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상하이서 첫 걸음을 시작해 일제의 패망으로 1945년 11월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 27년간 고난에 찬 투쟁을 이어갔다. 그 사이 임시정부는 상하이,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 등 중국 대륙 곳곳을 누비며 1만3천리(5,200㎞)를 이동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초기 활동 지역인 상하이와 첫 피신처였던 항저우의 임시정부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상하이・항저우 유적지 답사기와 함께 임시정부 역사를 10여회에 걸쳐 정리하고자 한다. 이 답사기는 매주 화요일 연재된다. / 필자 주

 

수시로 옮겨야 했던 상하이임시정부 청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수립되어 13년간 상하이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홍구) 공원 의거를 계기로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항주)로 옮겨갔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장소와 청사 위치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김신부로(金神斧路) 22호’(현재의 ‘서금2로 48농 18호’)로 추정하지만, 이는 초기 임정수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현순의 주거지에서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렸을 것이라는 추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정확하지는 않다.(주1)

임시정부 청사는 여러 곳으로 옮겨 다녔는데 지금까지 확인되는 것만 해도 12차례 이상이 된다. 임시정부 수립 일주일 후인 1919년 4월 19일경부터 ‘하비로(霞飛路) 321호’(현재의 ‘화이하이중루 651호’) 청사를 사용한 것이 확인되지만(주2) 언제까지 사용했고 실제 이곳에 청사를 두고 활동을 했는지도 파악되지 않는다. 임시정부는 수립 직후 청사에 태극기를 게양할 정도로 공개적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1919년 10월 프랑스 조계당국으로부터 폐쇄조치를 당한 후에는 개인 집이나 기관에 사무소를 두어야 했다.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며 불안정한 활동을 하던 임시정부가 안정적인 청사를 마련한 것은 1926년 3월이었다.(주3)

▲ ‘하비로 321호’에 있었던 임시정부 청사의 당시 모습(사진-동아일보, 2018. 4. 10). [사진제공-임영태]

6년간 활동한 보경리 4호 청사

우리가 지금 상하이에서 만나는 임시정부 유적지가 바로 이곳이다. 당시 주소는 백래니몽 마랑로 보경리 4호였고, 현재는 황포구 마당로 306농 4호로 이름이 바뀌었다. 임시정부는 이곳에 청사를 마련해 1932년 5월 항저우로 이동할 때까지 6년간 이곳에서 활동했다. 마당로 4호 청사는 현재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는 한국정부와 상하이시가 1988년부터 1990년까지 공동조사를 통해 현재의 마당로 건물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사용했던 건물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1993년 일제 강점기 활동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현재는 상하이시 황포구 인민정부의 관리 하에 “황포구 문물 보호단위 제174호”(대한민국임시정부유적지)로 지정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유적지 간판. [사진제공-임영태]
▲ 복원 내역을 알려주는 표지판. [사진제공-임영태]

현재 청사 건물의 1층과 2층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생활했던 공간이 복원되어 있다. 1층에는 회의실과 주방이 있고, 회의실은 회의용 탁자와 함께 임시정부 요인들의 사진, 임시정부 초기 사용했던 태극기가 전시되어 있다. 주방은 당시 사용했던 모습을 그대로 복원했고 2층에는 김구 선생의 집무실 겸 침실, 임시정부 요인들의 집무실, 임시정부 요인들의 숙소가 복원되어 있다. 3층에는 임시정부와 관련된 각종 자료들을 보여주는 전시실이 있는데, 제1전시실 입구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탄생할 때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의 역사가 소개되어 있다. 그 밖에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최초로 사용했던 청사 사진과 독립선언서, 국민대회 취지서, 임시정부 요인들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제2전시실에는 상해시기 임시정부의 활동과 유봉길 이봉창 의사의 의거, 이동시기 및 중경에서의 임시정부의 활동과 해방 후 환국 과정 등도 소개되어 있다.(주4)

잘 보존 관리되고 있는 청사, 그러나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는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다. 내부 전람시설은 잘 정비되어 있어서 당시의 모습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임시정부유적지 옆에는 여전히 주민들이 살고 있어서 한국인들이 역사 유적을 탐방하고 그 의미를 돌아보는 데 다소 불편한 면도 없지는 않다. 한국인 탐방객들에게는 오래된 도시 상하이의 옛 정취가 남아 있는 구시가를 보는 정취도 있지만, 표지판이 없다면 겉에서 봐가지고는 이곳이 유적지인지 알 수도 없다.

