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수 / 정치학 박사(북한정치 전공) · 『수령국가』 저자 · 평화통일센터 하나 이사장

 

북은 올해 1월 1일 신년사에 이어 1월 23일에는 신년사 관철을 위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정당, 단체 연합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서 4개항의 <전체 조선민족에 보내는 호소문>을 채택했고, 그 중 4항이 “전민족적 합의에 기초한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마련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나가자!”였다.
  
그래서 이 글은 그 화답의 의미도 있지만, 그런 북의 호소가 아니더라도 한반도에서의 통일문제는 시급한 문제이다. 비정상성의 분단 70여년이라는 그 세월과, 또 그런 상황을 극복해야 될 (역사적) 소임이 촛불정부(촛불정부임을 자임하는 문재인 정부)에게는 분명히 있어서 그렇다. 그런데도 이 정부는 ‘평화’ 프레임에만 갇혀 통일의 ‘통’자도 꺼내지 못한다.
  
그런 만큼, 이 글은 문재인 정부가 다시 궤도지표를 재설정해내기 위한 그런 강제의 역할과 촛불민심의 통일열망을 재구축하기 위한 시론성격으로 구성되었음을 미리 밝혀두고자 한다. 그리고 그 결과에는 정부, 시민사회, 해외가 함께하는 통일방안 합의에 작은 촉매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필자 주
 
 글 싣는 순서는 아래와 같다.

제1부: 분단 그 너머  
제2부: 왜 한반도식 통일여야 하는가?(독일식 통일은 절대 불가능하다.)  
제3부: 역대정부의 통일방안에 대한 비판적 접근
제4부: 북의 연방제에 대한 옳은 이해
제5부: 자주적 민주정부와 연방연합제 통일정부의 상관성 
제6부: 6.15공동선언 2항에 대한 제대로 된 해석 
제7부: 연방연합제 통일방안에 대한 이론적 고찰 
제8부: 연방연합제 통일방안에 대한 실천적 방안모색 

 

  이번엔 색다른 출발로 시작할까 한다.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시작해보겠다는 것이고, 구체적으로는 프랑스의 작가 폴 부르제가 한 말을 통일문제와 연관시켜 보려 한다. “생각하면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연관하면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통일이 당장 되겠어? 우선은 평화야.’, 또는 ‘통일이 밥 먹어주나?’ 그런 말과 상관있다. 언뜻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고, 현실직시를 정확하게 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를 한 꺼풀만 벗기고 들어가면 엄청난 불편한 속뜻(딜레마)이 숨어있다. 사실상 통일에 관심 없거나, 좀 더 심하게 표현하면 통일 그 자체를 반대하고 있을 수도 있는 그런 속내여서 더더욱 불편하다는 말이다. 평소에 ‘생각하지’ 않는 문제였으니 통일이 밥 먹여줄 리가 없는 것이다. 

  통일은 그렇게 사실상 먼 미래 일로, 혹은 인식으로부터 철저하게 거부당했다. 괜찮기는 과연 괜찮은 것일까? 

  전혀 괜찮지 않다. 먼저는, 헌법조항이 계속 사문화되는 그런 우가 발생한다. 헌법 제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라고 되어있고, 제4장 제1절 66조 ③항에는 대통령의 의무에 대해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라고 명확히 하고 있는데, 이를 이행하려 들지 않는다? 불편할 수밖에 없고, 책임 방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다음으로는, 통일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면 통일을 위한 (목적의식적인)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나, 현실에서는 그러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즉, 전 국민이 통일과 관련해 생각할 수 있게끔 끊임없이 자극을 주고, 부르제가 말했듯이 ‘사는 대로 생각하지 않게’해야 하는데도 그러하지 못하다는 말이고, 구체적으로는 교육을 통해, 정책을 통해, 실천을 통해, 그렇게 다양한 형식과 방법을 통해 통일을 ‘생각’하게끔 해내어야 하는 것이 그 국가적 책무이나, 그러나...

