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상하이서 첫 걸음을 시작해 일제의 패망으로 1945년 11월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 27년간 고난에 찬 투쟁을 이어갔다. 그 사이 임시정부는 상하이,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 등 중국 대륙 곳곳을 누비며 1만3천리(5,200㎞)를 이동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초기 활동 지역인 상하이와 첫 피신처였던 항저우의 임시정부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상하이・항저우 유적지 답사기와 함께 임시정부 역사를 10여회에 걸쳐 정리하고자 한다. 이 답사기는 매주 화요일 연재된다. / 필자 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상하이서 첫 걸음을 시작해 일제의 패망으로 1945년 11월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 27년간 고난에 찬 투쟁을 이어갔다. 그 사이 임시정부는 상하이,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 등 중국 대륙 곳곳을 누비며 1만3천리(5,200㎞)를 이동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초기 활동 지역인 상하이와 첫 피신처였던 항저우의 임시정부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상하이・항저우 유적지 답사기와 함께 임시정부 역사를 10여회에 걸쳐 정리하고자 한다.

임시정부의 조직적 한계와 혼선

1919년 9월 시작된 통합임시정부는 국내외 민족운동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전개하였고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출범 초기부터 삐걱대던 임시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심각한 난제들에 부닥치며 미로에서 헤어나지 못하였다.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한 임시정부 조직을 통합하고 나라 안팎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조직과 인물들의 활동역량을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임시정부는 통치대상인 국민(또는 공민)을 실제로 확보하지 못한 정부로써 물질적, 재정적 기반이 취약했고, 게다가 좌우합작 정부였기에 내부 통합력 또한 약했다.

조직적으로도 약점이 많았다. 특히 임시정부의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임기가 정해지지 않아서 큰 혼선을 불러왔다. 독립은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올 수 있는 일이었고, 그 과정에서 최고지도자를 교체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최고지도자인 임시대통령의 임기를 규정하지 않다 보니 지도자가 물러나야 할 상황인데도 스스로 사퇴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주1) 1920년 이후 이승만이 지도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거듭 불신임 결의와 탄핵이 추진되었지만 이승만이 버티면서 임시정부는 끝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주2) 1925년 탄핵에 의해 이승만이 강제로 물러날 때까지 임시정부는 심각한 지도력 공백 상태와 혼선을 겪어야 했다.

대통령제였지만 내각책임제 요소를 갖고 있었는데 이 또한 약점으로 작용했다. 애초 상하이 임시정부는 내각책임제로 구상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독단과 아집 때문에 결국 대통령제가 되었고 내각책임제 요소를 남겨두었다. 그러나 대통령제와 내각책임제를 절충한 형태가 임시정부 운영에서 장점보다는 혼란을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주권과 관련된 모든 권한은 대통령에게 있었지만 행정권은 국무원이 갖고 있어서 양측이 충돌하는 일이 수시로 발생했다. 더구나 이승만이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가 아니라 미국에서 원격제어를 통해 통제하려다 보니 심각한 결과를 빚고 말았다. 임시정부가 수립되자마자 곧바로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 움직임이 일어나고 헌법 개정 요구가 거듭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주3)

▲ 이승만 상해 임시정부 도착 환영식(1920. 12. 28). 태극기 앞에 선 인물은 좌로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사진=독립기념관]

좌우연합 정부의 성립과 와해

▲ 통합임시정부 국무총리였던 이동휘 사망기사, <동아일보> 1935. 2. 15

임시정부의 이념적 갈등도 혼선을 빚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진영 전체의 힘을 모으기 위해 좌우합작정부를 구성했지만 처음부터 삐걱댔다. 러시아에서 상하이로 오게 된 국무총리 이동휘와 교통총장 문창범은 통합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임시정부 참여를 망설였다. 통합정부는 원래 상하이 임시의정원과 대한국민의회를 동시에 해산하고 새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기로 했으나 임시의정원을 그대로 둔 채 정부만 대통령제로 개정했던 것이다. 문창범은 통합합의 원칙 위반을 이유로 끝내 교통총장 취임을 거부하고 러시아령 연해주로 돌아가 해산했던 대한국민의회를 다시 구성했다.

