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상하이서 첫 걸음을 시작해 일제의 패망으로 1945년 11월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 27년간 고난에 찬 투쟁을 이어갔다. 그 사이 임시정부는 상하이,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 등 중국 대륙 곳곳을 누비며 1만3천리(5,200㎞)를 이동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초기 활동 지역인 상하이와 첫 피신처였던 항저우의 임시정부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상하이・항저우 유적지 답사기와 함께 임시정부 역사를 10여회에 걸쳐 정리하고자 한다. 이 답사기는 매주 화요일 연재된다. / 필자 주

 

임시정부의 트러블메이커 이승만

상하이임시정부의 위기는 생각보다 일찍 닥쳐왔다. 상하이임시정부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분열에 빠지고 무력화한 데는 초대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의 책임이 가장 컸다. 국제연맹에 위임청원을 한 사실을 안 신채호는 이승만의 (통합임시정부의) 대통령 선출을 극구 반대했으나 자신의 의사와는 달리 기호파의 지지를 받아 선출되자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으로 근거지를 옮겨 반임시정부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또한 3.1운동 후 상하이임시정부 국무총리와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로 동시에 선임된 이승만은 한성임시정부 총재 명의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프레지던트’ 명함을 파서 활동하면서 상하이임시정부측에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제로 바꿀 것을 요구해 트러블을 일으켰다.(주1) 더욱이 이승만은 한성정부 총재 명의로 애국금과 공채를 발행하며 미주지역 교포사회로부터 성금을 거둬들인 다음, 그 통제권을 자신이 갖겠다고 해서 임시정부와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정부가 있는 상하이에는 오지도 않고 미국에 앉아서 안현경, 장붕 등 비선조직원을 통해 정보를 보고받고 ‘원격통제’하려 하였고 그 과정에서 임시정부(국무원)과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켰다. 물론 내각운영에서 국무총리 이동휘의 전횡도 심각한 문제가 되었고, 이를 비판한 안창호 또한 비밀・개인주의 행태를 벗어나지 못했지만,(주2) 이승만의 잘못된 행태는 이들을 훨씬 능가했다.

임시정부가 이처럼 분란을 거듭하면서 이승만에게 상하이로 와서 문제를 수습하라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승만은 임정의 빗발치는 요구에 마지못해 1920년 12월 상하이로 왔다. 당시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노선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최고지도자로서 분란을 수습하기는커녕 갈등만 키웠고 결국 이동휘는 임시정부를 떠나고 말았다. 이승만이 상하이에 온 뒤 임시정부는 더욱 깊은 내홍에 빠졌고 이동휘의 뒤를 이어 김규식 등 많은 사람들이 임정을 떠남으로써 조직은 더욱 약화되었다.(주3)

이런 상황에서도 이승만은 1921년 5월 상하이를 떠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감으로써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이승만이 떠난 뒤 상하이임시정부는 개조파, 창조파, 고수파 사이에 극심한 갈등이 일어났다. 이승만이 임시대통령직을 사퇴하지 않고는 사태를 수습할 방법이 없었지만 이승만은 한사코 사임을 거부하며 버텼다. 결국 고사 직전의 임시정부를 살리기 위한 응급처방으로 이승만의 탄핵이 추진되지 않을 수 없었다. 

1925년 3월 탄핵 이후 이승만은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사실상 단절했고, 충칭임시정부 시절에야 다시 재결하게 된다. 이승만의 탄핵 이후에도 임시정부는 상당기간 무력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동녕, 김구 등을 중심으로 무너지는 임시정부를 지키려는 노력이 계속되었고, 그러한 노력은 마침내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된다.
    
재정을 둘러싼 임정과 이승만의 갈등

임시정부의 분란은 이념과 노선에서 시작되었지만 초기에는 재정 문제도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 임시정부가 혁명러시아 레닌정부로부터 지원받은 자금을 둘러싼 이동휘, 김립 등 고려공산당(상하이파) 측과 임시정부(민족주의)의 갈등은 이미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미주지역 동포들의 지원금을 장악한 이승만과의 갈등 문제를 살펴보자. 

