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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26년, 그 고난과 역정의 역사① - 역사의 현장 상하이에서<새연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1)
임영태  |  ytlim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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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09  00:4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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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상해서 첫 걸음을 시작해 일제의 패망으로 1945년 11월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 26년 6개월 동안 고난에 찬 투쟁을 이어갔다. 그 사이 임시정부는 상하이,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 등 중국 대륙 곳곳을 누비며 1만3천리(5,200㎞)를 이동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초기 활동 지역인 상하이와 첫 피신처였던 항저우의 임시정부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상하이・항저우 유적지 답사기와 함께 임시정부 역사를 10여회에 걸쳐 정리하고자 한다. 이 답사기는 매주 화요일 연재된다. / 필자 주

 

임시정부는 소멸됐으나 정신은 남아 있다

1948년 7월 17일 제정, 공포된 대한민국 제헌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시작된다.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1919년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 재건하고 있다는 말이다. 제헌헌법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1919년에 건립되었고 1948년에 재건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19년 상해에서 첫 걸음을 내디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 앞장섰으며 독립운동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기할 사실은 처음 상하이에서 출범 때부터 좌우연합정부로 시작한 임시정부가 마지막 충칭에서도 좌우연합정부로 마무리했다는 점이다. 초대 국무총리였던 이동휘는 한국인 최초의 공산당 조직인 한인사회당(고려공산당)의 당수였고, 충칭 임시정부의 군무부장 겸 광복군 제1지대장이었던 김원봉은 아나키스트로 출발해 민족좌파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과 임시정부를 상징하는 존재인 김구는 우익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중국 땅에서 오랫동안 고난의 투쟁을 전개한 임시정부는 고국에 돌아온 뒤 미군이 지배하는 남한 땅에서 정부로 인정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미군정과 갈등, 충돌했고 끝내는 배척당했다. 미국의 지원 아래 이승만과 한민당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나서자 임시정부의 좌우연합 정신이 다시 발동된다. 김구 주석과 김규식 부주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단정을 반대하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협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통일정부는 실현되지 않았고 분단은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김구 주석은 끝내 분단세력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1949년 6월 26일 김구 주석의 암살과 함께 임시정부는 소리도 없이 소멸되었으나 그 정신만은 아직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임시정부의 사연들

모든 독립운동이 그랬지만 임시정부 활동 또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첫걸음을 시작한 임시정부는 그해 9월 통합임시정부를 조직해 한국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조직이 됐으나 얼마가지 않아서 사분오열되어 사실상 간판만 남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임시정부를 끝까지 고수한 이동녕, 김구 등은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를 통해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리며 그 위상을 높였으나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을 피해 중국 국민당 정부를 따라 머나먼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중국 대륙 곳곳을 누빈 끝에 1940년 9월 충칭에 안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김구 주석의 지도 아래 조직을 정비하고 광복군을 창설하여 일제에 선전포고를 하는 등 마지막 독립투쟁의 의지를 불태웠다. 임시정부는 건국강령을 발표하여 독립된 나라의 미래상을 제시했고, 연합국으로부터 외교적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미국의 지원을 받아 국내 침투공작을 준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임시정부가 첫 걸음을 시작해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피난길에 오르기 전 1932년까지 13년 동안 활동무대였던 상해, 장정 초기 피난처였던 자싱(嘉興)과 항저우(抗州)의 역사유적을 탐방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상하이(1919. 4〜1932. 5)와 항저우(1932. 5〜1935. 11)뿐만 아니라 전장(1935. 11〜1937. 12), 창사(1937. 12〜1938. 7), 광저우(1938. 7〜1938. 10), 류저우(1938. 11〜1938. 5), 치장(1939. 5〜1940. 9), 충칭(1940. 9〜1945. 11) 등 중국 대륙 곳곳을 누볐다. 임시정부가 1만3천리(5,300㎞)가 넘는 대장정 중에 겪은 고난의 행적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수많은 사연들을 담고 있다. 

상해와 항저우를 탐방한 이야기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서 귀국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해보려 한다. 