반면, 이동휘는 통합원칙을 어겼지만 이것이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보고 독립운동의 대의를 위해 통합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취임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동휘는 국무총리에 취임하기 전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조직한 한인사회당(후에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을 기반으로 활동하면서 위임통치설을 주장했던 이승만을 강력 비판하였다. 이동휘는 안창호의 중재로 1919년 11월 3일 국무총리에 취임했지만, 1920년 레닌정부에서 지원한 자금의 사용처를 두고 임시정부와 심각한 마찰을 빚었다. 또한 이동휘는 임시정부의 활동 노선과 개혁 문제를 두고 이승만・안창호 등과 대립하다가 1921년 1월 임시정부를 떠나고 말았다. 이동휘가 임시정부를 탈퇴함으로써 초기 좌우연합으로 출발한 임시정부는 우파만의 조직으로 남게 되었다.(주5)

특히 임시정부 내에서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사이에 갈등이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계기가 된 사건은 러시아정부로부터 받은 독립운동 지원 자금의 사용 문제였다. 이 일로 인해 임시정부 내의 민족주의세력이 이동휘의 최측근으로 국무총리 비서장이었던 김립을 암살하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왜 이런 극단적인 일이 일어난 것일까?

임시정부, 레닌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다

러시아혁명 후 들어선 레닌정부(소련)는 임시정부 초기 중요한 외교대상국이었다. 레닌정부가 식민지 국가들의 해방운동을 지원한다는 입장을 표명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자금지원 등 적극적인 지원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1917년 11월 15일 러시아혁명정부는 「러시아 제 민족의 권리 선언」을 발표했는데, 러시아 제 민족의 자결권과 분리 및 독립정부 형성의 권리를 인정하고, 러시아 내의 여러 민족들 사이의 평등과 주권을 보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러시아가 지배하고 있던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등이 제1차 세계대전 후 독립을 이루게 된다. 레닌정부의 민족자결주의 천명은 미국에게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고, 미국 대통령 윌슨은 국제사회에서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1918년 1월 서둘러 민족자결의 원칙을 천명하게 된다.(주6)

이러한 국제 정치 상황은 3.1운동을 일으키는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까지 이어졌다. 1920년 7월말부터 8월초에 걸쳐 개최된 코민테른 2차 대회에서는 레닌이 기초한 ‘민족・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를 통해 식민지 “혁명적인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하였다.(주7)

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 최초로 한인공산당을 조직했던 이동휘가 통합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맡게 되었고, 임시정부가 레닌정부에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취임하고 얼마 되지 않은 1920년 1월 22일 임시정부는 한형권·여운형·안공근 세 사람을 러시아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안공근은 당시 시베리아에 있었기 때문에 연락이 불가능했고, 고비사막을 횡단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여운형은 유럽을 거쳐 모스크바로 가는 통로가 해제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1920년 4월 말 한형권은 여러 통의 신임장과 공문서(주8)를 휴대하고 홀로 모스크바로 향했다.(주9) 

▲ 1920년 7월 코민테른 2차 대회 참석차 모스크바를 방문해 크레믈린 궁에서 레닌(가운데)과 회담하는 한인사회당 대표 박진순(레닌의 오른쪽) [사진제공-임영태]

한형권 혼자서 모스크바로 가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한형권이 홀로 가게 된 것은 한인사회당 영수이면서 임시정부국무총리였던 이동휘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 이동휘가 한형권의 모스크바 행을 임시정부 주변 사람들에 알린 것은 한형권이 모스크바를 향해 떠나고 나서 한달이 지난 다음이라고 한다.(주10) 소련에 도착한 한형권은 소련정부로부터 국빈 예우를 받았고, 레오 카라한을 비롯한 소련 고위관리들의 영접을 받았다. 그는 이미 고려공산당 대표로 모스크바에 파견돼 있던 박진순과 함께 외교인민위원 게오르기 치체린을 만나 여러 차례 회합했고, 마침내 레닌도 만났다.

레닌을 만난 한형권은 네 가지를 제안했다. 첫째, 노농러시아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둘째, 한국 독립군의 장비를 적위군과 마찬가지로 충실하게 해줄 것. 셋째, 독립군 양성을 위한 지휘사관학교를 시베리아 지정장소에 설치해 줄 것. 넷째, 상하이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크게 원조해 줄 것.

