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니 지켜야 한다고 했다. 탈옥을 권유하는 그의 제자들에게 한 말로 알려져 있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을 두고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제 귀걸이 제 코걸이’ 식 해석이 있어 왔다. 주로 악법을 정당화시켜주는 방향으로 이해되어왔다. 특히 유신시대 때 이 말은 바울의 ‘모든 권위는 하늘로부터 왔으니 지키라’는 말과 함께 독재를 합리화시켜주는 말로 제격이었다.

국가보안법은 분명히 악법이다. 소크라테스의 말대로라면 폐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이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에 동의한다. 그래서 국가보안법은 폐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과연 소크라테스는 악법을 정당화 내지 합리화시켜주려 이 말을 했을까?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란 말도 반대했으며, ‘악법도 법이다’란 말도 반대했다. 그의 논리학인 모순율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악은 악이고 선은 선이고, 너는 너고 나는 나이기 때문에 악법도 법이란 논리는 모순율에 반한다. 너인 것이 나일 수 없고 나인 것이 너일 수 없다는 것이 모순율이고 동일율이다. 누구의 말이 옳은가? 소크라테스의 말이 옳다고 이 글을 쓴다.

소크라테스의 논리는 아리스토텔레스학파가 반대한 헤라크라테스학파나 크레타 섬의 현인 에피메니데스의 그것과 같다. 그리고 후자의 논리는 철저히 서양사상사에서 배제되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말은 한갓 현자의 넋두리 정도로 여겨져 왔다.

소크라테스는 과연 악법을 합리화 내지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한 것인가?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말 속에는 그가 마신 독보다 더 무서운 독소가 들어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자기를 죽이는 세력과 인간들도 그 악법의 법망에 걸려 들 것을 환히 내다보았다. 동양의 한비자는 바로 이런 악법의 역설(逆說)을 역설(力說)하던 법가였다. 이 글에서 미흡한 부분은 한비자의 글을 읽는 것으로 보충하기 바란다. 한비자를 읽어야 법의 성격을 바로 알 수 있고 소크라테스의 진의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를 죽인 자들이 똑같은 법을 어길 때에 무슨 법으로 그들을 처단할 것인가? 그 소크라테스의 적들을 처단할 법도 자체도 바로 악법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만약에 그 악법을 없애 버리면 법자체가 없어져서 그의 적들을 처단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진나라 진시황제의 재상 상앙(商鞅)은 법을 많이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만든 법 가운데 날이 저문 후에 나가 돌아다닌 자를 투숙시키면 처벌한다는 법도 있었다. 진나라가 망하자 그는 갈 곳 없이 떠도는 자가 되었다. 저녁에 들어가 투숙을 청하는 집마다 거절당했다. 결국 그는 길거리에서 죽고 말았다. 자기가 만든 법에 자기가 죽고 말았다. 왜 이런 법의 역설이 생기는지 알아보자. 프랑스혁명 후 단두대를 만든 자들이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소크라테스의 논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와는 달랐다. 에피메니데스는 크레타 사람으로서 “모든 크레타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다”라고 했다. 일찍이 크레타는 그리스 남단에 있는 작은 섬으로 역사가 오래 되었고 해상업의 중심에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상술에 밝아 당시 그 일대에서는 “모든 크레타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라는 경구가 유행어처럼 퍼져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크레타 사람들에게 복음이 먹혀들지 않아 화가 나서 “크레타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거짓말쟁이요, 악한 짐승이요”(디도서 1장 12절)라고까지 했다. 이 말은 이미 지중해 일대에 경구같이 퍼져 있던 말이지 바울이 새롭게 지어낸 말은 아니다. 그만큼 크레타 사람들의 거짓말은 소문 나 있었다.

그런데 “모든 크레타 사람들”이라고 할 때에 ‘모든’이란 말 속에 크레타 사람인 에피메니데스 자신을 집어넣어 보자. 그러면 악순환의 논리에 직면하여 소화가 안 될 지경이 될 것이다. 그리스의 피라테스라는 철인은 이 악순환 속에서 밤새도록 고민하다 새벽에 자살하고 말았다고 한다.

에피메니데스는 크레타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이란 말 속에 자기 자신도 집어넣으면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을 한 꼴이 되기 때문에 ‘참말’이 된다.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을 하면’ 참말이니, ‘참말을 하면’ 거짓말이 된다. 이를 두고 ‘에피메니데스의 역설’ 혹은 ‘거짓말쟁이 역설’이라고 한다. 상앙이 정치 현실 속에서 직면한 역설과 하나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거짓과 참은 서로 분리될 수 없고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에 어긋나게 된다. 그러한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악법을 만든 사람을 그 악법 속에 집어넣는다면 그도 그 악법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자기도 그 악법에 의해 처벌을 받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내로남불’이란 말을 너무 가볍게 무의미하게 사용하고 있다. 지금 나경원과 황교안이 하는 소릴 들어 보라. 문재인 대통령과 여당 민주당을 향해 공격을 하고 있지만 모든 말은 자기들이 불과 2년 전에 한 말과 짓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악법 속에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 이 역설을 피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유체이탈을 하는 것이다. 즉, 역설을 피하는 방법은 역설의 악순환에서 일탈하는 길이 있다.  이를 유체이탈이라고 한다. 유체이탈을 하게 되면 못할 말, 못할 짓이 없게 된다.

