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창준 /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연구위원

 

2018년 4월 27일은 환희와 감동의 시간이었다. 1년이 지난 2019년의 4월 27일은 회의와 체념이 지배하고 있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원인을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의 결렬에서 찾으려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원인이 될 수 없다.

이미 지난 해 9월 평양공동선언 채택 이후부터 남북관계의 발전 속도는 급격히 떨어졌다. 특히 11월과 12월 남북 관계는 이렇다 할 진전을 보지 못했다. 철도와 도로 연결 착공식이 있었지 않냐 할 수 있으나 그것은 퇴보와 답보의 징표였다. 공사 착공 계획과 일정이 없는 착공식이 말이 되는가.

미국이 결사코 반대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는 반론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무책임한 논리이다. 개성공단을 시작할 때 미국이 쌍수를 들고 환영한 것이 아니었다. 그때도 미국은 반대했다. 미국의 허용 범위 안에 안주한 결과 남북 관계가 발전하지 못한 것이다.

판문점선언 발표 1년을 맞이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꼬인 것일까. 지금 남북 관계는 어디에 서 있는가. 2018년을 돌아보고 우리의 현재 위치를 찾고, 대책을 강구해야 할 때이다. 특히 문재인 정부 앞에 놓인 과제가 막중하다.

남북 평화공조가 일으킨 정치적 사건: 판문점 정상회담

2017년의 한반도 위기는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당시 위기는 냉전 시기 최악의 위기였다고 평가되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 버금가는 상황이었다는 것만 확인하면 될 것이다. 한반도를 삶의 터전으로 하는 우리들에게는 그만큼 평화가 절박한 순간이었다. 2017년 12월부터 남북 사이에 물밑 접촉이 이루어지고 2018년 1월부터 남북 고위급회담이 개최되고, 한미 군사연습이 ‘연기’되고, 평창에 북측 선수단과 대표단이 내려오면서 한반도 평화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4월 27일 판문점 정상회담은 남북 평화공조가 일으킨 사건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의 정상회담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여 특사를 파견했다. 특사를 접견한 자리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한반도 평화에 대한 적극적인 메시지를 남측에 보냈다.

판문점 정상회담은 한반도 평화를 최우선적 목표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동안 남측에서는 대북 정책에서 ‘비핵화’가 최우선적 과제였다. 2018년 벽두부터 드러나기 시작한 남과 북의 대화 분위기는 북한이 비핵화 조치를 취하기 전이었다. 북한의 직접적인 비핵화 의사는 3월 초 특사 방문에서 나왔으며, 비핵화 조치는 판문점 정상회담 이후 이루어졌다.

이는 판문점선언에서도 확인된다. 판문점선언은 “남북 관계 발전 → 한반도 긴장 완화 →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합의했다. 비핵화는 한반도 평화 영역에서 다루어졌다. 비핵화를 위한 평화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비핵화를 합의한 것이다.

사실상 정전협정을 새롭게 쓴 9월 평양 정상회담

남북 평화 공조는 9월 평양정상회담에서 더욱 강화된다. 평양에서 남북 정상은 9월 평양공동선언을 채택한다. 1항은 군사적 적대관계 종식을 선언했다. “대치지역에서의 적대관계 종식을 한반도 전 지역에서의 실질적인 전쟁위험 제거와 근본적인 적대관계 해소로 이어나가기로” 합의한 것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남측의 국방부장관과 북측의 인민무력부상이 합의한 <판문점선언 군사분야 이행합의서>를 평양공동선언의 부속합의서로 채택한 것이다.

<판문점선언 군사분야 이행합의서>는 복잡한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상 간단하다. 지상에서의 ‘비무장지대’를 정전협정에 명시되어 있던 상하 4km에서 상하 10km로 확장시켰다. 군사분계선도, 비무장지대도 존재하지 않아 남북 군사적 충돌의 진앙지가 되어 왔던 서해에 상하 80km에 달하는 ‘비무장지대’를 설정했다. 공중에서도 서쪽 지역은 상하 20km, 동쪽 지역은 상하 40km에 달하는 ‘비무장지대’를 설정했다.

