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경 / 농부

 

살구나무를 찾아서 살구나무 동산을 만들고 있다. 올해는 살구나무 마을을 만들려고 한다. 올해 우리 마을에는 많은 살구나무들이 새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인데, 나는 그것이 북측 회령 백살구나무이기를 바래서, 그것을 구하려 안타깝게 뛰어다니고 있다.

사라진 살구나무를 찾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살구나무를 잃어버렸듯이 아주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무엇을 위하여 그 많은 것들을 놓아버린 것일까? 여기 연재할 글들은 살구나무처럼 우리가 잃은 것들, 잊은 것들, 두고 온 것들에 대한 진지한 호명이다. / 필자

 

▲ 밭을 뒤덮은 태양광패널. [사진제공-주미경]

어느 청년농부의 근심 앞에서

읍에서 거의 일자로 편안하게 흘러온 강이 산을 만나 동쪽으로 크게 에도는 굽인돌이가 그 골짜기의 초입이다. 오래된 시멘트 포장길을 오르자면 여기 사람이 살까 싶기도 하거니와, 길 끝에 그렇게 너른 골안이 나지리라고는 별로 생각되지 않는 곳이다. 하지만 가파른 길은 잠깐사이에 눈이 확 트이는 이색적인 풍경으로 사람을 데려다 놓는다.

길이 난 서쪽으로 트여있을 뿐 사방이 능선으로 둘러싸인 깜짝 놀랄 정도로 너른 골안이 온통 사과밭이다. 하지만 위쪽 사과밭만 가꿔지고 있고 아래쪽 사과밭은 버려져 있다. 특이하게 눈에 띄는 것은 남쪽 산능선 아래 경사지에 넓게 조성된 초지이다. 지성농장의 주인은 이 골안에서 1만평의 사과농사를 지으며 남쪽에 초지를 조성해 열서너 마리의 소를 방목으로 키우고 있다. 홀로 하는 농사로는 꽤 큰 규모다.

거기에 들어올 때 그는 스물여섯 청년이었다. 지나가다 보고 그 자리에서 골안으로 들어올 결심을 했다던가. 소를 방목으로 키우겠다는 꿈을 갖고있던 그에게 아주 괜찮은 장소였던 모양이다. 물론 소를 방목하려는 어떤 사람이 그 골짜기에 마음이 붙들리는 것은 그럴 법한 일이다. 하지만 스물여섯 청년이, 세상과 동떨어져있는 듯한 무인지경의 골짜기에 마음이 붙들리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소를 키우는 것도, 사과농사를 짓는 것도 요즈음의 스물여섯 청년에게 흔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흔하지 않은 일은 그것만이 아니다. 그는 1만평의 사과밭을 가꾸면서 제초제도 화학비료도 쓰지 않는다. 약도 안하고 싶은데 그러면 팔 수가 없어서 최소한으로만 한다고 한다. 도시사람들은 그것을 그저 기술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농사짓는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다르다. 제초제를 안 쓴다는 말은 1만평 사과밭의 풀을 다 예초기로 잡는다는 것이다. 그게 어떤 것인지, 대개의 농꾼들은 엄두도 못 내는 일이다. 소를 방목으로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농사일에 있어 스스로 정하고 지켜가는 방식을 보면 그가 농사를 대하는 흔치 않은 관점을 읽어낼 수 있다.

그렇게 열세번의 해가 바뀌었다. 그의 20대와 30대가 그 골안에서 흘러갔고, 그의 청춘은 사과농사와 소 방목에 바쳐졌다. 스물여섯 청년이 열세해동안 사계절을 홀로 일하며 감당해야했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누구나 다 아는 바이지만 요즈음의 농사란 힘은 산만큼 들고 돈은 쥐꼬리만큼도 안되는 업이다. 그가 13년을 일군 농장을 보면 그가 바친 노고가 어떠한 것이었겠는지 묻지 않고도 알아진다. 그 골짜기와는 비교도 안되는 작은 골짝이고 농사규모도 비할 바가 아니지만, 한 단위의 농사를 감당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내 농사 다섯 해가 알려준 것이다.

