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경 / 농부

 

살구나무를 찾아서 살구나무 동산을 만들고 있다. 올해는 살구나무 마을을 만들려고 한다. 올해 우리 마을에는 많은 살구나무들이 새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인데, 나는 그것이 북측 회령 백살구나무이기를 바래서, 그것을 구하려 안타깝게 뛰어다니고 있다.
사라진 살구나무를 찾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살구나무를 잃어버렸듯이 아주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무엇을 위하여 그 많은 것들을 놓아버린 것일까? 여기 연재할 글들은 살구나무처럼 우리가 잃은 것들, 잊은 것들, 두고 온 것들에 대한 진지한 호명이다. / 필자

 

▲ 찔레꽃. (주미경 제공)

사람 손이 미치지 않는 밭가장자리, 산어귀마다 찔레꽃이 흐드러졌다. 길따라 늘어선 이팝나무들이 흰 꽃무더기를 한 광주리씩 이고 무거운 듯 바람에 출렁이는 것도 볼 만 하지만, 이 맘 때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단연 찔레꽃인가보다. 풍성한 초록이파리 덤불에서 소담하게 피어난 무수한 흰 꽃들, 그 선명한 빛깔의 대비가 드러내는 어여쁨과 진한 향기가 사람을 그예 홀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찔레꽃이 그저 볼만한 풍경만을 선사하는 것은 아니다. 찔레꽃에는 이야기가 깃들어있다. 찔레꽃에 이야기가 들어있는 것은 그것이 갖고있는 눈에 띄는 아름다움 때문이요, 사람사는 마을 언저리에 피어나는 꽃이어서 옛적부터 사람들의 삶과 연관되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적, 몽골에 공녀로 끌려갔던 소녀 찔레, 10년만에 부모와 동생을 찾아 돌아온 고향집에서 찾을 수 없는 동생의 이름을 부르다 죽어간 찔레, 그녀의 마음은 흰 꽃이 되고 동생을 부르던 목소리는 향기가 되어 부모와 동생을 찾아 헤매던 골짜기와 개울가 온 산천에 피어났다던가. 고통스런 역사와 슬픈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실은 꽃이름의 유래가 그 화사한 모양에서는 잘 연상되지 않는 비애를 자아낸다.

지금 어디에 살고있던 성장기를 시골에서 보낸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잡은 찔레꽃도 낭만이나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배고픔과 애탐의 기억이 화인처럼 찍혀있는 꽃이다. 제일로 높은 고개가 보리고개라, 찔레꽃은 보리고개의 가파른 막바지, 절량과 배고픔의 고통이 극에 달해있을 때 피어나는 꽃이다. 또한 입하에서 소만 망종까지, 해마다 가뭄이 극심한 절기에, 찔레꽃은 모내기를 위해 비를 기다리며 애타게 바라보는 무정한 하늘 아래서 피어나는 꽃이다. 그러니 옛 농사력에 전해지는 ‘찔레꽃 필 때 모내기하면 풍년이 든다’는 말도 모내기철에 제때에 마춤하게 내려주지 않는 비를 빗대어 생겨난 말일 것이다. 오죽하면 이 시기의 가뭄을 ‘찔레꽃 가뭄’이라 했을까.

그러고 보면 고통과 아름다움을 하나의 맥락에서 파악하는 우리네 정서는 그 어떤 문학적 상상력이 아니라 근근이 이어온 생활 속에서 자라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농사일에 일천한 나에게도 찔레에 대한 뚜렷한 경험이 자리잡았으니 그것은 찔레가시에 대한 것이다.

농사라곤 해도 연습에 불과했던 첫 해, 묵은 밭 가장자리를 점령한 찔레가지들을 목장갑 하나 끼고 뽑아내면서 수도없이 가시에 찔려버렸다. 찔리는 단번의 아픔으로 끝났다면 찔레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고 말았으련만, 온 몸에 가시독이 퍼져 두드러기로 몇 달을 두고 고생한 덕분에 ‘찔레’란 위태로운 물건이라는 개념이 저장된 것이다. 사실 뽑아낼 때는 그것이 찔레인 줄도 몰랐다. 나중에 피어난 꽃을 보면서 가시의 위태로움과 꽃의 아름다움 간의 연결되지 않는 간격에 아연해하던 심정도 보조개념으로 들어갔나보다. 위태로움과 아름다움도 한 바구니 안에 들어있다는 사실에 대한 실증적 경험이라 할까.