중국 관리인이 전람관 내부를 돌아보면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뭐라고 소리를 친다. ‘사진을 찍지 마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사진도 찍지 않고 그냥 갈 수는 없지. 눈치껏 보면서 사진을 찍어야 했다. 아무리 잘 관리하더라도 우리가 직접 하는 것만은 못할 것이다. 또 중국과 사이가 나빠지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 임시정부 유적 전람관 내부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 부엌 모습도 그대로 복원해 놓고 있다. 독립운동도 먹지 않고 할 수는 없는 일. 독립운동의 전면에서 활동했던 인물들 뒤에는 이들을 뒷바라지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진제공-임영태]
▲ 전람관 내에 있는 임시정부 국무령 김구 선생 집무실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파리강화회의, 제국주의 열강들의 전후 질서 재편

1919년 9월 통합정부가 출범하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국내외의 기대는 한층 부풀었다. 임시정부 초기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교와 국내에 대한 선전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외교 활동에서 가장 먼저 거론할 것은 파리강화회의와 관련한 활동이다.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파리에 대표로 파견한 김규식을 외무총장 겸 파리위원으로 임명하고 신임장을 보냈다. 그러나 1919년 6월 28일 회의가 끝날 때까지 한국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 파리강화회의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승국들이 모여 패전국들에 대한 전쟁배상금과 영토 분할 등을 논의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던 독일을 비롯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의 전쟁배상금과 영토 분할을 논의했던 것. 그 결과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과 맺은 베르사이유 조약(1919. 6. 28), 오스트리아와 맺은 생제르망 조약(1919. 9. 10), 불가리아와 맺은 뇌이 조약(1920. 11. 27), 헝가리와 맺은 트리아농 조약(1920. 6. 4), 오스만제국과 맺은 세브르 조약(1920. 8. 10. 1923. 7. 24 로잔 조약으로 대체) 등이 체결되어 국제 질서가 다시 조정되었다.

그런데 파리강화회담 결과, 프랑스 등 승전국이 패전국인 독일에 전쟁배상금을 너무 가혹하게 물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전쟁이 끝났을 당시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복수 일념밖에 없었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징병 가능한 남성의 거의 20%를 상실하였고, 상처 없이 전쟁을 겪은 프랑스 군인은 3분 1을 넘지 않았을 정도로 피해가 막심했다. 프랑스는 독불전쟁으로 독일에 빼앗겼던 알사스-로렌지방을 되돌려 받았고, 거기에 덧붙여서 독일이 더 이상 재기할 수 없을 만큼의 가혹한 전쟁 배상금(1921년 330억 달러)을 물렸다.

영국의 분노도 만만치 않았다. 영국 또한 이 전쟁에서 엄청난 인명 손실이 있었다. 단적으로 1914년 영국군에 복무한 25세 미만의 옥스퍼드 대학생과 케임브리지 대학생 중 4분의 1이 전사했을 지경이다. 그러다 보니 영국에서 선거 슬로건 중 하나가 “독일이라는 레몬을 짜낼 수 있을 만큼 다 짜내자!”였다. 지금도 ‘Greate War’라고 하면 유럽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의미한다. 그들에게는 이 전쟁이 그만큼 피해가 컸고, 처절했던 전쟁이었던 것.

▲ 1919. 6. 28. 강화조약 서명 전 모습. 중앙이 윌슨 미국 대통령, 그 오른쪽이 조지 클레망소 프랑스 대표, 왼쪽 로이드 조지 영국 수상. [사진제공-임영태]

하지만, 너무 가혹한 배상금이 역설적이게도 가장 민주적인 헌법을 가졌던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을 단명으로 끝나게 만들고 말았다. 가혹한 배상금이 독일에서 히틀러의 나치를 등장시킨 원인의 하나로 작용했던 것. 독일은 알사스-로렌 지방 외에도 북부 슐레스비히를 덴마크에, 포젠과 서프로이센 지역 대부분을 폴란드에 넘겨야 했다. 독일은 13%의 영토와 6백만 명의 인구를 빼앗겼고, 군사적으로 완전히 해체되었다. 중국과 태평양에서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해외 이권은 모두 일본과 영국이 나눠가졌다. 결국 독일에서 반프랑스・반영국 감정이 강하게 형성되었고, 나치가 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고 불가리아 왕국은 영토가 축소되었다. 오스트리와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가 분리, 독립하였고,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가 독립하면서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와 합쳐져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탄생했다. 오스만 제국 또한 해체되어 터키는 지금의 영토로 축소되었고,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던 중동・아프리카의 광대한 지역 대부분은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재차 분할되어 식민화되었다. 오늘의 중동 분쟁은 영국과 프랑스가 이곳에 들어가면서 그 씨앗이 뿌려진다.(주5) 

