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상하이서 첫 걸음을 시작해 일제의 패망으로 1945년 11월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 27년간 고난에 찬 투쟁을 이어갔다. 그 사이 임시정부는 상하이,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 등 중국 대륙 곳곳을 누비며 1만3천리(5,200㎞)를 이동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초기 활동 지역인 상하이와 첫 피신처였던 항저우의 임시정부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상하이・항저우 유적지 답사기와 함께 임시정부 역사를 10여회에 걸쳐 정리하고자 한다. 이 답사기는 매주 화요일 연재된다. / 필자 주


유일당 운동의 전개와 실패

1926년 홍진의 국무령 취임 후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세력을 통일하기 위한 유일당 건설에 나서기로 하였다. 유일당 운동의 계기는 비타협주의와 민족협동전선론에서 나왔다. 국내에서 자치론과 같은 타협주의가 등장하자 독립운동가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비타협주의가 천명되었다. 1923년 의열단 선언으로 발표된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이 대표적인 비타협 투쟁론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민족협동전선론은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민족운동 내부에서 사상적 분화가 일어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서는 코민테른 지도부는 계급해방에 앞서 민족해방을 실현하기 위해 전선을 통일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중국 관내 독립운동 진영 내에 좌파세력이 확장되면서 민족협동전선론은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특히 1924년 1월 20일 중국국민당이 제1회 전국대표대회를 통해 ‘연소・용공・공농부조’ 정책을 채택하고 제1차 국공합작을 성립시키자 한국 독립운동계도 큰 영향을 받았다.(주1) 

1926년 7월 8일 임시정부 국무령 홍진은 ‘전 민족적 대당’ 결성을 주장하였고, 이에 안창호가 적극 호응하였다. 안창호는 좌파세력의 대표격인 원세훈을 만나 대동단결을 촉구했고, 10월 16일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북경촉성회)를 결성하고 선언서를 발표했다. 안창호는 베이징을 출발점으로 삼아 만주지역으로 운동을 확산시켰고 그 바람은 상해에도 불어왔다. 또한 국내에서는 1927년 2월 15일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공산주의 세력이 연합하여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1927년 3월 21일 삼일당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상해촉성회)가 창립되었고, ‘유일당 조직을 촉성하고 민족의 독립적 역량을 집중하는데 노력한다’는 등의 강령이 채택되었다. 집행위원 24명 가운데 홍진・이동녕 등 16명이 임시정부 인사였고, 홍남표・정백 등 8명이 사회주의 계열이었다. 이후 광주, 무한, 남경 등에서도 잇따라 촉성회가 만들어졌다.(주2)

▲ 신간회 기념 축하 기사(동아일보, 1929. 1. 1)

그러나 순항하던 유일당 운동은 1928년부터 동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진영은 유일당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세력을 통일시키고 임시정부를 강화하여 독립투쟁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이에 반해, 사회주의세력은 ‘전선 통일’을 일시적인 전술로 보고 자신들의 세력 확대의 기회로 삼으려 했다. 1928년부터 우익진영은 ‘전민일치’의 중앙집권적 대독립당 결성을 주장하였으나 좌익진영은 노동대중의 이해와 입장에 기초한 ‘전투적 협동전선’, ‘혁명적 통일전선’을 주장하면서 대립하였다.(주3)

좌우 분열과 함께 좌파 내부의 대립도 나타났다. 좌파 내부의 양대세력인 화요파와 ML(마르크스레닌)파 사이에 주도권 싸움이 깊어지면서 통일적인 전략 수립이 힘들게 되었다. 화요파는 우파와의 결합을 중시했으나 ML파는 우파와의 분리와 헤게모니 관철을 중시했다. 1928년 12월 코민테른은 ‘12월 테제’를 통해 민족부르주아 세력과 결별하고 대중 속에 깊이 들어가 아래로부터의 당을 건설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 테제에 따라 좌익진영은 민족주의 진영과의 연합전선을 포기하였고, 유일당 운동 또한 중단되고 말았다.

