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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이동(1)<연재> 임영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의 역정’ (7)
임영태  |  ytlim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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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04  14: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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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상하이서 첫 걸음을 시작해 일제의 패망으로 1945년 11월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 27년간 고난에 찬 투쟁을 이어갔다. 그 사이 임시정부는 상하이,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 등 중국 대륙 곳곳을 누비며 1만3천리(5,200㎞)를 이동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초기 활동 지역인 상하이와 첫 피신처였던 항저우의 임시정부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상하이・항저우 유적지 답사기와 함께 임시정부 역사를 10여회에 걸쳐 정리하고자 한다. 이 답사기는 매주 화요일 연재된다. / 필자 주

 

임시정부 1만3천리 장정에 오르다

1932년 4월 29일 상해 훙커우공원(현재의 ‘루쉰공원’)에서 일어난 윤봉길의거는 한인독립운동의 흐름을 바꾼 쾌거였다. 임시정부와 한국독립운동의 존재에 대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한국독립운동은 활력을 되찾았다. 그러나 윤봉길의거 직후 임시정부는 일제의 필사의 추격을 피해 상하이를 떠나 고난의 피난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난 뒤, 항저우(杭州), 전장(鎭江),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치장(綦江)을 거쳐, 1940년 9월 충칭(重慶)에 안착하기까지 숱한 난관과 고비를 넘어야 했다.

   
▲ 동아일보, 2016. 2. 16

임시정부는 8년여 동안 무려 1만3천리(5,200km)의 거리를 이동하며 중국 대륙을 떠돌았다. 임시정부의 이동기간을 ‘장정시기’로 부른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상하이시기, 장정시기 8년, 충칭시기 6년 도합 27년간 고난의 투쟁을 이어갔다. 임시정부 27년 동안 어느 한 순간도 편안한 날이 없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장정시기가 가장 힘든 나날이었다. 상하이임시정부 초기는 사람도 있고 돈도 있어서 북적댔다. 그러다가 분열과 갈등으로 위기가 찾아왔지만 그래도 프랑스 조계지라는 비교적 안정적인 활동공간이 있어서 그런대로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고, 마지막에는 이봉창・윤봉길의거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충징임시정부 또한 일제의 중국 본토 침공 이후 2차 국공합작과 함께 중국국민당의 적극적인 재정・군사적 지원 아래 광복군을 조직하고 미국 OSS와 합작 훈련, 대일선전포고, 임시정부 승인을 위한 적극적인 외교 활동, 좌우연합 정부 구성과 건국강령 발표 등 광복을 향한 부푼 꿈을 가지고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장정시기에는 중국대륙을 기약도 없이 떠돌아야 했을 뿐만 아니라 이동한 도시나 지역에서도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계속 움직여야 했다. 재정적인 취약함은 말할 것도 없고, 국무위원 회의조차 제대로 열리지 못하고 약식으로 진행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이런 정처없는 처지를 ‘강물 위에 뜬 망명정부’(주1) 또는 ‘물 위에 떠다니는 정부’(주2)로 비유하곤 한다. 하지만 이 같은 고통의 시간이 있었기에 충칭시기의 빛나는 성과도 가능했다.

   
▲ 중국 상하이 루쉰공원(훙커우공원) 안에 있는 윤봉길의사 기념정자 매헌(梅軒)(주3). 때가 늦어 매화 향은 맡을 수 없었지만, 윤봉길의사의 애국 향기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사진=임영태)
   
▲ 루쉰공원 안에 있는 윤봉길의거 기념공원 매원(梅園)의 설명 표지석. 중국인들은 일본에 당한 치욕을 대신 갚아준 윤봉길의사에 대한 사랑과 의리를 잊지 않고 있다.(사진=임영태)


일본의 표적이 된 김구의 도피 생활

일본의 추적을 피해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는 처음 항저우에 도착하여 둥지를 틀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요인과 그 가족들은 다시 그곳을 떠나야 했고, 1935년 11월 난징(南京) 근교인 전강으로 이동했다. 전장으로 가기 전까지 임시정부는 항저우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중국국민당정부의 소재지인 난징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임시정부요인들은 대개 일제 정보망을 피해 항주를 벗어나 있었기에, 자싱(嘉興)이 또 하나의 거점 역할을 했다. 특히 김구는 일제의 체포령을 피해 ‘장진구(張震球)’ 혹은 ‘장진(張震)’ 등으로 이름을 바꿨고 저쟝성(浙江省) 성장을 지낸 주부청(褚輔成)의 도움을 받으며 운하 물길을 거처삼아 배 위에서 생활했다.

