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정의 종손녀인 윤명화 할머니가 석정 생가 마당에서 사진을 꺼내들고 석정의 외아들이자 5촌 당숙인 남선 아저씨의 생사여부 확인과 상봉을 기대하며 가족사에 대해 설명했다. [사진-조천현]

1942년 6월 3일 조선의용대 제1지대와 제3지대를 이끌고 중국 산서성 요현 상무촌의 팔로군 태항산(太行山) 근거지 장자령 화옥산에서 일제의 소탕전에 맞서 교전하다 전사한 석정(石鼎) 윤세주 열사(이하 석정, 1900.6.24)의 외아들 남선(南善, 아명-용문(龍文), 1929.3.11)이 북한에 살아 있을 수 있다는 증언이 제기됐다.

석정의 종손녀로서 그동안 가려져 있던 석정의 견결한 독립투쟁사를 복원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해 온 윤명화 할머니는 휠체어에 몸을 싣고 지난 13일 밀양에서 열린 3.13밀양만세운동 100주년 기념행사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올해 아흔살인 윤명화 할머니가 불편한 몸을 무릅쓰고 부산에서 밀양까지 거동한 것은 작은 할아버지 석정의 외아들인 남선 아저씨가 부친 사후 한국전쟁 시기 어머니인 하소악(河小岳, 본명-연악(蓮岳)) 여사와 함께 북한에 있었으며, 그 즈음 소련 레닌그라드 공대에 유학했었다는 증언을 공개하고 그의 생사여부와 행적을 확인하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윤명화 할머니는 이날 기자에게 "6남매인 우리 형제 중 온전하게 석정 할아버지의 일을 알고 있는 건 아홉살 아래인 막내 명옥이와 나 밖에 없다. 남선 아재가 아직 살아 계신지 모르지만, 꼭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큰 형님인 윤치장(尹致璋)과 20살 나이 차이가 나는 석정이 결혼 11년만에 낳은 외아들 남선은 나이는 한살 위이지만 윤 할머니에게 5촌 당숙이 된다. 윤 할머니는 윤치장의 손녀이다.

독립운동가들의 이념적 지향과 해방 이후 북한에서의 행적에 예민한 우리 정부가 해방전 중국 땅에서 팔로군과의 항일 공동작전에서 전사한 석정에게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의 서훈을 추서하고, 중국에서는 국립묘지인 하북성 환단시 진기로예 열사능원에 묘를 조성했지만 가족들이 북에 있는 석정의 외아들을 공개적으로 찾기는 어려웠던 저간의 사정은 짐작되고도 남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고령의 유족들로서는 이것 저것 눈치 볼 것도 없고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 된 것으로 보인다.

▲ 석정 윤세주 열사. [사진제공-윤명화]
▲ 석정의 부인 하소악 여사와 외아들 남선. 경주에서 머물던 시절 석정의 장조카인 태선이 찍은 사진이다. [사진제공-윤명화]
▲ 석정의 독자 윤남선(호적명, 아명-용문)의 9살 때 모습. 1937년 봄 부친이 은밀히 보내온 인편을 따라 어머니 하소악 여사와 밀양을 떠나 신의주를 넘어 남경에 도착, 5년만에 부친을 상봉했다. 이후 '이용문'이라는 이름을 쓰고 지금까지 생사를 모른다. [사진제공-윤명화]

그동안 석정의 부인 하소악 여사와 외아들 남선의 해방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관계자들의 증언 등을 통해 서너 개의 일화가 전해질 뿐이다.

석정 연구자인 김영범 대구대학교 교수는 2013년 '의열단·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의 영혼 윤세주'라는 저서에서 하소악 여사와 남선이 해방되던 해 겨울 한달 간격으로 각자 밀양에 3일 정도씩 다녀가면서 '대오따라 간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으며, 1950년 이화림이 평양에서 하 여사를 만났는데 전쟁 직후 사망했다는 것, 외아들 남선은 소련 레닌그라드 공대로 유학했다는 등 단편적인 소식이 전해질 뿐 생사여부와 다른 행적은 불명이라고 짧게 소개한 바 있다.

하소악 여사가 1950년에 평양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당시 아들 남선이 레닌그라드 공대에 유학하고 있었다는 증언은 김학철 선생으로부터 처음 나온 것이다.

윤 할머니는 "김학철 씨가 말하길, 자기 모친이 6.25동란때 이북에 있었는데 그때 남선 모자가 평양에 살았다고 하더라. 할머니(하소악 여사)는 계셨는데 아들(남선)은 소련의 레닌그라드 공대에 다닌다고 하더라고 했다. (우리 가족들은)그 이야기를 듣고 그런가보다 하지, 여력도 안되어서 찾으러 다니지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김학철 선생은 "(북한 당국이)우대를 하지는 않았겠지만 박해는 안했을 것" 이라고 촌평을 했다고 한다. 연안파에 대한 숙청이 있었지만 석정은 오래 전 중국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주변의 추측이다. 