▲ 물 댄 논에 뜬 송화가루. (주미경 제공)

시대는 바뀌어 보리고개도 애타는 가뭄도 다 옛이야기가 되었다. 연한 찔레순을 벗겨먹으며 주린 배를 달랠 일을 물론, 그럴만한 아이들 자체가 시골에 남아있지를 않고, 곳곳에 연결된 저수지 수로와 모터만 돌리면 콸콸 쏟아지는 관정 덕에 애타는 가뭄도 더 이상 없다. 기후까지 바뀌어 망종도 훌쩍 전이건만 모내기들도 벌써 끝물이다.

물채운 논마다 송화가루가 노랗게 떠다니더니 한 일주일 어간에 어린 모들이 들판을 다 채웠다. 이맘 때 바깥에 나갈 때마다 풍경이 바뀌는 것을 보자면 우렁각시를 떠올리게 된다. 사람기척이 그토록 드문한 들판이건만 때가 되면 제꺽제꺽 다른 모양을 연출해내니 우렁각시가 밤새 일을 해놓고 가는가 싶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우렁각시는 없다. 논판의 모든 일은 기계가 감쪽같이 해놓고 사라진다. 논판에 엎드린 사람그림자 하나 볼 수 없어도 땅과 하늘과 기계가 알곡을 키운다. 기계를 안들이는 나는 밭에 엎드려 벌써 열흘이 넘게 쑥을 캐고있다. 쓰자고 캐는 쑥이 아니라 없애자고 캐는 쑥이다. 쓰자는 쑥이라면 밑동만 잘라내면 될 것이나 없애자는 쑥이니 뿌리까지 캐내야만 한다. 호미로는 어림도 없어 자루 부러진 괭이를 휘두르느라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고 굳기를 세 번째에 접어든다.

오랫동안 묵은 논을 밭으로 개간하기 위해 버드나무들을 들어내니 여기저기 먼저 자리잡은 것이 쑥이었다. 쑥의 생태가 어떤지도 모르면서 쑥이 나니 국도 끓여먹고 떡도 해먹으리라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한 해 두 해 영역을 넓혀가며 심은 작물들을 괴롭히는 쑥을 호미로 캐내 여기저기 던져놓고 급기야 관리기로 갈이를 해버린 것이 큰 화근이었다. 작년부터는 온 밭에 너무나 크게 퍼져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어버렸으니, 그제서야 일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올해 밭이 끼는 물을 잡느라 밭 전체에 배수로를 만들어 재정비를 한 참에 벼르던 쑥 제거작업에 작심하고 달라붙었다.

이것저것 파종을 하면서 아직 크게 자라지 않은 쑥을 캐면서는 꽤 여유만만 했었나보다. 웬걸, 곡우 지나 한번 내린 비에 판갈이라도 한 듯 단번에 세상빛깔이 푸르게 바뀌니 쑥이야말로 선참으로 제 세상을 만난 것이다. 봄철 바쁜 것이야 농사일에선 당연지사지만 바깥일로 이리저리 몰리는 사이에 밭이랑마다 다시 쑥이 창궐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소만 다가가며 가뭄 끝에 내린 단비에 아직 손대지 못한 이랑은 이미 쑥밭이 되었고, 어린 쑥을 대충 캐내고 파종한 이랑에서도 다시 세를 뻗치며 작물들을 위협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보면 한심하다 하겠지만, 때를 놓치고 쑥을 자래운 일이 꼭 불운한 것만은 아니다. 빽빽한 군락을 이루며 무릎 높이를 넘게 자란 쑥을 뿌리까지 캐내면서 비로소 쑥의 생태를 알아가고 있다. 이를테면 ‘쑥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벌써 한여름 같은 땡볕을 등에 지고 종일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고 있다.

▲ 쑥 캐내는 괭이. (주미경 제공)

쑥은 동아시아에 분포하는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쑥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놀라운 적응력과 자생력이다. 쑥은 논밭둑이건 길가건, 풀밭이건 돌밭이건 장소를 가리지 않으며,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 해도 햇빛만 들면 어디에서든 자라난다. 또한 아무리 작은 싹이라도 일단 터를 잡기만 하면 땅 위에서 땅 속에서 몸을 키우며 맹렬하게 자기 진지를 넓혀간다. 얼마나 쑥쑥 잘 자라기에 이름마저 ‘쑥’이 되었을까.

쑥은 부지런하고 사철 자기 일을 멈추는 법이 없다. 쑥은 다른 풀들이 아직 잠들어있는 이른 봄부터 지상에 푸릇푸릇한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그래서 춘궁기가 본격화되는 즈음에 고마운 먹을거리가 되어주었는데, 쑥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지상의 씨앗이 여물고 난 초가을부터 다음해 봄을 위한 새 순을 땅 속에서 자래우기 때문이다. 쑥은 이렇게 부지런함으로 다른 풀보다 먼저 제 영역을 넓혀가면서 군락을 이루고, 강력한 타감작용으로 다른 식물의 침입을 막으면서 자기 영토를 지켜나간다.