   
▲ 임시정부 이동 경로. [사진제공-임영태]

아편전쟁 후 국제도시로 성장한 상하이 

상하이는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가 첫발을 내딛기 시작해 1932년 5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떠날 때까지 13년간 활동한 지역이다. 상하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기 활동무대였을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최소한 한 번씩은 거쳐 갔으며 수많은 독립운동단체들이 근거를 두고 활동한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상하이는 한국 독립운동사뿐만 아니라 현대 중국을 통치하는 중국 공산당에도 중대한 의미가 있는 지역이다. 오늘날 9천여만 명(주1)의 당원을 가져 세계 최대의 정당이자 유럽연합 최대 인구를 가진 독일보다 많은 당원수를 보유한 중국 공산당이 첫 걸음을 뗀 곳도 바로 상하이이다. 1921년 7월 말(주2) 13명의 젊은 공산주의자들이 모여 중국 공산당을 창당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한 곳은 프랑스 조계의 포백루에 있는 사립 박문여학교 2층 교실이었다. 지금의 신티옌띠(新天地) 근처 루완구 씽예루 78번지이다. 중국 공산당은 이곳을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지’라고 해서 잘 정비해 기념하고 있다. 후난 대표로 참석한 마오쩌둥을 포함해 젊은 공산주의자들은 중국 법이 미치지 않는 치외법권 지역인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에 모여 창당 대회를 열었고, 마지막 날 이상한 낌새를 느낀 프랑스 경찰이 들이닥쳤으나 그들이 이미 그곳을 떠난 뒤였다. 

프랑스 경찰의 기습을 피해 현장을 빠져나온 청년들이 다시 모인 곳은 상하이에서 멀리 떨어진 저장 성(浙江省) 자싱(嘉兴)의 호수 남쪽이다. 자싱은 양쯔강 삼각주 남부의 교통 중심지이고 대운하가 있는 타이후 호(太湖)의 남쪽 항저우의 북쪽에 있다. 항저우와 상하이를 잇는 철로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저장성 북쪽에 빽빽이 얽혀 있는 수로망과 연결되는 곳이다. 김구 선생이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거사 이후 일본 밀정의 추적을 피해서 도피처로 삼은 곳도 이곳 자싱이었다. 수로가 거미줄처럼 연결된 이곳이 도피 장소로는 최적의 곳이었던 셈이다.

상하이는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뒤 신중국 시대에도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10여년에 걸쳐 중국 대륙을 천하대란 상태로 몰아넣은 문화대혁명의 발단이 시작되는 곳도 상하이였다. 상하이에서 발간되는 1965년 11월 10일에 발간된 문예월간지 <문회보>에 야오원위안의 논설 ‘역사극 ‘해서파관에 대한 비평’이란 글이 실리면서 문화대혁명의 서막이 올랐던 것. 마오쩌둥의 지원 아래 문화대혁명을 극단적인 방향으로 몰고 갔던 이른바 ‘4인방’(장칭, 왕훙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의 근거지 역시 상하이였다. 4인방은 마오쩌둥의 사망과 함께 몰락했고 덩샤오핑이 이끄는 개혁・개방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나 상하이는 정치적 비중이 약화되지 않았다. 1989년 중국 천안문 사태 이후 장쩌민이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이른바 ‘상하이방’이 중국 권력의 핵심세력으로 부상했던 것. 국무원 총리 주룽지, 중앙당교 교장 쩡칭훙을 비롯해 우방궈, 자칭린, 류치, 저우융캉, 리창춘, 류윈상 등이 대표적인 상하이방 출신 인물들로 알려져 있다. 