윤 할머니는 남선 '아재'의 어린시절 독사진 등 집안에서 보관해 온 여러 사진자료와 함께 태항산 최후 전투를 함께한 김학철, 최채 선생 등으로부터 들은 석정의 최후와 가족들의 이후 행적 등에 대한 증언 필사록(1993년 중국 연길, 전우증언-환단시와 태항산을 다녀와서) 등을 건네주면서 오랜 시간 설명했다. 

또 지난 1997년 7월 중국 대련시에 거주하던 이화림 여사와 나눈 전화 통화에 바탕해 작성해 둔 "항미원조(6.25전쟁)차 평양에 갔을 때 석정의 부인을 잠깐 만났다. 아들은 보지 못했는데 생활은 국가에서 방조하는 것 같았다. 부인으로부터 '남편은 갔지만 아들이 자라고 있으니 오래지 않아 형편은 나아질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내용의 증언도 세상에 직접 알렸다.

윤 할머니는 90살의 나이가 무색하게 석정과 관련된 모든 활동의 연도와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관련 자료의 주요 대목에는 형광펜으로 반듯하게 줄을 긋고 사진 뒷면에는 연도와 인물 이름 등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반짝이는 눈빛과 또렷한 음성으로 자료를 하나하나 넘겨가면서 "부족하더라도 아닌 걸 기라고 하지 않았으며, 정확하지 않은 내용은 뺄지언정 보태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기록했다"고 다짐하듯 말했다.

▲ 무장 훈련 중인 석정의 모습. 시기와 장소는 확인되지 않았다. [사진제공-윤명화]
▲ 태항산 석문촌 묘비석과 비문. 1942년 건립 당시 모습. 하소악 여사가 1945년 겨울 밀양에 들러 석정의 전사 소식을 전해주며 전달한 사진이다. [사진제공-윤명화]

관련자들의 증언과 정황을 종합하면, 석정은 모친이 노환으로 작고한 이듬해 인 1937년 봄, 극비리에 인편을 보내 부인과 외아들을 중국 남경으로 불러들였다.  외아들인 남선이 밀양읍 밀성초등학교 1학년(9살)에 다니던 해였다.

이때 신의주를 넘어 중국 남경에서 부친을 상봉한 남선은 아명인 용문을 이름으로 쓰고 성을 이씨로 바꾸어 '이용문'으로 살게 된다. 이미 두 차례 중국 망명을 결행하고 조선혁명 간부학교 입학 및 교관(1932.10.20~1935.4.2), 조선민족혁명당 결성(1935.7.5) 등으로 지도적 위치에 있던 아버지와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 성까지 바꾼 듯하다.

석정 가족이 남경에서 함께 산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해 7월 7일 일본 주둔군의 루거우차오(盧溝橋, 노구교) 사건을 일으켜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가족들은 후방에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중일전쟁 발발 전까지 약산 김원봉도 남경의 석정 가족과 함께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태항산 전투 직전인 1941년 12월 일본군 12명을 사살한 전과를 올린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 전투에서 중상을 당해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로 끌려갔던 김학철 선생은 1993년 증언에서 "석정의 부인과 9살 아들(본명 남선, 중국에서는 이용문으로 통용) 용문이는 고국 밀양에서 중국 남경으로 와 함께 지냈으며, 중일전쟁 이후 석정이 대오를 따라 움직이면서 가족들은 후방에 남게 되었다"고 당시 가족들의 근황을 알렸다.

또 "남경에 있을 때 가정있는 분들은 출퇴근을 하고 독신들은 합숙을 했는데 그때 김두봉과 한빈도 석정의 집에 얹혀 살았다"고 증언했다.

석정의 최후가 된 태항산 전투를 전후한 시기에 부인과 아들은 중경에 살았으며, 석정이 순국한 후에는 연안에서 의용군 가족으로 생활하면서 아들은 학교에 다녔다는 사실도 증언으로 확인됐다.

1935년 광동성 광저우에서 석정을 처음 만나 남경에서 2년간 공작활동을 함께 하고 조선의용대원으로 태항산 전투에도 함께 한 이화림 여사는 1997년 윤명화 할머니와의 전화통화에서 "태항산에서 석정과 함께 활동할 때 부인과 아들은 중경에 살았다. 석정과 진광화가 전투에서 순국한 후 연안으로 갔는데 석정 부인과 아들이 먼저와 있더라. 의용군 가족으로서 생활하고 용문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윤 할머니는 해방되던 해 겨울 잠시 꿈결처럼 밀양을 찾은 남선 아재의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질 않는다고 했다.

남선 아재는 그때 '왜놈들에게 빼앗긴 놋쇠가 독립군의 목숨을 앗아가는 총탄으로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걸 그렇게 쉽게 내주진 못했을 것'이라며 굳은 표정으로 집안 식솔들을 나무랐다.

놋그릇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땅에 파묻기도 하며 죽을 고생을 했는데, 그걸 몰라줘서 야속하기도 했지만 돌아가신 석정 할아버지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서운하다는 생각은 할 수 없다고 했다.  

▲ 밀양시 내이동 881번지 석정 생가. 앞 공터에 두채가 더 있었으나 지금은 헐린 상태이다. 왼쪽은 약산 김원봉의 생가터로 의열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사진-조천현]
▲ 밀양의 항일독립운동가 영정.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수정-19일 08: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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