재정문제는 임시정부가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 가운데 하나였다. 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독립운동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조직을 움직이고 청사를 유지하고 외교를 펼치고, 또 독립군을 키워 독립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있어야 했다. 초기 국내에서 많은 인물들이 상해로 모여들고 자금도 도착하면서 임시정부 주변에 사람과 돈이 떠돌았다. 하지만 일제가 임시정부의 생명줄이 되는 국내로부터의 자금원을 찾아내 자르기 시작하자 1920년 이후 결정적인 타격이 가해졌다.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의 자금 통로가 막히면서 임시정부는 미주 동포들의 지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03년 하와이 노동이민에서 시작된 미주지역 동포사회는 임시정부 수립 직후부터 대한인국민회를 통해 애국금을 보내왔다. 그러나 통합임시정부의 대통령에 선임된 이승만은 미국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동포들의 애국금과 인구세, 애국공채 등 자금을 독자적으로 거두어 관리했다. 이승만은 한성정부 총재로 선임됐을 때부터 이미 독자적으로 동포들로부터 자금을 거둬들였는데 통합임시정부가 출범한 뒤에도 구미자금을 자신이 직접 관리하려 해서 임시정부와 갈등을 일으켰다.

이승만에게 미주의 재정권은 미주 동포 사회를 장악하고 자신의 외교활동을 뒷받침할 수 있는 기반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라는 원거리에서도 재정을 통해 임시정부를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임정으로서는 이승만이 미주지역 재정을 장악하게 되면 임시정부 재정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미주의 지원금을 제대로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재정의 중앙일원화를 통해 조직을 통일적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정부 운영 방침에도 어긋났다. 그렇게 되면 임시정부의 운영이 이승만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주4)

미주의 재정 통제권한은 임시정부와 이승만 양측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이해관계가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이 문제는 이승만과 임정 사이에, 직접적으로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사실상 운영하고 있던 이동휘・안창호와 이승만 사이에 심각한 불신의 원인이 되었다. 이승만의 일방적인 공채 발행 및 애국금 수납이 상하이 정계에 심각한 풍파를 불러왔고, 이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상하이임정은 이동녕, 이시영 두 사람의 주장에 따라 1920년 3월 23일 공채를 이승만의 구미위원부에 위탁하기로 결정한다.(주5) 이는 정부를 깨지 않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지만, 이승만이 미주 동포들의 지원금을 장악하면서 임시정부로 보내지던 자금이 거의 끊어졌고 임시정부는 극도로 쇠약해졌다. 임시정부(국무원)과 이승만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고 임시정부 사정은 날로 어려워졌다. 임시정부는 1921년 이후 위상이 크게 떨어지면서 재정수입도 축소되어 사무실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주6)

쪽박만 깨고 미국으로 돌아간 이승만

처음 북적대던 임시정부는 2년이 채 안 돼 자금이 고갈되었고, 인력 면에서도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했다. 임시정부를 유지하거나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력 공급이 필수적이었지만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었고, 급기야는 임시의정원 의원을 채우기도 힘든 상황이 벌어졌다. 임시의정원 의원은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을 출신 도별로 뽑아야 했지만, 충청·전라·경상지역은 정원도 못 채웠고, 전체 법정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주7) 그만큼 임시정부가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임시정부가 초기부터 위기를 겪은 중요한 원인으로는 대통령으로 선임된 이승만의 활동지역 문제가 있었다. 이승만은 재임기간 5년 6개월 가운데 단지 6개월(1920. 12~1921. 5)만 상해에 머물렀을 뿐, 나머지는 ‘원격제어’ 기법으로 임시정부를 운영하고자 했다. 전보문을 주고받고, 정보를 정리해 주는 통신원을 매개로 삼았지만,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정부 요인들과 빈번한 갈등을 일으켰다.(주8) 1920년 12월 5일 마침내 이승만은 상해에 도착해 임시정부의 난국 해결에 나서지만 결과는 분열만 가속화시켰다. 그는 이동휘와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고 국민대표회의를 추진하고 있던 안창호도 포섭하지 못하고 떠나게 만들었다.

