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연호(年號) 공표로 일본 열도가 뜨겁다. 오는 5월 1일 새롭게 시작될 ‘레이와(令和)’ 시대에 대한 흥분이다. 일본의 대대적 국가공사(國家公事)가 다시 시작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우연인 것일까. 공교롭게도 그 공표된 시기가 우리와 무관치 않다.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일(4월 11일)을 열흘 앞 둔 4월 1일에 돌출되었다. 이어 4월 9일에는 5년 뒤에 시행될 새로운 지폐 디자인도 전면 공개했다. 더욱이 1만엔권에 들어 갈 지폐의 인물이 식민지 경제의 거두였던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 1840-1931년)라는 점도 왠지 찝찝하다. 혹여 그들의 환호로 우리 임정수립 100주년 분위기에 김 빼기를 하려던 복심은 아니었을까.

연호란 임금의 재위 연대에 붙이는 칭호다. 왕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정의하는 일본이나, 제왕(帝王)의 기년(紀年)을 칭하는 이름으로 개념화하는 중국 등, 동북아 삼국의 연호에 대한 정의는 큰 차이가 없다. 연호에 대한 문화적‧역사적 배경이 흡사하기 때문이다.

일본에 있어 연호는 남다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연호 사용 국가인 점과 일왕을 중심으로 한 일본 집체주의(集體主義)의 상징이라는 것 때문이다. 특히 이번 연호 채택은 두 가지가 눈에 띤다. 연호의 출처를 중국 고전에서 인용해온 관행을 깨뜨렸다는 것이 하나다. 또 하나는 연호 인용의 출처가 일본 고전 시가집인 『만엽집(萬葉集)』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에도시대 이후 일본의 주요 명제는 탈중국‧탈조선이었다. 그러나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연호인 ‘헤이세이(平成)’에 이르기까지 역대 247번째 연호 가운데, 출처가 알려진 것은 모두 중국의 고전이다. 역설적이게도 중국의 『주역』과 『상서』, 그리고 『사기』 등에서 연호의 의미를 가져왔다.

근대 일본의 국왕 중심 체제를 이끈 메이지(明治, 1868-1912)라는 연호부터 보자. 『주역』「설괘(說卦)」에 근거를 둔다. “이(離)괘라는 것은 밝음이니 만물이 모두 서로 보니 남방의 괘다. 성인이 남쪽을 대면하여 천하의 소리를 듣고는, 밝음을 향하여 정치를 하니, 이는 대개 그 이(離)괘에서 취함이다.(離也者明也 萬物皆相見 聖人南面而聽天下 嚮明而治 蓋取諸此也)”에서 기인하고 있다. 곧 ‘밝은 정치’와 연관된 연호가 메이지다. 또한 다이쇼(大正, 1912-1926)도 『주역』「단사(彖辞)」에 실린 “바른 것으로 크게 형통하는 것이 바로 하늘의 명이다.(大亨以正 天之命也)”라는 구절에서 뽑아온 구절이다. ‘바른 것으로 크게 형통’하라는 가르침이다.

쇼와(昭和, 1926-1989) 역시 『상서』「요전(堯典)」의 “백성은 밝고 밝으며, 모든 나라와 협화한다.(百姓昭明 協和萬邦)”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백성들의 밝음과 다른 나라와의 협화’가 강조된 연호다. 끝으로 헤이세이(平成, 1989-2019)도 『사기』「오제본기」와 『서경』「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내용을 가져왔다. 『사기』의 “아버지는 바르고 어머니는 인자하며 형은 우애하고 동생은 공손하며 자식이 효도하면 안이 평온하고 바깥은 이루어진다.(父義 母慈 兄友 弟恭 子孝 内平外成)”는 내용과, 『서경』의 “땅은 평온하고 하늘은 이루어진다.(地平天成)”는 구절이다. 헤이세이라는 연호는 ‘평온과 이룸’의 소망이 담겨있는 말이다.

기원 후 645년, 고토쿠(孝德) 일왕의 다이카(大化)로 시작한 그들의 연호가 마침내 일본의 정체성을 담은 ‘레이와’로 바뀌게 되었다. 꼭 1,374년만의 일이다.