  잠깐, 비교대상이 조금은 엉뚱할 수 있으나, 한 실례를 들어보면 그 심각함이 얼마나 큰지는 매우 분명하게 직시될 수 있다. IQ는 똑똑할지 모르겠으나 사고가 시대적이지 않고, 공동체적이지 않고, 도덕·윤리적이지 않다면 당시 70% 내외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던 문재인 대통령을 겨냥해서도 “문재인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극언과 함께, ‘이딴 게 무슨 대통령’이라며 ‘문재인을 탄핵하자’고 했던 그런 인물(김준교 자유한국당 청년최고위원 후보)들이 판치고, 카이스트 교수라는 사람(이병태)은 “직지심경과 한글에는 구텐베르그의 인쇄술과 달리 보통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혁명적 효과가 없었다”라고 주장한다. 

  사유와 자기성찰이 사라진 사람과 민족에게나 볼 수 있는 그런 극단의 한 형태이자 ‘암울한’ 미래의 한 시그널이고, ‘생각이 사라진’ 민족과 국가가 맞이해야 될 미래청사진이다. 아무것도 희망할 수 없는 그런 암울한 잿빛과 같다.(민족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

  다시 돌아와 그렇게 분단체제에 익숙하게 되면 그와 비례해 분단적 사고는 계속 커지고, 그렇게 분단적 사고에 익숙하게 되어 아무런 생각 없이 살다보면 통일염원은 온데간데없어진다.

  자본과 물질의 힘이 이끄는 데로만 향하게 된다. 이른바 세속적 인격체만 형성되어 미래는 설계되지 않고, 삶은 반복되고 행동은 ‘경직’으로 패턴(a pattern)된다. 다시 말해 익숙한 습관만을 견고하게 하여 생각하는 능력 그 자체를 소멸시킨다. 그래서 결국에는 자신의 행동에 무엇이 문제가 있는지, 뭐가 잘못되고 있는지, 뭐가 부족한지, 무엇을 성찰해야 하는지를 잃어버리는 그런 괴물 아닌 괴물이 만들어진다.

  이른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과 연동된다. 빗대면 가히 ‘잊힘의 평범성’이라 할 만하고, 그렇게 모두는 공범자가 된다. 이미 그렇게 모두가 평범성에 그 공범자가 되어있으니 통일(에 대한 문제)을 잊어도 아무렇지 않게 된다.

1. 왜 통일해야 하는가? 

  해서 언제까지 그렇게 내버려 둘 수만은 없다. 이미 흘러왔다하더라도 예전과 같이 단어 그 자체만으로도 이제는 가슴 설레고, 흥분되게 해야 한다. 과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던 시기와 같이 그렇게 약동해야 한다. 빛바랜 개살구처럼 전혀 감동도 없고, 낡은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그런 옛 추억이 아니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도 있지 않은가.

  원치 않게, 원래 같은 민족이었던 한민족이 외세의 힘에 의해 분단되어졌고, 그 토대는 결국 전쟁과 체제경쟁으로 나타나 분단고착화가 더 심하게 진행되는 그런 원인이 되었으나, 이 악화를 끝내지 않는다면 민족적 불행은 계속되고, 경제와 수출로만 먹고살아야 하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암울하다. 그럼으로 같은 민족이라는 그 당위가 결코 ‘밥’을 먹여주지는 않는다고 하는 그런 앙탈은 지금도 한물간 그런 20세기의 담론이 결코 될 수가 없다.

  분단으로는 분명 밥도, 평화도 그렇게 얻지 못한다. 