윤봉길의거 이후 일제는 김구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김구는 일제의 추적을 피해 이곳저곳을 떠돌며 생활했다. 일제는 일본돈 60만원의 현상금을 걸었고, 산하 밀정 300여 명을 풀어서 백범을 체포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자싱에서 백범 피난처를 관리하고 있는 해설자는 “당시 일본돈 60만원이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한국돈 200억원이 넘는다”고 했다.

윤봉길의거 후 김구가 일본의 주요 추적목표가 되자 장제스정부는 “비행기라도 보내겠다”고 했지만 중국인들의 보호 아래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김구는 중국 국민당정부와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일제의 추적을 피해 2년 가까이 행적을 감췄고, 임시정부요인들 중에도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김구의 오른팔이었던 안공근・엄항섭 정도가 그의 행적을 제대로 알고 있었을 뿐이다. 중국은 ‘남선북마(南船北馬)’라는 말이 있다. 중국 남부지방에 가면 운하가 도로망처럼 발달되어 있어서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고, 작은 배로 사람과 물건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김구는 이런 배 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주4)

김구는 4.29의거 후 프랑스 조계에 있는 미국인 피치의 집에 20여일간 피신해 있었으나 밀정의 추적이 있어서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위기일발의 순간, 피치 부인의 도움으로 그곳을 벗어나 안공근과 함께 기차를 타고 자싱으로 피신했다.(주5) 김구는 저보우청의 아들 저봉장이 운영하던 면사공장(수륜사창)에 피신처를 잡았다. 김구는 그곳에서 저보성의 수양아들 천둥성(陳桐生)의 집에서 숙식하며 지냈다. 그러다가 이곳도 안전하지 않아서 다시 해염현에 있는 저한추의 별장으로 옮겼으나 중국 경찰에 신분이 드러나서 다시 자싱으로 돌아와야 했다.(주6) 

김구는 자싱시 남당농 매만가(메이완졔) 76호(주7)를 거점으로 삼고, 광둥성(廣東省) 출신으로 행세하며, 낮에는 주로 선원 주아이바오(朱愛寶)의 도움으로 운하 물길을 떠다니며 배 위에서 생활했다. 은신처 2층에 있는 김구의 침실 바닥에는 비상탈출구가 마련되어 있어, 비상시에는 이곳을 통해 배를 타고 남호(南湖) 호수로 피신할 수 있었다. 김구는 빨랫줄에 널어놓은 빨래의 색깔을 보고 안전을 확인한 후에 집에 들어갔다. 이후 김구는 남경으로 활동무대를 옮겼고,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김구와 임시정부가 남경을 떠나 장사로 활동 무대를 옮길 때까지 주아이바오는 김구의 시중을 들었다.(주8)

   
▲ 자싱시 남당농 매만가 76호 김구 선생 피난처는 호수와 연결돼 있어 위급할 때 배를 타고 도피할 수 있다.(사진=임영태)
   
▲ 상해-가흥에서 김구선생의 피난길 행로(사진=임영태)
   
▲ 자싱시 매만가 76호 백범 김구선생 피난처(사진=임영태)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남경에서 출발할 때, 주애보는 본향인 가흥으로 돌려보냈다. 그 후 종종 후회되는 것은 송별할 때, 여비 100원 밖에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근 5년 동안 한갓 광동인으로만 알고 나를 위했고, 모르는 사이 우리는 부부같이 되었다. 나에 대한 공로가 없지 않은데, 내가 뒷날을 기약할 수 있을 줄 알고 돈도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천만이다”라고 기술했다.(주9)

   
▲ 자싱에서 김구선생의 피난을 도와주었던 중국인 주애보(사진=임영태)