임시정부, 집단지도체제로 개편

임시정부 국무령 홍진은 유일당 운동이 탄력을 받자 이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1926년 12월 9일 국무령 자리를 사직했고, 그 뒤를 김구가 이어받았다. 처음 김구는 “자신의 출신 성분이 낮다는 점과 내로라는 인물들도 극복하지 못한 한계를 자신의 힘으로 이겨내기 힘들다는 점”을 이유로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주4)

그러나 이동녕이 거듭 설득하자 김구도 받아들였다. 김구와 이동녕은 임시정부 수립 이후 계속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김구가 경무국장일 때 이동녕은 내무총장이었고, 내무총장 시절에는 국무총리였다. 국무령 취임을 요구하던 당시에는 이동녕이 의정원 의장을 맡고 있었다. 이처럼 두 사람의 친밀한 관계는 뒷날 기강에서 이동녕이 서거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김구는 이동녕의 요구를 받아들여 1926년 12월 10일 국무령에 취임했다.(주5)

김구는 국무령 취임 후 헌법을 개정하여 집단지도체제로 바꾸었다. 5인 이상 11인 이하로 구성되는 국무위원 중에서 한 명을 주석으로 선출하여 특별한 권한 없이 회의를 주관하도록 한 것이다. 이와 함께 독립운동진영에서 일치된 의견을 모아 정당을 조직하면 최고 권력을 그 당에 주도록 하는 규정을 두었다. 중국국민당이나 소련공산당처럼 하나의 정당이 국정을 통치하는 이른바 ‘이당치국’(以黨治國) 체제를 규정한 것이다. 이 헌법은 1927년 4월에 발효되어 1940년 10월 9일까지 13년 반이나 유지되었다.

집단지도체제라고 했지만 실질적으로 국무위원회와 의정원 상임위원회의 이중체제였기에 실질적인 구심이 없었다. 그 때문에 정부가 중심이 돼 활동을 전개하기보다는 한인애국단처럼 별도의 조직을 만들어 투쟁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 이후 상해를 떠나 이동하는 과정에서는 이런 체제가 오히려 임시정부의 유지라는 측면에서는 유리한 점도 있었다.(주6)

김구는 헌법 개정 후 새 내각이 구성되자 주석 자리를 이동녕에게 넘겨주고 내무장이 되었다. 정부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한 방편이었다. 그리고 김구는 한인애국단 등의 통해 의열투쟁을 전개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상하이 시절 지도부 변화(사진=임영태)

한국독립당과 조소앙의 삼균주의

좌우 및 좌익내부의 노선 차이로 유일당 운동이 벽에 부딪치게 되자 임시정부 핵심인물들은 새로운 조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30년 1월 25일 이동녕을 비롯한 임시정부 핵심세력과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한국독립당(한독당)을 결성하였는데, 이 당을 임시정부의 중국국민당이나 중국공산당과 같은 존재로 생각했다. 한국독립당 발기인 28명은 대부분 임시정부의 핵심 구성원이었다. 한국독립당의 당의(黨意)와 당강(黨綱)은 조소앙이 제시한 삼균주의를 기본 골격으로 삼았다.

조소앙은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임시헌장과 임시의정원법 기초위원으로 활동했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국무원 비서장에 선출되었으나 6월 10일경 파리평화회의 대표로 파견된 김규식을 지원하라는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유럽으로 파견되었다. 김규식과 조소앙 등은 파리강화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8월 스위스에서 열린 국제사회당대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과 함께 국제연맹 가입 촉구 결의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 한국독립당(1930.1.)의 당의와 당강을 기초한 삼균주의 사상가 조소앙(사진=독립기념관). 조소앙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관련된 많은 주요 문건들을 기초했고, 그의 삼균주의 사상은 1948년 제헌헌법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다. 

조소앙은 1921년 5월 베이징에 도착할 때까지 2년여에 걸쳐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영국, 독일, 발틱3국과 혁명러시아 등을 돌아보며 견문을 넓혔다. 조소앙은 이때 접하고 익힌 유럽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은 삼균사상을 체계화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조소앙이 주창한 삼균주의는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통해 개인과 개인의 균등생활을 실현하고, 이를 토대로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사이의 균등생활을 이루며 나아가 세계일가를 추구한다는 것이 주요한 골자이다.(주7)

1922년 임시정부 외무총장에 선출된 조소앙은 중국 국민당정부의 원조를 끌어내고 한중 공동전선을 모색하고 깨진 임시정부의 좌우연합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1930년 1월말〜2월초 이동녕, 김구, 이시영 등 임시정부 요인들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한독당)이 창당되면서 조소앙이 작성한 당의와 당강에 삼균주의가 공식적으로 반영되었던 것이다.