게다가 쑥은 웬만해선 죽지 않는다. 아무리 캐어내고 베어내도 쑥이 나날이 번성하는 것은 생장점이 지하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뿌리까지 죽이는 제초제라야 쑥을 잡을 수 있는데, 그런 제초제는 다른 작물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쉽사리 쓰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물며 제초제를 전혀 쓰지 않는 나는 죽으나사나 괭이를 들고 달라붙는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쑥 뿌리를 캐내면서 5밀리미터도 되나마나한 뿌리조각에서 올라온 순을 보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러니 몇해동안 호미 하나 들고 어설프게 쑥을 캐낸 일이나 관리기로 갈아버린 일이 결국은 쑥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쑥을 밭 전체로 더 퍼뜨린 일인 것이다. 홍길동과 손오공의 분신술인가, 아니면 죽어도 죽지않는 터미네이터의 현신인가, 뿌리째 캐내어 땡볕에 널어놓아도 비라도 한줄금 내리면 말라죽은 것처럼 보이던 뿌리들이 부활이라도 하듯 파릇하게 되살아나는 것도 신기중에 신기다.

▲ 뿌리째 캐낸 쑥. (주미경 제공)

뿌리를 들어내기 위해 50센티 60센티 땅을 파고 허비는 것은 예사다. 쑥의 다채로운 생존전략 중 손가락에 꼽힐 만한 또 하나의 기술이 아마도 도마뱀 꼬리작전이 아닐까 여겨진다. 쑥이 아직 크게 자라지 않았을 때 지표면에 가까운 뿌리들은 연하여 쑥 몸체를 잡고 뽑으면 가벼운 감촉으로 툭 뽑혀나온다. 내가 그랬듯이, 대개는 그것으로 쑥이 제거되었다고 믿게되지만 그것은 쑥의 털끝 하나 건드린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쑥의 진짜모습은 지상보다는 지하에 있고 지표 가까운 곳보다는 깊숙한 곳에 있으며 그것은 적어도 괭이날 세 길 이상은 되어야 보게된다.

그래서 쑥을 캐는 일은 종종 자신을 보는 일로 되어버린다. 기세가 썩 좋은 쑥 군락을 깊이 파고들다보면 끝장을 봐야겠다는 집요한 심사가 발동을 건다. 시골와서부터는 되도록 멀리하려고 하는, 어떤 현상의 근원을 알고싶다는 열망에 또 불이 달리는 것이다. 벌써 몇해동안 농사를 망치는데 일조하는 쑥의 근원, 그것을 보고야말겠다는 의지가 충천하고 괭이를 휘두르는 어깨에 힘이 집중되고, 연신 흘러내리는 땀이 옷을 다 적시면, 마음속 어딘가 아직도 비어있는 공터에서 오래된 소리가 들려온다. “발본색원! 발본색원!”, “음, 젊었을 적 하루가 멀다하고 듣던 소리군….”

‘발본색원’은 의미가 정 반대로 뒤집힌 문구이다. 발본색원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주나라 고사에 등장하는 말로, 글자를 그대로 풀면 ‘나무의 뿌리를 뽑고, 물의 근원을 막는다’는 말이다. 원래의 의미는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고 근본을 망친다’는 것인데, 원래의 의미와는 반대로 ‘폐단을 근원적으로 없앤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생각해보라. 나무의 뿌리를 뽑고 물의 근원을 막는 일이 어떻게 좋은 일일 수가 있을까. 그 시절의 그들도 ‘폐단을 제거한다’는 뒤집힌 의미로 그 말을 사용했겠지만, 그들이 실제 한 일은 원래의 의미대로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고 근본을 망치는’ 일이었다.

제법 부피있는 쑥 뿌리가 뜨드득 통째로 들려나오며 손으로 전달되는 미묘한 파장에 “음 뿌리뽑는다는 느낌이 이런거군.” 감상도 하고,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이 ‘발본색원’인가 그 ‘발본색원’인가 가늠도 해가며, 땅 속 깊이 뻗어간 뿌리를 따라 괭이날 두 길 세 길을 파헤쳐 마침내 만나고야 만 뿌리의 끝, 살아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까맣게 딱딱하게 굳어있는 오래된 뿌리를 들어내고는, 보잘것없는 이것이 이렇게 기세좋게 창궐하는 생명체들의 근원인가 싶어 숙연해지고 겸연쩍어지기도 하면서 떠오르는 두서없는 생각들이 하나의 곬으로 흘러 고인다.

