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아무런 합의 없이 돌아선 지도 20여일이 지났다. 미국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하노이 정산회담 직후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하노이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북한에게 돌리는 발언들을 쏟아냈다.

볼턴 보좌관뿐만 아니라 폼페이오 장관과 비건 대표까지도 영변 핵시설만이 아닌 모든 대량살상무기와 운반수단까지 포함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소위 ‘빅딜’(big deal)이라는 포괄적 합의를 요구하며 북한의 양보를 강요했다.

미국의 갑질과 타임머신

하노이 ‘노딜’(no deal)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미국 국내정치적 변수가 트럼프의 결정에 너무 일찍 작동해 버린 것이 사실이다. 트럼프가 지금까지 북미협상의 진행이 자신의 정치적 생명에 불리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싱가포르에서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고 보았다면 그 이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무엇보다 9월 평양 남북정상선언에 미국의 상응조치에 따라 영변 폐기를 명문화한 것은 미국 입장에서 보면 명백하게 독소조항일 수 있다. 이번 하노이 노딜은 평양선언 5조 2항에 명시한 북한의 단계적 동시적 접근 방식을 거부하고 우리의 중재 노력마저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이는 트럼프의 <협상의 기술>(The Art of the Deal)에 나오는 ‘판 깨기 위협 뒤 좋은 조건으로 유인하기’처럼 명백하게 강자의 갑질이다. 북한이 성급하게 제재 해제를 요구하면서 조급함과 스스로 제재에 굴복해 핵을 포기하는 모순을 드러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국내 정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북한의 약점을 간파하고 ‘협상테이블 박차고 일어나기’를 통해 싱가포르 이전으로 상황을 리셋하려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싱가포르 이전인 5월말,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유예와 풍계리 핵시험장 폐기한 다음날로 시계를 되돌리기를 원할 것이다. 여전히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 하노이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미연합훈련 변경 및 축소를 결정한 것은 2016년과 2017년 북한이 핵실험과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던 위기상황으로까지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협상테이블에서 박차고 일어나기’ 위협을 통해 북한의 양보를 얻어낸 뒤 대화를 재개하려는 계산이었다면 그 효과가 사라지기전 미국은 북미회담을 재개하려 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의 ‘미국 따라 하기’

협상은 100m 달리기가 아니다. 누가 먼저 목표지점에 도달하느냐가 아니라 양 끝단에서 누가 더 많이 자신 쪽으로 오도록 만드는 게임이다. 협상이 시작되기 위해선 양측 모두 자신이 시작할 위치를 명확히 해야 하고, 협상 상대에게도 알려주어야 한다. 하노이 이후 미국은 뒷걸음질해 자신의 새로운 협상 시작 위치가 영변이 아닌 모든 것을 포함한 포괄적인 합의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북한에게는 시작점을 양보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그런데 북한은 양보할 생각이 없다. 지난 15일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평양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우리는 미국의 요구에 어떤 형태로든 양보할 의사가 없다”면서 “핵·미사일 시험 모라토리엄(유예)을 계속 유지할지에 대해 김 위원장이 곧 결심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까지 이야기했다. 미국이 그렇게 나오면 싱가포르 이전 5월말이 아닌 그 훨씬 이전으로 돌아가 버릴 수도 있다고 오히려 협박하고 있다. 하노이 이후 미국이 보인 행동을 보자면 북한이 보일 수 있는 당연한 반응이다.

북한은 이번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국제정치에서의 약소국이 가지는 힘의 한계를 절감했다. 북한은 그동안 잃을 것 없는 약자의 입장에서 벼랑 끝 전술을 통해 미국을 상대해 왔던 약자의 폭정(tyranny of the weak)이 더 이상 협상테이블에서 유용하지 않다는 한계를 깨달았을 것이다. 북한 주민의 변화 속에 경제 발전을 향하고 있는 김정은 시대의 북한은 이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약자가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 북한의 반응을 단순히 벼랑 끝 전술만으로 봐서는 안 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하노이 이후에도 누차 김정은과 여전히 좋은 관계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최선희 부상이 “두 최고지도자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는 여전히 좋고 궁합(chemistry)은 신비할 정도로 훌륭하다”고 묘사한 것은 미국과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에 임하고 있다는 것을 보려주려는 ‘미국 따라 하기’에 가깝다.