당의에서는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광복해서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민주국가를 건설하여 국민 각개의 균등생활을 확보하고, 밖으로는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평등을 실현하고 나아가 세계일가의 진로로 향한다”라고 했다. 또한 당강에서는 ‘보통선거를 통한 참정권・기본권 보장, 토지 및 생산기관의 국유화로 생활의 평등화, 국비의무교육에 의한 교육권의 평등화, 민족자결과 국제평등, 세계일가의 조성’ 등을 천명했다.(주8) 이러한 내용들은 이후 임시정부의 정책에 그대로 수용되었고, 상하이 한국독립당의 맥을 잇는 재건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통합한국독립당, 나아가 충칭의 좌우연합정부까지 그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조소앙의 삼균주의 사상은 1948년 제헌헌법에도 영향을 미쳐 중요한 이념적 토대로 작용했다.(주9)

한국독립당은 좌우연합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임시정부 주변의 민족진영을 통합해 당을 조직했고, 정강에서 보통선거제와 국민기본권의 평등을 제시하였다. 또한 한국독립당은 일제와의 투쟁 방법으로 민중적 항일투쟁과 무력적 파괴를 제시하였고, 당의와 당강에서 토지와 대규모 생산기관을 국유로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와 같이 사회주의적 내용을 포함한 것은 러시아 혁명과 서구 사민주의, 중국 쑨원의 삼민주의 등의 영향을 받은 때문이었다. 실제로 일제 기관과 일본인이 주요산업과 토지, 대기업 등을 모두 차지하고 있는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감안하더라고 국유화는 당연한 방향이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전개된 유일당 운동 과정에서 민족주의 세력들도 사회주의적 흐름에 익숙해졌고, 1929년 세계대공황을 보면서 자본주의 모순을 심각하게 깨달았다. 그 때문에 한국독립당에서 알 수 있듯이 임시정부 또한 정치적 민주주의와 함께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의열투쟁 노선과 한인애국단 조직
 
1932년 1월 8일 오후 5시, 일본 왕궁 입구에서 이봉창 의사가 던진 폭탄이 터졌다. 일본 천왕을 겨냥한 폭탄은 비껴갔지만 일제를 향한 본격적인 의열투쟁의 신호탄이었다. 김구 등 임시정부의 핵심인물들은 고심 끝에 의열투쟁을 항일투쟁의 주요한 방법으로 선택했다. 특히 1931년 7월 만주에서 일어난 만보산 사건을 계기로 일제가 한・중 인민의 이간 공작을 노골화하면서 중국 내 한국독립운동이 설 자리를 완전히 상실하게 될 위기감을 느껴야 할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던 임시정부 지도부는 1931년 11월 국무회의 논의를 통해 의열투쟁을 기본 방법으로 정하고 그러한 일을 실행하기 위해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주10)

임시정부의 의열투쟁은 단지 한 두건의 거사가 아니라 본격적인 일제와의 무력투쟁을 의미했다. 군대가 조직되지 않은 상황에서 임시정부가 무력투쟁을 구사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일제의 주요기관이나 핵심인물들을 파괴, 저격하는 의열투쟁일 수밖에 없었다. 임시정부는 1932년에 들어서면서 5개월 사이에 6건의 거사를 준비하거나 실천에 옮겼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주11)

1) 이봉창의 동경 의거(1932. 1. 8)
2) 상해주둔 일본군사령부(일본전함 이즈모호) 폭파 계획(중국인 용병-실패: 1932. 2. 12)
3) 윤봉길 등의 상해 일본 비행장 폭파 계획(좌절: 1932. 3. 3)
4) 이덕주・유진식의 조선총독 공략(좌절: 1932. 3.)
5)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1932. 4. 29)
6) 최흥식・유상근의 만주 관동청 공략(좌절: 1932. 5.)

