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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은 하나, 꼬레아노는 꼬레아노다” 마르따 임 김 전 쿠바 마딴사스종합대 교육대학장
아바나=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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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10  08: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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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당시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낸 임천택 선생의 딸 마르따 임 김 전 쿠바 마딴사스종합대 교육대학장을 지난 3일 쿠바 마딴사스 자택에서 <통일뉴스>가 만나 인터뷰를 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해외동포 사회를 들여다보면 한반도 분단 만큼이나, 남이냐 북이냐를 두고 편을 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국전쟁 이후 해외로 건너간 이들이 대부분 그러하다. 하지만 분단 이전, 일제 강점기 시기에 노동자로 떠나야 했거나, 강제로 끌려갔던 상황에 놓여 해외동포로 남게 된 이들은 하나였던 한반도를 그리워하며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최근 여행지로 주목받고 있는, 사회주의 국가, 쿠바에도 “조국은 하나”라는 마음을 가진 동포들이 살고 있다. 마르따 임 김 전 쿠바 마딴사스종합대 교육대학장(82세)이 바로 그중 한 사람이다.

구한말 어려운 시기에 조국을 떠나 멕시코에서 사탕수수 노동자로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았고, 다시 쿠바로 건너와 정착한 이들. 그들은 쿠바에서 일제의 ‘일본인’ 등록에 맞서 한인회를 결성해 ‘일본’이 아닌 ‘꼬레아(Corea)’라는 국적을 지켜냈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냈다.

마르따 임 김 전 학장의 부친인 임천택 선생도 바로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임천택 선생은 마지막 한인회 회장을 맡았고, 자신의 집에 한글학교를 세우고 한글을 가르칠 정도로 민족성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 강인함은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의지에서 비롯됐을 터.

하지만 그가 그토록 바란 조국은 해방 이후 분단된 땅으로 남았다. 남이냐 북이냐 선택의 고민이 쿠바의 해외동포들에게도 힘들었을 것이다.

   
▲ 마르따 임 김 전 학장은 “저희 아버지 때 조국은 통일된 조국이었다. 저희도 그렇고 저희 후손들에게도 남한이 어떻고 북한이 어떻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꼬레아는 하나의 나라이다. 하나의 조국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그러나 마르따 임 김 전 학장은 단호했다. “저희 아버지 때 조국은 통일된 조국이었다. 저희도 그렇고 저희 후손들에게도 남한이 어떻고 북한이 어떻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꼬레아는 하나의 나라이다. 하나의 조국이다.”

남한사람, 북한사람이 아닌 “꼬레아노(Coreano)는 꼬레아노”라고 강한 어조로 말한 그는 지난해 4.27 판문점선언 이후 한반도 정세를 보며, “뉴스를 볼 때, 마음이 좋다. 완전한 통일이 될지는 두고 봐야 할 문제지만, 서로 돕고, 같이 사는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며 “그럼 우리 조상들도 행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마음이 중요하다. 일단 열린 마음을 갖고 뒤를 돌아보면 된다”며 “역사를 보면 꼬레아는 늘 하나였다. 분단은 외부의 힘에 의한 것도 있어서, 서로가 과거에 꼬레아가 가진 역사와 전통,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통일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한반도에 떠오른 화두 ‘평화’를 두고,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다. 다른 입장에 서서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그리고 함께 사는 것, 공존이다. 공존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

1938년생인 마르따 임 김 전 학장은 쿠바의 현대사를 살며 혁명을 지켜본 인물이다. 그에게 쿠바 혁명은 어떤 의미일까.

   
▲ 마르따 임 김 전 마딴사스종합대 교육대학장.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그는 “쿠바 혁명은 우리 쿠바 국민에게 굉장히 중요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며 “한인 후손 입장에서도, 우리는 상당히 가난했다. 혁명이 없었다면, 저 역시도 대학교육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혁명정부는 지방이나 외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교육을 직접 챙겼다”며 쿠바 혁명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그리고 “농민들에게 땅을 분배해서 땅을 갖도록 했다. 소외된 여성들을 불러서 바느질을 가르쳤다. 또 하나 혁명의 가장 큰 산물은 보건의료시스템이 무상이라는 것”이라면서 “경제봉쇄도 있고, 지금처럼 물자가 부족하고 풍성하게 살지 못하지만, 쿠바 혁명은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마르따 임 김은 쿠바 한인 후손으로는 처음으로 교원자격증을 취득, 교편을 잡았다. 이후 마르크스 철학을 공부해, 마딴사스종합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작고한 남편 라울 루이스 마딴사스종합대 박물관장과 함께 책 ‘쿠바의 한인들(Coreanos en Cuba)’을 2000년에 펴내기도 했다.