김구와 임시정부 피난처였던 자싱에서

상하이에서 이동한 임시정부는 항저우에 자리를 잡았다. 1932년 5월 10일 군무부장이었던 김철이 항저우 칭타이(淸泰) 제2여사(지금의 항저우 위산 친잉여관) 32호에 임시정부 사무실을 개설함으로써 항저우시대를 준비했다. 하지만 국민당 정부가 있는 난징과는 거리가 멀어 난징과 비교적 가까운 자싱이 또 하나의 거점이 되었다. 더욱이 윤봉길의거 후 임시정부의 실력자로 부상한 김구가 자싱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이곳도 임시정부의 활동공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 임시정부 일부요인과 가족들의 또 다른 거주지 설명 자료. (사진=임영태)
   
▲ 자싱 김구선생 피난처 매만가 76호에서 가까운 곳(200미터 거리)에 위치한 일휘교(日暉橋) 17호는 임시정부 일부요인과 가족들의 또 다른 거주지. (사진=임영태)

 
상하이 루쉰 공원에 들러 윤봉길의거 기념공원인 매원과 기념관 매헌을 구경하고 밖으로 나오니 중국인들이 여유를 즐기고 있다. 중국인들이 즐겨하는 태극권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루쉰의 좌상이 잘 다듬어진 정원수들 가운데 멋지게 자리잡고 있다. 갑자기 “중국인과 개는 이 공원에 들어오지 마시오.”라는 안내문이 걸려 있어 루쉰이 엄청난 충격을 받았던 것이 이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훙커우공원은 1922년에 만들어져 1928년부터 중국인에게 개방됐다는 기록이 있어서 중국인의 출입금지가 거짓이 아니었다고 한다.(주10) 실제 윤봉길의거 장소는 기념석이 서 있는 곳과는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일행은 윤봉길의거 장면을 재현하며 그날을 기념촬영을 한 뒤 버스를 타고 김구선생 피난처가 있는 자싱시로 이동했다.

   
▲ 루쉰공원에 있는 루쉰 좌상. 현대 중국문학의 개척자이자 중국인에게 가장 존경받는 작가. (사진=임영태)

상하이에서 자싱까지는 기차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얼마 안 되는 거리지만 상하이 시내를 빠져나오는 데 상당히 시간이 지체됐다. 자싱에 도착 점심 식사를 끝내고 바로 매만가로 이동했다. 매만가는 광광지로 잘 정비돼 있었다. 김구선생 피난처와 임시정부 가족들의 거주지를 돌아보고 오는데 비가 내렸다. 버스로 항저우로 가는 동안 많은 비가 내렸지만 항저우에 도착하니 다행히 비가 그쳤다. 상하이에서 자싱-항저우로 이어지는 지역은 중국 남부의 대표적인 평야지대이다. 저쟝성은 오래 전부터 중국의 대상과 부자들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가는 동안 아예 산을 볼 수 없고 곳곳에 수로가 연결돼 있어서 말로만 듣던 그 유명한 남선(南船)지대를 실감할 수 있다.

   
▲ 상하이에서 자싱으로 가는 길에 만난 물길. ‘남선(南船)’의 의미가 실감 있게 다가온다.(사진=임영태)

임시정부 첫 피난처였던 항저우에서

자싱에서 항저우까지는 100km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자싱에서 너무 늦게 출발한데다가 비도 내리고 항저우에 들어갈 때는 퇴근시간과도 겹쳐서 밤에야 도착했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식당으로 가서 저녁 식사를 한 후 ‘송성가무쇼(宋城歌舞秀)’를 관람했다. 항저우는 남송의 수도였으니 송나라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또한 아울러 강남지역을 대표하는 도시이기도 하니 이 지역의 강남문화와 역사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은 수천년 동안의 역사 과정에서 1840년 아편전쟁 이래 1백여년간 서구열강과 일본에 당한 뼈아픈 경험을 빼놓고는 세계 최고의 문명과 국력을 자랑해왔다. 중국이 현재 G-2가 되어 미국와 세계 패권을 두고 경쟁하고 있고, 장차 세계의 지도국(중국은 ‘패권’이 아니라 ‘지도’라고 표현한다)이 되겠다는 야심을 감추지 않고 있는 것도 역사적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중국도 송나라는 그다지 내세우고 싶어하지 않는다. 북방민족인 거란(요), 여진(금), 몽골에 계속 밀려 남쪽으로 내려갔고, 결국 몽골제국에게 멸망당해 원나라가 들어선 아픈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중국역사에서 송은 가장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풍성했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과학기술의 측면에서도 나침반, 화약을 송나라 때 최초로 발명했다. 송대 과학자 소송이 1090년에 발명한 천문시계는 당대 최고의 정확도를 자랑했다. 철을 단련하는 용광로와 수력 방직기, 화약과 강노, 물시계 등도 송나라 때 발명됐고, 건축에 아치형 다리와 받침대가 쓰였다. 조선업이나 항해술도 대단히 높은 수준에 도달해 나침반과 수력 터빈을 사용했다. 경제발전과 함께 생활수준이 높아져 ‘애완 고양이 침대가 따로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 중국 북송의 수도 카이펑(개봉) 사람들의 일상을 그린 ‘청명상하도’. 송나라 사회와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그림으로 유명하다.