▲ 안중근 일가는 대표적인 한국 독립운동 명문집안이다. 1907년 안중근이 연해주로 망명하기 직전에 찍은 가족 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둘째가 안중근이고 그 왼쪽이 남동생 안정근, 그 앞이 안공근이다. 오른쪽 끝이 여동생 안성녀이다.(사진=『안중근가(家) 사람들』, 역사인) 안정근과 안공근은 임시정부에 참여해 활동했으며, 특히 안공근은 김구의 오른팔로서 ‘한인애국단’을 실질적으로 움직였다.

임시정부의 의열투쟁기구였던 한인애국단은 일제의 침략을 정면에서 공격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렇게 해서 침략의 본거지인 동경, 식민지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 상해주둔 일본군사령부, 만주침략과 통치의 심장부인 관동청, 일본군 수뇌부의 ‘훙커우 공원 천장절 및 승전기념식장’ 등이 공격대상으로 선정되었던 것이다.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한 특공작전이면서 반침략전쟁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투쟁의 선두에 선 것이 이봉창・윤봉길 의거였다.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은 테러가 아니라 임시정부가 선택한 무력투쟁, 반침략전쟁이었다. 왜냐하면 테러는 불특정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 파괴하고 사살하는 것이지만, 의열투쟁은 이와는 전혀 달리 침략의 원흉이나 침략・통치기관을 처단하고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주요 투쟁 방법으로 선택된 의열투쟁은 절대로 무고한 민중을 목표로 삼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수뇌부와 그 명령을 따르는 기관, 그리고 침략에 앞장 선 인물을 공격하는 독립전쟁이었다.(주12)

이봉창 의거

이봉창의 별명은 ‘일본 영감’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일본인 상점에서 일하였고,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 등지에서 철공소 직원으로 근무하기도 해서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이봉창은 상하이에서 김구와 관계를 맺은 뒤, 월급을 받으면 종종 술과 고기, 국수를 사 가지고 당시 김구가 단장으로 있던 상하이 민단 사무실에 와서 술을 마시곤 했다. 그는 취하면 곤장 일본 노래를 유창하게 부르며 호방하게 놀았기 때문에 ‘일본 영감’이란 별명을 얻었던 것. 하지만 김구와 사전에 “순전히 일본인으로 행세하고 매월 한 차례씩 밤중에만 찾아오라”고 한 약속에 따른 것이었다.(주13)

▲ 이봉창의사의 선서와 기념 촬영(사진=독립기념관). 사지로 떠나면서 찍은 영정 사진이나 다름없지만, 그는 활짝 웃고 있다. 그의 사생관이 잘 드러나는 사진이다.

어느 날은 일본인 행색으로 하오리(일본식 옷)를 입고 게다(일본식 나막신)를 신고 임정청사에 들어서다가 중국 직원에게 쫓겨난 일도 있었다. 김구는 이 때문에 이동녕 등 국무위원들에게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분간도 안 되는 수상한 인물을 정부 문 앞까지 출입케 한다고 질책을 받기도 했다. 김구는 조사・연구하는 사건이 있다고 답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불쾌감을 없애지는 못했다.(주14) 한인애국단을 조직한 뒤 첫 거사인물로 선정한 이봉창의 행적을 철저히 비밀에 부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봉창은 1900년 서울에서 태어나 천도교에서 세운 용산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3세에 일본인 과자점 점원으로 들어가면서 줄곧 노동자 생활을 이어갔다. 1919년에는 일본인 경영 상점 점원에서 해고됐고, 용산역 만선철도 기차운전견습소의 역부, 전철수, 연결수로 일하다가 1922년에 또 다시 해고됐다. 그는 노동자로 일하면서 한일 노동자의 임금 격차를 보면서 항일의식이 싹텄다.

이봉창은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철공소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로 이름을 바꿨고, 도쿄와 오사카, 효고 등지를 전전하며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갔다. 그는 이런 과정에서 일제의 조선 침략으로 한민족의 생계가 위협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방랑 생활로 삶을 허비할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마음먹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러나 민단 간부들은 그의 거동을 수상하게 여겨 받아주지 않았다.

