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를 하기 앞서 먼저 <자코뱅>에 대한 소개가 필요할 듯하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자코뱅은 프랑스혁명을 급진적으로 이끌었던 그 자코뱅이 아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새로운 급진주의 저널’로 평가받고 있는 <자코뱅>은 2010년 9월 온라인 매거진으로 출범했다고 한다. 소개말 중에는 ‘신자유주의 영향으로 미국 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젊은 세대의 산물’, ‘냉전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낡은 좌파 지식인들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하고자 하며,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사회주의적 관점을 제공하고 있음’ 등이 눈에 들어온다.

현재 계간으로 발행되는 잡지의 구독자가 1만 5천 명, 웹사이트 독자가 월간 70만 명에 이른다니 허투루 볼만한 이들은 아닌 것 같다. 미국의 젊은 진보 진영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새로운 좌파’ 정도로 볼 수 있겠다. 이 책〈자본의 새로운 선지자들〉은 자코뱅과 서구사회의 진보적 사상을 대표하는 출판사 버소(Verso)가 협업을 통해 만들어내고 있는 ‘자코뱅 시리즈’ 중 하나라고 한다.

▲ 니콜 애쇼프 지음 / 황성원 옮김,『자본의 새로운 선지자들』, 펜타그램, 2017. 11.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런 배경을 감안한다면 이 책이 담고자 하는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람마다 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현재 우리의 삶을 지배, 통제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의문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은 없으리라. ‘이미 오래 전부터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느끼지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 딱 꼬집어 말하기는 또 쉽지 않다. 치밀하고 정교하게 짜여있는 자본주의의 그물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그물에 대한 인식조차 쉽지 않은 것이다.

기존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인식할 수 있어야 변화와 개혁의 동력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개혁이 아닌 ‘변화 없는 변화’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거대한 자본과 명성이라는 권력을 소유한 채, 마치 선지자와 같은 위상을 갖는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기존의 부와 불평등을 철저히 옹호한다. 언뜻 아닌 것 같지만, 그들의 주장 속에 집단과 사람은 보이지 않고, 개인과 이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 바 ‘윤리적인’ 거대 자본가, ‘착한’ 기업인, 서민들에게 기적의 희망을 전해주는 ‘영적’ 멘토, 여성의 지위 상승을 위해 유리 천장을 부수라고 호소하는 초일류기업의 ‘여성’ CEO. 저자는 이들을 이 시대 자본주의의 영속을 위해 나서고 있는 새로운 스토리텔러라 말하고, 자본주의의 선지자 행세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선지자는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선지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막스 베버는 “개인적인 부름”을 받음과 동시에 새로운 교리를 전파하는 사명에 착수한 카리스마적인 인물을 선지자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교리란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하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의미한다. 선지자의 권력은 자신의 개인적인 재능, 즉 계시와 카리스마에서 비롯된다. 산업사회 이전의 선지자들은 마법을 이용하거나 기적을 행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과시했는데, 이런 능력이 그들의 카리스마의 원천이었다. 오늘날 선지자들은 마법적인 기교를 수행하지 않는다. 대신 이들의 카리스마는 부를 축적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23쪽.

페이스북의 최고운영책임자 셰릴 샌드버그, 1980년에 최초의 유기농 슈퍼마켓 체인점 ‘홀 푸드 마켓(Whole Food Market)’을 설립한 존 매키, 더 이상 말이 필요치 않은 이 시대 영혼의 멘토(라 불리는) 오프라 윈프리, 그리고 빌 게이츠와 멀린다 게이츠. 이들은 분명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기존의 자본가 이미지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수많은 파괴적인 요소를 비판하고, 여성의 해방을 이야기한다. 누구나 진심으로 노력하고 간절히 바라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하거나, 세계의 빈곤과 미국의 교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막대한 재산을 투입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과 행동의 근원에는 기존 자본주의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가 함께 하고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위한’ 선지자다. 자본주의 이후의 시대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교묘히 숨기고 새로운 자본주의라 명명하는 그 무엇에 대중이 복무하도록 독려한다. 기왕이면 별 생각이나 거부감 없이. 이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착한 자본주의는 과연 가능할까? 선한 자본가는 만날 수 있을까? 개인의 성공은 온전히 개인의 몫일까? 이윤을 넘어선 개인을 위한 자본주의 시스템은 성공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자본주의는 끊임없는 감언이설과 스토리텔링이 없이 굴러갈 수 있을까? 책을 읽다보면 그 가능성은 점점 희미해 보이기만 하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대통령이 탄핵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삼성은 결코 망해선 안 된다고 외치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삼성은 일개 기업이 아닌 신앙이다. 이재용은 스스로 원했던 그렇지 않았던 자본권력의 상징이 되었고, 대통령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상을 누린다. 그의 부친은 타의로 인해 생명을 유지당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온갖 갑질과 부정행위로 비난 받던 대기업 회장은 사망 이후 한국 현대사에 길이 남을 사업가로 추앙받고, 그의 잘못들은 지워진다. 야당 정치인 중 누군가는 그의 사망 원인이 현 정권 탓이라 떠든다. 이쯤 되면 제 정신으로 보기 힘들다. 자본의 노예 그뿐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는 그 어떤 자수성가한 인물을 추앙한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온갖 고생을 겪은 끝에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인물. 그는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이제 그마저도 찾기 쉽지 않자, 재벌 3~4세라도 대단한 사고만 치지 않았다면 존경을 한 몸에 받는다. 아니, 어느 정도 사고를 쳐도 눈 감아 준다. 그는 거대한 자본을 가지고 있는 신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백종원 개인이 아무리 많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참교육을 시켜준다 하더라도, 골목상권은 쉽사리 살아나지 않는다. 기형적으로 높은 자영업자의 비율을 줄일 수 있는 근본적인 해법이 없이는, 매일 망하는 식당은 변함없이 발생할 것이고, 또 다시 많은 퇴직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프랜차이즈의 노예가 될 것이다.

통신 3사의 독과점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은 없다. 거대 재벌의 마구잡이식 상권 확장에 분노하는 이들도 점점 줄어든다. 거대 자본가는 그 자체만으로 성역이 되어간다. 어찌하든 먹고 살아야 한다는 처절함은 비굴함과 무관심을 함께 얻을 가능성도 높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재용은 우리의 친구가 아니다. 백종원은 당신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의 부와 명성이 내 것은 절대 아니다. 긴 분량의 책은 아니지만, 4명의 ‘선지자’들을 통해 지금 이 땅의 선지자들을 생각해본다. 수없이 많은 멘토가 차고 넘치는 데 정작 그들로 인해 세상이 나아지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그들의 수익만 늘어날 뿐. 아마 서점의 자기계발 코너는 계속 북적일 것이고, 어설픈 멘토는 끊임없이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계발서를 만들어내는 출판사만 끝내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인문학 따위, 역사 따위 돈이 될 리 없다.

책의 부제는 ‘21세기 슈퍼엘리트 스토리텔러 신화 비판’이다. 여러모로 21세기는 슬프다. 억지로 희망을 찾는 노력도 점점 힘들기만 하다. 정당한 분노가 증오와 혼동되고, 공정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무의식적인 차별을 합리화한다. 무언가에 대한 글을 써내려가기도 너무 힘든 지금이다. 그래도 다시 힘을 내보려 한다. 스스로에 대한 격려가 필요하다. 힘내자.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