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
아, 놀라워라. 아, 놀라워라! 나는 먹거리다. 나는 먹거리다! 나는 먹거리를 먹는 자다. 나는 먹거리를 먹는 자다. 나는 먹거리를 먹는 자다. (우파니샤드) |
한 식구에 관한 추억
- 박철
댓돌 아래 할짝이던 개가 있었다
오뉴월 염천, 아버지 개 끌고 산으로 올라간다
삐삐선 엮어 개의 목에 두르고 가지 위로 걸었다
소나무 조금 휘청거렸다
개는 뭔 일인지 몰랐다
개, 하늘 보며 뒤룽거린다
삐삐선이 풀렸다
땅에 떨어진 개 달려나간다
아부지 개 달아나요
냅도라 집으로 돌아올 겨
댓돌 아래 돌아와 서성이는 개가 있었다
아버지 다시 데리고 산에 오른다
개는 정말 뭔 일인지 몰랐을까
원시인들은 자신의 얼굴과 비슷한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강에서 연어를 잡아먹으면 첫 번째 잡은 연어는 살을 먹고 껍질과 뼈를 강에 띄워 보냈다고 한다. 다시 살을 얻어 연어로 부활하라고.
현대 문명인은 자신이 잡은(혹은 기른, 혹은 돈을 주고 산) 동물은 자신의 소유이니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동물들을 함부로 대한다.
원시인들은 숲에 무서운 짐승이 살아도 그들과 화해를 했다. 예를 들어 곰이 산다면 곰과 인간은 하나의 가족이라는 신화를 만들어 냈다. 그래서 인간은 한 식구인 곰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따라서 원시인들은 자신들이 다른 동물들, 다른 생명체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래서 원시인들의 삶은 우주의 다른 존재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삶이었다. 삼라만상이 하나의 식구였다.
이런 사유의 흐름들이 고대사회로 오면서 ‘만물제동(萬物齊同 만물은 하나)’ 사상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근대산업 사회가 등장하여 자본가들이 중심세력이 되면서 ‘소유’를 합법화했다. ‘나’는 ‘나의 것’이고 따라서 ‘내가 획득한 것’도 ‘나의 것’이라는 사고였다. 현대에 사는 우리는 소유를 당연시 여긴다.
집에서 기르던 개를 어떻게 잡아먹느냐는 사고에는 개는 나의 가족, 식구라는 ‘나’중심의 사유가 있다. 가족중심주의, ‘나’가 확장된 가족. ‘가족을 위해서는 무엇을 못하겠어?’라는 사고가 있다.
이런 ‘나 중심의 사고’ 가 히틀러로 하여금 유대인들 수백만 명을 학살하게 했다. 게르만족이 그의 식구였으니까. 현대인은 국가, 직장, 동창회, 향우회, 동호회...... 등을 만들어 여러 식구 속에 들어간다. 약육강식의 정글을 만들어낸다.
‘댓돌 아래 할짝이던 개가 있었다/오뉴월 염천, 아버지 개 끌고 산으로 올라간다/ 삐삐선 엮어 개의 목에 두르고 가지 위로 걸었다/소나무 조금 휘청거렸다/개는 뭔 일인지 몰랐다/개, 하늘 보며 뒤룽거린다/삐삐선이 풀렸다/땅에 떨어진 개 달려나간다/아부지 개 달아나요/냅도라 집으로 돌아올 겨’
하지만 개는 돌아온다. 식구들 품으로.
‘댓돌 아래 돌아와 서성이는 개가 있었다/아버지 다시 데리고 산에 오른다//개는 정말 뭔 일인지 몰랐을까’
개는 처음에는 한 식구가 자신을 ‘먹거리’로 만든다는 게 너무나 두렵고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멀리 도망쳐가면서 본능적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식구에게 가자!’ 식구는 서로 먹거리가 되는 관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