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향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대표 / 김복동의 희망 공동대표)

 

“일본... 아베... 나쁜...
“우리 문제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내가 더 하고 가야 하는데...재일조선학교...나를 대신해서 대표가...

그렇게 말씀을 하시고도 한참을 할머니는 이야기를 계속하셨다. 사력을 다해서 말씀하시는데도, 귀 뿐 만 아니라 온 몸의 세포구멍을 다 열어 할머니 말씀을 들으려고 애를 썼으나 너무나 죄스럽게도 할머니의 말씀을 더 이상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말씀을 하기 위해 얼마나 사력을 다했는지 할머니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이 솟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할머니는 숨을 거두셨다. 2019년 1월 28일 오후 10시 41분.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정말 원없이 세계를 돌았고, 원없이 일본도 왔다갔다 했고, 원없이 세상을 향해 말했고, 원없이 세상의 폭력과 맞서 싸웠던 김복동 할머니셨다. 재일조선학교 아이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싸웠어야 원없이 눈을 감으실 수 있었을텐데, 할머니에게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것이 못내 안타까웠던 할머니...

침묵을 깨트리고 활동가로 그리고 절망

김복동 할머니는 1992년 초에 침묵을 깨트리고 피해자임을 신고한 후 국내외 활동의 선두에 서 있었다. 그러나 금방 해결될 줄 알았던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5년이 가도 해결되지 않고 계속되자 심신에 피로감을 느낀 할머니는 1998년 공개 활동을 접고 부산에서 홀로 지내시게 되었다. “이렇게 해결이 오래도록 안될 줄 알았으면 신고를 안했지” 하는 말을 그 때부터 종종 하시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할머니 눈에 이상이 생겨 사물이 잘 보이지 않게 되고, 홀로 생활이 거의 불가능하게 된 상태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마주보고 있어도 너의 형체가 희무끄레 하게 보여. 눈 코 입 그런게 자세히 보이지가 않아.” 2002년 봄, 한 달에 한 번 할머니댁을 방문하고 있던 나에게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다. 한쪽 눈은 완전히 실명된 지 오래 되었고, 나머지 한쪽 눈마저 잘 보이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은 할머니의 성격도 바꿔놓고 있었다. 적극적이고 과감했던 할머니가 쪼그라든 느낌으로 방안에 갇혀 지내다시피 했다. 생명의 기운이 꺼져가는 느낌이었다. 

다시 생명의 기운

이후에도 할머니 댁을 방문할 때마다 서울에 가서 치료를 받자고 권유했고, 2009년 3월 8일,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착공식을 앞두고 할머니는 서울에 오셨다. 그리고 할머니 한쪽 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퇴원하던 날 할머니의 표정이 180도로 달라져 있었다. 의사가 아주 잘 생긴줄 알았더니, 별로라며 농담도 하시고, 식당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생김새도 설명하시고, 수요시위에도 참석하시는 등 적극적이 되셨고, 쾌활하게 달라졌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다시 부산 집으로 가셨다. 

그러나 다시 눈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결국 수술 후 1년이 지난 2010년 3월 29일(월요일), 김복동 할머니는 ‘부산 홀로 생활’을 정리하고, 정대협의 쉼터 <평화의 우리집>으로 완전히 이사를 하여 “너희들을 믿고 왔으니, 배신하지 말거라” 하시며 혹여나 정대협을 그만 둘까봐 불안해 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할머니께 안심을 시키고, 그 때부터 정기적으로 할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다니면서 눈 치료도 하고, 다른 건강체크도 진행하였다. 할머니 건강에 맞춘 식단을 짜서 식사를 드리는 등 적극적인 돌봄 활동을 하였다.

