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애국열사 김규철 선생 민족통일장’이 18일 저녁 건국대학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150여명의 추모인사를 장내를 메웠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우리에게는 큰 슬픔이고 민족자주 조국통일투쟁에 커다란 손실이다.”

18일 저녁 건국대학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통일애국열사 김규철 선생 민족통일장’에서 노수희 범민련 남측본부 부의장은 이규재 의장의 추도사 대독을 통해 고인이 “민족사의 대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는 이토록 중요한 시기에 우리들 곁을 떠났다”면서 이같이 아쉬워했다.

노 부의장은 수차례 옥고를 치르고 출소 이후에도 “민자통 재건사업을 비롯하여 범민련 결성과 전민특위 남측본부 집행위원장, 통일선봉대 총대장 등을 맡으시면서 고난과 시련의 가시밭길을 걸어오셨다”면서 “시대와 민족의 부름을 외면하지 않고 당당히 투쟁해 오신 의장님의 삶은 수많은 동지들과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어주셨다”고 기렸다. 

▲ 노수희 범민련 남측본부 부의장은 추도사를 통해 “민족사의 대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는 이토록 중요한 시기에 우리들 곁을 떠났다”면서 고인의 타계를 아쉬워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는 “김규철 선생님을 생각하면 딱 두 마디, ‘에이 아니야’와 ‘그래 맞아, 맞아’라고 한 말이 떠오른다”면서 “선생님이 세상을 떠났으니 ‘아니야’가 어울리고 선생님의 삶을 생각하면 ‘맞다 맞아’가 어울린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권 대표는 “선생님은 당신의 지식, 정보, 상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 직설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이를 두고 일부에서 괴팍하고 성깔 있다고 하는데 운동과 조직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라면서 “선생님은 떠난 게 아니다. 선생님의 뜻, 외길 인생은 우리들 가슴 속에 깊이 간직돼 있다”고 기렸다.

한충목 6.15서울본부 상임공동대표는 “선생님은 따뜻 온화한 면과 대쪽 같은 면이 함께 있어 선비와도 같았다”고 회고하고는 “문익환 목사님 5주기 때인 1999년 중국 용정에서 북측 대표단과 만나 합의한 대로 그해 서울대에서 열린 8.15대회를 ‘하나의 대회’로 치렀다”고 상기하고는 그 중심에 김규철 선생이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알렸다.

한 상임공동대표는 “그 행사 이후 선생님은 구속되었는데, 감옥에서도 ‘이제부터 8.15대회는 반드시 하나의 대회로 치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며 고인의 강한 의지를 소개했다.

김혜순 양심수후원회 회장은 “통일운동에 산처럼 우뚝 서 계시던 큰 스승을 잃었다”면서 “혹자는 선생님을 직설적인 말투 때문인지 원칙주의자로 평하지만 제게는 따뜻한 분으로 기억된다”고 회고했다.

김 회장은 “6년 전 고인이 팔순잔칫상을 받았을 때 ‘오로지 조국통일만을 보고 죽는다면 여한이 없겠다’고 짧은 말로 절절한 심정을 토해냈다”고 상기하고는 “그러기에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후배들에게 ‘통일운동 열심히 하시오’라는 유언을 남기셨다”고 기렸다.

▲ 임방규 통일광장 선생,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권오헌 (사)양심수후원회 이사장(우측부터)의 대표 분향으로 추도식이 시작되었다. [사진-통일뉴스 이종문 통신원]

앞서, 이날 추도식은 임방규 통일광장 선생,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 권오헌 (사)양심수후원회 이사장의 대표 분향으로 시작되었다.

김준기 민자통 상임의장이 고인의 약력을 보고했으며, 이어 고인의 활동을 모은 추모영상이 상영되었다.

▲ 김길숙 홍익예술아카데미 외래교수의 추모춤. [사진-통일뉴스 이종문 통신원]

추도사에 이어 김길숙 홍익예술아카데미 외래교수의 추모춤과 노래극단 희망새, 가수 차준호 씨의 추모노래가 펼쳐졌다.

박중기 추모연대 명예의장은 호상 인사말을 통해 “김규철 동지와는 60년 동지이다. 떨어져 있기도 했고, 같이 있기도 했다”고 회상하고는 “우리 세대가 시련 속에 감당하기 어려운 역사적인 무거운 짐을 마다하지 않고 여태까지 끌고 나온 것은 칭찬받아야 할 일이다. 그런데 우리 세대가 늙고 죽는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 후배들이 이어가는 것이 역사이고, 사회이다”면서 고인의 뜻을 후배들이 이어받기를 호소했다.