전승국이었던 중국은 1915년에 맺은 불평등한 ‘21개조 요구’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독일이 차지하고 있던 산둥 지역의 이권을 일본이 넘겨받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에 분개한 중국의 학생, 지식인, 민중이 궐기하면서 5.4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

이런 상황이었으니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이 발언권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인들은 파리강화조약이 체결되기 1년 전에 발표된 미국 대통령 윌슨의 14개조에 언급된 ‘민족자결의 원칙’에 많은 기대를 걸고 3.1운동을 시작했고, 결국 임시정부 수립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국제정치 현실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파리강화회담은 6월 28일 베르사이유 조약이 체결되면서 일차적으로 끝났다.

그래도 파리위원부의 활동이 전혀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대표단을 상대로 한국문제를 설명했고, 프랑스 동양정치연구회에서 2차에 걸쳐 한국문제 연설회를 개최했으며, 프랑스 국민정치연구회에서 한국문제 보고회를 가졌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8월 9일 스위스 루체른에서 개최된 제2차 사회주의인터내셔널 대회에서 「한국 민족 독립 결정서」가 통과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 한국대표단의 일원인 조소앙은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개최되는 제2차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에 참가하여 「한국 독립문제 실행 요구안」을 제출했고, 브뤼셀의 국제사회당본부는 이듬해(1920)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과 대한민국이 독립국이라는 사실을 승인하도록 국제연맹과 열강에게 요구하였다.(주6)

혁명러시아(소련)도 임시정부의 중요한 외교대상국으로 떠올랐다. 특히 이동휘가 통합정부의 국무총리를 맡아 상해에 도착한 뒤 러시아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 임시정부는 1920년 1월 22일에 한형권·여운형·안공근 세 사람을 러시아 파견외교원으로 선정했다. 이동휘가 한인사회당 간부인 한형권만 몰래 보내서 러시아정부로부터 자금을 받아 임시정부가 아니라 고려공산당 활동에 사용하는 바람에 심각한 갈등을 빚었고, 경무국장 김구의 지시를 받은 오면직과 노종균에 의해 국무총리 비서장 김립이 살해되는 비극적 사건이 연출되었다.(주7)(이 이야기는 다음 회에 자세히 다룰 것이다.) 그래도 이는 임시정부가 첫 번째 공식적 외교활동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한편, 독립운동을 펼쳐나가는 현장이라는 점에서 중국정부와 벌인 초기 외교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1921년 10월 초 신규식은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대리 겸 외무총장, 그리고 특사의 자격으로 광동을 방문하여 손문을 만났다. 이때 신규식은 상호 정부의 승인, 한국인 군사간부의 육성 지원, 경제 지원과 근거지 제공 등을 요청했다. 손문은 신규식의 요구가 당연하나 현실적으로 실현하기에는 다소 시일이 필요하다고 답해 보류하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상호 승인이 이루어졌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의 성과를 얻었다.(주8)

임시정부 수립 초기 미국에 대한 외교는 워싱턴회의가 가장 대표적이다. 1921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열린 이 회의에 한국문제를 상정시키기 위해 구미위원부를 앞세워 임시정부가 총력을 기울였다. 미국에서 이승만이 앞장서는 가운데 임시정부에서 선언서를 발송하고 선전활동을 폈으며, 임시의정원 의원 홍진과 안창호가 주도하는 연설회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워싱턴회의는 끝내 한국대표단의 존재마저 인정하지 않았고, 임시정부가 기울인 모든 노력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국내를 향한 조직・선전 활동

임시정부는 무엇보다 국내에 조직을 마련함으로써 국민적 기반을 획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임시정부는 1919년 연통부와 교통국, 1920년 선전대를 설치하여 국내의 조직 기반을 확장하려 했다. 연통제는 임시정부의 비밀 국내 통치제도로 내무총장 안창호에 의해 추진되었다. 안창호는 상해 임시정부의 지지기반이 국내라는 점을 인식하고 상해와 국내를 연결할 수 있는 행정・통신망 구축에 심혈을 기울였다. 안창호는 9월 통합정부가 출범하면서 노동국총판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연통제를 계속 주도해 나갔다. 안창호가 연통제 조직을 통해 이룬 가장 성공적인 사례는 대한제국 대신 출신으로 비밀항일조직이었던 대동단 총재 동농 김가진의 망명 실행이었다.(주9)