상하이는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작은 어촌에 불과했으나 청나라 말기 서세동점의 시대와 함께 새로운 상황이 열린다. 제1차 아편전쟁이 끝난 1842년 중국과 영국 사이에 난징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때 영국의 요구에 따라 중국(청)은 홍콩의 할양과 함께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5개 항구의 개방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때부터 상하이가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제2차 아편전쟁 후 1860년 텐진조약이 체결되어 상하이와 텐진에 서구열강들의 치외법권 지대인 조계(租界)(주3)가 허용되면서 중국은 서구 열강의 반(半)식민지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처음 영국, 미국, 프랑스가 각각 상하이에 조계를 설정하였고, 나중에 영미의 ‘공공조계’와 프랑스의 ‘프랑스 조계’로 정리되었다. 1937년 일본이 중국 본토를 침략, 일본군의 상하이 주둔으로 일본, 미국, 영국, 이탈리아 지배구역으로 상하이가 분할되었으나, 1941년 태평양 전쟁을 계기로 영국, 미국이 상하이에서 철수했고 1943년 난징에 있던 일본의 괴뢰정권인 왕징웨이 정권에 조계지역이 넘어가면서 조계지는 사라졌다.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는 중국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고 비교적 자유로운 곳이어서 비밀활동이 이곳에서 다수 이뤄졌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프랑스 조계에서 세워져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거사가 일어나기 전까지 13년간 활동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1921년 중국 공산당 창당대회(1회 대표대회), 1922년 7월의 2대 대표대회, 1925년 1월의 4대 대표대회가 개최되었고, 노동운동을 비롯한 공산당의 지하활동의 중심지(이른바 백색지구 활동지역) 역할을 했다. 1927년 4월 12일에는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로 다수의 공산당원이 학살되는 사건이 일어났지만, 여전히 상하이는 중국 공산당의 백색지구 활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 중국공산당 1차 대회지. 중국 청년들이 단체로 탐방 중이다. [사진제공-임영태]

근대 이후 서구 열강에 의해 강제로 개방된 다음부터 상하이는 국제도시로 성장했다. 서구 열강의 정치적 침략을 상징하는 조계지와 함께 경제적 침략을 상징하는 수많은 금융기관과 국제기업들이 자리를 잡았다. 도시의 성장과 함께 상하이는 중국 내에서 가장 인구 조밀지역이 되었고, 현재도 중국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다. 국제도시의 면모에 걸맞게 돈과 사람이 넘치고, 세계적인 유행패션과 첨단문화를 자랑하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상하이는 중국에서 가장 소득수준과 물가, 인구밀도가 높고, 금융과 주식 등 경제의 핵심지로 자리 잡고 있다. 상하이는 베이징, 텐진, 충칭과 더불어 성급 4개 직할시의 하나이다. 

예원 옛거리에서

인천공항에서 한국 시간 오전 9시 10분경 이륙한 비행기는 중국시간 10시 10분경 상하이 푸둥 공항에 도착했다. 시차가 1시간이니 1시간 50분 정도 소요되는 시간을 대략 맞춘 셈이다. 양쯔강 하류 삼각주 지역에 형성된 상하이는 산이 전혀 없고 오직 평지만 있을 뿐이다. 대신 퇴적물이 쌓여 이뤄진 지역이기에 건물을 세우기에는 많은 기초공사가 필요하다고 한다. 비행장을 앞둔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상하이는 오직 평지와 낮은 구릉지대만 보일 뿐이다. 

공항에 도착, 검색대를 지나 대합실에서 우리를 안내할 가이드 이선생과 만났다. 푸둥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푸둥 신시가지를 지나 황푸강 난포(남포)대교를 건너 구시가지로 갔다. 푸둥 신시가지는 2001년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상하이 방문 때 ‘천지개벽을 했다’고 말한 곳. 그러고도 18년이 지났으니 상하이의 변화는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다. 일행은 이구동성으로 중국은 나날이 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중국의 위세를 실감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특히 상하이는 이미 뉴욕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도시가 되었다. 마천루 빌딩 숲이 뉴욕처럼 좁은 지역에 밀집해 있지 않아서 그렇지 실제로는 상하이 전체로 보면 뉴욕의 그것을 능가한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뒤따른다. 충분히 그럴 것이라고 여겨진다. 상하이는 100년 전에 이미 세계적인 도시의 반열에 들었던 곳이다. 이제 다시 중국의 부활처럼 상하이가 옛 명성을 되찾았다고 해야 할까?

점심 식사는 예원 옛거리 근처에서 했다. 상하이 식이어서 약간은 느끼할 것이라고 했지만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다만 기름에 볶은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약간 느끼하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식사가 끝난 뒤 예원 옛거리를 구경했다. 우리의 북촌거리와 비슷한 곳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예원(豫園)은 상하이 구 시가지 푸시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명청시대 양식을 가진 정원을 말한다. 반윤단이란 인물이 아버지 반은을 위해 1559년부터 짓기 시작해 1577년에 완공했다고 한다. 중국 정원 중에서도 가장 섬세하고 아름답다고 평가받고 있다.