임시정부의 내부 갈등은 1921년 1월 14일 이동휘가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연해주로 떠난 데 이어서 4월 29일 학무총장 김규식이 내각을 사임하면서 결정적 상황을 맞았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5월 7일 내각 인사를 단행하였고, 상하이를 떠나기 직전 5월 16일 안창호가 고사하던 국무총리 대리에 법무총장 신규식을 겸직하도록 한 다음, 무책임하게 중국을 떠나 하와이로 가고 말았다.(주9)

지역갈등 또한 중요한 장애요인이 되었다. 사람을 믿기 힘든 망명지에서 같은 지역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가장 많은 인물이 있었던 기호지역과 서북지역 출신 사이에 빚어진 갈등은 임시정부에 매우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주10) 1920년 이후 이동휘・안창호가 임시정부의 정국 주도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이시영・이동녕 등 기호파가 점차 소외되면서 내부 갈등이 깊어졌다.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한인사회당(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결집과 흥사단과 『독립신문』 등을 통한 서북세력의 결집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기호파를 이승만의 비선과 결합시켜 지역적으로 결집하게 만들었고, 이는 상해 임시정부 분열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주11)

▲ 이승만 상해 임시정부 도착 환영식(1920. 12. 28). 태극기 앞에 선 인물은 좌로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사진=독립기념관)


3두체제의 파탄과 임정 개조 요구

이승만이 구미위원부를 통해 공채를 발행하는 등 미주지역의 재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국내로부터의 자금 유입도 끊어지면서 임시정부는 심각한 재정난에 빠졌다. 직원의 월급은커녕 집세도 몇 달 동안 내지 못할 정도로 궁핍해졌다. 임시정부의 각료들도 끼니를 굶는 일이 허다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국내로 들어가서 활동자금을 구해오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임시정부의 재정 곤란을 해소하기는 어려웠다.(주12)

국무총리 이동휘와 6명의 국무원 비서장・차장들은 이러한 임시정부의 어려움의 원인이 이승만에게 있다면서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운동을 시작했다. 이동휘는 1920년 6월 22일 위임통치 청원을 골자로 한 이승만 불신임 이유서와 국무총리 사퇴서를 제출하고 상해를 떠났다. 국무원 비서장 김립, 재무차장 윤현진, 내무차장 이규홍, 교통차장 김철 등도 함께 사직을 시도했으나 안창호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한 이동휘는 1920년 8월 11일 사퇴서를 제출한 지 1개월만에 국무총리직에 복귀했다. 국제공산당(코민테른)에서 상하이로 파견된 보이틴스키(G. Voitinsky)의 권고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소련 정부와의 차관교섭을 위해서는 임시정부 국무총리 명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1920년 가을 만주에서 발생한 경신참변(주13)은 임시정부 내에 치열한 노선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동휘 등 무장투쟁노선을 주장하는 세력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와 함께 독립전쟁을 전개해야 한다면서 임시정부의 전면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그동안 임시정부의 주류 노선이었던 외교론에 대해서도 성토가 이어졌다. 그러나 안창호는 짧은 기간에 독립을 이룰 수 없으므로 장기간에 걸쳐 준비가 필요하다며 이에 맞섰다. 임시정부 내에서 논쟁과 갈등이 깊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1920년 12월 이승만이 태평양을 건너 상하이로 왔다.

이승만은 상하이에 도착한 뒤 1921년 1월 5일 이후 열린 세 차례의 국무회의에서 이동휘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동휘는 3.1운동 직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의 책임을 추궁하면서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내각책임제 성격의 국무위원제로 전환하자고 주장했다. 이승만과 안창호 등 국무위원 다수가 이동휘의 주장에 반대하자, 1월 24일 이동휘는 국무회의를 성토하며 임시정부에서 탈퇴하였다. 이어 참모총장 겸 총사령관 유동열(4월 15일), 교통총장 남형우(4월 25일), 학무총장 김규식(4월 29일)이 연속적으로 사임했다.

이승만은 상하이에 도착한 뒤, 임시정부의 기능을 회복하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갈등만 키우고 말았다. 이승만·이동휘·안창호 삼각 체제로 유지되던 임시정부 내에서 타협을 향한 노력들이 있었지만 끝내 실패했다. 이동휘가 이승만과 격렬한 논쟁 끝에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난 뒤부터 임시정부를 향한 비판과 개조의 목소리가 크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1921년 2월에는 박은식이 주도하는 비판 선언이 있었고, 4월에는 북경의 군사통일주비회가, 5월 6일에는 만주 서간도의 김동삼 등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며 임시정부의 개조를 주장하고 나섰다.(주14)