▲ 고인의 장남 김종태 씨가 유족인사를 하자 고인의 부인 이영자 여사가 오열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종문 통신원]

이어 고인의 장남인 김종태 씨가 유족인사를 하자 유족들은 오열하고 장내는 숙연해지면서 눈물바다가 되었다.

끝으로 가족 헌화와 함께 참가자들의 헌화로 추도식이 마무리되었다.

▲ 추도식 광경. [사진-통일뉴스 이종문 통신원]
▲ 추모인사들이 헌화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종문 통신원]

강경태 범민련 서울연합 사무처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추도식에는 150여명의 추모인사들이 참석해 행사장을 꽉 메웠다.

한편, 발인은 19일 오전 8시40분에 건국대학교 병원 장례식장 202호에서 진행되며, 장지는 경기도 광주시 소재 자하연 분당이다.

 

▲ 고인의 영정 앞에서 장남 김종태 씨가 향을 피우고 있다. 이날 종태 씨의 유족인사로 장내는 눈물바다를 이뤘다. [사진-통일뉴스 이종문 통신원]

저는 69년생입니다. 저희 아버지 형제분들은 규자 항렬이고, 동생들은 석자 항렬을 씁니다. 저만 종자입니다.

제 이름은 사형을 받으신 동지의 그 이름을 제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 이름이 김종태입니다. 제가 모르는 일로 그 무거운 이름을 지어준 게 그렇게 싫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이름을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봉석이라고 하셔서 촌스럽다고 싫다고 했습니다. 

1차 인혁당 사건 때 외삼촌 이상배 열사가 모처에서 고문을 받으셨습니다. 너무나 심한 고문을 받다가 동지의 거처와 이름을 불까 싶어 공수도 3단 서울법대 6등이셨던 분이 2층에서 묶인 채 창문에서 뛰어내리셨습니다. 목 신경이 끊긴 채 머리만 살아계신 채로 7년을 버티다가 곡기를 끊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뒤로 그 동지의 여동생을 아내로 거두어 지금까지 살아오셨습니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어느 날 용정을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갔다 오신 날 김포공항에 갔습니다. 안 나오시는 거예요. 갑자기 웅성웅성하더니 기내에서 연행되셨다고 했습니다. 남대문경찰서로 찾아갔는데, 자식으로서 얼마나 걱정이 됐겠습니까? 한참 기다리니까 아크릴 유리창에 아버지가 싱글벙글하며 나오셨습니다. “아버지, 그 안에서 뭐가 좋으시냐”고 물으니까, “다들 잘 싸워 좋아서 그런다”고 하셨습니다.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곧 국정원으로 이송되셨는데, 국정원에서 단식을 하셨습니다. “니들이 주는 밥은 먹지 않겠다”고 하면서 단식하셔서 한쪽 눈을 잃으셨습니다. 아버지가 한쪽 눈이 안 보이는데 슬퍼하지 않을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내 동지들은 목숨을 잃었다. 나는 눈 하나 잃었는데 슬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오랜 동지 도강호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친구 분들과 모여서 추모식 하는데 우스갯소리로 “도강호 선생이 목소리 커 고문 받고 있는데도 넌 줄 알았다”고 하시면서 아버지는 고문 받으면서 비명 한번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동지를 위해서 내가 죽겠다고 하면 이순신 장군처럼 비명이 안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통일선봉대 총대장이 되셨을 때. 다리가 이미 마비 상태였습니다. “그 몸으로 걸으면 죽어요”하고 말렸는데, “나는 길에서 죽을 각오가 돼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총련사건인 96년 학생들이 연세대에 갇혔을 때, 헬기에서 최루탄 쏘고 그럴 때 신촌에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거기 전쟁터에요 어딜 가요 아버지”라고 했더니, “학생들이 갇혀있다”고 하면서 가셨습니다. 

평생 그렇게 누구를 위해서 사셨습니다. 아버지께 이름 밖에 받은 것 없는 저와 엄마는 시장에서 내장 팔면서 먹고 살았는데,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그런데 당신은 “이게 내가 가족을 사랑한 방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인 줄 몰랐습니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우리 가족과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방식은 모든 것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오신 선생님들 꼭 오래 사셔서 이 나라의 통일을 맞이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수정-19일 오후 12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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