송대 경제발전의 원동력은 강남 개발이었다. 송대부터 양쯔강 이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됐고, 수차의 개발로 계단식 논을 통한 쌀의 집약적 재배가 가능해졌다. 어마어마한 생산력 발전으로 잉여식량이 생기면서 상업이 발달하고, 운송, 숙박 등 서비스업도 함께 발달했다. 그에 따라 지폐와 어음도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영국 옥스포드 너필드 컬리지의 스티븐 브로드베리 교수가 2017년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송나라는 1020년에 1인당 GDP가 1000달러(1990년 가치 기준)를 돌파했다. 영국이 1000달러를 돌파한 것은 이로부터 400년 가량이 지난 1400년대부터였다. 이 때문에 많은 서양 학자들은 송나라가 왜 산업혁명 목전까지 가고도, 결국 도달하지 못했는지 무척 궁금해 하고 있다. 영국보다 약 500년 앞선 이 때 산업혁명을 시작했다면 세계사의 흐름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주11) 

어찌됐던 중국한족 입장에서 보면, 송나라는 북방이민족에게 끝임 없이 핍박을 당하다가 끝내는 몽골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으니 그렇게 내세우기 싫을 것이다. 세계제국이었던 당이나 중국을 의미하는 중국(China)을 세계에 알린 한나라, 몽골을 몰아내고 한족국가를 세운 명나라, 심지어 북방민족이 지배했지만 세계제국을 이루었던 청나라와 비교해도 송나라는 성에 차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다민족통일국가론’을 바탕으로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 중국이, 원나라는 물론이고 징기즈칸까지도 중국역사로 보려는 중국이 송나라를 옛날처럼 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송성가무쇼는 프랑스 파리의 물랑루즈, 미국 라스베가스의 O쇼와 함께 세계 3대쇼라고 선전하고 있다. 중국에는 송성가무쇼 외에도 전국 유명 관광지마다 그 지역의 특색에 따라 제작된 대규모 쇼가 공연되고 있다. 항저우의 인상서호, 시안의 기전영사(낙타 방울소리), 안후이성 황산 휘운가무쇼, 장가계 천문호선가무쇼와 매력상서쇼, 깐수성 장족전통 가무극 ‘금정범음’ 등. 송성가무쇼가 다른 가무쇼에 비해 특별한 매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장가계에서 ‘매력상서쇼’를 봤던 경험으로 하는 말이다. 규모면에서나 구성, 무대장치, 쇼의 화려함 등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송성가무쇼가 조금 더 자본주의화, 선정화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미국이나 프랑스의 대형쇼와 함께 외국 관광객을 염두에 둔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송성가무쇼. 세계 3대 가무쇼로 선전하는 중국 대형가무쇼의 대표작(사진=임영태)
   
▲ 송성가무쇼의 한 장면(사진=임영태)

송의 수도였고, 근대 이전 강남을 대표하던 도시 항저우는 근대 이후 주도권을 상하이에 빼앗겼다. 19세기에는 태평천국군의 싸움으로 도시가 파괴되었고, 아편전쟁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침략으로 난징조약이 체결되면서 상하이가 개방되자 번영의 중심을 넘겨주어야 했다.