지난 3일 쿠바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약 90여 km 떨어진 마딴사스에 위치한 자택에서 마르따 임 김 전 학장을 <통일뉴스>가 만나 인터뷰를 했다. 스페인어가 편한 그를 위해 쿠바에 거주하는 정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중미카리브협의회 자문위원이 통역을 도왔다.

다음은 마르따 임 김 전 마딴사스종합대 교육대학장과 인터뷰 전문이다.

“그들은 항상 꼬레아노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 통일뉴스 : 선생님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하신 일을 주도적으로 하신 분이다.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그런 일을 하시게 됐는가.

■ 마르따 임 김 : 아버지가 혼자 하신 게 아니다. 한인 커뮤니티를 대표해서 하셨다.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보내는 데, 아버지가 힘을 쓴 것이다. 당시 한인은 특히 가난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 가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조금씩 모아서 쿠바에 있는 중국 은행을 통해 보냈다.

   
▲ 쿠바 아바나 한쿠바문화클럽에 있는 임천택 선생 가계도. 9남매의 여섯 째인 마르따 임 김과 남편의 이름이 적혀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당시 한인들이 노동자로 일하면서 매우 가난했는데, 어떻게, 그리고 왜 독립자금을 보내게 됐는가.

■ 그분들은 항상 조국이라는 게 머릿속에 있었다. 멕시코에 있으면서도 계속 조국을 생각했다. 멕시코에 있을 때, 한일강제병합이 진행됐다는 비보를 듣고 항상 조국에 대한 마음이 있었다. 그러다 우리가 쿠바에 들어와서 마딴사스로 넘어와 등록을 해야 하는데, 나라가 빼앗긴 상태라서, 일본 대사관에서 일본인으로 등록시키려고 했다. 이를 거부하기 위해서라도 급하게 한인회를 결성해 꼬레아노로 기록할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은 항상 꼬레아노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면 조국의 문화를 가르치고, 청소년 클럽, 여성 클럽을 만들었다. 당시 여성들이 돈을 모으는 데 갖은 애를 많이 썼다. 항상 조국에 가고 싶어 했다. 돈을 벌어서 조국으로 가고 싶었는데, 꿈을 이루지 못했다.

□ 가난한 노동자였음에도 조선인으로서 고국을 위해 일 하신 모습을 옆에서 봤을 때,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는가.

■ 저는 사실 9남매 형제 중 여섯 번째이다. 어려서 기억이 잘 안 난다. 가난했지만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고 성격이 강한 분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제일 마지막 한인회장이셨다. 우리 집에 한글학교를 만들어서 한글을 가르치고 끝나면 옆 동네 가서 한글을 가르쳤다. 매우 활동적인 분이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을 위해서 일을 하셨어도 됐을 텐데, 별로 그런 성격이 안되는 분인 것 같다.

※ 설명 : 임천택 선생은 1903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1905년 어머니를 따라 멕시코 유카탄으로 이민을 갔다. 애니깽으로 일하다 1921년 쿠바로 건너가 마딴사스에 정착했다.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에서 활동하며 민성국어학교, 진성국어학교 등에서 한글과 역사, 문화를 가르쳤다. ‘재큐한족단’의 주요 인물로 참여, 중국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에 일조한 공로로 1997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특히, ‘큐바이민사’를 기록, 쿠바의 초기 한인사회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이를 토대로 딸 마르따 임 김과 사위 라울 루이스가 12년 동안 현지조사 및 자료정리와 3년의 집필을 통해 2000년 책 ‘쿠바의 한인들(Coreanos en Cuba)’을 펴냈다. 이 책은 쿠바 문화부로부터 최고 학술출판상을 받기도 했다.

“꼬레아는 하나의 나라이다. 하나의 조국이다”

□ 아버지와 동료들이 독립자금을 보낼 정도로 독립을 바란 조국은 해방이 되고 분단이 됐다. 그런 현실에 대해서 느낌이 어떠한가.

■ 저희 아버지 때 조국은 통일된 조국이었다. 저희도 그렇고 저희 후손들에게도 남한이 어떻고 북한이 어떻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꼬레아는 하나의 나라이다. 하나의 조국이다. 쿠바에 북한대사관이 열렸을 때, 초기에 아버지가 통역으로 한두 번 일한 것으로 안다. 그 이후에 북측에서 직접 통역관을 데려왔다. 북한대사관은 한인 커뮤니티와 접촉이 별로 없었다. 일본이나 중국 대사관은 각각 자기들의 후손 커뮤니티에 적극 지원하는 것은 봤지만, 북한대사관을 접촉하긴 했지만, 특별한 경우나 몇몇 사람만 접촉이 가능했을 뿐, 정확하게 우리와 교류는 없었다.

□ 문재인 정부 들어 한반도 정세가 과거와 많이 달라지고 있다. 남북이 서로 화합하는 분위기이다. 이러한 현재의 한반도 정세를 보면 어떤 기분인가.