  그렇다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반론에 직면할 수가 있다. 정치적으로 볼 때 반드시 같은 민족이라 하여 다 같은 국가를 이루고 있지는 않을 수 있지 않는가? 물론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같은 그런 적합한 예가 있어서 그렇다. 이들 두 국가는 원래 같은 한 민족이었지만, 지금은 각각의 국가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으니 꼭 같은 민족이라 하여 같은 한 국가를 이루고 살 필요는 없다는 그런 논리를 성립시킬 수가 있다. 그럼으로 ‘같은 민족이라는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반드시 같이 살아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논리를 성립시킬 수가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논리는 하나는 보았지만, 둘은 보지 못하였다. 다시 말해 이 같은 논리를 백번 양보하더라도 한반도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매우 많은 무리가 뒤따른다는 말이다.
 
  근거는 다음과 같은 ‘부정확한’ 인식이 그 한 이유이고, 이는 대한민국(이하, 한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조선), 독일과 오스트리아 간에는 도저히 등가로 비교될 수 없는 그런 결정적 차이가 하나 있어서 더더욱 그렇다. 

  다름 아닌, 독일과 오스트리아 간에의 그 민족성은 ‘같은’ 생물학적 동질성뿐이지만, 한국과 조선 간에는 그런 같은 생물학적 동질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집단으로 형성된 그런 민족적 동질성을 갖고 있어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같은 그런 단순비교는 성립하지 않는다.

  같은 언어, 같은 핏줄, 같은 문화, 같은 역사성을 공유하고 있고, 그것도 단군민족형성이래로 1천여 년 동안 그렇게 ‘함께’ 살아온 그런 민족국가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한국과 조선 간에는 그렇게 ‘있고’와 ‘없고’가 명확하다. 

  또, 남과 북의 입장에서 통일을 해야만 하는 진정한 근거에는 민족자주성 회복문제가 남아있어서 그렇다. 그리고 이 역시 독일의 분단과 통일과정을 자주 비교하는데, 여기에도 그 결정적 차이는 분명 있다. 전혀 다른 결과가 있다는 말이다.

  다름 아닌, 한반도의 분단은 독일과 같이 분단이라는 현상의 결과는 똑같을 수 있겠으나, 그 내용과 본질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양상을 갖고 있다는 말일 테고,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대목이다.
  
  이른바 한반도의 분단이 독일과 같이 우리 민족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같을지 모르나, 한반도의 분단은 독일과 같은 그런 전범국가가 아니기에 독일과 같은 그런 전범국가의 사례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미소의 전후처리과정으로, 여기서도 그 핵심은 외세에 의해 분할· 점령되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는 점이다. 패권전쟁을 일으킨 것도, 다른 국가를 점령한 것도 아닌데 그 책임을 물어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단되었다? 뭔가 정상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식민해방과정에서는 온전히 하나의 민족국가로 되돌아왔어야 했다. 그런데도 외세에 의해 자의적이고도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 국토가 강제분할 당한 것은 민족으로는 매우(굉장히) 수치스러운 일이고, 결과도 국가적 통합성은 엄청 파괴되고, 민족동질성은 위협당하고 피폐화되었다. 비례해서 당연히 그런 상황에서는 민족자주성이 온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후 상황은 굳이 설명 드리지 않아도 될 만큼 그 고통과 아픔은 매우 컸다.

  민족적 차원에서 진정한 자주는 그렇게 회복되지 못하였고, 못한 만큼, 한쪽에서는 OECD 가입국인데도 진정한 주권국가인지 그렇게 의심받아야 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전략국가인데도 ‘가난한 국가’로 비아냥 받아야만 한다. 유일분단국으로 남아있는 한 ‘언제까지’ 그렇게 국제사회의 조롱거리 대상인지 모른다.  

  원하지 않은, 수모당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고통과 슬픔은 그렇게 곳곳에  쓰며있다.

  이는 한 국가를 이루는 가장 포괄적인 사회적 집단의 한 형태가 민족이라 했을 때 그 민족의 온전한 자주성은 완전한 국가통합으로 나타나야 하고, 그것이 그 정상이라 했을 때 그것도 우리민족 스스로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외세의 의해 그렇게 되었다면 그 한 국가가 분단되어 겪는 슬픔과 고통, 비아냥들은 반드시 민족자주성과 반비례하게 된다. 