서호를 돌아보며 소동파와 서시를 생각하다
 
항저우를 이야기 하면서 서호(西湖)와 소동파(蘇東坡)를 빼놓을 수 없다. 중국에 서호란 이름을 가진 호수가 800개나 되지만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항저우의 서호이다. 2000년 전에는 지금의 서호가 첸탕강(钱塘江)의 일부였지만 진흙모래가 쌓여서 만들어진 담수호다. 전체 면적은 6.3㎢, 둘레는 15㎞, 동서 2.8㎞, 남북 3.3㎞이고, 평균수심은 1.5m, 최대 수심 2.8m의 규모로 알려진다.

서호는 소제, 백제, 양공제로 불리는 3개의 제방이 있다. 백제(白堤)는 당나라 덕종 때 백거이가 항저우 관리로 임명되어 쌓은 제방이다. 당시 서호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으나 관리가 제대로 안돼 홍수와 가뭄에 무방비 상태였다. 비가 많이 오면 넘쳐서 주변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고, 반대로 가뭄이 닥치면 호수 바닥이 금새 드러나 버렸다. 백거이는 호수 바닥을 준설하고 서북 쪽에 길다란 제방을 쌓았다. 소제(蘇堤)는 송나라 때 소식이 항저우의 관리로 임명되어 쌓은 둑이고, 양공제(楊公堤)는 청나라 때 양씨가 만든 둑이라고 한다.

그러나 서호를 이야기하면서 소동파를 빼놓을 수 없는데, 그것은 그가 이 서호를 정비하는데 그만큼 많은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동파 소식은 항저우에서 두 차례나 관리 생활을 했다. 처음 그가 항저우에 부임한 것은 36세 때인 1071년이었다. 당시 중앙에서 진행되고 있던 왕안석의 개혁에 비판적이었던 소식은 지방관직을 자청하여 항저우의 부지사격인 통판에 임명돼 3년간 재직했다. 18년 후 54세 때 소동파는 항저우 지사로 재차 부임하였다. 그가 부임했을 때 서호는 토사가 쌓여 바닥이 드러난 곳이 많았고, 호수면 위에는 물풀들이 어지럽게 자라나 있어서 주민들이 호수 물을 식수로 사용하기도 힘든 상태였다.

   
▲ 항저우 시와 첸탕강, 서호 위치. 서호는 본래 첸탕강의 일부였으나 퇴적물이 쌓여 호수가 되었다.(구글 지도)

소식은 먼저 항저우 시내에서 서호로 흘러드는 물길을 준설했다. 반년 동안에 걸친 준설작업이 끝나자 물길이 시원하게 뚫려 선박이 자유자재로 통행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4개월에 걸쳐 수초를 걷어내고 호수 바닥에 쌓인 토사를 걷어내는 공사를 했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소식은 공사장 부근 임시숙소에서 침식하며 공사를 감독했다. 준설공사에서 나온 퇴적물을 서호의 서쪽에 쌓게 했고, 공사가 끝나자 호수 서쪽에 남북을 연결하는 통로가 하나 생겼다. 이 통로(제방) 중간 중간에 다리를 놓아 양쪽의 호수물이 서로 통하게 했다. 유람객이 쉴 수 있도록 정자도 만들고 양 옆으로 버드나무와 꽃나무를 심었다. 호수 한 가운데에는 3개의 탑을 세우고 그 옆에 다시 토사를 쌓아 호수를 만들어 연꽃을 심었다. 바로 삼담인월(三潭印月)이다.(주12) 

서호란 이름은 그 옛날 중국 최고 미인 중 하나로 알려진 서시(西施)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서시는 춘추시대 말기인 기원전 5세기경 사람으로 왕소군, 양귀비, 우희와 함께 4대 미녀로 손꼽힌다. 본명은 이시광(施夷光)이고 중국에서는 서자(西子)라고도 불린다.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패하자 구천의 참모 범려의 계략에 따라 공물로 오왕 부차에게 공물로 바쳐졌다. 서시에 빠진 부차는 월나라를 완전히 멸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오자서까지 죽이면서 경계심을 늦추다가 월나라에 패망하게 된다.