▲ 초기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이끈 주역 안창호. 그도 결국 임시정부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조가 필요하다는데 동의하고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사진제공-임영태]

상황이 바뀌면서 초기 임시정부를 만들고 실제로 이끈 주역이었던 안창호 또한 임시정부 개조에 동의하고 나섰다. 안창호는 개인자격으로 활동하기 위해 1921년 5월 11일 노동국총판직을 사임한 다음 여운형 등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상하이 모임을 조직했다. 안창호를 비롯하여 김규식·원세훈·여운형·윤현진·이탁 등 상하이에서 활동하고 있던 국민회의 추진세력은 박건병·최목을 대표로 한 베이징 인사들과 만나 임시정부 개조 문제를 논의하였다.  

국민대표회의와 민족통일전선 운동

1922년 4월 3일, 임시의정원 2회의에 천세헌 등 102명이 연서한 「인민청원서」가 제출되었다. 4월 14일 장붕, 윤기섭 등 이승만 지지세력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청원안이 의정원을 통과했다. 안창호를 따르는 국민대표회의 지지자들이 더 많았던 것이다. 그 사이 국무원은 노백린 국무총리 체제 아래서 재무총장 이시영을 유임한 상태에서 김구, 조소앙, 유동열, 홍진, 조성환, 이탁, 김동삼 등을 새로이 각료로 임명하였다.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에게 대통령의 책임이행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국민대표회의 소집 반대만을 반복할 뿐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이에 임시의정원은 6월 17일 임시대통령과 국무원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해 통과시켰다. 16명 정원에 4명 퇴장, 12명 찬성이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한성임시정부 정통성을 주장하며 임시의정원의 요구를 무시하였다.(주15)

이런 가운데 1923년 마침내 국민대표회의가 상하이에서 개최되었다. 나라 안팎 여러 곳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세력의 대표들이 상하에 모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처음부터 순조롭게 풀리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회의 의제를 두고 대립한 것이다. ‘임시정부를 개조할 것인가’(개조파), 아니면 ‘이를 없애고 새로운 정부를 만들 것인가’(창조파). 개조파와 창조파의 목적은 근본적으로 달랐다.(아래 표 참조)

개조파・창조파의 참가세력 운동노선

 

주요 참가 세력

주요 인물

주의

주요 입장

임정에 대한 태도

지향

운동노선

개조파

상해

개조파

임정내 개조파

안창호 등 서북파

민족주의

임정 인정

정부개조, 대독립당 건설

실력양성론

상해파

고려공산당

윤자영, 김철 수 등

공산주의

임정 인정

정부개조, 민족혁명당건설

무장독립론

서간도 개조파

서로군정서, 한족회

김동삼, 이진산 등

민족주의

임정 인정

정부개조

무장독립론

창조파

북경

창조파

북경군사통일회의

박용만, 신숙, 신채호

진보적 민족주의

임정불신임

신조직건설(위원제정부)

무장투쟁론

상해・노령 창조파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김만겸 등

공산주의

임정불신임

민족혁명당건설

무장투쟁론

대한국민의회파

문창범 등

공산주의

임정불신임

신조직건설(위원제정부)

무장투쟁론

출처: 윤대원,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 『한국사』 48(국사편찬위원회), 144쪽

개조파를 대표하는 안창호의 목적은 각 정파와 단체를 통일하는데 있었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물들은 대개 개조파로서 임시정부 개편과 독립운동 세력 강화라는 목표를 내걸었다. 하지만 윤해와 원세훈 등 연해주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던 창조파는 이승만 배척, 임시정부 해체, 새로운 정부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1923년 3월 9일 신이진 등 19명이 임시정부의 ‘개조안’을 제출했다. 이후 한동한 찬반양론이 치열하게 이어졌으나 양측은 끝내 견해차를 좁히지 못했다. 5월 15일 개조파가 회의장을 떠났고, 국민대표회의도 막을 내렸다.