  자주적으로 살며 살아가려는 민족적 요구가 철저하게 거세당한 민족의 불행이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다. 그것도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인해 겪는 민족적 고통과 불행이니, 이보다 더 큰 고통과 불행이 어디에 있을 것이며 그리고 그 모든 만 악의 고통이 그렇게 분단에서 기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어찌 분단극복에 사활하지 않을 수 있겠단 말인가? 더구나 외세의 강요에 의해 형성된 분단체제라면 더더욱 그러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분단과 민족적 자주성은 절대 양립할 수 없으니 더더욱 그러해야 하고, 동시에 그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것이 단순히 남북관계를 과거의 분단 이전상태로 복구되는 그런 문제가 될 수 없음도 분명히 해야 한다. 

  이유는 민족자주성이라는 것이 자주적으로 살며 행복을 누리려는 그런 민족적 의지와 요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일 텐데, 또 외세의 강요와 강권에 의해 짓밟힌 민족의 사회·정치적 생명을 되찾는 것이 그 근본이라 할 수 있을 텐데, 다시 하나 된다는 문제를 그렇게 단순 분단이전 상태로 복구되는 그런 민족통합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민족의 사회· 정치적 생명인 자주성이 올곧은 방향으로 발현되는 것이어야 하고, 주권국가로서의 부강조국 미래로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외세에 의한 강제적 국토분할로 인해 파괴된 그 국가적 통합성을 회복하고, 또 민족분열이 장기화되면서 발생한 민족정체성위기를 민족동질성 수호와 그러한 방향에서의 민족적 자주성을 완성하는 그런 민족사 최대의 절체절명의 위업과도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
 
2. 통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통일이 그렇게 절체절명의 위업인 것으로 사고된다면, 우리는 다음의 문제에 귀 기울어야 한다. 분명하지만, 반드시 분명해야 하는 것은 한반도에서의 통일은 철저하게 자주적이고, 평화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지지와 협력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근거도 비교적 명확하다. 앞의 ‘자주적’은 분단의 성격에 따른 근거이고, 뒤의 ‘평화적’은 분단극복방법에 관한 원칙문제이니 더더욱 그렇다. 다시 말해 외세에 의한 분단과 전쟁의 경험은 분단극복의 원칙과 방법을 그렇게 명확하게 강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 왜 자주적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먼저 좀 더 구체적으로 상술해보자.

  분단의 원인과 성격을 짚어보면 이는 금방 나온다. 먼저는, 한반도에서의 국토분단이라는 것이 미소가 일본군 무장해제를 그 명분으로 하여 진행된 그런 인위적 38선 분할이라는 것이 그 결정적 증거이고, 그로부터 한반도의 통일문제는 그 근본에 외세를 반대하고, 전 민족이 단합하고 단결하여 전국적 범위에서의 자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그 통일의 본령으로 하게 되고, 때문에 통일은 반드시 외세를 반대·배격하는 그런 자주적 원칙을 띠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통일 경험을 벤치마킹할 수는 있으나, 자주적 원칙의 문제는 한반도 통일의 고유성을 띄는 그런 문제이다.

  다음으로는, 분단지속의 한 원인이 남북이 각기 자신들만의 정부수립으로 인해 생긴 분열요인, 즉 체제분단 성격과 그리고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에 있다. 특히, 한국전쟁은 필연적으로 민족을 서로 원수가 되어버리게 한 그런 갈등적 상황을 발생시켰고, 비례해서 그런 아픈 상흔은 필연적으로 통일이 절대 전쟁 없이 평화적으로만 이뤄져야 함을 강하게 안내해 준다.