레닌, 한국 독립운동 지원을 약속하다

레닌은 한형권을 호의적으로 맞았다. 레닌은 ‘제국주의 군국주의 일본을 타도함이 없이는 아시아 제 민족에 자유와 행복이 없다. 조선에는 무산계급적 사회혁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민족해방운동, 즉 독립운동이 필요하다. 한국의 독립운동에 전적으로 찬성하며 원조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레닌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200만 루블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200만 루블은 오늘날 화폐가치로 2,500억원이 넘는 엄청난 금액으로 추정된다.(주11) 그런데다가 당시 루블화는 국제통화로 통용되지 않았고, 한꺼번에 그 많은 돈을 가져갈 수도 없었다. 먼저 40만 루블을 금화로 받았다. 첫 자금은 20부대씩 일곱 상자로 나누어 금화로 받았다. 한형권은 한 상자의 무게가 다섯 사람의 체중에 달했다고 회상한 바 있다. 카라한은 이걸 먼저 상하이로 운반하고 나머지는 다음에 가져가라고 말했다.(주12)

한형권은 옴스크에 도착해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으로 있던 김립을 만나 40만 루블의 금화를 전달하고, 다시 나머지 160만 루블을 가져오기 위해 러시아로 되돌아갔다. 이 무렵 임시정부는 노선과 향후 진로 문제를 두고 갈등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창조파・개조파・고수파로 분열되었다. 사회주의 세력 내부도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로 갈려 주도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상하이 독립운동가 주변에는 일본의 첩자들이 침투해 활동했고,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극단적인 비방이 난무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의 지원 자금이 들어오자 이를 둘러싸고 갈등이 더욱 격해진다. 

소련 외무인민위원 치체린은 상하이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고 나머지 돈을 받으러 간 한형권에게 ‘아직 당신들의 돈 받을 그릇(임시정부)이 확실치 못한 것 같으니 160만 루블은 다 줄 수 없고 우선 20만 루블을 더 주겠다’고 했다. 치체린은 “(자신은) 전액을 다 주려고 하였으나 코민테른의 간섭으로 그리할 수 없으니 양해하라”고 말했다. 한형권은 20만 루블만 받아 베를린에서 달러로 바꾼 다음 고창일과 함께 유럽을 경유해 상하이로 돌아왔다.(주13)

레닌정부의 자금 갈등이 암살 사건으로 비화되다

▲ 상하이 임시정부 경무국장 시절의 김구. 레닌정부의 자금지원을 둘러싼 갈등으로 일어난 김립 암살 사건의 배후로 알려지고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임시정부 주변이 분열되어 있고, 공산주의 세력 내부의 분열이 심각한 상황에서 레닌정부의 자금이 들어오자 갈등은 배가되었다. 이동휘가 모스크바에서 가져온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한인사회당(후에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의 활동 자금으로 사용하면서 갈등은 폭력 사태로 발전했다. 임시정부의 민족주의자들은 이동휘를 강력하게 성토하였고, 나아가 그의 비서장이었던 김립을 암살하기에 이르렀다.

김립을 암살한 것은 오면직・노종균 등 김구의 수하였다. 오면직과 노종균은 황해도 안악 출신의 동갑내기 동지였다. 그들은 국내에서 3.1운동과 조선일보・동아일보 안악지국에서 활동했고 1921년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 건이 발각돼 상하이로 망명했다. 두 사람은 1922년 2월 6일 김구의 지시에 따라 모스크바에서 받은 자금을 도용했다는 이유로 김립을 살해했고, 그후 김구의 측근으로 한국노병회・한인애국단・한국독립군 특무대 등에서 활동했으며, 1935년 맹호단을 조직해 군자금 모집, 밀정 처단 등의 활동을 하였다. 오면직은 1936년 일본 영사관 습격 계획사건으로 체포되어 1938년 평양형무소에서 사형되었고, 노종균은 1938년 체포돼 이듬해 해주 옥중에서 사망했다.(주14)