이 같은 합의는 사실상 정전협정을 새롭게 쓴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판문점선언 군사분야 이행합의서>를 평양공동선언의 부속합의서로 만든 것은 양 정상이 그 이행과 준수를 책임지겠다는 정치적 의사의 표현이다. 장관급이 서명한 합의서를 정상선언의 부속합의서로 채택한 것이 <판문점선언 군사분야 이행합의서>가 유일하다.

한반도 비핵화의 정의를 내린 9월 평양공동선언

하노이 정상회담을 전후하여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정의부터 합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었다. 이 같은 주장은 9월 평양공동선언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정의했다는 사실을 망각한 데서 나오는 무지의 소산이거나 혹은 그것을 부정하려는 의도를 가진 악의적 주장이다.

남북 정상은 9월 평양공동선언을 통해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 나가”기로 합의했다. 즉 한반도 비핵화는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이다. 한반도의 비핵화는 북한의 비핵화 조치 외에도 미국의 핵무기 전개와 핵위협이 동시에 제거된 상태를 말한다. 북한의 ‘선비핵화’ 주장은 9월 평양공동선언에서 합의한 한반도 비핵화 정의에 어긋난다.

이로써 남과 북은 한반도 비핵화의 당사자가 되었다. 비핵화의 정의를 내렸다는 것은 당사자성을 서로 인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서 김정은 위원장은 북쪽 지역의 비핵화 당사자가 되었고, 문재인 대통령은 남쪽 지역의 비핵화 당사자가 되었다.

당사자가 협력해야 비핵화의 실질적인 진전은 가능하다. 9월 평양공동선언에서 “남과 북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추진해나가는 과정에서 함께 긴밀히 협력해나가기로” 합의한 것 역시 남북의 비핵화 당사자성을 확인시킨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하노이 정상회담 당시 북측은 영변 지역의 모든 핵시설을 폐기하겠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9월 평양공동선언의 내용에 따라 북미 회담을 진행시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과연 문재인 정부는 9월 평양공동선언의 내용에 따라 북미 회담을 중재하고 있는가.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할 대목이다.

중재자 역할 실패 확인한 한미 정상회담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이후 문재인 정부는 북미 중재자 역할을 자임했다. 그러나 중재자의 발상도, 중재의 내용도 문제가 많았다. 한미 정상회담은 애초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데서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자 역할이 큰 작용을 했다. 북미 사이에 실질적인 대화 채널이 없었고, 북미 양 정상 간에는 어떠한 신뢰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최적, 최선의 중재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수시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현재 북미 사이에는 대화 채널이 가동되고 있으며, 북미 양 정상의 신뢰는 돈독하다.

하노이 정상회담의 결렬 원인은 소통의 부재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통의 부재가 결렬 원인이었다면 애초에 하노이 정상회담은 개최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합의서 초안까지 나와 있을 정도로 북미 사이에는 상당한 교점이 마련되어 있었다. 회담 직전에 미국이 새로운 요구를 들고 나온 것이 결렬의 원인이었다. 따라서 북미 정상회담의 재개는 중재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가 마련한 중재의 내용은 더 심각했다. 북한 측에게는 영변 플러스 알파를 설득하고 미국 측에게는 포괄적 비핵화 합의와 이를 단계적으로 이행하는 방안을 설득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기계론적 중재안이다. 영변 플러스 알파라는 미국 측의 요구와 단계적 접근이라는 북한 측의 요구를 합친 것이다. 북한이 요구하는 형식에 미국이 요구하는 내용을 짬뽕시킨 것이다.

이 같은 중재안마저도 미국 측은 사실상 거부했다. 우리 정부는 한미 정상회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4월 22일 해리 해리스 주한미대사의 기자회견은 달랐다. 해리스 대사는 ‘굿 이너프 딜’과 관련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면서 “미국과 공유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문재인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워싱턴에서 제재 완화로 향하는 길이 북한의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가능한 비핵화(FFVD)에 달렸다는 점에 동의했다”고 평가했다.