   
▲ 서호 주변 지도(구글 지도)
   
▲ 서호의 아름다운 풍경(사진=임영태)

소식은 서호의 준설 공사를 공들여 했을 뿐만 아니라 서호를 사랑해 서호와 관련된 많은 시를 남겼다. 그 가운데 가장 수명한 시가 바로 서호를 미인 서시에 비유한 시라고 한다.(주13)

호수 위에서 술을 마시노라니 맑다가 비가 오네                 
날이 맑을 때는 물빛이 반짝반짝 아름답더니                           
비 내릴 때 역시 산빛이 어둑어둑 멋지기 그지 없구나.               
서호는 미인 서시를 닮았도다.                                               
옅은 화장이나 짙은 분, 모두 잘 어울리는구나.      
飮湖上初晴後雨  水光瀲灩晴方好 山色空濛雨亦奇  欲把西湖比西子  淡裝濃抹總相宜

서호는 중국10경(주14)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하지만 서호 유람은 부차적이고 항저우 임시정부 유적지 답사가 본래 목적이다 보니 서호 구경은 그야말로 바람결에 스쳐가는 느낌을 돌아보아야 했다. 하지만 그래도 서호에서 유람선을 타고 돌아보면서 잠시나마 소동파와 서시를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서호의 풍광은 아름답지만 구경만 하고 다닐 시간이 없다. 주마간산으로 훑어보고 떠나려니 안타까운 마음이다.(사진=임영태)


항저우 임시정부 청사를 돌아보며
                 
1932년 5월 10일, 김철 군무부장이 항저우에 사무실을 마련한 뒤 상하이를 탈출한 임시정부 요인들도 이곳에 모여들었다. 5월 14일 김구, 이동녕, 조완구, 조소앙 등 임정 주요인사가 항저우에 모여 향후 활동계획을 두고 토론을 벌였다. 그런데 이때 윤봉길의거 후 중국측이 임시정부에 제공한 지원금의 처리를 놓고 갈등이 일어났고, 김구와 이동녕은 인사도 없이 자싱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후 1년 동안 김철・송병조・차리석 세 분이 임시정부를 꾸려갔지만 항저우임시정부는 유명무실한 상태로 거의 활동을 하지 못했다. 1933년 양기택 등이 김구의 복귀를 설득했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싱에서 비밀리에 임시정부의 통일작업을 진행했다.(주15)

항저우 임시정부 청사는 처음 항저우시 청태 제2여사에 자리잡았다. 청태여관 32호실에 군무부장 김철이 머물렀고 이곳에서 임시 국무위원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현재 청태여관은 군영반점(群英飯店)으로 이름을 바뀌었다. 군영반점은 항저우시 인민정부 상업국 소속의 음식복무공사에 속한 국영여관 겸 음식점이다. 임시정부는 청태제2여사에서 잠시 머물다가 호변촌(湖邊村) 23호로 이전했다. 호변촌은 말 그대로 항저우를 상징하는 서호(西湖) 부근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2007년 호변촌 23호는 항저우시의 주도 아래 재정비 복원되었고, 현재 대한민국임시정부항주구지기념관(大韓民國臨時政府杭州舊地紀念館)으로 사용되고 있다.

항저우 시절의 중요한 유적지로는 임시정부 요인 대다수가 가입했던 한국독립당 사무소 자리가 있다. 임시정부와 함께 이동한 한국독립당은 항저우 학사로 사흠방 40호・41호에 자리잡았다. 한국독립당은 항주에서 『진광(震光)』이란 기관지를 발행하였다. 임시정부는 1932년 5월 항저우로 이전한 후, 1935년 11월 전장(鎭江)으로 옮겨갈 때까지 약 3년 6개월 동안 항저우에 머물렀다.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임시정부 청사인 청태제2여사와 호변촌 23호에서 함께 생활하다가, 1934년 11월부터 오복리 2가 2호로 옮겨 생활하였다.(주16)

   
▲ '항주에 새 터를 마련하다'.(사진=임영태)

항저우시기 임시정부 활동 중 가장 중요한 일은 1935년 7월 5일 창당된 조선민족혁명당 등 사회주의 세력과의 통합 작업을 모색한 것이었다. 1935년 9월 조소앙의 노력으로 통합이 움직임이 가속화되었고 11월 3일에는 자싱 난후의 유람선 위에서 마라톤회의를 벌여 이동녕, 조완구, 김구, 조성환, 이시영, 송병조, 차이석 등을 국무위원으로 한 임시정부 활동을 재개하게 되었다. 항저우와 자싱을 오가면서 좌우통합노력이 있었지만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항저우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1935년 11월 임시정부는 난징에서 30분 거리에 위치한 전장(鎭江)으로 거처를 옮겼다.

