드러냄으로써 협동전선운동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해버렸다.(주13)

   
▲ 항저우 임시정부 기념관의 김철, 송병조, 차이석 선생(사진=임영태)

김구・한국국민당의 연합전선 이해

한국국민당은 『한민』·『한청』·『전선(戰線)』·『전고(戰鼓)』 등의 기관지를 통해 ‘순수한 민족주의에 입각한 독립운동의 혁명적 이론’을 고취하고, 무장독립운동론, 한중연합항일전선의 결성 등을 선전하였다. 김구는 한국특무대독립군과 학생훈련소의 청년대원들을 청년단으로 조직하였고, 이를 통해 보수적인 노장년층 중심의 한국국민당 분위기를 쇄신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청년단은 1936년 7월 10일 창립선언문에서 “과거 40여년간 일관된 정신으로서 혁명운동에 분투·노력해 온 백범 김구선생의 영도를 받아, 그의 손과 발이 되어 그의 정신과 사업을 계승할” 것이라고 했고, 강령에서 “한국국민당의 핵심이 되어 전위적 임무를 충실히 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김구와 임시정부의 전위를 자임한 것이다.(주14)

한국국민당의 활동은 주로 항일특무에 집중되었다. 창당 직후인 1935년 12월 국민당정부로부터 특수공작에 투입할 청년 20~30명의 선발을 명령받는 등 국민당정부 기관과 함께 항일공작 전개였다. 중일전쟁 직후에는 본부를 난징에 설치해 조사·행동·특무·교통·연락부로 조직을 재정비하였고, 상하이 프랑스조계 호산로에 지부를 설치해 조상섭과 나우(羅愚)를 책임자로 파견하기도 했다. 한국국민당은 국민당정부의 특무기관인 남의사(藍衣社)와도 연계했으며, 상하이 지부의 경우 상호연락체계를 유지하였다.

   
▲ 윤봉길의거 후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임시정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한다. 김구-장제스 회담 후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편성해 한국 독립군 지휘관 양성을 시작한다.(사진=임영태)

한국국민당의 특무공작은 대부분 안공근이 관장했다. 당시 안공근은 중국국민당 중앙당부에서 대적정보공작을 담당했는데, 국민당정부로부터 매월 수천 원의 자금을 받아서 특무공작비와 당원 생활비로 썼다. 안공근은 이렇게 해서 김구의 오른팔이 되었지만 내부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안공근의 득세에 반발한 박찬익·오면직·노종균 등이 이탈했던 것이다.

안공근은 상당기간 김구의 오른팔 역할을 했으나 자금문제와 형 안중근 가족의 이주문제로 김구의 심한 질책을 받았다. 안공근은 1939년 5월 30일경 충칭에서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는데 살해범을 찾지 못했고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주15) 안공근이 손을 떼면서 한국국민당의 특무공작은 사실상 정지상태가 되었다. 한국국민당의 활동도 정체되었으며 청년당원들의 탈당도 늘어났다. 결국 김구를 비롯한 당의 지도적 인물들은 우파세력의 통합을 통해 당의 활로를 새로이 도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국민당의 연합전선에 대한 이해는 소극적이었고 편협했다. 이들은 “통일운동이란 오직 동일한 주의와 사상의 전제 하에서만, 그 진정성을 발휘하는 것이니, 이단의 주의자와의 결합은 어느 시기까지의 협동에 불과한 것뿐이요, 영구하고 완전한 통일은 기도하기 어려운 것이다”라고 했다.(주16)

한국국민당은 1930년대 중반 이후 중국 내에 있던 최대의 한국독립운동세력이었던 민족혁명당을 공산당으로 규정하여 그 존재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였다. 김구와 한국국민당은 민족혁명당 등 좌파와의 타협을 전제로 하는 협동전선운동에 회의적이었다. 김구와 한국국민당은 우파세력의 연합을 바탕으로 민족운동을 강화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중도나 좌파세력과의 연합 대신에 ‘국수적인’ 독자노선을 견지하였다.