그런데 김구는 그가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일본 천왕을 왜 못 죽입니까?” 하는 소리를 듣고 그의 진심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봉창은 김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 나이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까지 왔습니다.”(주15)

김구는 이봉창을 의기남자, 살신성인의 큰 결심을 품고 일본에서 상하이로 건너온 것을 알고서는 거사를 위한 준비자금을 마련하였다. 1년여의 자금 등 준비기간을 거쳐 1931년 12월 중순 최종적으로 하룻밤 자면서 거사 점검을 마쳤다. 이봉창은 안공근 집에서 선서식을 거행한 다음, 김구가 주는 폭탄 두 개와 돈 300원을 건네받았다. 사진관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 김구의 얼굴이 처연하다며 위로하였다.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자 이 길을 떠날 터이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으십시다.”

김구와 헤어진 이봉창은 일본으로 떠났다. 그리고 10여일 후 도쿄에서 전보가 왔다. 1월 8일 물품을 방매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거사일이 1월 8일로 정해진 것이다. 김구는 마지막으로 200원을 더 부쳐주었다. 이봉창으로부터 다시 “돈을 미친 것처럼 다 써버려서 주인댁에 밥값까지 빚이 져 있었는데, 200원을 맏아 다 갚고도 돈이 남겠습니다.”란 내용의 편지가 왔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도쿄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일본 천왕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수류탄은 일왕에 명중하지 않았다. 말이 다치고 마차가 손상되고 일본 고관 두 명이 부상했으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았다. 이봉창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고, 1932년 9월 30일 사형이 선고되었다.(주16) 그는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이봉창의 나이는 만 32세였다.

상하이 사변과 윤봉길의 결심

이봉창 의거는 애초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임시정부와 김구에게 엄청난 힘이 되었다. 미주와 하와이, 멕시코, 쿠바 등지의 동포들로부터 격려 편지가 “태평양을 건너서 눈송이같이 날아들었”고, 금전적인 지원도 이어졌다. 의열투쟁에 목숨을 기꺼이 던지겠다는 청년들도 줄을 이었다. 무엇보다도 1931년 만보산 사건(주17) 이후 한국인에 대해 백안시 하던 중국인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윤봉길 의거에 사용될 성능 좋은 제조폭탄은 이러한 중국인들의 호의적인 태도 변화가 아니었으면 쉽게 구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윤봉길은 1908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하였다. 윤봉길은 최병대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와 한학을 공부했고, 성주록의 오치서숙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고전을 공부하였다. 또한 그는 1926년부터 농촌계몽운동, 야학 활동, 독서회 등을 시작하였고, 이를 위하여 농민독본을 저술하기도 했다.

1929년 부흥원을 설립해 농촌부흥운동을 본격적으로 폈다. 2월 18일에는 학예회를 열어 ‘토끼와 여우’를 공연해 성황리에 끝나자 일제당국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윤봉길은 아랑곳하지 않고 농촌진흥을 위한 월진회를 조직, 회장에 추대되었고, 수암체육회를 조직, 운영하면서 건강한 신체를 바탕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했다.

1930년 3월 6일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라는 글귀를 남기고 만주로 망명했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 뒤 윤봉길은 다시 만주로 탈출, 김태식・한일진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였고, 12월에는 단신으로 다롄를 거쳐 칭다오로 건너가 1931년 여름까지 그곳에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했다. 1931년 8월 윤봉길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활동무대를 옮겨야 큰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곳으로 갔다.

윤봉길은 상하이에서 프랑스조계 샤비루(霞飛路)에 있는 안공근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였다. 안공근은 김구의 오른팔로 한인애국단의 실무를 책임지고 있었다. 윤봉길은 우선 생계를 위해 동포 실업가 박진이 경영하는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상해영어학원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공장을 나와 훙커우 공원에서 채소장사를 하면서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등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1932년 1월 8일 한인애국단의 이봉창 의사가 도쿄에서 일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한 다음, 상하이 일대는 복잡한 상황에 빠졌다. 일제는 1월 28일 일본승려살해 사건을 조작하여 상해사변을 도발하였다. 일본은 시라카와(白川義則)대장을 사령관으로 삼아 중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러한 때 윤봉길은 김구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칠 각오를 피력하였다.