  한편, 국제정치이론의 관점에 볼 때 국토분단은 국토가 분단되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체제가 들어설 수밖에 없고, 그 다름은 결국 체제경쟁으로 나타나 전쟁과 같은 그런 극단적 한 형태가 발현된다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은 대상동학의 관점에서 그 반대편 평화와도 같다. 동시에 그 평화는 반드시 통일을 통해 완성시켜내려는 그런 속성을 갖기도 한다. 바로 그 극단적 한 형태가 전쟁이고, 그래서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통일전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또한 분명한 것은 그 (통일)전쟁 역시 당시 미소라는 냉전질서를 뛰어넘지 못하고 그 하위체제로서의 남북체제로 포섭되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전쟁은 국제전이면서도 내전이고, 내전이면서도 국제전인 그런 전쟁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고, 결과도 38°체제라는 휴전체제를 낳았고, 지속되어온 분단체제는 더 영속하게 되는 그런 참담한 결과를 낳게 된다.    
 
  그렇게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값비싼’결과를 낳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전쟁은 비록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였으나, 한반도 전역을 초토화시킬 만큼의 가공할 재앙이었다. 인구재앙은 물론, 전 국토의 산업시설과 기반, 경제는 엄청난(상상도 못할 정도의) 후유증을 유발시켰다. 곧 역설적으로 이는 향후 전개될 한반도의 통일방식을 철저하게도 평화적인 방식이어야 함을 각인시켜준 결과를 만들어준다.

  뿐만 아니라, 국토분단의 완전해소 없이 안정적인 평화가 없음도 분명히 하였다. 말할 필요도 없이 작금의 분단현실이 이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냉전체제와 분단체제를 그대로 두고서는 남북 간의 사소한 긴장도 전쟁으로 비화될 그런 가능성을 내포하고, 세계전쟁(제3차 세계대전, 핵전쟁)의 화약고로 전환하게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어서 그렇다.   

  그러니 분단극복은 이렇듯 △세계적 차원의 냉전해소와 △민족적 차원에서의 평화와 번영을 담보하는 그런 핵심 사안임을 각인해준다.

분단극복(=통일) 효과

- 세계적 차원의 냉전해소

- 민족적 차원에서의 평화와 번영

 
 이른바 통일의 완성도적인 측면에서는 자주적 독립국가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내는 그런 본질문제로, 현실국제사회에서는 국제적 지지와 협력을 통해 냉전체제해소와 최종적으로는 UN가입에 의해 마무리됨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유는 (UN)가입 그 자체로 자주독립국가로서의 면모가 완결되어진다는 의미에서의 문제여서 그렇기도 하거니와, 근대국가가 형성된 이후 분단국가가 재통합될 시에는 예외 없이 유엔가입이 이뤄진 사례에서도 그 사실이 입증되어서도 그렇다.  

  해서 그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릴 수가 있다.

  우선은, 우리 통일에는 우리의 길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 길은 독일의 길, 예멘의 길, 베트남의 길도 아닌 ‘우리방식’만의 통일이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의 경우는 국제전범국가로서의 모델이기에 우리와는 전혀 다른 통합의 경험이고, 그 방식 또한 흡수통합의 케이스인데, 이는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합 하였지만, 이에 따른 경제문제와 동서독 갈등문제가 여전하다는데서 우리 롤 모델((Role model)이 되지는 못하며, ‘양안제’라는 중국식 통일방안 또한 우리 한반도가 걸어온 역사와 처지, 분단과정에서 맞닥뜨린 분단경험과 실정이 중국의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다.(그럼으로 중국식 또한 적용대상이 아니다.)

