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은(이화여자대학교 초등교육과 명예교수/‘국민학교’ 명칭개정 협의회 집행위원장)

 

3.1혁명 100주년을 맞아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국민학교’ 명칭 변경과정에서 집행위원장으로서 서글펐던 일들을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돼 펜을 들었다. 

‘국민학교’란 명칭은 1941년 2월 28일 일제가 자기들의 제국 안에 있는 나라의 사람들을 ‘황국신민’(皇國臣民)이라고 부르기로 강요하면서 부쳐진 것이다. 즉, 일제는 조선교육령을 통해 교육의 식민지 지배체제가 시작된 이후 민족말살 정책을 더욱 강화하고 한국인을 전쟁에 총동원하기 위해서 ‘황국신민’ 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는 진주만을 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직후 일제칙령 제148호로 ‘국민학교령’을 공표하였다. 그런데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중국, 대만, 심지어는 일본마저도 ‘소학교’ 그리고 북한은 ‘인민학교’로 바꾸었는데 우리만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처음 역사적 고증에 의하여 밝혀 낸 분은 박창희 교수(외국어 대학)였다. 그러나 이름을 고치는 작업을 시작하자마자 박 교수는 국가보안법에 저촉돼 구속되고 말았다. 구속된 이면의 자세한 이야기는 알 수 없으나 오비이락이 아니기만 바란다. 

박 교수의 구속 이후 정보기관의 계속적인 감시와 도청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오비이락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이것이 첫 번째 서글픔이었다.

‘국민학교’ 직전에는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였다. 대학도 모두 ‘전문학교’라고 했으며 ‘심상’이란 그들의 식민지 통치에 유용한 하급 기술 인력육성을 위한 실업 기술교육에 치중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과연 그들이 말하는 ‘대동아 공영’인가? 이 한가지만으로도 그들의 의도가 분명할진대 어떻게 아직 친일잔재가 기승을 부리고 친일잔재 청산을 시도한 ‘반민특위’를 국론분열이라고 하는가? 그것도 야당 대표자가 그럴 수가 있는가? 서글픔을 더해 간다. 

그러면 명칭변경 단체의 명칭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부터가 당면한 문제였다. 1993년 10월 16일 국민학교 이름 고치는 모임에서는 회장(박창희 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연구소 소장)과 부회장(이성은 교수, 이화여대 초등교육과 교수)을 선출하였다. 이 모임에 고문이신 고 이오덕 선생님의 의견에 따라 ‘국민학교’ 이름고치는 모임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첫 발걸음도 떼기 전에 명칭에 대한 거부반응이 생기기 시작했다. 순수한 우리말로 된 명칭으로는 정부기관과 언론으로부터 호응을 얻기 힘들고 일반 국민들로부터 인정받기도 힘들다는 반대여론에 직면하여 부득이 ‘국민학교 명칭개정 협의회’로 바꾸었다. 이것 역시 서글프게 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드디어 1994년 2월 25일 ‘국민학교 명칭 개정에 관한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그러나 심포지엄이 있자마자.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전개되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와 생각하니 색깔론이었다. 어디서 낌새를 알았는지 아사히신문 기자가 수차례 연구실을 방문하여 진행 절차를 확인하였다. 취재인 줄 알았는데 무언의 압력이었다. 서대문 경찰서에서 수개월 연구실 도청을 하다 의연하게 대처를 하고 어떤 배경도 재정적 지원도 없이 일이 진행되는 줄을 알고 드디어 여 교수의 피눈물 나는 헌신에 감동하여 사과하는 점심대접을 하고 도청 해제를 알려주었다.

나는 이념서적 하나 읽지 않고 초등교육의 산실인 이화여대 초등교육과 교수가 당연히 풀어야할 과제라는 의무감과 역사학자 박창희 교수와 남편 김상일 교수의 격려로 일을 시작하였지만 당연히 그것도 오래 전에 했어야 할 이름 고치기 하나 하는데 이렇게 이념적으로 접근하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당연한 민족사적 작업마저 혹자들은 색깔론으로 보고 있었다. 공청회와 여론조사까지 마치고 막상 정부부처와 국회까지 통과를 보아야하는 첩첩산중이 앞을 가로 막았다. 

일을 진행하는 집행부 안에서도 내부적 갈등과 소영웅주의는 가장 큰 뇌관으로 작용했다. 국민학교 명칭 변경 1차 시도는 결국 좌초되고 말았다. 내부의 주도권 잡기가 갈등의 원인이었고 그 누구도 양보 없는 이전투구 양상은 가장 서글프게 한 일 가운데 하나이다. 결국 1차 집행부는 해체될 수밖에 없었고 일체 개정운동은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그리고 본인은 연구년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개정 운동에 대한 아쉬움을 갖는 몇 분들이 다시 운동을 시작하였고 나는 다시 집행위원장직을 맡게 되었다. 

1995년 4월 1일 국민학교 명칭개정협의회 발기인 대회를 거쳐 친일교육의 잔재인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고쳐야한다는 각계의 의견이 모아져 국민학교 명칭개정 협의회가 아래와 같이 발족되었다. 