   
▲ 예원 옛 거리는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사진제공-임영태]

예원은 1842년 아편전쟁 때 영국군이 5일간 점령했고, 태평천국의 반란 때 천군(황군)에 점령되었다. 1942년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심하게 손상되었는데 1956년부터 1961년 사이 상하이 시 정부에 의해 보수되었다고 한다. 1962년부터 일반에 공개되기 시작했고, 1982년에는 국가 단위의 문화재로 공표되었다. 중국 경제가 발전하고 상하이가 세계적인 경제, 관광도시로 부상하면서 예원 옛거리의 정비와 함께 관광객이 끊이지 않고 물려드는 곳이 되었다. 우리 일행도 식사 후 예원과 옛 건물, 거리, 사람을 구경하고 기념사진도 한 장씩 찍었다. 정말 중국의 도시는 사람으로 넘쳐난다. 이곳도 예외는 아니다. 평일 낮인데도 발걸음을 떼기기 쉽지 않다. 

상하이 박물관에서

다음 우리가 찾은 곳은 상하이 박물관. 상하이 박물관은 상하이와 주변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고대 청동관, 고대 조소관, 고대 도자기관, 역대 새인관, 역대 서법관, 역대 회화관, 명청 가구관, 소수민족 공예관, 역대 전폐관, 고대 옥기관, 잠득루 도자기관 등 11개 전시장에 12만 점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불과 1시간 남짓한 시간에 그야말로 주마간산으로 한번 돌아보는 것으로 끝내야 했다. 주 목적지가 이곳이 아니고, 일정이 너무 촉박했기 때문이다.  

상하이는 중국 역사에서 볼 때 일찍부터 문화가 발전한 지역은 아니다. 고대 춘추시대에는 오나라의 동쪽 지역에 속했고, 전국시대에는 초나라에 속했다. 삼국 시대에는 오나라 황제 손권의 형인 손책이 회계 전투에서 승리해 이곳을 차지했다. 손권은 이곳의 아름다운 바다 경치를 지나칠 수 없어서 자신의 별장을 지었다고 하는데 별장의 위치는 와이탄 주변으로 알려진다. 

송나라 때 한족들은 북방 민족의 거센 공격에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금나라의 공격으로 북송이 무너진 뒤, 남송이 수도로 정한 곳이 우리의 다음 목적지인 항저우(임안)였다. 남송 시대 양쯔강 이남(강남) 지역이 집중적으로 개발되었고 생산력이 엄청나게 발전하면서 송대는 어마어마한 부와 문화를 자랑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중국인들은 송나라를 그다지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 북방민족에게 밀린다가 끝내 몽골에 멸망했기 때문이리라. 강남 개발로 남송 말기에는 상하이 진(鎭)이 형성된다. 명나라 때는 왜구들의 침략이 드세어서 상하이에 이들을 막기 위해 해안에 성을 구축하였고, 남경지구 쑹장부 관할에 속했다고 한다. 

상하이는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 역사에서 큰 비중이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상하이 박물관의 유물 또한 중국 전체로 보면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규모 면에서는 웬만한 국가단위 박물관 수준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청동유물들. 박물관 외관이 원래 청동기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고 할 정도로 이곳 청동유물 컬렉션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옥 유물, 도자기, 회화도 볼만하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옥 유물 외에는 보지 못했다. 시간 때문인지 정비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문이 닫혀 있었고, 설령 열려 있어도 시간 제약으로 볼 여유도 없었다. 그런 중에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중국 소수민족의상 진열관이었다. 중국은 현재 ‘다민족통일국가론’에 따라 중국 역사 전체를 재구성하고 있는데, 그것 지향하는 방향은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을 통합한 ‘중화민족’ 개념의 정립이라 할 수 있다. 소수민족의상관을 통해 중국 국가가 인민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바로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을 통합한 새로운 중국민족, 즉 중화민족일 것이다. 