그런 뚝심을 가진 사람이건만 최근 그의 가슴에 꺼먼 먹장구름이 가득하다. 처음부터 쉽지 않았고 농사라는 게 해마다 좋아지기보다는 나빠져왔다지만 지금처럼 망연자실 어려운 때는 없었다고 한다. 그의 사과밭 아래쪽 방치된 사과밭 1만평에 태양광발전 시설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마을 앞산 전체에 들어오려던 태양광발전 시설을 마을사람들과 함께 막아내어 철회된 소식을 들은 바로 그 날, 기뻐할 새도 없이 들려온 더 나쁜 소식이었다고 한다.

과수와 가축은 환경변화에 더 민감하다. 더구나 산능선으로 둘러싸여 대기의 확산이 원활하지 않은 지형에서 바로 앞 1만평의 땅을 뒤덮은 태양광 패널이 필연코 야기할 온도변화와 빛반사, 소음과 화학물질 오염 등, 생태계 교란이 몰고 올 재난 앞에서 그는 홀로 무력함을 절감하고 있다. 어떤 부재 지주의 불로소득과 어떤 부재 시설업자의 매출증대를 위해 한 청년농부가 청춘을 털어 바친 땀이 물거품으로 되려 하고 있는 것이다.

‘태양광 발전소 결사반대 ○○마을 주민 일동’ 요즘 주변의 도로변에서 심심찮게 보게 되는 현수막 내용이다. 도시에서 바라보는 태양광발전과 시골에서 바라보는 태양광발전은 사뭇 다르다. 도시에서였더라면 주변 농가의 고통쯤은 청정에너지 생산을 위한 ‘부수적 피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을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시골에서 목격한 태양광발전은 결코 청정에너지가 아니다. 작물과 가축에 대한 직접적인 피해뿐 아니라 더욱 심각한 것은 숲과 농토가 대규모로 사라지고 주변의 농가까지 못살게 만드는 것이다. 반세기 초지일관 내달려온 농토실종의 변주곡에 이제 태양광까지 가세한 형국이다.

▲ 논을 밀어내고 들어선 태양광 패널. [사진제공-주미경]

농토실종의 방정식

농토가 사라지는 것이 어제오늘 일인 것은 아니다.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줄곧 우리나라의 농토는 줄어왔으며 그에 따라 식량생산의 자급률도 줄기차게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1975년에 220만ha를 넘어섰던 농토가 2018년 160만ha를 하향 돌파함으로써 30%에 달하는 농토가 사라져버렸다. 무려 64만ha가 넘는, 서울시의 10배에 해당하는 면적이다. 그 동안에 인구는 3천2백만에서 5천1백만으로 50% 이상 수직 증가하였고, 식량자급률(곡물자급률)은 80%에서 23%로 자유낙하 하였다. 이 변화추이를 한 마디로 말하면, ‘인구는 빠르게 느는데 농토는 급격하게 줄고 식량생산은 더 무섭게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반세기도 못되는 시간동안 농토와 인구와 식량생산의 변화를 압축한 이 이상한 방정식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 사회가 인구가 늘어도 그 인구를 먹이는 농토와 식량생산에는 어떤 관심도 갖지 않는 사회, 어떤 정책도 펼치지 않는 사회라는 사실이다. 그동안에 사람들이 알아챈 것은 돈만 있으면 먹을 것은 얼마든지 어디서든지 사올 수 있다는 것이어서, 먹을 것을 생산하는 일을 중히 여기는 사회에서 돈 버는 일을 최상으로 치는 사회로의 변화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게 한다.

하지만 알지 못한다면 모를까, 식량생산의 극단적 감소와 농토의 가파른 상실 앞에서 막연하게나마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없다. 특히 농토의 상실은 그것이 돌이킬 수 없다는 성격으로 해서, 또한 최근 10여년간에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것으로 해서 생각있는 여러 사람들의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2018년 통계청에서 시행한 경지면적 조사에 의하면, 밭보다 더욱 급속하게 감소하는 것이 논이며, 건물건축과 고령화로 인한 농사포기 외에 태양광발전 시설이 농토감소의 주요원인으로 새로 등장했다. 정부가 농지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 일부 개정령을 시행해 농업진흥지역 밖 농지에 설치할 수 있는 태양광 발전기 면적 제한을 1만㎡ 이내에서 3만㎡로 3배 늘리고, 지난해 2월부터는 농지내 태양광 발전기를 설치하면 농지보전 부담금도 50% 감면해주는 파격적인 정책이 가져온 결과다.