                국민학교 명칭개정 협의회

공동 대표:   김찬국(상지대학교 총장)
                박창희(한국외대 사학연구소 소장)
                서영훈(전 KBS사장, 현 공선연 상임대표)
                윤택중(전 문교부장관, 현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
                조덕송(전 조선일보 논설주간, 현 전남일보 고문)
 집행위원장: 이성은 (이화여대 초등교육과 교수)

광복 50주년이 되는 1995년에는 반드시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청산하고 전 국민이 공감하는 새로운 이름으로 개정하여야 한다는 의지로 4월 20일 서울 YWCA대강당에서 국민학교 명칭개정에 관한 공청회가 개최되었다. 공청회가 있자 언론들이 보도에 나서 한국일보, 연합통신, MBC, KBS에서 방영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 교육부 장관이 3번 바뀌었다. 이 세 분의 장관들은 역사에 길이 남을 분들이었다. 지금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의 발언을 들을 때 과연 이런 분들이 정권을 잡았고 그 정권 하의 교육부 장관이었다면 과연 명칭이 변경될 수 있었을까, 의심스럽다 아니 할 수 없다. 김영삼 문민정부의 세 분들의 장관(34대 김숙희, 35대 박영식 36대 안병영)들은 명칭 변경에 적극적으로 협조적이었다.

이렇게 사회분위기와 정권 차원의 지원이 이뤄지자 그러면 명칭개정의 기준을 어떻게 정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남게 되었다. 그 기준은 물론 일제 잔재를 청산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다음과 같은 기준에 부합돼야 한다.  

△ 어린이 교육목적에 맞아야 한다.
△ 세계적이고, 역사성이 있어야 한다.
△ 미래지향적, 통일지향적이어야 한다.
△ 국민정서에 알맞고 민주 시민정신에 적합해야 한다.
△ 중, 고, 대학교와의 연계성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기준을 두고 일반 국민들이 얼마나 호응을 하느냐, 다시 말해서 여론조사란 과제가 남았다. 여론조사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여론조사에 필요한 비용을 모금하기란 어려운 과제였고 개인적인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대우재단 연구비 500만원, 교육부 연구비 600만원, 회원들 간의 자발적인 모금형성과 관심 있는 독지가의 재정적 지원이 없었더라면 개정 운동은 좌초되고 말았을 것이다. 후원해 주신 개인과 단체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론조사는 미디어리서치 연구진 3명과 협의 하에 문항작성과 함께 전화면접 결과 국민 73%가 변경에 찬성을 하였다. 명칭개정의 찬성이유는 76.3%로 ‘일제잔재청산을 통한 민족주체성 회복을 위해서’였다. 실로 이러한 여론조사 결과는 결정적으로 변경에 동력을 받게 하였다.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개정반대자들의 목소리는 확실히 줄어들었다. 

여론조사에 들어가자 가장 큰 반발을 하는 곳은 학교현장이었다. 학교 차원의 전국 초등학교 간판 교체비용이 20억 이상이 소요된다는 것이었다. 이 비용을 내세워 불필요한 개정 작업을 왜 하느냐였다. 해방 후 친일 잔재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 경찰과 교육이라고 한 말이 실감났다. 일선 학교 일부 교장과 교사들이 앞장서 고치자고 해도 부족한 마당에 이들이 오히려 반대를 하다니. 서글프고 서글펐던 일이다.  

그러나 교육 현장에서도 여론의 목소리를 이길 수는 없었다. 아무리 친일 잔재들이 준동하고 있어도 평균적인 국민정서는 일제를 용납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 남은 과제는 그러면 개정된 명칭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였다. ‘초등학교’로 최종 변경되기까지 ‘어린이학교’, ‘태학교’ 등의 이름들이 후보로 올랐다. 외국에서는 ‘elementary school’ 혹은 ‘primary school’ 등으로 사용되는데 이 두 말을 합한 의미가 ‘초등’이었다. 그리고 초등, 중등, 고등 교육으로 불리는 만큼 ‘초등’은 적합도 1위였다. 그리고 명칭이 바뀌자마자 쉽게 사람들 입에서 불리게 되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었다.

1941년 2월 28일 일제칙령 제 148호 ‘국민학교령’(國民學校令)에 의해 공포된 국민학교(國民學校)는 1996년 3월1일 교육법 제 81조 제 1호에 의해서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지금에 와서는 ‘국민학교’라고 하는 것이 어색할 정도이다. 

마지막까지 서글펐다. 이제 막상 국회 통과란 최대 난제가 남아 있었다. 믿겨지지 않겠지만 어렵게 근소한 차이로 통과되었다는 점이다. 참으로 이런 나라는 지구상에 둘도 없을 것이다. 아프리카 토호 국가에도 이런 나라는 없다. 자기들을 35년간이나 지배하고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창씨개명까지 강요한 식민제국에서 아직도 벗어나기 싫어하고 저항하는 무리들이 우리 속에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 서글픈 정도가 아니고 기가 막힌다. 안중근, 유관순, 윤동주의 얼굴을 생각하며 이 글을 마친다.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중 자기가 한 업적 가운데 중앙청 허문 것과 국민학교 명칭 개정한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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