하루가 멀다하고 ‘발본색원’을 고지하며 공안사건들을 조작해내던 이들, 그들은 지금 무대에서 내려온 듯이 보이지만, 그들이 한 일은 계속되고 있고 아직까지는 성공이라고 말해야 할게다. 몰락에 몰락을 거듭해 하늘아래 근본이라 일컫는 농사가 밥먹고 못살 업으로 전락하고 아이들 재잘대는 소리마저 끊긴지 오래인 지금의 농촌을 보자면, 나무의 뿌리를 뽑고 물의 근원을 막은 그들의 행위가 어찌 성공했고 성공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랫동안 묵고묵어 까맣고 딱딱하게 굳어진 뿌리를 풀더미에 던져놓으며 쑥이란 것이 참 촌사람들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수십년간 촌이 변화해온 모습을 죄다 지켜보았던 사람들, 촌의 어제와 오늘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들, 자신의 전 생애를 한 장소에서 살아온 사람들 말이다.

땅을 구하러 다니면서 처음으로 가까이 접한 촌사람들에게서 발견한 건 안정감과 초연함이다. 그것은, 여기저기 숱하게 자라나면서도 어딘지 생뚱맞게 보이는 망초나 도깨비바늘과는 달리, 어떤 장소이든 자기 진지를 구축한 쑥군락이 거기를 차지한 터주처럼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 그들의 얼굴에는 고단함과 권태로움이 짙게 배어있었지만, 그들에게서는 거기에 펼쳐진 산과 들과 개울에 녹아든 풍경의 일부인 것처럼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과 초연함이 느껴졌다. ‘토착’, 저것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온 사람들의 몸에 스며든 숨길 수 없는 속성일까. 그들에게서는 허공에 매달려 사는 도시인들에게서 흔히 느껴지는 경계심과 불안감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농촌은 오래된 장소다.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심은 느티나무 그늘에서 놀고 아버지가 심은 감나무에서 감을 따먹으며 성장했다.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맨 손으로 일군 땅에서 일하며 아버지가 고쳐지은 집에서 살아간다. 여기는 과거가 삭제된 장소가 아니라 과거가 살아 이어지는 장소인 것이다. 어느 여울에 가야 빠가사리가 잡히는지, 어느 골에 가야 다래를 실컷 따는지, 어느 등판에 가야 고사리를 푸짐하게 끊는지, 너무나 잘 알고있는 장소에서, 그들이 지닌 눈빛과 표정과 움직임이 이방인의 그것과 다른 것이야 당연한 일이다.

한 마을에 이방인으로 들어와 4년, 마주치기만 하면 반가워하고 무얼 해먹고 지내냐고 걱정해주는 할매들, 고추장을 담그면 고추장을 퍼주고, 깨를 볶으면 깨를 싸주고, 면민의 날 당신이 받은 수건을 꿍쳐주면서 자네 주고싶다고 귓속말을 건네는 할매들, 그만하면 이제는 마을의 한 성원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고 여겨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여기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가며 가끔씩은 내가 알 수 없는 거대한 그들만의 세계를 느낄 때가 있다.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눈짓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언어들, 내 머리에는 인지되지 않는 관계들, 그것은 꼭 짚어 말할 수 없는 어렴풋한 느낌으로 내가 금 밖에 있음을 상기시키곤 한다. 쑥이 보여주는 세계가 지상의 것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쑥이 지상과 지하라는 판이하게 다른 세계를 한 몸체에 지니고 있는 것처럼, 쑥이 독립적으로 보이는 지상의 모습과는 달리 서로 연결되고 얽혀있는 지하의 세계를 갖고있는 것처럼, 그들이 보여주는 세계도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맥락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 세계인 것이다.

이방인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그것을 텃세라고도 하고 배타성이라고도 하며 경원시하지만 나는 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오래된 장소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오래된 사람들의 관계가 만들어낸 세계다. 아버지의 아버지들,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씨실과 날실로 얽히고 설키며 세월을 두고 지어낸 그물과 같은 세계다.

요새 일상이 되어버린 사이버세상, 이름도 모르면서 살을 베어줄듯 친하기도 하고 얼굴도 모르면서 갈아마실듯 싸우기도 하고, 마음만 먹으면 들어가고 또 마음만 먹으면 나오기도 하는 그런 세상의 관점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불가한 세계다. 그것은 이리로 걸치고 저리로 부대끼며 아버지의 이름으로, 어머니의 인연으로 만들어진 세계, 아무나 들어갈 수도 없지만 나오고 싶다고 나와지지도 않는 그런 세계인 것이다.