통계청 관계자는 "최근에는 논, 밭에 태양광 설비를 설치하는 사례가 크게 늘면서 경지면적 감소의 요인 중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향후 2~3년간 태양광 설비 증가 추세가 계속되면서 경지 면적 감소의 주요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사람을 먹이는 식량을 생산하는 농토에는 어떤 혜택도 차례지지 않는데, 태양광이 만드는 전기는 세금을 들여 비싸게 사주고 시설자체에도 각종 혜택을 선사하는 판이니, 농토니 식량이니 염불외지 말고 돈 되는 쪽으로 움직이라는 강력한 신호다.

오늘은 지성농장의 주인이 직격탄을 맞을 참이고, 내일은 누구 차례가 될지 알 수 없다. 값싼 농토로 인해, 값싼 농산물로 인해 이런 기형적인 정책의 표적이 되어버린 시골은 요즘 뒤숭숭하다. 태양광으로 불로소득을 꿈꾸는 소수의 지주들과 일확천금을 노리고 시설사업에 뛰어든 부나비 같은 업자들을 제외하곤 태양광 발전을 환영하는 사람들은 없다. 태양광 패널로 인해 바야흐로 시골풍경이 뒤집어지는 중이다.

▲ 오래된 논이 인삼밭으로. [사진제공-주미경]

농토가 무엇이라구?

소설가 이태준은 농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썼다. 그 중 농토에 대한 그의 사상이 잘 나타나있는 작품은 「농토」와 「돌다리」이다. 「농토」는 매우 빼어난 수작으로, 송곳 하나 박을 땅도 못 가진 소작농들의 농토에 대한 포한을 그려냈다면, 「돌다리」는 성실한 자작농에게 있어 농토의 의미를 깊이 있게 보여준다.

「돌다리」는 짧은 단편이다. 농토가 무엇인지, 농부에게 있어 농토란 어떤 것인지, 농토의 의미를 그렇게 짧은 소설 속에 포괄적으로 깊이 있게 압축해 놓은 작가의 솜씨가 여간 맵짜지 않다. 「돌다리」의 중심내용은 농부인 아버지와 의사인 아들의 대화다. 병원을 키우려고 땅 팔 것을 조근조근 설득하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대답한다.

“천금이 쏟아진대두 난 땅은 못 팔겠다. 내 아버님께서 손수 이룩허시는 걸 내 눈으루 본 밭이구, 내 할아버님께서 손수 피땀을 흘려 모신 돈으루 장만허신 논들이야. 돈 있다고 어디가 느르지논 같은 게 있구, 독시장밭 같은 걸 사? 느르지 논둑에 선 느티나문 할아버님께서 심으신 거구, 저 사랑마당엣 은행나무는 아버님께서 심으신 거다. 그 나무 밑에를 설 때마다 난 그 어룬들 동상(銅像)이나 다름없이 경건한 마음이 솟아 우러러보군 헌다. 땅이란 걸 어떻게 일시 이해를 따져 사구 팔구 허느냐? ........ 땅이란 천지만물의 근거야. 돈 있다구 땅이 뭔지두 모르구 욕심만 내 문서쪽으로 사 모기만 하는 사람들, 돈놀이처럼 변리만 생각허구 제 조상들과 그 땅과 어떤 인연이란 건 도시 생각지 않구 헌신짝 버리듯 하는 사람들, 다 내 눈엔 괴이한 사람들루밖엔 뵈지 않드라."

"네가 뉘 덕으루 오늘 의사가 됐니? 내 덕인 줄만 아느냐? 내가 땅 없이 뭘루? 밭에 가 절하구 논에 가 절해야 쓴다. 자고로 하눌 하눌 허나 하눌의 덕이 땅을 통허지 않군 사람헌테 미치는 줄 아니? 땅을 파는 건 그게 하눌을 파나 다름없는 거다."

"땅을 밟구 다니니까 땅을 우섭게들 여기지? 땅처럼 응과(應果)가 분명헌 게 무어냐? 하눌은 차라리 못 믿을 때두 많다. 그러나 힘들이는 사람에겐 힘들이는 만큼 땅은 반드시 후헌 보답을 주시는 거다. 세상에 흔해 빠진 지주들, 땅은 작인들헌테나 맡겨 버리구, 떡 도회지에 가 앉어 소출은 팔어다 모다 도회지에 낭비해 버리구, 땅 가꾸는 덴 단돈 일 원을 벌벌 떨구, 땅으루 살며 땅에 야박한 놈은 자식으로 치면 후레자식 셈이야. 땅이 말을 할 줄 알어 봐라? 배가 고프단 땅이 얼마나 많을 테냐?"