그러자 창조파는 그들만으로 새 정부를 구성했다. 6월 3일 국호를 ‘한(韓)’, 연호로 ‘단기(檀紀)’를 채택했다. 6월 7일에는 국민위원회를 구성하여 전문 18조로 된 위원제 헌법초안을 기초하였고, 이어 국민위원 33명, 국무위원 4명, 고문 31명으로 정부를 조직했다. 창조파가 신정부를 수립하자 각지에서 경고성명이 빗발쳤다. 고문으로 추대된 박은식조차 이를 비난했고, 길림과 서간도・북간도의 단체들은 신정부 수립은 절대 불가하다고 주장했다.(주16)

▲ 국민대표회의 개최와 규정을 알리는 『독립신문』 기사(1923. 24). (독립기념관)

창조파는 새 정부를 블라디보스토크에 두기로 했다. 그러나 1924년 2월 15일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은 앞서 약속했던 재정지원을 보류한다고 발표했다. 신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러시아령 밖으로 떠날 것을 명령했다.(주17) 근거를 잃어버린 창조파는 베이징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고 창조파 정부가 와해되면서 무장투쟁론자들은 큰 좌절을 맞보았다. 임시정부 또한 격랑의 연속이었다.

개조파와 창조파가 서로 다른 목적을 갖고 시도한 국민대표회의는 결국 실패했다. 신숙・문창범・윤해 등의 창조파 인사들은 무장투쟁 노선을 실현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던 반면, 여운형・안창호・김동삼 등의 개조파 인사들은 ‘정부’라는 명분을 중시했다. 두 세력은 끝내 타협점을 찾지 못한 채 뿔뿔이 헤어졌고, 임시정부 또한 더욱 약화되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이동녕, 이시영, 김구, 조완구, 엄항섭, 차이석 등의 임시정부 옹호파・고수파는 산하 조직도 없이 고군분투하면서 임시정부를 지켰다. 국민대표회의 실패 이후 임시정부는 하나의 독립단체 수준으로 전락했으나 “고수파들은 프랑스 조계 마당로에 청사를 마련하여 간판을 내걸고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유지하려 무진 노력을 기울였다.”(주18)

국민대표회의는 결과적으로 임시정부를 분란의 회오리 속으로 몰아넣어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지만 독립운동 전략의 측면에서는 발전적인 면도 있었다. 국민대표회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독립운동 진영은 임시정부 운영과 독립운동 전략을 둘러싸고 백가쟁명식의 논쟁을 펼쳤고, 독립운동이 좌우로 분화되는 초기에 민족통일전선을 위한 고민을 할 수 있었다. 또한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뒤,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등 초기 임시정부를 삼분하던 정치적 거두들이 퇴진하면서 무주공산이 된 임시정부를 김구 등 이론보다는 투쟁으로 지켜낼 인물들이 등장할 공간이 마련되었다. 위기가 기회를 만든다고 했다. 임시정부의 유지, 고수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는 새로운 지도력의 등장이었다.

이승만 임시대통령의 탄핵

▲ 상하이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시절의 김규식과 이승만. [사진제공-임영태]

1923년 하반기 상하이 독립운동 진영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상해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갔고, 큰 기대를 가졌던 워싱턴회의(주19)마저 별 다른 소득을 올리지 못하면서 대책 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한편, 극동민족대회(주20)에 참가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임시정부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기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했으나 개조파와 창조파로 분열되면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상하이 독립운동 진영은 황량해졌고 임시정부 또한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임시정부가 고비를 넘기기 위해서는 임시정부 체제 개편과 임시대통령 이승만 해임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체제 개편은 임시정부에서 자체적으로 논의할 수 있었지만, 이승만 물러나게 하는 일은 당사자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1923년 2월부터 이승만에 대한 탄핵 논의가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임기 규정이 없으니 탄핵이 마지막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4월 2일 조덕진 등 9명의 의원이 ‘대국쇄신안’을 상정, 통과시켰다. 그들이 제시한 해결 방안은 ‘법제 개정과 국민대표회의 요구 수용, 그리고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이었다.(주21)

그러나 임시대통령 탄핵안은 법적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이승만에 대한 탄핵 논의는 잠시 주춤했으나 1924년 중반 다시 불이 붙었다. 노백린이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1924년 4월 23일 이동녕이 국무총리를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거론되었다. 임시의정원은 마침내 8월 21일 ‘임시대통령의 유고(有故)’를 결정하였다.(주22) 12월 11일 박은식이 임시대통령대리로 선임되면서 임시헌법 개정과 이승만 탄핵 문제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925년 3월 13일 곽헌・최석순 등 10명의 의원이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상정했고, 3월 21일 탄핵 심판서가 보고되었다.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면직함”이라는 짧은 주문과 함께 그 이유가 덧붙여졌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주23)