경무국장 김구가 김립의 살해를 지시한 것은 소련정부로부터 받은 돈을 빼돌려 착복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김구는 이와 관련하여 백범일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이(동휘)씨가 밀파한 한형권은 단신으로 시베리아에 도착하여 ...(중략) 입에서 나오는 대로 200만 루블을 요구하였다. ... 레닌은 ... 즉시 러시아 외교부에 명령하여 200만 루블을 지급하게 하였으나, 외교부는 금괴 운반 문제 때문에 시험적으로 제1차 40만 루블만을 한형권에게 주었다. 한이 시베리아에 도착할 시기를 맞추어 이동휘는 비서장인 김립을 밀파해, 한형권을 종용하여 금괴를 임시정부에 바치지 않고 중간에서 빼돌렸다. 김립은 이 금괴로 북간도 자기 식구들을 위하여 토지를 매입하였고, 이른바 공산주의자라는 한인・중국인・인도인에게 얼마씩 지급하였다. 그러고서 자기는 상해에 비밀리에 잠복하여 광동여자를 첩으로 삼아 향락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임시정부에서 이동휘에게 죄를 물으니, 이씨는 총리직을 사직하고 러시아로 도주하였다. 또한 한형권은 러시아 수도에 가서 통일운동을 하겠다는 이유를 설명하고, 다시 20만 루블을 가지고 상해에 잠입하여 공산당들에게 금력을 풀어 이른바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였다. ...(중략) 정부의 공금횡령범 김립은 오면직・노종균 등 청년들에게 총살을 당하니 인심이 잘했다고 칭찬하며 통쾌해 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한형권을 러시아 대표직에서 파면하고 안공근을 러시아 주재 대표로 파송하였다. 그러나 별 효과 없이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는 끝내 단절되었다.”(주15)

임시정부는 1922년 1월 26일자로 신규식(국무총리 겸 외무총장 겸 법무총장), 이동녕(내무총장), 노백린(군무총장), 김인전(학무총장대리 차장), 이시영(재무총장 겸 노동총판), 손정도(교통총장) 등 각부 총장들 명의로 이동휘와 김립을 성토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 포고문에서 임시정부는 “한형권을 이웃나라에 몰래 파견하여 이웃나라의 후의에 의하여 거금을 정부에 증여케 하고 김립으로 하여금 이를 중도횡령케 하고 도리어 죄를 전 각원에게 돌리여 정부를 파괴하려고 꾀한 그 죄 천인(天人)이 함께 할 수 없다”고 하였다.(주16) 그리고 나아가 “김립은 이동휘와 서로 결탁하여 마침내 국가 공금을 횡령하여 개인주머니를 살찌우고 같은 무리를 불러 모아 공산이란 미명하에 숨어서 간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그 죄가 극형에 처할 만하다’고 성토하였다.(주17)

자금유용 소문에 대한 오해와 진실

그렇다면 김구의 주장은 사실일까? 많은 부분 사실이 아니다. 사실의 착오와 왜곡도 있다. 이는 김구를 비롯한 임정고수파의 반대파에 대한 의도적인 폄하가 반영된 결과이다. 또한 김구의 이념성향과도 무관하지 않다. 김구는 해방 후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위해 북행길에 오르기 전까지는 공산주의자 또는 좌파와 타협한 적이 거의 없었다. 충칭 임시정부 시절 일부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 민족좌파와 연합한 좌우합작정부를 운영하지만, 대부분의 독립운동 기간동안 우익 민족주의 이념에 충실하게 행동했다. 이동휘・김립에 대한 언술도 이러한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도 김립이 거액의 자금을 착복했고, 그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개인적인 호화생활을 위해 썼다는 김구의 주장은 착오로 보인다. 레닌정부 자금의 재정을 담당했던 김철수에 의하면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한형권과 박진순이 모스크바에서 레닌정부의 자금을 치타까지 운반했고, 이후에는 김립과 이태준・조응순 등이 자금을 함께 상하이로 운반했기 때문에 김립이 자금을 도중에 빼돌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주18) 