  또, 왜 평화적인 방식이어야 하는 문제도 우리 스스로의 한국전쟁경험과 베트남의 경우 무력통일방식이었으나 그 후유증이 지금도 현재진형으로 나서고 있어 여전히 완전한 통합에는 갈길 멀고(북베트남과 남베트남 간의 갈등과 앙금이 완전 해결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예멘의 경우도 합의통일을 이룩하였지만 결국에는 다시 분단되었고, 이후 다시 전쟁을 통해 통합되었으나 ‘사실상’의 내전상태로의 돌입은 합의통일이 갖는 그 한계가 명확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통일방식은 철저하게 자주적이면서도 평화적인 방식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3.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과 연방통일정부와의 상관성

  한반도에서의 통일문제는 이렇듯 여타 분단국가와는 달리 남북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상황과 조건이 있다.

  우선은, 보편적인 의미에서 어느 제국주의의 한 식민국가가 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면서 나서는 그런 과제, 즉 그 제국주의로부터의 완전한 독립해방(자주권 회복)과, 그 국가의 봉건성, 혹은 반(半)봉건성을 뛰어넘을 것을 요구하는 그런 문제, 이른바 ‘자주화’의 과제와 ‘민주화’의 과제가 그렇게 통합해서 나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한반도에서의 통일문제는 여기에다 ‘분단극복(=통일)’의 과제가 하나 더 추가된다. 이유는 완전한 독립과정에서 그 형태가 ‘완전하지(=독립)’못했고, ‘불완전한(=분단)’ 그런 형태로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어서 그렇다. 그래서 한반도에서의 완전한 자주권 회복문제는 분단을 극복해야만 완성되는 그러한 한 특성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그 외세와 그와 결탁했던 그런 예속세력의 민족분열책동을 반대하고, 전국적 범위에서의 민족적 단합과 단결, 자주권을 회복하는 그런 차원에서의 조국통일운동전개가 필요해진 것이다.    

  해서 한반도에서의 완전한 자주권 회복문제는 통일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야만 풀어질 수 있는 그런 문제가 된다.

  그러니 당연히 그 첫째에는 전 민족적인 힘과 역량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그런 통일전선전략과 노선이 필요하고, 그 둘째에는 외세(특히, 미국)의 부당한 지배와 간섭을 극복해낼 수 있는 그런 정부가 들어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 두 조합은 반드시 앤드(and)적어야 한다.

  이유도 비교적 명약관화하다.

  첫째는, 전 민족적인 힘과 역량을 모을 수 있는 그런 조직적 구심체가 필요해서 그렇다. 이른바 조국통일전선역량이고, 이는 다시 민족대단결의 원칙에 따라 사상과 이념,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떠나 6.15공동선언을 동의하고 지지한다면 그 어떤 민족구성원이라 하더라도 다 함께 참여하는 그런 통일전선운동체가 되겠다.

  이유는 그러한 전선조직만이 미국의 벽을 넘어설 수가 있으니 그렇다.  다시 말하면 조국통일문제가 주권국가로서의 미국반대 내용뿐만 아니라, 전국적 범위에서의 자주권 회복문제임으로 인해 전민족인 단합과 단결, 즉 남북해외의 모든 역량이 총집결해야만 가능한 그런 문제이기에 반드시 북과는 연대연합의 관점에서 민족공조를 해야 하며, 비록 그 정권이 한계가 있다하더라도 대북화해정책에는 적극 지지· 협력해야 하고, 나아가서는 비록 그 세력이 보수세력이라 하더라도 6.15공동선언을 지지한다면 이들 세력들과도 연대·연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원칙은 이른바 민족대단결의 원칙에 따라 사상과 이념,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넘어 6.15남북공동선언에 동의하는 모든 민족구성원들이어야 한다. 조국통일운동의 본령과도 그렇게 딱 맞아 떨어진다.

  둘째는, 그 첫째로부터 지금의 문재인 정부가 촛불정부다운 성격에 부합하게 정국을 운영할 수 있도록 최대한 협력할 것은 협력하면서도, 비록 낮은 차원이기는 하나 미국반대의 일 주체가 될 수 있도록 견인해내는 그런 광범위한 활동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 이유는 아래 ‘셋째는’에서 약술하기로 하고, 그렇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연속적인 민주정부로의 정권재창출을 통해 최대한 지지·엄호해야한다. 뿐만 아니라 조국통일의 일 주체, 그것도 평화를 넘어 통일문제를 전면화할 수 있게끔 강제해내어야 한다. 