아버지의 세 마디 속에 ‘농토’란 어떤 것인지가 다 드러나있다. 아버지에게 있어 농토는 “할아버니께서 쇠똥을 맨손으로 움켜다 넣시던 논, 아버니께서 멍덜을 손수 이룩허신 밭”이고, 그것을 자신이 “더 건 논으로 더 기름진 밭이 되도록, 평생을 닦달한” 땅인 것이다. 농토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농사가 아무 땅에서나 되는 것도 아니다. 농토란 누대에 걸쳐 축적된 노동의 산물이며, 농토는 바로 그 인연의 결과물인 것이다.

▲ 오랫동안 버려진 다랑논. [사진제공-주미경]

시골에 와서 땅을 얻으러 다닐 때 제일로 많이 들었던 말이 있으니 “땅은 인연이 있어야 얻는다”는 것이다. 그때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던 그 말을 이해하게 된 건 땅을 얻어 들고나서였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40년 가까이 버려져 있던 땅이라 했다.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부피를 더해온 세월만큼 묵은 다랑논이었다. 완만한 경사의 작은 계곡을 따라 계단을 이룬 크고 작은 다랑이들이 아니라면 산인지 논인지 분간이 안되는 땅, 나무를 베어내고 덤불을 걷어내고 물길을 정리하며 알게 되었다. 오래 전 맨 손으로 이 다랑이들을 일구었을 농부들, 내가 여기 들어와 그 오랜 시간을 깨치고 이 땅을 농토로 되돌림은, 그들과의 인연이 땅으로 하여 나에게로 이어지는 것임을.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짓는 것이 농사다. 그 이치를 오연히 드러내 보이는 것이 바로 농토인 것이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더해진다. 그는 자신이 오롯이 거둔 농토가 어떤 인연으로 이어져야 하는가를 아들에게 말해준다. 거기에는 농부로서의 삶과 농부로서의 죽음, 그리고 농사짓는 일을 업으로 평생을 묵묵히 바쳐온 농부의 자존이 내배어져 나온다.

“나 죽은 뒤에 누가 거두니? 너두 이제두 말했지만 너두 문서쪽만 쥐구 서울 앉어 지주 노릇만 허게? 그따위 지주허구 작인 틈에서 땅들만 얼말 곯는지 아니? 안 된다. 팔 테다. 나 죽을 임시엔 다 팔 테다. 돈에 팔 줄 아니? 사람헌테 팔 테다. 건너 용문이는 우리 느르지논 같은 건 한 해만 부쳐 보구 죽어두 농군으로 태났던 걸 한허지 않겠다구 했다. 독시장밭을 내논다구 해봐라, 문보나 덕길이 같은 사람은 길바닥에 나앉드라두 집을 팔아 살려구 덤빌 게다. 그런 사람들이 땅 임자 안 되구 누가 돼야 옳으냐? 그러니 아주 말이 난 김에 내 유언(遺言)이다. 그런 사람들 무슨 돈으로 땅값을 한몫 내겠니? 몇몇 해구 그 땅 소출을 팔아 연년이 갚어 나가게 헐 테니 너두 땅값을랑 그렇게 받어 갈 줄 미리 알구 있거라. 그리구 네 모가 먼저 가면 내가 묻을 거구, 내가 먼저 가게 되면 네 모만은 네가 서울루 그때 데려가렴. 난 샘말서 이렇게 야인(野人)으로나 죄 없는 밥을 먹다 야인인 채 묻힐 걸 흡족히 여긴다."

"자식의 젊은 욕망을 들어 못 주는 게 애비 된 맘으루두 섭섭허다. 그러나 이 늙은이헌테두 그만 신념쯤 지켜 오는 게 있다는 걸 무시하지 말어 다구."

풍경의 탄생

땅을 찾아 다니며 알게 된 것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요즘에는 땅이라 하면 죄다 부동산이고 그 중 값나가는 것이 대지요 상업지이지만 그건 세상의 중심이 돈으로 뒤바뀐 연후의 일이다. 산이 많은 것이 우리나라이니 몇몇 고장을 제외하곤 꽤 너른 들이라도 산자락에 이어지기 마련이다. 마을을 이룬 어디를 가나 집들은 너르고 평탄한 들을 제껴두고 비좁고 가파른 산자락에 옹색하게 붙들려있다. 요즘 사람들 눈에는 전망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보이겠지만 그건 오해다.