애초 문재인 정부가 추진했던 계획대로 정상회담이 진행되지 못했다. 정상회담 전에 펜스 부통령, 폼페이오 국무장관, 볼튼 보좌관 등을 만나 중재안을 설명하려 했으나 여기에 4명의 다른 미국 측 당국자들이 배석하는 바람에 설득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다.

두 정상의 단독회담 역시 부부동반 회담으로 변경되었다. 그마저도 기자들의 질문이 쇄도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거기에 답변하는 데 시간을 보냄으로써 2분 여 밖에 단독회담은 진행되지 못했다. 이번 정상회담은 문재인 대통령으로 하여금 중재를 시도할 최소한의 시간마저도 보장되지 않았다.

한미 워킹그룹: 남북 평화 공조에서 한미 비핵화 공조로 선회

9월 평양 정상회담 이후 문재인 정부에 대한 미국의 압박이 거세찼다. 지난 해 10월 미국 대통령이 “승인”이라는, 외교적으로 전혀 타당하지 않은 멘트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결국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에 굴복했다. 한미 워킹그룹회의를 신설한 것이다.

당시 우리 정부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유엔 안보리 결의 이행, 남북 협력 등 북핵/북한 관련 제반 현안”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논의를 한 것은 제반 현안이 맞다. 미 국무부도 그렇게 설명한다. 그러나 문제는 제반 현안을 논의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이다. 미 국무부 홈페이지에는 바로 그 무엇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 미 국무부 홈페이지에는 한미워킹그룹이 FFVD를 달성하기 위한 한미 양국의 긴밀한 협력 강화가 목적이라고 적혀있다.

이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을 조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 조율의 방향은 FFVD, 즉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이다. FFVD는 한반도 평화에 대한 내용이 없다.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미국의 의무 사항도 없다. 오직 북한의 비핵화만을 명시하고 있다. 한반도 비핵화 회담에서 FFVD만을 언급한다는 것은 선비핵화론의 변형된 형태일 뿐이다. 문재인 정부는 한미 공조라는 미명 아래 선비핵화론을 사실상 수용해버린 것이다.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남북 평화 공조에서 한미 비핵화 공조로 선회한 것이다.

그 이후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은 미국의 ‘승인’ 아래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의 구체적 실천 사항은 이행되지 못했다. 2019년 들어와 한미 군사연습이 재개되었다. 문재인 정부의 국방부는 북한의 반발에 ‘연례적 방어연습’라고 반박했다. 역으로 묻고 싶다. 2018년의 군사연습은 ‘연례적 공격연습’이었기 때문에 중단했던가. 그 때 중단된 것도 ‘연례적 방어연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차라리 “미국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라고 솔직하게 토로했다면 그 처지를 이해라도 해주겠다.

문재인 정부, 중재자 말고 당사자로 행동해야

문재인 정부는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을 채택하던 당시로 돌아와야 한다. 한미 비핵화 공조에서 벗어나 남북 평화 공조를 추진해야 한다. 지난 4월 정상회담에서 확인했듯이 미국은 한국의 중재자 역할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하겠다는 구상은 말도 꺼내지 말라고 한다.

미국의 지지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절대적 조건일 수는 없다. 설령 미국의 지지가 필요하더라도 반드시 ‘사전 지지’일 필요도 없다. 일단 일을 벌이고 난 후 ‘사후 지지’도 가능하다.

남측이 남북 평화 공조를 추진했을 때 한반도의 평화와 비핵화, 남북 관계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지난 4월부터 확인해오지 않았던가. 남북 관계가 발전해야 북미 정상회담도 가능하다는 것을 문재인 대통령 본인이 보여주지 않았던가.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의 중재자가 아니라 당사자이다. 당사자면 당사자답게 행동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 이후 남북 정상회담을 다시 제안했다. 남북 정상회담에서 트럼프의 메시지를 전달하겠다는 계획이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실패를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재자, 메신저 역할론을 고수하고 있다.

북측에서 답변이 없다는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그러나 시정연설에서 밝혔던 것처럼 북측은 중재자가 아니라 당사자가 되었을 때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을 때 정상회담에 화답할 것이다. 이것은 북측의 요구에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다.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을 이행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1년 전의 판문점으로 돌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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