“제가 채소바구니를 등 뒤에 메고 날마다 홍구 방면으로 다니는 것은 큰 뜻을 품고 천신만고 끝에 상해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중일전쟁(주18)도 중국에서 굴욕적으로 정전협정이 성립되는 형세인즉,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마땅히 죽을 자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께는 동경 사건과 같은 경륜이 계실 줄 믿습니다. 저를 믿으시고 지도하여 주시면 은혜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주19)

김구는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의 천장절 경축식(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의식)이 있을 예정인데 그때 거사를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고 물었고, 윤봉길은 흔쾌히 하겠다고 했다. 윤봉길은 장래 큰 활약을 할 수 있는 준비된 독립운동가였지만 기꺼이 목숨을 던지기로 했다.

▲ 훙커우공원 거사 전날 태극기 앞에서 찍은 윤봉길의사의 사진. 이봉창과는 달리 윤봉길의 표정은 너무나 진지하다.

윤봉길의 훙커우공원 의거

김구는 중국국민혁명군에 복무하고 있던 왕웅에게 폭탄을 제조해 달라고 부탁했다. 왕웅은 독립운동가 김홍일의 가명이었다. 김홍일은 중국 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독립군 무관학교 생도대장・대대장, 한국의용군 부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1926년부터 중국국민혁명군 동로군 참모로 북벌전쟁에 참가하였고 국공내전 때까지 중국중앙군 장교로 근무했다. 김홍일은 중국국민혁명군에 복무하면서 이봉창・윤봉길 의거 등에 사용될 무기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등 한국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김구의 부탁을 받은 김홍일은 상하이 병공창에서 폭탄을 제조해 넘겨주었다. 중국인 병공창장은 김구에게 무기 성능 시험까지 해보이며 성심껏 도와주었다. 김구는 물병 폭탄과 도시락 폭탄을 받아서 프랑스 조계에 사는 동포 집에 “귀한 약품이니 불만 조심하게”라면서 맡겨두었다.

4월 29일 아침, 윤봉길은 김해산의 집에서 김구와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아침 7시 윤봉길은 자신의 시계와 김구의 시계를 바꾸자고 했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두 사람은 시계를 바꾸었다. 윤봉길은 택시 요금을 주고 남은 돈 5, 6원을 김구에게 주고 거사 현장으로 떠났다.(주20) 

1932년 4월 29일 홍커우공원(현재 ‘루쉰공원’)에는 일본군과 일본교민, 초청인사 등 2만여명이 모였다. 일본군의 상하이 승전 및 천장절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에서 승리한 후 1932년 괴뢰만주국을 세웠고, 1932년 1월에는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 승리해 기고만장한 상태였다. 윤봉길은 그 자리에서 물병폭탄을 정확히 단상을 향해 던졌고, 엄청난 굉음과 함께 단상이 무너져 내렸다.

윤봉길의거로 상하이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테이지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부상을 입은 상처가 악화돼 몇 달 뒤 사망했다. 또한 주중 일본공사 시게미츠 마모루와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쿠라마츠가 중상을 입었고, 제9사단장 육군중장 우에다 켄키치는 왼쪽 다리를 잃었으며, 해군중장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 키치사부로는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 이 가운데 노무라 키치사부로는 후에 주미대사가 되어 진주만 공습 직후 선전포고문을 들고 코델 헐 국무장관 앞에 갔고, 한쪽 다리를 잃은 시게미츠 마모루는 1945년 9월 2일 도쿄 항 앞바다에 정박한 미국 미주리호 함선에서 일본의 전권대사 자격으로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 1945년 9월 2일 일본의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가 미국 미주리 호 선상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시게미쓰 마모루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 때 한쪽 다리를 잃었다.(사진=위키백과 사전) 