한국국민당은 국수적 성향을 강하게 갖고 있었지만 1935년 11월 창당되어 1940년 5월 ‘통합’한국독립당으로 발전적 해소를 할 때까지 중국관내의 우파 민족주의세력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한국국민당은 김구의 리더십 아래서 중국국민당정부의 지원을 통해 활동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고, ‘상하이한국독립당 → 한국국민당 → 통합(중경)한국독립당’으로 이어지는 중국관내 민족주의세력의 중심축의 위상을 확보했다. 김구는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임시정부활동까지 주도하게 되면서 송병조·조소앙 등의 경쟁자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김구는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임시정부주석 뿐만 아니라 광복 후 통일국가 건설운동의 지도자로 등장할 수 있었다.

   
▲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자싱, 1936). 앞줄 왼쪽부터 엄기순・엄기선・엄기동(엄항섭 딸과 아들). 가운데줄 왼쪽부터 송병조, 이동녕, 김구, 이시영, 조성환. 뒷줄 왼쪽부터 연미당(엄항섭의 아내), 엄항섭, 조완구, 차리석, 이숙진(조성환의 아내)(사진=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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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정정화, 『장강일기』, 학민사, 1998, 147쪽

2) 한상도, 『대한민국임시정부 2-장정시기』, 독립기념관, 2008, 17쪽

3) 한상도, 위의 책, 162쪽

4) 노경채, 『한국독립당연구』, 신서원, 1996, 63쪽

5) 한상도, 위의 책, 168쪽

6) 김구/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357〜358쪽

7) 한상도, 위의 책, 169쪽

8) 김구/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359쪽

9) 김구/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359쪽

10) 한상도, 위의 책, 170쪽

1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낙양군관학교’ 참조

12) 조소앙은 임시정부의 이념적 토대가 되는 삼균주의를 제창하였다. 삼균주의는 간단히 말하면, ‘개인・민족・국가간 균등에 기초하여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치사회사상이다. 조소앙은 자신이 제창한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임시정부의 중요 정책과 이념을 제시하였고, 수많은 문건들을 작성하였다. 여러 차례 바뀐 임시정부 헌법들과 한국독립당(한독당), 한국국민당 등 임시정부 여당의 정강과 정책, 당의와 당강, 임시정부에서 발표한 주요 성명서와 발표문, 선전문, 포고문 등 그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임정 문건이 없을 정도이다. 광복 후 민족국가 건설의 총체적인 계획을 담고 있는, 1941년에 발표된 ‘건국강령’은 그가 기초한 여러 문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제헌헌법에는 건국강령의 주요 내용과 뼈대가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조소앙은 ‘한국 헌법의 아버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가 작성한 임시정부의 주요문건들은 대한민국 헌법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임영태, “조소앙, 한국 헌법의 기초를 닦은 삼균주의 사상가”, 매일노동뉴스, 2019. 4. 15)

13) 한상도, 위의 책, 170〜171쪽; 노경채, 위의 책, 80〜89쪽

14) 한상도, 위의 책, 172쪽

15) 안공근은 충칭에서 상하이 동제대학 출신의 의사 유진동의 집을 내왕하던 중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는데, 임정 산하에서 안공근과 경쟁관계에 있었던 기호파 계열에 의해 암살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되기도 한다. 안공근의 큰아들 안우생은 김구 비서로 활동하다가 김구 암살 직후 김구의 주치의 유진동과 함께 홍콩을 통해 북으로 넘어갔다. 둘째 아들 안낙생은 광복군에 참여했고, 사위 한지성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후 북으로 넘어가 고위직이 되었다.(조광, “안중근의 두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 가톨릭뉴스, 2008. 11. 29)

16) 한상도, 위의 책, 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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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19-06-12 09:45:42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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