임시정부는 나라 안팎 주요 거점에 교통국을 설치하고 통신원을 배치했다. 교통국은 정보 수집과 교환, 자금 모집과 전달, 물자와 무기 운반 등을 맡은 특파원이 파견될 때 그를 연결시키는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고 독립운동가들의 안전과 편리를 도와주었다. 국내 동포에게 문서를 전달하고, 국내에서 모금된 자금을 상해로 보내는 활동은 가장 중요한 기능에 속했고 여기에 업무가 집중되었다.(주10)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에 국내 동포들에게 적극적인 선전 활동도 펼쳤다.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상황을 알리기 위해 임시정부 관보인 <공보>와 각종 법령, 포고문 등을 국내로 보냈다. <독립신문>과 <신대한보>·<대한독립보>·<신한청년>·<동아청년>·<배달공론>·<진단>·<천고>·<사민보> 등 신문과 잡지를 국내에 배포했다.

임시정부는 나라 안팎으로 정부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기 위해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발행했다. 1919년 8월 21일 ‘독립’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이 신문은 두달만에 이름을 바꾸었다. <독립신문>은 국한문 혼용으로 띄어쓰기 없이 세로쓰기를 적용했다. <독립신문>은 창간 이후 자금난 등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1920년 6월까지는 대체로 주3회 발행원칙을 지켰다. 자금난과 일제의 방해공작이 지속되자, <독립신문>은 간행 횟수를 줄이지 않을 수 없었다. 1920년 5월 11일자(제57호)부터 주 3회에서 2회로 바꾸었다. <독립신문>은 상해를 중심으로 중국관내와 만주지방, 연해주, 미주지역 등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들뿐만 아니라 국내로도 반입, 배포되었다. 해외의 경우는 우편발송을 했으나 국내의 경우는 연통제와 교통국 조직망이 이용되었다. 1922년 7월 22일자로 <독립신문> 중문판도 발간했는데 중국인을 상대로 한국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알리면서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연대하자는 내용을 담은 선전 신문이었다.

2009년 5월 북한산 기슭에 위치한 천년고찰 진관사에서 칠성각 해체 복원 작업 중 불단 밑에서 비밀스런 물건들이 발견되었다. 몇 권의 책과 옛날 신문 등을 싸고 있는 태극기가 발견되었던 것. 이때 <독립신문> 4점(1919. 11. 27.자 등), 신채호가 발행한 <신대한> 3점(1호-1919.10., 2호-1919.11., 3호-1919.11.), 국내에서 발행된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 불교계의 독립신문 <자유신종보> 3점(제4호-연대미상, 제7호-1919.9./ 제12호-1919.10.)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주11) 상하이에서 발간된 <독립신문>이 국내로 반입돼 국내 민중의 선전활동에 이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진관사에서 발굴된 태극기와 함께 상하이임시정부에서 발간한 <독립신문> 등 일제강점기 신문 자료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사진-진관사). [사진제공-임영태]

임시정부는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해 사료집도 발간했다. 파리강화회의가 만들어낸 국제기구인 국제연맹에 제출하고 세계에 3·1운동을 정확하게 알리는 작업이 필요했다. 임시정부는 급박하게 임시사료편찬회를 조직했고, 임시정부 수립 후 5개월만인 1919년 9월 국제연맹에 제출하기 위한 자료로써 사료집을 발간할 수 있었다. 악조건에서도 작업은 빠르게 진척되었고, 사료 수집과 정리, 집필, 그리고 필경 등에 이르기까지 84일 만에 『한일관계사료집』 발간을 마쳤다. 이 책에서는 삼국시대 이후에 전개된 한일관계사를 역사적으로 검토하고, 일제 침략과 강점에 이르는 전 과정과 식민지 지배의 잔학상을 실증적으로 서술했다. 일제 침략과 지배의 부당성을 논리적으로 검증하는 한편 한민족의 독립운동 사실을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이 책은 단순한 사료집이 아니라 ‘외세의 침략에 대항한 한민족의 반침략투쟁사’, ‘항일독립운동사’였다.(주12)