『만엽집』에 실린 ‘레이와’의 전거(典據)는 ‘初春令月 氣淑風和(새봄의 좋은 달, 기운 맑고 바람 자다)’이다. 일본 수상 아베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마음을 맞대면 문화가 태어나고 자란다는 뜻이 담겼다”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가 새 연호 ‘레이와’의 영어식 의미에 대해 ‘아름다운 조화(beautiful harmony)’로 설명할 것을 각국 일본대사관에 지시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레이와’의 출처인 『만엽집』의 본질부터 알아보자. 이 책은 7~8세기 후반에 걸쳐 존재한 일본 전통시가를 모은 것으로 『고사기(古事記)』‧『일본서기(日本書紀))』와 함께 일본 국학(國學)의 3대서(三大書)다. 또한 『고사기』‧『일본서기』‧『고어습유(古語拾遺)』‧『선명(宣命)』‧『영의해(令義解)』 그리고 『연희식(延喜式)』‧『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풍토기(風土記)』 등과 함께 일본 신도(神道)의 주축 신전(神典)이다. 한 마디로 『만엽집』은 일본정신 그 자체다. 일본 수상 아베가 새 연호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만엽집』을 '국서(國書)'라고 부른 이유이기도 하다.

또 다시 구밀복검(口蜜腹劍)하는 일본의 이중성이 도마 위에 오른다. 다도(茶道)와 꽃꽂이를 즐기며 칼을 휘두르던 사무라이의 모습처럼, ‘레이와’의 ‘따사로운 겉’과 ‘섬찟한 속’은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레이와’로 내세운 다테마에(たてまえ, 建前)가 ‘아름다운 조화’라면 그 혼네(ほんね, 本音)는 팽창적 ‘일본정신’이다.

하기야 우리를 대함에 있어 일본은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구별도 없다. 식민지 시절, 노예를 대하는 주인처럼 몽둥이면 통하는 것이 조선이라는 인식이었다. 해방 이후로도 그저 멸시와 하대, 무시와 방관뿐이었으며, 우리와의 이해 충돌에서는 무조건 반발하고 반대하는 것이 그들의 생리였다.

분명 일본은 우리와의 관계에서는 이성을 잃는다. 거의 병적으로 발작하는 그들이다. 이유가 있을 듯하다. 이 대목에서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다. 일본인의 저술 『충구발(衝口發)』이라는 책이 그것이다.

근세 일본의 사상 논쟁 중 가장 주목을 끈 사건 중의 하나가,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와 우에다 아키나리(上田秋成, 1734-1809)의 논쟁이다. 세칭 ‘일본신(日の神)’의 논쟁으로 알려진 그 중심에는 『충구발』이라는 저술이 있다.

1781년 후지와라 사다모토(藤井貞幹, 1732-1797)가 저술한 『충구발』은, 그 출간과 함께 일본의 지식계를 흔들어 놓았다. 당대 최고의 국학자 노리나가의 『겸광인(鉗狂人)』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노리나가는 사다모토가 일본의 황통(皇統)을 폄훼하였다고 분개하면서 ‘미친 놈(狂人)’으로까지 몰아세웠다. 그러한 광기(狂氣)를 품고 사마모토의 입에 족쇄를 채우겠다고 저술한 것이 『겸광인』이다. 그리고 『겸광인』의 비이성적 논리에 반박해 나오는 것이 아키나리의 『겸광인상전추성평(鉗狂人上田秋成評)』이며, 이에 노리나가가 재반박하며 쓴 것이 『겸광인상전추성평동변(鉗狂人上田秋成評同弁)』이다.

노리나가의 흥분처럼 사다모토는 ‘미친 놈’이었을까. 아니다. 그는 교오토 출신의 극히 이성적인 인물이었다. 더욱이 불학(佛學)과 유학(儒學)은 물론 국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고고학자였다. 그러면 『충구발』의 어떤 내용이 노리나가의 광기적(狂氣的) 반응을 촉발한 것일까. 그리고 어떤 주장이 치열한 사상 다툼의 원인이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조선과의 연관성 문제였다.

사다모토는 황통의 근간이 되는 신대(神代)의 연수가 모두 터무니없는 날조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고증을 통해 일본의 언어, 성씨(姓氏), 국호(國號), 의복, 제사, 박수예절(拍手禮節), 화가(和歌), 국사(國史), 제도(制度) 등의 모든 것이 조선으로부터 건너왔음을 주장했다. 일본의 국학(자)이 공들여온 그들의 신국관(神國觀)과 국체(國體)의 근본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은 것이다.

노리나가는 일본 국학을 대성한 인물이다. 탈중국적 사고를 통한 일본 고유의 신국(神國) 사상을 논리화한 장본이이다. 이것이 후일 히라타 아츠타네(平田篤胤, 1766-1843)가 강조한 일본신국관(日本神國觀)의 원천이 된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기재를 모두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면서 삼한이 일본에 조공한 나라로 날조한 인물도 노리나가였다. 더욱이 진구황후(神功皇后)는 신의 계시를 받아 삼한을 토벌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도 신의 뜻으로 정당화시켰다. 후일 정한론의 배경도 여기에서 잉태되었다.