   
▲ 호변촌 23호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항주구지기념관(大韓民國臨時政府杭州舊地紀念館)(사진=임영태)
   
▲ 항저우임시정부 청사자리 기념관 내부 전시 사진(사진=임영태)

서호를 유람하고, 서호 주변에 위치한 임시정부기념관을 돌아보는 것으로써 이번 탐방 일정은 끝났다. 그러나 임시정부 이야기는 계속된다. 장정시기와 충칭시기까지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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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정정화, 『장강일기』, 학민사, 1998, 148쪽

2) 한상도, 『대한민국임시정부 2-장정시기』, 독립기념관, 2008, 11쪽

3) 1994년 매정(梅亭)이란 이름으로 간판을 달았으나 2009년 매헌(梅軒)으로 현판을 교체했다. 2015년부터는 전시와 동영상을 제작해 제공하고 있다. 기념정자에서 기념관으로 바뀐 것이다.(<국외독립운동사적지>-“윤봉길의사 홍구공원 의거지/ 윤봉길의사 기념관”. http://oversea.i815.or.kr/country/?mode=V&p=2&l_cd=china&area=ARA013&m_no=CN00210)

4) 태륜기, 『회상의 황하』, 갑인판사, 1975, 190~191쪽

5) 윤봉길의거 이후 김구, 김철, 안공근, 엄항섭 등 4명은 함께 프랑스 조계에 있었던 미국인 피치(George, A. Fitch, 중국 이름은 페이우싱) 집에 몸을 숨겼다. 상황은 매우 위급했고, 일본인들은 이미 피치를 의심하고 있었다. 1932년 0월 0일 일본인들이 피치의 집을 수색하려 할 때 피치는 김구 선생을 서양인으로 분장시키고 자신의 부인을 김구 선생의 부인으로 분장시켜 함께 자가용에 타게 하고 자신은 운전기사로 변장하여 위기에서 탈출시켰다. 이리하여 김구는 상하이 서가회 기차역에서 자싱으로 가는 열차에 안전하게 탑승할 수 있었다. 

6) 김구/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343〜352쪽

7) 주부청의 수양아들 천둥성(陳桐生)의 별채였던 이곳은 2005년 5월 ‘저쟝성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2001년 이래 독립기념관과 가흥시정부의 지원으로 확장·보수공사를 마쳤고, 전시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8) 한상도, 『대한민국임시정부 2-장정시기』, 독립기념관, 2008, 13쪽

9) 김구/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362쪽

10) 조창완,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주경로 답사기”, <신동아> 2003년 8월호(2003. 7. 29)

11) 유성운, “산업혁명 500년 전 영국보다 잘 살았던 송나라, 왜 망했나”, 중앙일보, 2018. 7. 29

12) 이근명, “항저우의 서호와 문인들: 백거이와 소동파”, 대한항공 사외보 <스카이뉴스> 296호, 2011. 10. 9; 하늘나리네(http://blog.daum.net/naryspa/18032428)

13) 이근명, “항저우의 서호와 문인들: 백거이와 소동파”, 대한항공 사외보 <스카이뉴스> 296호, 2011. 10. 9; 하늘나리네(http://blog.daum.net/naryspa/18032428)

14) 제1경 만리장성, 제2경 계림산수. 제3경 항저우 서호, 제4경 자금성, 제5경 쑤저우 정원, 제6경 황산, 제7경 장강삼협, 제8경 허베이 승덕 피서산장, 제9경 대만(타이완) 일월당, 10경 시안 병마용.

15) 조창완,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주경로 답사기”, <신동아> 2003년 8월호(2003. 7. 29)

16) 김주용・박환・조재곤・한시준・한철호, 『국외항일유적지』, 독립기념관, 2009, 234〜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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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19-06-05 09:39:58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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