그런데 비극은 임시정부 회계보고 요구에 김립이 허위보고를 했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김립은 ‘1920년 5월 고려공산당을 조직하고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계봉우와 함께 모스크바로 출발하였는데, 치타에 이르러 그곳 극동공화국 대통령인 크라스노 시체코프와 회담을 하게 되어 모스크바까지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크라스노 시체코프로부터 1만원을 교부받아 도중에 여비로 3천원을 소비하고 잔금 7천원을 소지했는데 이 돈은 임시정부에 교부할 필요가 없어서 고려공산당에서 사용하였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김립이 가져온 돈은 이보다 훨씬 많았고, 그 돈은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활동자금으로 쓰였던 것이다. 이런  허위보고를 접한 상하이 임시정부는 이동휘와 김립이 정부자금을 횡령했다는 내용의 포고를 발표했고, 1922년 2월 8일 오후 1시 상해에서 김립 암살 사건으로 이어졌다.(주19)

비밀해제된 러시아 문서에 의하면 레닌정부가 제공한 자금은 국제공산당에 가입한 ‘한국공산당’(‘고려공산당 상하이파’)에 제공된 것이었다고 한다. 레닌정부가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은 이동휘 등 사회주의자들이 임시정부에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레닌정부는 그들을 보고 자금지원을 결정한 것이었고, 박진순과 한형권, 김립 등은 임시정부가 아니라 공산당이 자금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았다.(주20)

그러나 달리 말하면, 레닌정부가 지원한 자금은 한국독립운동을 위해 쓰여지는 것이었고, 그 활용책임은 한인사회당이 참여하고 있었던 임시정부라고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금이 도착할 때는 김립은 임시정부를 떠난 뒤였고, 이동휘 또한 결별 직전의 상태에 있었다. 1920년 말경 자금이 도착한 후 이동휘와 김립은 이 돈을 임시정부 개혁 작업에 썼으나 임시정부의 개혁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1921년 1월 24일 이동휘는 임시정부 국무총리직을 사퇴했고, 그 이후 고려공산당(상하이파) 조직 작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레닌정부에서 제공한 자금은 임시정부 개혁과 공산당(고려공산당 상하이파) 조직 활동에 투입되었다.(주21)

파벌 싸움이 불러온 비극

레닌정부에서 받은 1차 자금 40만 루블은 김립, 조응순, 이태준 등이 상하이로 가져와 이동휘를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자금으로 사용되었다.(주22) 그리고 한형권이 후에 가져온 20만 루블은 고려공산당이나 임시정부 등 어느 세력에게도 넘겨주지 않고, 국민대표회측의 임시정부 개조운동 자금으로 사용되었다.(주23) 임시정부 입장에서는 한형권이 임시정부 대표로 파견됐으므로 그 자금이 당연히 임시정부 활동자금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임시정부에서는 한형권이 확보한 20만 루블을 빼앗기 위해 추격대를 조직하였고 대한국민회 간부 윤해가 김상옥에게 저격당해 상해를 입었다.(주24)

▲ 1920년경 상하이에서 촬영한 사진. 앞줄 왼쪽 두 번째부터 이동휘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한인사회당 당수, 박진순 모스크바 외교 활동 주역, 김립 국무총리 비서장(김구 부하에게 암살) [사진=독립기념관]

이동휘는 이 레닌정부 자금이 임시정부 내에서 문제가 되자 1921년 1월 24일 임시정부 국무총리직을 사임하였고, 같은해 5월 23일 한인사회당 세력과 국내의 사회주의자들을 규합하여 이르쿠츠크 공산당에 대항하는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을 조직하였다. 이후 양파는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기 위해 치열한 경쟁, 갈등을 연출했다. 급기야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의 갈등은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스보보드니(알렉세예프스크, 자유시)에서 러시아군대가 한국독립군 단체를 공격해 수백명을 살상한 ‘자유시 참변’을 불러오고야 말았다.(주25)