   
▲ 상하이 박물관. [사진제공-임영태]

동방명주 타워에서 황푸강을 바라보면서

상하이 박물관을 휙 돌아보고 나오는데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다. 가는 빗줄기 속에서 우리가 찾아간 곳은 동방명주탑(Oriental Pearl Tower). 정식명칭은 동방명주TV탑(东方明珠电视塔)이라고 한다. 1991년 7월 30일에 착공해 1994년 10월 1일 완공되었다. 상하이의 랜드마크이자 푸둥의 상징이랄 수 있는 건물이다. 구슬을 꿰어놓은 막대 같은 건물로 꼭대기는 TV 송신탑이 설치되어 있다. 

높이 467m로 처음 세워졌을 때는 상하이에서 가장 높았는데, 지금은 492m의 상하이 세계금융센터(101층)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고 한다. 동방명주탑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 높은 타워(Tower)라고 하는데 그 순위가 어찌 되는지는 모르겠다. 이 건물은 한국의 남산 타워와 같은 성격이라고 보면 되지만 약간 차이가 나는 부분도 있다. 제일 위는 TV전파 탑이 있고, 267m 높이에는 회전하는 식당이 있다. 지하 1층에는 상하이 시의 역사를 보여주는 근현대박물관이 있고, 두 개의 큰 구 사이에는 스페이스 호텔이라고 불리는 20개의 방이 있다고 한다. 게임장과 놀이시설, 레스토랑 등도 있어서 아이들, 어른, 노인들 가리지 않고 함께 와서 지낼 놀이공간으로 좋은 곳이다. 그 점은 롯데월드와 비슷한 면이 있지만 차이가 나는 점도 있다. 

이 건물이 유명해진 것은 특이한 모양이 한몫했다. 동방명주라는 이름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시 ‘비파행(琵琶行)’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백거이의 시에서 “大珠小珠落玉盤(큰구슬과 작은구슬 옥쟁반에 구르는 듯하네)”라는 싯귀에서 나온 것이라고. 그러나 이 탑을 설계한 장화청은 염두에 둔 시가 없었다고 말했다고. 평론가들이 너무 앞서간 것인지, 아니면 디자이너가 자신의 창의성을 너무 자랑하려고 한 것인지 모르겠다. 건축이나 디자인에 문외한이 나는 건물을 처음 봤을 때 옥구슬보다는 이슬람 건축물의 이미지가 연상되었다. 이 글을 쓰면서 인터넷에 올라 있는 황푸강에서 바라본 야경 또한 그런 느낌이다. 

이 건물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은 상부 관찰 플랫폼. 둥근 구슬 모양으로 만들어진 이곳에서는 사방을 관람할 수 있게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다. 바로 한층 아래에는 야외에 1.5인치 유리 플로어가 설치돼 있어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스릴을 즐길 수 있다. 상부 관찰 플랫폼에서 상하이 시내를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이 이 건물의 가장 큰 매력이지만 안개비 때문에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아서 아쉬움이 컸다. 

그럼에도 건물 앞을 돌아서 흐르는 황푸강을 지켜보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황푸강을 굽어보면서 100여년 전 이곳에서 목숨을 내걸고 독립투쟁을 벌였던 선열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저 강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언제 체포될지 모르는 긴박감, 하루하루의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빈한한 삶. 그런 속에서도 그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고민했고, 때로는 고국에 남겨 두고 온 부모형제와 처자식을 떠올리기도 했을 것이다. 
전망대에서 상하이 시내와 황푸강을 굽어보면서 여러 생각에 잠겼던 것과 더불어 지하1층에 있던 근현대 박물관을 돌아본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상하이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중국의 근현대 역사를 살펴볼 수 있기를 기대했으나 그와는 관계가 먼 상하이 문화사, 도시 변천사, 나아가 풍물사가 잘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근대 상하이의 풍광을 보여주는 사진과 모형물들에 빠져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다 일행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거기다가 처음 들어왔던 곳이 아닌 다른 출구로 나가는 바람에 비 내리는 거리를 한동안 헤매고 다녀야 했다. 결국 우리의 일정은 30분가량 지체되었고 저녁도 그만큼 늦었다.   

