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셰익스피어의 비극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민족적 비극을 강요한 분단의 가장 큰 책임은 강대국의 패권주의에 있다는 점을 두 번에 걸쳐서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분단의 책임은 강대국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일본 제국주의가 이 땅을 식민지로 침탈하지 않았다면 미소에 의한 분할점령도 없었을 것이요, 그랬다면 분단의 비운도 맛보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은 우리 민족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분단 과정에 외세의 개입이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잘 했더라면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분단은 단계를 거쳐서 발전되어 갔습니다. 분단의 시작은 미소 양군에 의한 분할점령에서부터 비롯됩니다. 그러나 분할점령은 아직까지 군사적 편의에 의한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적어도 1945년까지는 고착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45년 12월말부터 시작된 신탁통치 분쟁은 우리 민족 내부를 남과 북, 좌와 우로 갈라놓습니다. 또한 민족 내부의 분열은 막 시작되고 있던 미소간의 냉전대립과 맞물리면서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는 미국의 외신을 받아 "한국을 4개국 신탁통치 아래 두기로 결정하였다"고 보도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회담을 계기로 조선독립문제가 표면화되지 않는가 한다. 즉 번즈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받았다고 하는데 3국간에 어떤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미국 태도는 `카이로 선언` 의해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태도를 결정할 것을 약속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해서 38도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처럼 이 보도는 사실이 아닙니다. 신탁통치를 처음 주장한 것은 미국이고 소련은 반대했으나 결국 기간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선에서 미국의 입장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미국과 미국의 외신, 그리고 동아일보가 합작해 모스크바 회담을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있었던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미국으로서는 한국에서 민족주의가 분출되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이 신탁통치를 주장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게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또한 반공주의에 젖은 보수적인 미국 신문이나 동아일보는 사실을 왜곡함으로써 국민들에게 반소, 반공 감정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의도는 맞아떨어졌습니다.

이 보도가 나간 다음부터 정국은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즉각 `신탁통치 반대` 구호가 터져 나왔고, 반탁운동이 조직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아일보의 보도를 근거로 해서 `모스크바 협정=식민지적 신탁통치=소련의 주장=반민족적 행위`라는 등식이 성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주장은 신탁통치가 미국의 주장이었다는 사실을 왜곡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모스크바 협정의 주요 내용조차도 왜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위해 모스크바 협상의 주요 결정 내용이 무엇인지 한번 봅시다.

"첫째, 한국(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임시적인 한국(조선)민주정부를 수립한다. 둘째, 한국(조선)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개최한다. 셋째, 미·영·소·중의 4개국이 공동 관리하는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넷째,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미·소 양군 사령관 대표로 회의를 소집한다."

이걸 보면 모스크바 협정의 핵심 내용이 `한국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아일보나 반탁세력은 임시정부수립 문제는 의도적으로 배제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임시정부수립 문제를 논의하게 되면 과거 식민지 시대 행적이 문제가 됩니다. 일제에 끝까지 비타협적으로 저항했던 세력 가운데는 좌익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국내에 남아있던 우익의 경우 조만식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친일파로 변절했습니다. 동아일보가 지지하고 있던 한민당(한국민주당)도 친일파 집단이라는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좌익은 적색노조·농조 운동, 당 재건운동, 건국동맹 등 끈질기게 투쟁을 계속해왔습니다. 해외의 경우에도 김구가 지도하는 중경임시정부가 유일한 우익이었던 반면, 좌익은 만주와 연안, 그리고 중국관내에 광범위하게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당시의 좌익은 광범한 대중적 지지 위에서 강력한 조직기반을 갖고 있었던 반면, 우익은 중국에서 귀국한 김구의 임정계열을 제외하고는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우익은 역전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임시정부가 세워질 경우 도덕적으로 조직력에서 우위에 선 좌익이 주도권을 쥐게 될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신탁통치 문제가 터져 나오자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들은 이를 기회로 일거에 정국을 뒤집어엎으려고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의도는 성공했습니다.

모스크바 협정 소식이 알려지면서 우리 민족은 모스크바 협정 지지와 신탁통치 반대로 분열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것은 좌우의 분열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기회를 틈타 친일파가 부활했습니다. 친일의 원죄 때문에 숨죽이고 있던 친일세력들은 반탁을 구실로 반소·반공 애국자로 둔갑했던 것입니다.

이와 함께 한국(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기회도 사라져 버립니다. 모스크바 협정 가운데 가장 핵심문제는 임시정부 수립이었습니다. 만일 민족 내부의 분열이 없었다면 임시정부 수립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신탁통치 문제는 임시정부가 수립된 다음 임시정부가 미·소와 협의해 처리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랬다면 우리는 임시정부와 미·소의 협상으로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고 즉각 독립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그 기간을 5년보다 짧게 할 수도 있었을지 모르며, 최악의 경우 5년의 신탁통치 기간을 거친다 하더라도 적어도 분단만은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한국전쟁의 비극도 없었을 것입니다.

역사에서 가정은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흘러간 역사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역사로부터 교훈은 얻을 수 있습니다. 신탁통치 분쟁과 민족 내부의 분열. 이것은 분단을 가속화시킨 결정적 요인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도 분단의 책임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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