일본정부, 재일조선학교 차별 노골화

그 때 일본에는 오랜 자민당 정권이 물러나고 민주당이 집권을 하게 되었다. 할머니와 우리의 기대는 컸다. 민주당은 야당 시절,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들에게 사죄와 배상을 위한 법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 입법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면 뭔가 조금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할머니와 우리에게 권력에 대해 큰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2010년 1월 29일 일본 각의는 민주당의 선거공약을 실천하기 위해 모든 고등학교의 수업료를 무상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라 공립 및 사립 뿐만 아니라 조선학교 및 브라질인학교, 중화학교 등 ‘각종학교’ 고등학생들도 연간 약 12만 엔을 지원받을 수 있게 된 획기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이 법이 통과된 후 납치문제담당장관이 “‘북한 제재중’이라는 점을 충분히 생각해주길 바란다”며 문부과학상에게 고교무상화 대상에서 조선학교를 제외해달라고 요청했고,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는 “조선학교가 무엇을 가르치는지 잘 모르겠다”며 동조 발언을 하고 나섰다. 아이들과 북한 정부를 동일시하며 차별과 고립정책을 노골화시켰고, 재일조선학교 탄압에 대한 여론의 길을 터 줬다.

김복동 할머니의 ‘애잔한 손주사랑’

24시간 뉴스를 보시던 김복동 할머니의 관심영역에 재일조선학교 문제가 당연히 들어왔다. 늘 아이들을 위한 걱정을 쏟아내셨다. 

2012년 9월 김복동 할머니는 일본 도쿄와 오사카로, ‘강제연행을 입증하라, 증거를 대라’며 폭언을 해대는 일본 오사카 하시모토 시장에게 “직접 겪은 당사자가 증거다. 증거가 왔으니 내 이야기를 들어라” 라며 활동하셨고, 재일조선학교에 대한 차별중지 활동을 하였다. 할머니의 메시지는 말로만 끝나지 않았다. 이꾸노쿠 조선초급학교를 방문하셨을 때 만난 어린 손주들을 보시고는 “차별한다고 기죽지 마라. 당당하라!”고 힘주시고, 전교생 아이들에게 지갑을 열어 공책과 연필 하나씩 선물하며 할머니한테 편지도 하고 소식도 주고받자며 사랑을 주셨다
2013년 5월에는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일본 전국순회집회에 본인이 함께 가겠다고 자원하였다. 그리고 오사카에서 오사카 조선초급학교를 방문하여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만남으로 인해 할머니의 심장 속에 재일조선학교 아이들이 깊이 들어와 버렸다. ‘할머니의 손주’들에 대한 애잔한 사랑을 자주 드러내며 전교생 300명에게 할머니의 응원메세지와 함께 양말선물을 보내기도 하고, 새해가 되면 새해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더 나아가 할머니는 아이들의 학비를 지원해 달라시며 어렵게 모은 돈 5천만원을 장학금으로 정대협에 기부하셨다.

2014년, 제12차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가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4박 5일의 일정으로 일본 도쿄에서 개최되었다. 이 때 김복동 할머니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분명하고 강하게 일본정부에게 ‘위로금’이 아닌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피해자의 목소리를 전했다. 그리고 조선대학교를 방문하여 학생들과 교직원 앞에 서서 한 시간 동안 강연을 하였다. 일본군‘위안부’ 문제에서 출발하여 통일문제, 재일동포 문제로 넘나들며 역사인식을 넘어서서 통일과 평화, 인권강연을 한 김복동 할머니의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고, 학생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전해 들었다.

병상에서 더 뜨거웠던 할머니의 재일조선학교 사랑

2017년, 정대협은 김복동장학기금을 별도로 설치하여 모금활동을 펼쳤고, 그렇게 모인 성금으로 매년 2명씩 장학생을 선정, 졸업 때까지 장학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숭고한 역사를 시작하던 첫 번째 해, 김복동 할머니에게 암이 몸에서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바로 수술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첫 번째 역사를 직접 여시지 못하고, 길원옥 할머니께서 대신 일본 오사카로 가셔서 오사카조선고급학교 학생 2명에게 김복동장학금을 전달해 주셨다. 