   
▲ 동방명주 타워에서 바라본 황푸강. 안개비가 내려 주변이 흐릿하다. [사진제공-임영태]

임시정부가 꿈꾼 나라는 민주복지국가, 통일자주독립국가

식당으로 이동하는 40여분 동안 나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운동 역사 강연이 배당되었다. 당연히 해야 할 내 역할이었지만 나는 벌칙처럼 느껴졌다. 한동안 빗속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일행을 찾았기에 당혹감과 미안함이 혼재된 내 심리상태가 채 정돈되지도 않은 상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목소리는 다소 흥분된 상태로 시작해 갈수록 톤이 높아졌다. 그렇게 진행된 내 이야기 내용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좌우연합으로 시작했고, 마지막에도 좌우연합 정부였다. 국내외 동포들의 기대 속에 시작된 임시정부는 얼마 안가서 분열되었고 사람들이 떠나면서 사실상 간판만 남은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된 책임의 많은 부분은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에게 있었다. 이승만이 엉망으로 만든 임시정부를 수습해 간판을 지키며 충칭까지 임정을 이끌어간 것은 이동녕・김구 등이었다. 특히 김구는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통해 임시정부의 위상을 회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후 사실상 임시정부의 최고 지도자, 상징인물로 부상하였다.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 국민당과 함께 중국 대륙을 1만3천리나 이동하며 고난의 투쟁을 이어갔다. 1940년 충칭에 안착한 후 광복군을 조직하고 일제에 전쟁을 포고하고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하여 광복에 대비하였다. 임시정부는 고난의 투쟁 과정에서 1930년대 중반 이후 세계사의 흐름을 반영하여 사회주의적 이념을 상당부분 받아들였고, 조소앙은 이를 한국적 이념으로 정립하여 삼균주의를 내놓았다. 충칭 임시정부는 독립 후 세울 나라의 기본 뼈대를 삼균주의에 기초하여 건국강령으로 정리했는데 그 핵심내용은 지금 말로하면 민주복지국가라고 할 수 있다. 임시정부의 이상과 꿈은 제헌헌법에 거의 대부분 반영되었으나 이승만 정권은 그걸 한낱 종이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헌정 파괴 행위를 자행했다. 임시정부가 독립투쟁을 통해 세우고자 한 나라는 간단히 말하면 민주복지국가, 좌우연합국가, 자주독립국가, 그리고 통일국가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러한 임시정부의 꿈과 이상은 아직도 유효하며 우리의 현재적 과제이다.’ 

내 방식으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역사를 간단히 요약한 셈이다. 이제부터 이런 관점으로 임시정부의 활동 역사를 차근차근 살펴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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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2016년 말 시점 중국 공산당원은 8,944만7천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68만8천명이 늘어났다(“중국공산당 당원 9천만명 육박…전년 대비 68만명 증가”, 뉴시스, 2017. 7. 2). 이런 증가추세를 반영하면 2018년 말에는 9천만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7월 하순이지만 날짜에 대해서는 참석자들의 기억이 일치하지 않아서 중국에서는 7월 1일을 공식 당 창건일로 기념하고 있다.(임영태, 「중국 혁명」, 『스토리 세계사』 9, 21세기북스, 2014, 96쪽 참조)

3) 청나라 말기부터 중화민국 시기 외국인이 행정자치권과 치외법권을 가지고 거주한 조치지. 1840년 아편전쟁의 패배로 체결된 불평등조약에 의해 중국 대륙 각지의 조약항구에 설치되었다. 상하이의 공공 조계와 프랑스 조계, 텐진의 여러 조계가 있었다.이와 비슷한 성격의 조치지로는 일본의 거류지가 있었다. 일본 다롄, 독일의 칭다오, 프랑스의 광저우 같은 조차지는 조차국이 외국인뿐만 아니라 중국 주민에 대한 사법권도 행사하며, 전시에는 군사기지로도 사용하였다. 홍콩이나 마카오도 조계지의 성격이 있었지만 완전한 식민지에 가까웠다. 이처럼 조계지와 조차지 등이 곳곳에 설치되면서 중국은 서구 열강들의 반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지금은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주력하고 있다. (사)현대사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다.

저서로는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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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19-04-09 09:29:25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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