▲ 독립신문 창간호(1919. 8. 21). [사진제공-임영태]

임시정부의 무장투쟁 준비와 활동

3.1운동 이후에는 독립에 대한 열망과 그 독립을 위한 일제와의 무장투쟁, 즉 항일전쟁을 당연하게 여겼다. 1920년에는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 일제와의 항일무장투쟁에서 독립군들이 승승장구하며 기세를 올렸고, 임시정부 또한 독립전쟁에 대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초창기 임시정부의 군사활동은 주로 시베리아와 만주일대의 독립군 단체에 의지했지만 1920년에 들어서는 스스로 독립군을 조직하거나 군사력을 기르는 방안도 추진했다. 3.1운동 이후 만주에서 독립군 조직이 급속히 늘어났다. 1919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북간도와 북만주지역에 대한국민회와 북로군정서 등이 활동하였고, 서간도 지방에서 서로군정서 등이 활동하는 등 모두 46개 정치군사단체들이 등장했다. 

임시정부는 만주지역의 독립군 조직을 내세워 독립전쟁을 준비해 나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는 이 시기 만주에서 독립전쟁을 펼치던 대표적인 단체였다. 1920년 만주에 파견된 최동오는 독립군 단체가 모두 22개나 되고, 무장 군인이 약 2,000명을 넘는다고 보고했다. 그 가운데 대한광복군총영은 임시정부의 직속기관으로 독립전쟁을 펼치고 있던 유일한 단체였다. 대한광복군총영은 1920년 5월 7일 상해에서 안창호·김희선·이탁 등이 논의를 시작하여, 6월 남만주에서 대한독립단과 대한청년단연합회의용대가 합쳐 결성되었다.

광복군총영은 국경을 넘어 국내진공작전을 펴기도 하고, 일제 기관들을 파괴하거나 일본인과 친일분자를 응징하면서 독립자금을 모집하거나 병력을 확보하는 데도 힘썼다. 임시정부가 국내를 목표 지점으로 삼아 펼친 군사 활동에는 주비단과 의용단이 있었다. 주비단은 국내에서 단원모집과 군수품 확보 및 모험 공작을 벌이는 데 목적을 두었다. 주비단이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조직이라면, 의용단은 전쟁을 대비하여 준비태세를 갖추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김석황은 국내로 잠입하여 곳곳에 의용단 지단을 만들어 활동했다.(주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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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참조
(http://oversea.i815.or.kr/country/?mode=V&p=2&l_cd=china&area=ARA013&m_no=1-01-13-0004)

2) 조종엽, “[단독] 상하이 임시정부 두 번째 청사 위치 찾았다”, 동아일보, 2018. 4. 10

3) 김주용・박환・조재곤・한시준・한철호, 『국외항일유적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225쪽

4)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주 상하이 대한민국 총영사관 홈페이지 참조.
http://overseas.mofa.go.kr/cn-shanghai-ko/brd/m_541/view.do?seq=1146143&srchFr=&amp%3BsrchTo=&amp%3BsrchWord=&amp%3BsrchTp=&amp%3Bmulti_itm_seq=0&amp%3Bitm_seq_1=0&amp%3Bitm_seq_2=0&amp%3Bcompany_cd=&amp%3Bcompany_nm=&page=3

5) 임영태, 『스토리 세계사 8』, 238〜243쪽 참조

6)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1-상해시기』,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124〜133쪽 참조.

7) 김구 지음/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997, 313쪽

8) 김희곤, 위의 책, 132쪽

9) 한홍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특별기획-임정의 국로 동농 김가진① 대한제국 고관 중 유일하게 ‘민국’의 배에 오르다/ 국내 최대 비밀결사 대동단 총재 자격으로 임시정부 망명…임정에서도 최고 어른 ‘국로’로 모셔”, 내일신문, 2019. 4. 8

10) 김희곤, 위의 책, 111〜116쪽; 이현주, 「임시정부의 수립과 초기 활동」, 『한국사 48』(국사편찬위원회, 2001), 129쪽

11) 홍다영, “진관사 태극기”, 불교신문, 2015. 6. 3; 송화선, “속속 밝혀지는 진관사 태극기의 비밀 – 90년만에 드러난 불교계 항일운동”, <신동아>, 2019. 2. 28

12) 김희곤, 위의 책, 141〜142쪽

13) 김희곤, 위의 책, 118〜124쪽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지금은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주력하고 있다. (사)현대사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다.

저서로는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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