윤봉길 의사는 훙커우공원 거사 직후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고, 헌병대에서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1932년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같은 해 11월 18일 배편으로 후송되어 일본 오사카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한 달 후인 12월 18일 가나자와 일본 육군구금소로 이감되었고, 다음날인 12월 19일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 교외의 미쓰코지산 서북 골짜기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윤봉길은 만 24세의 청년으로 생을 마쳤다. 윤봉길 의사의 시신은 가나자와 노다산 공동묘지 가는 길 아래에 봉분도 없이 매장했다.(주21) 해방 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일본에 있던 박열에게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3의사의 유해 발굴을 부탁하였고, 박열 등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946년 3월 6일 유해를 발굴, 6월 30일 효창공원에 안장할 수 있었다.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는 한국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쾌거였다. 일본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던 중국인들의 입장에서도 통쾌한 복수를 해준 셈이었다. 거사 전해에 일어났던 ‘만보산 사건’의 후유증을 말끔히 씻어줄 정도로 중국인들에게도 엄청난 감동을 안겨주었다. 항일전에 소극적이었던 장제스조차도 “중국군 100만명이 하지 못하는 일을 했다”며 김구의 임시정부에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일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윤봉길의거는 잔치상에 재를 뿌린 정도가 아니라 아예 판을 다 뒤집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승승장구하던 일본의 입장에서는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배후인 김구와 임시정부는 일제의 추적을 피해 기나긴 피신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 중국 상하이 루신공원(옛 훙커우공원)에 있는 윤봉길의사기념관(매원)의 윤봉길 활동 소개 모습.


---------------------------

<주>

1)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사 1』,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222쪽

2) 이영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민족유일당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80주년기념논문집(하)』(한국근현대사학회, 1999), 495〜499쪽 참조

3) 김희곤, 위의 책(2008), 251〜252쪽

4) 백범일지에는 “첫째 정부가 아무리 위축되었다고 하더라도 해주 서촌 김존위의 아들인 내가 한 나라의 원수가 되는 것은 국가・민족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리는 것이므로 불가하다. 둘째 이・홍 양씨도 호응하는 인재가 없어 실패하였거늘, 내가 나서면 더욱 호응할 인재가 없을 것이다.”라고 돼 있다.(김구/도진순 해제, 『백범일지』, 돌베개, 1997, 316쪽)

5) 김구/도진순 해제, 위의 책, 316쪽

6) 김희곤, 위의 책(2008), 228〜237쪽 참조

7) 임영태, 「조소앙, 한국 헌법 기초를 닦은 삼균주의 사상가」, <매일노동뉴스>, 2019. 4. 15

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4-한국독립당 2』 해제(정병준)(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ij_034_$1exp) 참조

9) 임영태, 위의 글, <매일노동뉴스>, 2019. 4. 15

10) 김기승,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방략」,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80주년기념논문집(상)』(한국근현대사학회, 1999), 705쪽

11) 조동걸, 「이봉창 의거의 역사성과 현재성」, 『이봉창의사와 한국독립운동』, 단국대출판부, 2002, 69쪽; 김희곤, 위의 책(2008), 287쪽

12) 김희곤, 위의 책(2008), 286〜291쪽 참조

13) 백범선양회 엮음, 『백범일지』, 하나미디어, 1992, 204〜205쪽

14) 백범선양회 엮음, 『백범일지』, 1992, 205쪽

15) 김구/도진순 해제, 『백범일지』, 1997, 323쪽

16) 김구・엄항섭 엮음, 『도왜실기』, 범우사, 1989, 36쪽

17) 1931년 7월 2일 중국 길림성 창춘의 만보산 지역에서 한・중 농민 사이에 수로문제를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는데, 일본이 뒤에서 개입, 조종하여 조선에서 반중 폭동이 발생했다. 조선 내 반중폭동이 격화되어 많은 화교들이 살상되고 방화, 파괴 등으로 인해 엄청난 재산 손괴가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중국인의 조선인에 대한 감정이 크게 악화되었고, 만주와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를 만회하는 것이 이봉창・윤봉길 의거였다.

18) 보통 중일전쟁은 1937년 7월 7일 일본이 중국 본토를 침략하면서 시작되는 전쟁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중일전쟁은 1932년 1월 28일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략한 상하이 사변을 의미한다. 

19) 김구/도진순 해제, 『백범일지』, 1997, 331쪽

20) 김구/도진순 해제, 『백범일지』, 1997, 336쪽

21) 재일민단 “윤봉길 의사 순국 골짜기 확인”, <연합뉴스>, 2010. 12. 19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