『충구발』의 내용을 보면 이러한 『고사기』 등의 내용이 모두 날조다. 일본 정신의 뿌리인 신도(神道)의 원류도 조선에 기원을 둔다. 일본은 신국이 아니라 조선의 아류국이며, 일본 국체(國體, 일본의 정체성) 역시 그 정신적 고향은 조선에 있다. 당대 국학의 거두였던 노리나가에게는 더 없는 충격이었다. 그에게 천황은 신(神)이었으며, 일본은 신국(神國)이요 팔굉(八紘)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성을 잃어가며 『충구발』을 ‘미친 놈’의 ‘미친 소리’로 몰아세운 배경이다.

사다모토의 언급처럼 일본의 화가(和歌) 역시 그 정신적 고향은 우리다. 그 화가의 원류인 『만엽집』의 작가들도 한반도로부터 건너간 도래인(渡來人)들이 주류를 이룬다. 그 주제를 보더라도 도래인들이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이 그 주종이다.

그렇다. 일본이 우리에 대해 발작적으로 반응하는 배면에는 그들의 태생적 한계에 대한 자괴감이 있다. 그것이 일본의 ‘혼네’에 숨은 ‘진정한 혼네’다. 모든 것이 우리의 아류(亞流)로 귀착되는 일본사의 트라우마가 일본 위정자들에게는 견뎌내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일본이 괴로워하는 진정한 속내도 여기에 있다.

아쉬운 것은 우리 정부의 반응이다. 일본의 의도적 도발이라 할 연호 발표와 새 지폐의 공표에 대해 누구 하나 의미 있는 대꾸도 못했다. 더욱이 우리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보여준 임정수립 100주년 기념 발언은 졸렬하다 못해 창피한 수준이었다. 혁신적 포용국가, 정의 대한민국, 평화 한반도라는 뜨뜻미지근한 구호가 임정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메시지라니, 아쉬움을 넘어 황당함마저 감출 수 없다.

학교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으로도, 애국충정을 고무하는 후방 부대 소대장의 정훈교육으로도 번연히 할 수 있는 그런 소리들이다. 아니, 나라 걱정하는 국민들이면 누구나 던질 수 있는 흔하고 흔한 구호들이다. 정치지도자들의 역사의식은 뒷전에 두고라도, 임정수립 100주년의 메시지 치고는 너무도 맥 빠지고 기가 막힌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어떤 곳인가. 식민지의 한을 쏟아내며 피를 흘렸던 3‧1독립항쟁이 빚어낸 망국민의 정신적 공동체였다. 더욱이 올 해는 그 고귀한 자취의 시간이 흘러 100주년이 되는 해 아닌가. 100년은 1년을 백 번 쌓아야 맞을 수 있는 시간이다. 지나면 다시 맞을 수 없는 시간이 또 그 100주년의 의미다. 언사(言事)와 행위 하나하나가 100년의 무게를 대신했어야 할 올 해 그 날이었다.

그러나 무엇을 했는가. 그저 평범한 날, 평범한 사람들이 외쳐댈 수 있는 구호를 우리 정치지도자들은 되뇌었을 뿐이다. 임정수립의 정신을 되살린답시고 호들갑스런 이벤트만 우리 사회에 난무했던 것도 빼 놓을 수 없다. 100년 전 임시정부를 수립한 우리 선열들의 진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의 ‘레이와’ 선언과 ‘새 화폐 사용’의 예고가 임정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가장 큰 이슈가 되었다는 것이 마음을 후빈다.

진정 임정수립 100주년을 맞아 일본에게 던져줄 메시지는 없는 것인가. 다시금 『충구발』과 『만엽집』의 교훈을 떠올리며, 독립운동의 정신적 대부였던 나철이 일본총리에게 보냈던 서한(書翰, 1916년)을 되새겨보자. 일본 정체성의 뿌리가 모두 한국에서 건너갔다는 다음의 훈계가 그것이다.

“대화(大和)의 옛 사기(史記)를 살펴보건대, 일본 민족의 근본과 신교(神敎)의 본원이 다 어디로부터 온 것이며, 신사(神社)의 삼보한궤(三寶韓几)와 궁내성(宮內省)의 오십한신(五十韓神)이 다 어디에서 왔으며, 의관문물(衣冠文物)과 전장법도(典章法度), 그리고 공훈을 세운 위인들이 다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가.”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종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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