  그를 위해 남측의 모든 통일애국역량은 민족대단결의 원칙에 따라 광범위한 조국통일전선구축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사상과 이념, 정견과 신앙에 상관없이 6.15남북공동선언에 동의하는 그 어떤 세력이라도 끌어안고 연대·연합하고자 하는 그런 통 큰 자세와 열린 마음가짐으로 조국통일전선에 최대한 많은 역량을 결집해 외세의 개입을 차단하고 단결의 힘을 과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당면한 조국통일운동과제를 명확히 제시하고, 그 핵심내용에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철회의 당위성과 연방연합 통일방안에 대한 대중적 합의운동을 적극 조직전개하고, 북미(남중)간의 평화협정체결을 강제해내는 그런 실력을 발휘해내어야 한다.     

  셋째는, 그 정치적 의미로 볼 때 남측정부에 민주정부가 들어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인데, 그 최대치에 ‘자주적’형태의 민주정부수립이 있고, 그 최소치에 ‘민주연립’정부구성이 있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도 이 문제는 미국의 부당한 지배와 간섭을 이겨낼 수 있는, 달리 말하면 비정상적인 한미동맹 체제를 극복해낼 수 있는 그런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해내거나(그런 정부구성은 진보정당이 집권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현실적인 의미에서 그 (주체적) 역량 상 당장 어렵다면 민주개혁세력과 진보세력이 연합하는 그런 정부형태, 다름 아닌 민주연립정부 정도의 수준(민주당+진부정당 연합의 정권형태)은 되어야만 남북 간 통합성을 높여나갈 수 있는 그런 정책을 구사할 수 있다.

  당장 보더라도 한미워킹그룹에서 확인받고 있는 것이 있다. 미국의 내정간섭 극복 없이는 그 어떤 형태의 통일을 향한 여정이라 하더라도 그 한 발자국 띠기가 정말 어려움을 알 수 있고, 구체적으로는 개성공단 기업인의 단순 방문도, 결핵약품지원사업인 타미플루 지원사업은 인도적 지원(유엔에서도 허용하는 그런 문제조차)사업으로 미국의 허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그 반출을 허용 받아야 할 만큼의 현대판 ‘미군정(=현대판 조선총독부)’이 실시되고 있고, 나아가 철수할 생각이 전혀 없으면서도 주한미군철수 카드로 방위비 인상과 내정간섭, 북미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그런 미국의 모습, 또 북핵을 그 빌미로 해서는 동북아에서의 패권유지와 제재국면지속의 명분으로 활용. 이 모든 상황은 그런 정부(=자주적 민주정부이거나 민주연립정부) 등장 없이는 아주 자그마한 통일진전은 고사하고, 지속가능한 남북교류협력 조차도 힘 든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뿐만 아니다. 통일문제가 완전한 자주권 회복문제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하는 것은 통일문제가 전국적 범위에서 완전한 자주권을 회복하는 그런 문제이기에 그 자주권을 짓밟고 있는 외세, 즉 현실적으로는 반미자주화의 문제를 포함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그런 사실의 문제에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교조와 개량주의 경향을 정확히 구분하고, 정확한 반미자주화개념을 정립하는 문제가 나선다.