첫째, 이승만은 7년 동안 취임 선서도, 행정도 맡지 않았으며, 각료들과 다툼을 벌였다.
둘째, 구미위원부를 세워 국무원과 다투고, 마음대로 법령을 발표하여 혼란을 일으켰고,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정부에 맞섰다.
셋째, 임시의정원을 무시하고, 대통령 자리를 황제로 인식하면서 이를 평생 직업으로 여겨 민주주의를 말살했다.
넷째, 미주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정부에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다섯째, 독립운동 단체 지도자들과 다툼을 벌여 정부를 고립시켰다.

3월 21일 심판서가 제출되었고, 23일 임시의정원이 이를 통과시켰다. 이승만 탄핵안이 통과된 그 자리에서 후임 대통령을 선출했다. 12월말부터 임시대통령직을 맡아 개헌의 중심축에 서 있던 박은식이 제2대 임시대통령으로 뽑혔다. 다음 날 3월 24일 박은식은 제2대 임시대통령에 취임했고, 바로 내각을 구성했다.

임시정부의 체제 개편

1925년 3월 10일 임시정부는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내렸다. 이승만이 구미위원부를 중심으로 맡았던 외교 사무는 외교위원을 파견하여 처리하도록 하고, 재정에 대한 업무는 대한인국민회와 하와이교민단에게 넘기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 명령을 듣지도 않고 구미위원부를 1928년까지 끌고 가면서 동포들에게서 거두어들인 애국금과 각종 성금을 틀어쥐었다.(주24) 이 때문에 미주 지역 동포사회는 충돌과 반목을 거듭했다.(주25)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에 대한 탄핵을 추진하면서 임시헌법 개정 작업도 동시에 진행했다. 1925년 3월 30일 새 개헌안이 임시의정원을 통과해 4월 7일 공포되었다. 1919년 9월 1차 개정된 헌법은 명분과 형식에 무게를 두었고,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를 절충한 것이 특징적이었으나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임기규정이 없어 문제가 되었다. 제2차 개헌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보완하고 독립운동의 현실을 반영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통령제를 내각책임제인 국무령제로 바꾼 것이었다. 당연히 국무령의 임기도 정했다.

개정헌법이 발효된 1925년 7월 7일 박은식 임시대통령은 ‘국인(國印)’을 임시의정원 의장에게 전하고 고별인사를 했다. 박은식 임시대통령은 국가의 도장을 상징물로 삼아 의회에 반납함으로써 3개월 보름가량의 임기를 마무리 지었다. 개정헌법에 따른 초대 국무령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펴고 있던 이상룡이 당선되었다. 이상룡이 초대 국무령으로 선출된 데에는 안창호의 역할이 작용했다. 안창호는 이 시기에 상해를 떠나 미국에 있었지만 측근들을 통해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주26)

▲ 임시정부 2대 국무령 홍진. [사진제공-임영태]

이상룡은 1925년 9월 17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9월 22일 청년동맹회의 환영회에 참석하고, 다음 날 삼일당에서 국무령으로 취임하였다. 10월 10일 이상룡은 이탁, 김동삼, 오동진, 이유필, 윤세용, 현천묵, 윤병용, 김좌진 등을, 이틀 뒤에는 조성환을 추가로 국무위원으로 임명했다. 만주의 3부(참의부・정의부・신민부) 요인을 골고루 포함시켰고, 출신 지역도 안배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상해로 부임하지 않았다. 만주의 상황이 이들의 국무위원 취임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1925년 겨울 상하이임시정부 주변에서 다시 갈등이 일어나자 이상룡은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겼고, 다음해(1926년) 2월 18일 국무령에서 면직된 뒤 만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주27)