양파의 대립은 자유시 참변 사건을 불러왔고, 결국 임시정부의 좌우연합까지 파탄내고 말았다. 이동휘의 상하이파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이르쿠츠크파는 김립이 레닌정부로부터 받은 자금을 개인적으로 횡령, 착복했다는 ‘거짓소문’을 퍼트림으로써 ‘뛰어난 혁명가’가 살해되게 만들었다. 상하이 통합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의 비서장이었던 김립은 김구라는 민족주의의 상징적 인물이 『백범일지』에서 단죄한 내용에 따라 아직도 ‘파렴치한 공금횡령자’로 남아 있다. 그러나 김립은 김구의 평가처럼 ‘파렴치한 인물’ 아니라 ‘국제정세에 탁월했고 독립운동방략이 치밀했던 뛰어난 독립운동가’였다고 한다.(주26)

이처럼 파벌싸움은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 경쟁상대를 무차별적으로 훼손하고 동지를 살해하는 극단적인 행위를 낳는 원인이 되었다. 독립운동 내부에서 노선과 올바른 방향을 두고 치열한 토론과 논쟁이 필요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운동의 발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정도를 벗어난 파벌간의 대립은 운동진영 전체를 파괴하는 심각한 폐해를 낳을 수 있다. 상하이임시정부는 불과 2년여 만에 심각한 내분과 갈등 속에서 활로를 찾지 못하고 미로 속을 헤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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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1-상해시기』,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153〜156쪽 참조

2) 이명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80주년 기념논문집 (하)』, 한국근대사학회편, 국가보훈처, 1999, 462〜465쪽 참조

3) 김희곤, 위의 책, 155쪽

4) 윤대원, “좌우연합을 지향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일을여는역사』, 통권18권, 2004, 235쪽

5) 김희곤, 위의 책, 154〜155쪽

6) 임영태, 『스토리 세계사 8』, 21세기북스, 2014, 265〜269쪽

7) 전명혁, “1920년 코민테른 2차대회 시기 박진순의 민족・식민지 문제 인식”, 『한국사연구』, 134호, 2006, 195쪽

8) 한형권은 상하이임시정부 특사 신임장과 밀서, 극동공화국 대통령(외상 겸임)이며 한인사회당의 오랜 후원자인 크라스노시초코프 앞으로 보내는 이동휘의 서신을 갖고 있었다.(강덕상 저/ 김광열 역, 『여운형과 상해 임시정부』, 도서출판선인, 2017, 119쪽)

9)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지음/ 한홍구 옮김, 『한국공산주의운동사』, 돌베개, 2015, 89〜90쪽

10) 로버트 스칼라피노, 위의 책, 89쪽; 강덕상 저/ 김광열 역, 『여운형과 상해 임시정부』, 도서출판선인, 2017, 120쪽

11) 하성환, “비극적인 항일독립지사 ‘김립’에 대한 회상 – 김립에 대한 서훈 추서를 고대하며”, 한겨레:온, 2019. 3. 11
(http://www. 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8963)

12)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위의 책, 90〜91쪽

13)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위의 책, 91〜92쪽

14) 김구지음/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1997, 313쪽

15) 김구지음/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1997, 310〜313쪽

16) 반병률, “김립과 항일민족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 2005년 봄호, 제32집, 97쪽

17) 하성환, “비극적인 항일독립지사 ‘김립’에 대한 회상 – 김립에 대한 서훈 추서를 고대하며”, 한겨레:온,  2019. 3. 11

18) 김철수, “김철수 친필유고”, 『역사비평』, 1989년 여름호, 351〜352쪽

19) 김방, “고려공산당의 분립과 통합운동”, 『아세아문화연구』, 제5집, 174〜175쪽

20) 반병률, “김립과 항일민족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 2005년 봄호, 제32집, 90쪽

21) 반병률, “김립과 항일민족운동”, 93〜94쪽

22) 반병률, “잊혀진 비극적 민족혁명가, 김립”, 『내일을여는역사』, 통권 26권, 2006, 109〜110쪽

23) 반병률, “김립과 항일민족운동”, 97쪽; 하성환, 위의 글, 한겨레:온, 2019. 3. 11

24) 반병률, “잊혀진 비극적 민족혁명가, 김립”, 112쪽

25) 김방, 위의 글, 173, 197쪽

26) 하성환, 위의 글, 한겨레:온, 2019. 3. 11; 반병률, “잊혀진 비극적 민족혁명가, 김립”, 98〜112쪽 참조; 반병률, “김립과 항일민족운동”, 63〜10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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