옛 사람들은 농토를 가장 귀중하게 여겼다. 그것은 가장 좋은 땅은 우선하여 농토로 내고 집자리는 농사짓기 어려운 비탈에 올라 붙은 것이 만들어낸 구도인 것이다. 옛사람들이 농토를 얼마나 귀이 여겼는가를 보여주는 풍경이다. 마을이름들 중에 평지마을은 있어도 비탈마을은 없는 것이, 평지에 마을을 이룬 일이 그만큼 드물고 특별하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가 자연이라고 여기는 시골의 경관과 풍경도 이렇게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치관이 바뀌면서 풍경도 따라 변한다. 자고 나면 바뀌는 것이 도시의 모습이라고 하지만 요즈음은 시골도 만만치 않다. 도시의 모습을 바꾸는 것이 건물과 도로라고 한다면 시골의 모습을 바꾸는 것은 재배작물과 농지 및 산지전용이다. 시골에 와서 5년은 주변의 풍경이 쉼없이 바뀌는 것을 목격한 시간이다.

가장 크게 바뀌는 것은 논이다. 크게 넓지는 않아도 강을 따라 양쪽으로 가지런히 펼쳐져, 산과 들과 강이 아름다운 비례로 어우러져 사계절 서로 다른 빛깔로 사람들 마음에 유다른 애착을 불러일으키던 풍경이었다. 거기에 큼직한 연동하우스들이 줄지어 들어서고, 인삼밭 시커먼 차광막이 뒤덮이고, 나무밭이, 급기야 태양광 패널까지 합세하여 논을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 시골풍경. [사진제공-주미경]

풍경이 밥 먹여주냐고? 글쎄다. 풍경이 밥 먹여주는 것이 아니라면 행정관청은 어째서 몇 년 전부터 ‘관광’을 입에 달고 있는 걸까? 그들은 일찌감치 ‘농사로는 가망이 없으니 체험 휴양 치유 관광이나 해라’라고 나팔을 불어대고 있지 않은가? 독보적인 문화재나 유명한 관광지를 갖고있지 않은 평범한 시골지역에서 관광이 될 자원은 그야말로 시골다운 풍경뿐이다. 시골의 풍경은 농부들의 생각과 가치관이 만들어내는 것, 그것은 곧 그들이 재배하는 작물이요, 그들이 키우는 가축들이다. 따라서 농사가 가망이 없으면 관광도 가망 있는 일이 아니다. 참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가장 낮은 들에는 벼가 자라고, 논둑과 야트막한 구릉지와 산자락에 갖가지 잡곡과 채소들이 빼곡히 자리잡고, 사람 사는 집들이 들어선 뒤쪽으론 여러 산업의 원료를 제공하는 나무들이 이룬 숲이 둘러진 풍경, 그것이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왔던 시골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먹고 사는 사람들인가를 보여주는, 우리가 무엇을 귀중히 여기는가를 드러내는, 우리 삶의 질서와 조화, 정체와 가치를 말해주는 풍경이었던 것이다.

모든 길은 돈으로 통하는 세상에서 시골풍경도 바뀌어간다. 먹을 것 만들어내는 일이 하찮게 되고 소설 속에서 보았던 농부의 자존도 남은 데가 없다. 먹을 것을 남에게 의존하면서 농토를 몹쓸 땅으로 여기는 사회의 미래란 과연 어떤 걸까. 그런 사회에 미래라는 말이 발을 붙일 수나 있는 걸까.

‘농토’와 ‘사람’은 소멸위기에 다가가고있는 시골에 있어 가장 소중한 자원이다. 행정절차에 따라 태양광발전 시설 허가장에 기계적으로 도장을 눌러대는 주무관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스물여섯 살 청년이 열정을 다해 바친 열세해를 도장 하나로 바꾸면서 ‘우리는 법대로 한다’고 말하는 그 입이 떨리지 않던가를, 스물여섯 청년이 열세해동안 농토에 바친 땀과 인내를 무지르며 도장을 누르는 그 손이 떨리지 않던가를.

농토가 사라지면 사람도 사라진다. 먹을 것을 생산하지 못하는 땅에 남아있을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그 이치에선 도시도 예외로 될 수 없다. 지성농장의 청년주인은 자기의 농토를 지켜낼 수 있을까? 그가 과연 자기의 청춘을 바친 사과나무와 소를 지켜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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