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종교 중광자이자 항일독립운동의 대부 홍암 나철 선생의 마지막 모습. 1916년 음력 8월 5일 사리원역 앞 사진관에서 '순명 조천'을 앞두고 기념사진을 남겼다. 최근 영화 ‘사바하’는 이 사진에 배우의 얼굴을 합성해 대표적인 사이비 교주의 모습을 연출했고, 대종교 측으로부터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최근 물의를 빚고 있는 영화 ‘사바하’로 인해 대종교와 초대 교주 홍암 나철 선생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영화 ‘사바하’는 홍암 나철(弘巖 羅喆, 1863~1916) 선생의 사진을 합성해 배우의 얼굴을 입히고 사이비 종교 지도자로 비하했다. 물론 영화사는 이런 잘못에 대해 전혀 고의도 아니고 의도적으로 하지도 않았다고 해명했다.

일반인의 사진을 합성해도 문제가 될 일인데, 독립운동가의 사진으로 이런 장난(?)을 치는 일이 식민지배를 당했던 나라에서 공공연히 일어난다. 일제치하 우리나라 독립운동 역사가 현재 우리사회에서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일제치하 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독립운동 역사 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사건 중 하나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일 것이다. 이 청산리 대첩을 인적, 물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주도한 종교는 어떤 종교일까? 라는 물음에 일반인들은 의아해 할 것이다.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일어난 단재 신채호, 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한 박은식 등의 민족사학에 영향을 준 종교는? 이 물음 자체도 생소해 할 것이다. 일제 식민지 기간 동안 항일무장세력의 본거지로 만주에서만 10만명 이상의 순교자를 낸 종교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어떨까? 역시 우리나라에 그런 종교가 있었던가 고개를 갸웃하게 될 것이다.

이 질문에 공통된 답은 ‘대종교(大倧敎)’이다. 대종교가 답이 되는 일제치하 독립운동 사건과 인물에 관련된 질문은 수십 줄을 더 쓸 수 있다. 만약 이 물음을 ‘종교’가 아닌 ‘인물’로 바꿔서 질문한다면, 그 답은 바로 홍암 나철 선생이 된다.

나철 선생은 1863년 전남 보성군 벌교읍(당시 낙안군 남상면)에서 태어났다. 구한말 과거에 급제해 승정원 등에서 공직생활을 하였으나, 쓰러져가는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스스로 사임하고 항일운동에 뛰어들어 ‘을사오적 처단투쟁’을 벌였고, 국권을 잃어가는 상황에서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1909년 단군교(1910년 ‘대종교’로 개칭)를 다시 일으켰다.

민족정신을 함양한다는 이유로 일제는 급속하게 교세를 확장하던 대종교의 활동을 철저히 불법화하고 탄압하였다. 민족정신 수호의 중심이 되는 단군을 신화속의 인물로 철저히 배격하고 자신들의 신도(神道)를 퍼트려 민족정신을 짓밟았으며, 결국 1915년 종교통제안을 공포하고 대종교인을 집중 투옥, 감시하였다.

국내 활동이 거의 불가능해진 대종교는 총본사를 백두산 북쪽으로 옮겼으며, 만주지역으로 이주해간 조선인들에 의해 민족정신과 항일정신이 합쳐지면서 절대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대종교는 만주지역에 동도본사(책임자 서일), 북도본사(이상설), 서도본사(신규식, 이동녕)를 설치하고, 한반도에 남도본사(강우)를 설치해 이후 민족운동 진영의 항일무장투쟁의 전진기지로 활용하였다.

바로 청산리대첩을 이끈 북로군정서의 총책임자가 대종교 동도본사 책임자인 서일(白圃 徐一, 1881~1921) 선생이다. 선생은 김좌진, 이범석 등을 영입하고 군대를 이끌어 당대 최강이라고 평가되던 만주 일본군을 대파했다.

▲ 중국 밀산시 당벽진에 세워진 ‘서일 총재 항일투쟁 유적지 기념비’ 모습. [자료사진 - 통일뉴스]

중국 밀산시 당벽진에 세워진 ‘서일 총재 항일투쟁 유적지 기념비’에는 “1920년 10월, 서일은 연변지구에서 항일련합부대를 지휘하여 저명한 청산리대첩을 펼쳐 일본침략군 수천명을 섬멸함으로서 일본군의 “천하무적” 신화를 깨뜨리고 동북항일투쟁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남겼다“고 새겨져 있다.

그리고 1919년 임정출범 후 제1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인물이 대종교 서도본사 책임자 이동녕 선생이다. 또한 같은 서도본사 책임자인 신규식 선생은 중국 손문 정부과 연결해 임시정부가 활동할 수 있게 뒤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임정이 파벌 싸움으로 갈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막후 조력한 당시 최고 어른 중 한분이셨다.

이렇게 대종교의 주요 지도자들은 민족운동진영의 항일무장투쟁과 임시정부 수립의 실질적 주역이였지만, 해방 이후 다른 민족종교들이 일정부분 영역을 확보할 수 있었던 반면 주요 활동지가 중국이었다는 이유로 대종교는 오히려 자기 공간을 잃어버리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게 되었다.

더구나 미군정과 이후의 독재정권은 이 땅에 종교의 형태로 살아남은 민족정신을 철저히 배격하고, 심지어 대종교의 지원으로 설립된 민족교육재단마저 친일파와 독재의 하수인들을 앞세워 강제로 빼앗아 갔다. 당시 친일파와 독재에 의해서 박탈된 대학은 홍익대와 단국대, 국학대 등이 대표적이다.

이로 인해 대종교가 수호하고자 했던 민족독립의 정신은 힘을 잃고 대종교의 교세는 축소되었으며 유사종교로 취급받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정부는 독립운동의 고귀한 역사를 다시 세우겠다는 뜻을 가지고 각종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행사에만 몰입될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지 있는 그대로 비춰보고 가려진 과거에 대한 성찰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영화 ‘사바하’가 일으킨 물의는, 최소한 독립운동가의 역사를 보존하고 그들이 지키려했던 가치를 수호해야 하는 국가보훈처 등 관련 정부부처의 역할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아직도 많은 독립투사들이 사회주의라는 이름 때문에 항일활동이 알려지지도 않고 독립유공자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 같은 민족주의자일지라도 외교노선을 강조하고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그 역할을 인정받지만, 중국에서 본인은 물론 후손까지 목숨을 바쳐 항일무장투쟁을 해온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박한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친일 부역을 했어도 공산주의와 맞서 싸웠다(?)는 이유로 친일파들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고, 사이비 종교를 신봉했다는 거짓 오명을 쓴 민족주의자들은 평가절하되거나 역사에서 아주 사라져 버렸으며, 어쩌면 자연스럽게도 그 유해조차 찾을 수 없거나 만주벌판에 초라한 비석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대종교와 홍암 나철 선생(독립유공자 서훈 6등급 중 3등급)인 것이다.

임시정부 수립 후 100년이 흘렀다. 당당하고 떳떳해야 하는 많은 사람과 그 후손들이 사실은 그렇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 사회가 제자리를 찾는데 100년이라는 시간은 아직 짧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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