임시정부는 다시 최고 지도자가 없는 공백 상태를 맞았다. 임시정부는 이상룡을 면직하던 그날 양기탁을 국무령으로 선출했으나, 1926년 4월 29일 그는 취임하지 않겠다는 뜻을 정식으로 보내왔다. 5월 3일에는 안창호를 국무령으로 선출했지만 일부 반대자가 있다는 이유로 안창호도 취임하지 않았다. 국무령 공백 사태가 지속되면서 임시정부는 혼미한 상황에 빠졌다. 임시정부로서는 이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이 임시로 국무령을 대리하면서 가까스로 공백을 메워나갔다. 1926년 7월 8일 홍진이 국무령으로 취임하면서 겨우 수습 국면을 맞았다.(주28)

▲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관람실에 걸려 있는 초기 임시정부 요인들 사진. 오른쪽에서 김구 다음 두 번째가 홍진 2대 국무령. [사진제공-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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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한철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 기념논문집(상)』, 국가보훈처, 1999, 130〜134쪽

2) 윤대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운영과 독립방략의 분화(1919-1930)』, 서울대 박사논문, 1992, 102〜104쪽

3)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사 1-상해시기』, 156〜157쪽

4) 윤대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운영과 독립방략의 분화(1919-1930)』, 서울대 박사논문, 1992, 72쪽

5) 윤대원, 위의 글, 72쪽

6)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사 1』, 155〜156쪽; 윤대원, 위의 글, 72〜74쪽

7) 김희곤, 위의 책, 156쪽

8) 한시준,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이승만연구』, 연세대출판부, 2000,

9) 김희곤, 위의 책, 156〜157쪽

10) 김희곤, 위의 책, 158쪽

11) 윤대원, 위의 글, 110쪽

12) 처음 시아버지와 남편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상하이로 망명했던 정정화는 모두 6차례에 걸쳐 국경을 넘나들었다. 그의 활동 내용은 『장강일기』(정정화, 학민사, 1998)를 참조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을 정정화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활동으로 임시정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웠다. 

13)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와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한국 독립군에 크게 패한 일본군은 독립군의 활동 무대를 파괴하기 위한 북간도와 서간도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였다. 1920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경신참변으로 불리는(간도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해서 ‘간도참변’이라고도 함) 이 사건으로 조선인들이 최소 5천 명에서 최대 수만 명이 학살되었고 거의 모든 조선인들의 가옥이 파괴되거나 불타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14) 이명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 기념논문집(하)』, 국가보훈처, 1999, 465〜467쪽

15) 이명화, 위의 글, 469〜471쪽 참조

16) 김희곤, 위의 책, 184〜190쪽 참조

17) 이명화, 위의 글, 480쪽

18) 이이화, “[한국사바로보기] 21. 임시정부의 법통성과 오늘의 유산”, 경향신문, 2004. 10. 13

19)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변화된 국제관계를 반영하여 미국의 주도로 워싱턴에서 개최된 회의로, ‘군비축소’ 및 아시아・태평양에서 열강들 사이의 질서 재편성을 목적으로 진행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 회의에 이승만 등으로 대표단을 구성하여 한국 문제가 의제로 선정되도록 활동하였으나 미국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의제에 올리지도 않았다. 

20)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가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국제공산당) 국제대회. 1920년 제2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채택한 ‘민족,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에 입각해 극동의 피압박민족 문제를 다룬 회의로, 한국, 중국, 일본, 몽골, 인도네시아 등에서 대표들이 참가했다. 본래 명칭은 극동피압박인민대회였으나 일본은 피압박국이 아니라는 문제 제기로 인해 ‘인민대표대회’로 변경. 한국대표단은 23개 단체 52명으로, 전체대표 144명의 1/3을 넘었다. 이동휘, 박진순, 여운형, 장건상, 임원근, 박헌영, 김단야, 김규식, 나용균, 김시현, 김원경, 권애라 등이 주요 참석인물. 이 대회의 결의에 따라 여운형 등은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기 위해 1923년 1월 23일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진로를 논의했으나 창조파, 개조파의 대립으로 결렬되었다.

21) 김희곤, 위의 책, 201〜209쪽 참조

22) 이명화, 위의 글, 481쪽

23) 김희곤, 위의 책, 208〜209쪽

24) 이명화, 위의 글, 482쪽

25) 김희곤, 위의 책, 210쪽

26) 김희곤, 위의 책, 217쪽

27) 김희곤, 위의 책, 218쪽

28) 임시정무 국무령 홍진의 활동에 대해서는 한시준, 『의회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홍진』, 탐구당, 2006, 119〜138쪽을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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