2018년, 암수술을 한 해임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직접 일본으로 가시고자 마음을 먹었다. 6월 9일, 교토 조선고급학교 학생 4명을 추가로 김복동장학생으로 선정하여 장학금을 지원하기로 하고, 일본 도쿄로 아픈 몸을 이끄시고 직접 가셨다. 일반사단법인 희망씨앗기금과 함께 재일조선고등학교 아이들에게 장학금 전달식 행사를 하며, 한사람 한사람 아이들의 손을 잡고 힘내라고, 할머니가 너희들을 지원할테니 힘내라고 하시던 그 모습... 지금 생각해도 참 눈물겹고 감동적이었다. 

김복동 할머니의 재일조선학교에 대한 활동은 병상에 눕게 되면서 더욱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18년 9월 6일, 한 방송국 뉴스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하고 돌아오는 길에, 할머니는 태풍 피해를 입고 있는 재일조선학교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시더니 “우리나라에서 일본에 지원한 성금도 재일동포들에게는 해당안되겠지?”하시고는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힘내라고 하는 말과 태풍피해 복구를 위해 많은 사람들에게 협조해 달라는 자신의 말을 영상으로 찍어서 사람들에게 알려달라고 하셨다. 충실한 심부름꾼이었던 나는 할머니의 그 제안을 그대로 실행하였다.

할머니는 온 장기에 암이 퍼져 소변도 보시기 어렵게 된 상황에서 일본에 직접 가시기를 바랬고, 우리는 정말 할머니의 마지막 여행이라 여겨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할머니와 함께 하자는 무언의 다짐으로 2018년 9월말, 오사카를 방문했다. 그리고 조호쿠조선초급학교를 직접 방문하여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만나 희망을 전하시며 힘든 여정을 결행하셨다. 비록 극심한 병마와 싸우는 중이었지만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뜨거운 사랑과 강한 힘을 담고 조선학교 아이들과 교직원들에게 전해졌고, 그것은 재일조선학교 사회에 잔잔한 ‘희망’이 되어 전해져 갔다. 그렇게 재일조선학교 아이들에게 ‘희망’이 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할머니의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김복동의 희망”

할머니는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고, 입원과 퇴원을 몇 차례 반복하시는 중에 통장을 다 털어 재일조선학교 장학금으로 5천만 원을 전달할 의사를 밝히셨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스스로 결정으로 하는 것이다”고 영상에 당신 뜻을 담으면서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에게는 희망 메시지를 전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함께 힘을 모아줄 것을 호소하셨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로 기자들과 인터뷰를 할 때도 늘 결론은 재일조선학교 아이들이 차별받으면 안된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으셨다. 

2018년 11월, 할머니의 공적인, 사적인 삶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 모여 비영리민간단체 <김복동의 희망>을 설립했다. 명예회장으로 김복동할머니가 취임하셨다. 할머니는 <김복동의 희망>에 5,000만원을 기부하시면서 “희망을 잡고 살자. 나는 희망을 잡고 살아. 나를 따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지난 1월 28일, 병상에서 나 대신 재일조선학교 지원사업을 계속해달라고 부탁하시고는 숨을 거두셨다. 

그러나, 김복동 할머니는 지금도 계속 살아 활동을 계속하고 계시다. 할머니의 뜻을 계승하겠다는 결의들이 확산되고 있고, 여기저기서 청소년들이 “내가 김복동이다”는 다짐들이 확산되고 있다. “재일조선학교 아이들을 지원해 달라”는 할머니의 마지막 유지를 받들기 위해 활동하는 <김복동의 희망>에는 성금들이 모아지고 있다. 김복동 할머니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나는 희망을 잡고 살아. 나를 따라” 하셨던 메시지가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으며, 재일조선학교 사회뿐 아니라 콩고와 우간다, 코소보 등 내전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은 생존자들이 김복동 할머니의 이름은 자신들에게 너무나 큰 의미가 되었다고 고백하며, 할머니의 활동을 뒤따라 전쟁으로 상처입고 차별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겠다는 결의들을 보내오고 있다.

‘김복동의 희망’참여하기' http://bitly.kr/1dyh4

(수정, 2일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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