■ 물론, 두 나라라는 것은 당연히 인정하지만, 마음으로는 꼬레아는 하나이다. 꼬레아노는 꼬레아노이다. 뉴스를 볼 때 마음이 좋다. 서로 통일된 모습들이 보여질 때는 행복하다. 통일 쉽지 않다는 것도 이해한다. 완전한 통일이 될지는 두고 봐야 할 문제지만, 서로 돕고, 같이 사는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 그럼 우리 조상들도 행복할 것이다.

□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서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는가.

■ 글쎄. 그걸 내가 알 수 있을까. 상당히 정치적인 것도 들어가고, 한 번도 그동안 없었던 뭔가 새로운 것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렇지만 나는 (통일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 마르따 임 김 전 학장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한반도 통일을 위해서 정치도 문제지만, 사람 대 사람의 문제가 중요한 것 같다. 한반도 통일을 위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 마음이 중요하다. 일단 열린 마음을 갖고 뒤를 돌아보면 된다. 역사를 보면 꼬레아는 늘 하나였다. 긴 역사와 전통과 문화 등이 같은 것임을 금방 알 것이다. 분단은 외부의 힘에 의한 것도 있어서, 서로가 과거에 꼬레아가 가진 역사와 전통,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통일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 요즘 한반도에서 평화가 큰 화두이다. 선생께서 생각하는 평화란 무엇인가.

■ 평화는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각각 분야에서 서로 이해하는 역지사지, 다른 입장에 서서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그리고 함께 사는 것, 공존이다. 공존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서로 사랑해야 한다. 평화를 종교적인 수준으로 신봉해야만 사람들 사이에 서로 이해할 수 있다. 쉽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게 해야만 평화를 지켜낼 것이다.

□ 서울을 몇 차례 방문한 것으로 안다. 느낌이 어떠했는가.

■ 많이 변했다. 1997년에 처음 가서 굉장히 감명이 깊었다. 2014년에 갔을 때는 재외동포들을 위한 축제인가에 참가했는데, 해외 후손들이 모여서 문화를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아리랑을 같이 부르는데 눈물이 나서 정말 힘들었다. 이 자리에 아버지가 있어야 하는데, 내가 대신 왔구나, 아버지는 그토록 조국에 오고 싶어 했는데, 내가 대신 이런 경험을 하는구나 싶었다. 2018년에 가서는 백범기념관 등을 둘러볼 수 있어서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쿠바 혁명은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 쿠바 혁명을 몸으로 체험한 선생님의 삶이 궁금하다. 쿠바 혁명 당시에 ‘7.26운동’ 등에 참여한 적이 있는가.

■ 참여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18세였다.

   
▲ 부친이 쓴 '큐바이민사' 원본을 가리키는 마르따 임 김. 그는 부친이 쓴 기록을 토대로 남편과 함께 12년의 현지조사 및 자료정리와 3년의 집필을 거쳐 2000년 책 '쿠바의 한인들'을 펴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큐바이민사' 표지(왼쪽)와 첫 장. 임천택 선생의 가족사진과 함께 마르따 임 김의 대학 졸업사진이 함께 실려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쿠바에서 태어나고 자라, 교사로서 오랫동안 일하고 마르크스 철학을 공부해 교수로 재직하셨다. 쿠바 혁명은 어떠한 의미라고 보는가.

■ 비록 많은 실수와 오류, 여러 가지 잘못이 있지만, 쿠바 혁명은 우리 쿠바 국민에게 굉장히 중요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인 후손들의 입장에서도 우리는 상당히 가난했다. 혁명이 없었다면, 저 역시도 대학교육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혁명정부는 지방이나 외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교육을 직접 챙겼다. 농민들에게 땅을 분배해서 땅을 갖도록 했다. 여성들의 경우, 소외된 여성을 불러서 시내에서 바느질을 가르치고, 그런 사람들이 머물 공간이 없으니까 기숙사도 대주는 등 모든 교육은 정부가 무상으로 지원하고 있다.

또 하나 혁명의 가장 큰 산물은 보건의료시스템이 무상이라는 것이다. 심장이식 수술을 해도 무상이다. 예전 같으면 수술받지 못했을 텐데, 지금은 적어도 그런 면에서 나아졌다.

경제봉쇄도 있고, 지금처럼 물자가 부족하고 풍성하게 살지 못하지만, 쿠바 혁명은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 쿠바는 여전히 미국의 경제봉쇄로 어렵고 물자도 부족하다. 하지만 앞으로 쿠바는 어떻게 나아가리라고 기대하는가.

■ 쿠바의 미래를 단정해서 말하기 힘들지만, 지금 현재 미국 대통령이 계속하는 한 어려울 것이 명약관화하다. 지난 오바마 행정부 시기에는 쿠바와 미국이 관계가 원만하고 수교도 다시 했지만, 지금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모든 것이 뒷걸음질 치고 있다. 저 정부가 남아있는 한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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