  즉, 통일문제 해결을 위한 반미자주화와 한 국가의 주권적 의미에서의 미국반대에는 그 동일성도 있지만, 그 차이성도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해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예는 이렇다. 불평등한 한미동맹을 정상화하는 그런 문제, 불평등한 한미협정을 평등한 한미협정으로 정상화하는 그런 문제, 부당한 방위비분담을 재조정하는 그런 문제, 주권국가에 대한 미국의 내정간섭(워킹그룹과 같이) 그런 문제 등은 주권국가와 주권국가가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맺어진 쌍무관계가 불평등해서 나타나는 그런 문제이기에 이를 통일문제해결을 위해 나서는 그런 반미자주화와 같은 전략노선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른바 국가이익을 되찾기 위한 그러한 범위 내에서 벌어지는 미국반대와, 조국통일문제와 연동된 그런 반미자주화는 철저하게 구분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주한미군철수, 북미평화협정 체결, 미국의 대북적대정책 철회 등이 바로 조국통일문제와 연동된 그런 반미자주화의 내용이다.

  해서 앞의 미국반대는 자주적 민주정부형태가 아니더라도, 즉 민주연립정부(혹은, 촛불정부) 정도가 되더라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미국반대내용일 수 있고, 후자의 (반미)내용은 자주적 민주정부가 수립되어야만 완전히 해결될 수 있는 그런 반미자주화의 내용이다.

  그래놓고 본다면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보야 할 것이 하나 나선다. 다름 아닌, ‘낮은 단계가 해결되어야만 다음으로 높은 단계로 이행해나갈 수 있다’는 그런 사고와 정부구성의 형태 또한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를 구분하여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단계별로 나눠’ 버리는 그런 이분법적 사고이다.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이다. 위의 교조냐, 개량이냐를 가름하는 그런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고, 전략과 전술을 구사함에 있어서도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쉬운 것에서부터 어려운 것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과 이를 이원화하고 분절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이 다른 차원의 문제이니 더더욱 그렇다. 

  다시 조국통일문제의 본령얘기를 아니할 수 없다. 앞서 내내 얘기했듯이 (조국)통일문제는 전국적 범위에서의 자주권 회복문제와 이를 위한 전민족적인 힘과 역량을 하나로 모으는 그러한 단합과 단결의 문제였음을 확인하였다면, 통일문제는 준비된 주체역량과 정부의 구성형태에 따라 그 소요시기의 걸 맞는 내용과 방도로 통일의 근본문제로 ‘지향’시켜 나가야 하는 그런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다. 했을 때 그 중심은 주체역량의 문제를 남쪽의 단독역량만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고, 전민족인 힘(혹자는 이를 남·북·해외를 포함하는 3자연대의 원칙이라 부른다.)을 보는 것이다.

  즉, 남쪽 정부만의 힘의 형태가 아닌, 전국적 범위에서의 광범위한 통일애국역량과 함께, 그러한 역량으로 보여 지는 통일정세는 비례적으로 분절적이고 이원적 접근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설령,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여전히 분절적이고 이원적 접근문제가 남아있다면 이는 분명 조국통일문제를 남한관점에서만 본다는 것이고, 3자연대관점과 그 역랑의 총합으로 만들어지는 통일정세를 여전히 보지 못하다는 것과 하등 다르지 않다.

  자신을 되돌아 보아야할 문제가 그렇게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저서로는 『수령국가』(2015)외에도 『사상강국: 북한의 선군사상』(2012), 『세습은 없다: 주체의 후계자론과의 대화』(2008)가 있다.

강의경력으로는 인제대 통일학부 겸임교수와 부산가톨릭대 교양학부 외래교수를 역임했다. 그리고 현재는 부경대 기초교양교육원 외래교수로 출강한다.

주요활동으로는 전 한총련(2기) 정책위원장/전 부산연합 정책국장/전 부산시민연대 운영위원장/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사무처장·상임이사/전 민주공원 관장/전 하얄리아부대 되찾기 범시민운동본부 공동운영위원장/전 해외동포 민족문화·교육네트워크 운영위원/전 부산겨레하나 운영위원/전 6.15부산본부 정책위원장·공동집행위원장·공동대표/전 국가인권위원회 ‘북한인권포럼’위원/현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부산지역본부 운영위원(재가)/현 사)청춘멘토 자문위원/6.15부산본부 자문위원/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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