물 속의 물고기가 물을 느끼지 못하듯이 그들도 자기들의 세계를 뚜렷하게 의식하지 못한다. 그것은 계획도 설계도 의도도 없이 만들어진 세계, 그저 살다보니 그렇게 되어진 세계인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또 이방인의 감각으로만 인지되는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한 그들의 세계를 인정하면서 나는 사람들을 좀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이 논리보다는 인연을 중히 여기고, 할 말이 있어도 다 하지 않으며, 자기 의견을 내놓기보다 남의 의견에 기대는 그러루한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 살구나무길. (주미경 제공)

어쨌든, 4말5초에 걸쳐 마을에는 살구나무가 심어졌다. 지난 겨울내내 애타게 뛰어다닌 보람도 없이 회령 백살구나무는 끝내 구하지 못했지만, 국내에서 판매하는 백살구나무 360주와 커다랗게 자란 개살구나무 210주, 합하여 570주의 살구나무를 온 마을에 심었다. 군데군데 빈 곳은 있어도 꽤 봐줄 만한 살구나무 둘레길이 만들어지고 집집마다 살구나무 너댓 그루씩이 자리를 잡았다.

나무를 더 심어달라거나 심지 말라거나, 큰 나무를 심어달라거나 작은 나무를 심어달라거나, 누구는 저런데 나는 왜 이러냐거나, 자잘한 잡음들이 간간이 비어져 나왔지만 대체적으로는 순조롭게 사업이 마무리되었다. 이장에게 물어보았다. 살구나무를 심어서 마을사람들이 좋아하냐고. 이장이 대답한다. 호주머니에 돈이 들어와야 좋다고 하지 나무 심었다고 좋다 하겠냐고.

자연스런 일이다. 촌사람들도 쑥처럼 실용주의이니까. 쑥은 철저한 실용주의다. 사람사는 곳에서 지천으로 자라도 쑥에는 찔레에서처럼 이야기도 없다. 단군신화에 등장할 정도로 아주아주 오래된 소재이지만 신화에서마저도 쑥은 곰을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유용한 재료일 뿐이다. 그래서 쑥에는 이야기가 없는 대신 갖가지 신비한 약리작용과 쓰임새에 대한 정보들이 넘쳐난다.

실용주의라는 측면에선 촌사람들도 도시사람들 못지않다. 어쩌면 실리를 따지는데 있어 도시 월급쟁이들보다 훨씬 꼼꼼하고 계산적일지 모른다. 모두다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모양보다는 실속을 챙기고, 많이 벌어 많이 쓰기보다는 적게 벌어도 아끼며 사는 것이 대개의 촌사람들이다. 도시보다는 덜 해도 시골 역시 돈 없이는 살 수 없는 곳으로 되었으니, 무얼 하든 그게 돈이 되는가를 따지고 살구나무보다 살구나무가 돈이 되어줄 것인지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이 어찌 자연스런 일이 아니겠나.

농촌사람들과 쑥이 여러 가지로 닮았다 해도 닮지 않은 한 가지가 있으니, 그들에게는 쑥에는 없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에게나 꺼내놓지 않는 이야기들, 어쩌면 찔레꽃에 깃들인 이야기보다 더 애닯고 서럽고 고통스러울지 모르는 이야기들, 그것들을 죄다 땅 속에 묻고 그들은 무심히 살아간다. 무표정한 얼굴로, 실용주의로 무장하고 말이다.

순희할매가 세상을 떴다. 지병으로 마을과 서울을 오가며 지내던 노인네다. 지난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계량기를 보러간 나를 끝내 붙들어 밥을 먹이고 가지나물과 오이냉국을 비닐봉지에 싸서 꼭꼭 여며주던 할매다. 매화가 피기도 전에 있었던 그 죽음에 대한 소식이 살구꽃이 지고서야 나에게 도착했다. 마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소식은 마지막에야 나에게 당도한다. 내가 알면 모든 사람이 다 아는 것이다. 중간에 실종되는 일도 심심찮게 있을게다.

다 털어야 쉰 명도 못되는 마을에서 듣게된 두 번째 부고다. 노인네들이 세상을 뜬다. 대를 이어온 그물짓기를 이어갈 세대가 없으니 그물은 한코한코 풀어져 간다. 우리가 두고온 것들을 그들은 걷어가지고 간다. 나에게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오래된 그들의 세계가 허물어져가는 것은 슬픈 일이다. 오래된 장소가 잃어버린 장소로 되어가는 것은 더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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