서양 역사에서 역설은 혼란을 조장하며 성가신 것이기 때문에 폐기의 대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과 동일율로 이를 난도질한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특히 도가 사상에서는 좌우가 같고 밤이 있으니 낮이 있다고 역설을 조장하고 선양한다. 서로 반대가 일치하는 교집합을 역설이 만들기 때문에 역설이 없는 사회는 이분법으로 균열되고 만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알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반대했었다.

아무리 역설을 제거하려 해도, 모든 존재는 역설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피아를 막론하고 교집합이라는 것이 있게 된다. 죄 없는 자가 먼저 간음한 여인에게 던지라고 할 때에 돌을 던지려는 자기들 자신들도 같은 죄를 범했다는 것을 안 바리새인들은 들었던 돌을 놓고 말았다. 이 정도의 교집합이 있어야 건전사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를 좌우로 극단적으로 나누고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며 거리를 누비는 태극기부대와 국회라는 공간 안에서 이들 소리를 대변하는 한국당, 이들은 최소한 우리 사회의 교집합을 완전히 파괴하고 말았다.

한국당은 여인에게 뻔뻔스럽게 돌을 던지고는 예수에게 간음 사주 방조를 했다고 가짜 뉴스를 전파하고 있는 격이다. 교집합이 있었다면 적어도 초등학생들을 향해 시위를 하지는 못할 것이다, 교집합이 있었다면 적어도 5.18 광주 희생자들을 모독하지는 못할 것이다. 교집합이 있었다면 적어도 세월호 희생자들 유가족 앞에서 피자를 먹지는 못할 것이다.

나경원과 황교안. 결국 이들이 이 나라 가치관을 다 파괴하고 나라의 경륜과 윤리도덕을 다 망가지게 만들어 버렸다. 결국 이들이 다시 집권하게 되면 나라는 망하고 말 것이다.

나는 이들을 위해 국가보안법은 그냥 두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다만 주적 개념만 바꾸면 되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 재판을 받아 본 사람들은 안다. 검찰과 판사가 묻는 첫 번째 질문은 ‘주적이 누구냐’이다. 경찰조사와 검찰조사 그리고 재판과정에서 한결같이 이에 대한 답은 ‘일본’이라고 하면 국가보안법 7조 고무찬양죄에 걸린다. 북을 주적이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도를 가운데 두고 일본은 시시각각 시비를 걸고 있다. 언젠가는 독도를 구실로 전쟁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 북의 핵문제는 아주 간단한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5027 작계란 무엇인가? 북이 붕괴되었을 때 미국과 일본이 각각 나누어 황해도 해주와 강원도 원주에 진주한다는 작전계획이다. 그러면 중국이 쳐 내려오고 청천강 선에서 남북을 분할통치 하자는 것이 아닌가? 이미 임진왜란 때 명과 일본이 구상했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그런 분할 구도 속에서 살아 왔을 것이다.

당시 조정에서와 같이 지금 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철저하게 이 구상을 찬성하는 선을 넘어 밀어붙이고 있다. 그것이 그들의 영구 집권이 되고 그래야 국회의원도 장관도 일본의 꼭두각시 대통령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일본은 재무장을 하고 있다. 불과 며칠 전 보도에 의하면 일본은 400킬로미터 항공 미사일을 개발했다고 한다. 이 거리면 남북을 다 가로지르는 거리이다. 남북이 공동대처 하지 않고 미일의 5027 작계를 어떻게 막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국가보안법 적용 현장에서는 한결같이 일본은 주적이 아니라 한다. 나경원 대표의 발언은 5027 작계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 한다. 그의 논리는 일본의 재침략을 쌍수 환영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반민특위가 국론을 분열했다는 저들의 목구멍까지 차 있던 말이 서슴없이 나온 것이다.

나경원을 두고 ‘친일파의 수석대변인인가’ 혹은 ‘나베 경원’이라고 말장난 할 때가 아니다. 일본을 당장 ‘주적’으로 국가보안법의 글자만 바꾸면 된다. 그리고 법 자체는 그냥 두어야 한다. 악법을 그냥두지 않고 그 악법을 저지른 자들을 처벌하려고 새 법을 만들려면 백배 힘이 들 것이다. 반민특위가 실패한 것이 이 때문이다.

나경원과 김무성의 조상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일본 천왕 생일잔치에 그리고 일본 자위대 창설 기념식에 드나드는 이들을 처벌하기 위한 법을 따로 만들자면 엄청난 저항에 부닥쳐 법 자체가 성사도 안 될 것이다. 반민특위를 해산시키던 그 저항 이상의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국민 30% 콘크리트 층이라는 게 버티고 있다. 이들을 역사의 현장에 세우지 않으면 결국 구한말 꼴이 날 것이다.

정답은 현재 국가보안법을 그냥 두고 주적을 ‘일본’이라고 하면 된다. 이것 역시 간단할 것 같지만 어려울 것이다. 지금 일본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학계, 정계, 재계, 문화계에 침투하여 물량 공세를 하고 있다. 일본은 하늘과 땅 바다를 모두 석권할 만한 정보력으로 우리를 꼼짝 달싹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우리를 35년간이나 그렇게 악질적으로 탄압하고도 한마디 사과나 회개도 없이 오히려 우릴 향해 이래라 저래라 큰 소리 치고 있다. 지구상 그 어디에도 주권 국가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친일 청산을 못 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을 그냥 두라. 주적 개념만 바꾸라. 언젠가 나경원과 황교안과 자유한국당 무리들을 일거에 국가보안법으로 처단할 날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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