결국 하노이 이후 북미 양측은 한 번씩 공을 주고받았고 어느 한쪽도 양보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협상을 시작하기 전 서로의 입장과 시작 위치를 재확인한 것이다. 북미협상 중단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최선희의 기자회견은 역설적으로 조만간 협상 재개를 알리는 신호일 수 있다.

한반도 비핵평화는 과정이다

협상에 상대가 있는 것처럼 거래 역시 쌍방 간에 이루어진다. 하노이에서 북한과 미국 모두 ‘플러스 알파’를 원했다. 북한은 영변 폐기의 상응조치로 제재해제를 원했다. 반면 미국은 영변 이상을 요구했고 지금은 사실상 모든 것을 원한다. 영변과 제재에 대한 상호 가치 평가에 극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북한이 영변 전체의 완전한 폐기까지 주겠다고 했다면 미국은 제재가 아니면 어디까지 줄 수 있는지 명확히 제시했어야 한다. 반대로 미국이 영변을 넘어선 모든 것을 내놓으라고 할 때는 자신도 북한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 원하는 것이 포괄적이면 주는 것도 포괄적이어야만 한다. 과연 미국이 이야기하는 경제적으로 밝은 미래의 청사진만으로 북한을 설득하기에 충분한 포괄적 상응조치인지 궁금하다. 그렇게 믿기에 북미간 불신의 골은 너무 깊다.

북한은 단계적 동시적 진행을 바라는 반면 미국은 포괄적 합의를 원하고 있다. 이를 두고 북한에 대해서는 여전히 ‘살라미 전술’이라고 하고 미국은 과거 ‘선 핵폐기 후 보상’으로 돌아간 것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선후관계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미국도 알고 있다는 점에서 포괄적 합의가 ‘선 핵폐기 후 보상’으로의 회귀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북한의 핵폐기 조치와 미국의 상응조치가 포괄적 합의 하에 동시병행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결국 지금 필요한 해법은 북한의 단계적 동시병행 해법과 포괄적 동시병행 해법의 접점을 어디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에 달려있다.

양쪽이 이행 가능한 모든 것을 협상테이블 위해 올려놓는다면 포괄적 합의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설령 북한의 핵폐기와 미국의 상응조치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명시된 포괄적 합의라고 해도 일시에 이를 이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미국이 요구하는 포괄적 합의에 걸 맞는 상응조치를 당장에 준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에서 상호 이행 가능한 약속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이미 그것이라면 1조 북미관계 개선, 2조 평화체제 구축, 3조 완전한 비핵화가 명시된 싱가포르 선언 역시 세부적인 내용이 없을 뿐이지 큰 틀에서 포괄적 합의라 할 수 있다. 오히려 북한이 원하는 제재해제가 명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북한에게 불리한 합의다.

한반도 비핵평화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다. 단계적이든 포괄적이든 북한의 핵폐기와 미국의 상응조치간 물고물리는 동시병행적 과정일 수밖에 없다. ‘스몰 딜’(small deal)이 될 수도 있고 ‘빅 딜’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합의가 아니라 상호 이행 가능하고 지킬 수 있는 약속이다. 그것이 바로 ‘굿 이너프 딜’(good enough deal)이 아닐까 한다.

미국은 지금도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고 핵무기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문제로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핵 시설을 중단하겠다고 합의한 적이 없다. 과거 미국과 소련과 핵군축 회담시에도 합의가 되기 전까지 양국은 핵무기의 수를 증가시켰다. 그것이 현실이다. 싱가포르 이후 북한의 핵 활동 지속에 대해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럼 미국은 왜 제재를 지속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한다.

북한의 핵 활동을 비난하고 핵무기가 증가하는 것을 우려하면서 동결과 영변에 대한 평가는 야박하다. 영변이 현재 북한의 핵물질 생산에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평가는 갈린다. 그렇다면 일단 북한이 제시한 영변 핵시설 전면 폐기와 함께 어디인지 무엇인지는 명시하지 않더라도 우선 포괄적으로 북한 내 모든 핵무기 관련 활동을 동결하는 합의를 하면 되지 않을까 한다.

이미 핵 실험과 미사일 시험 발사를 유예한 상황에서 이것 역시 문서로 명시하고 핵물질과 이동수단이 더 이상 양적으로 증가하지 못하게 차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성과일 수 있다. 여기에 북한이 언급한 확인된 영변부터 우선 폐기와 검증을 해 나가면서 영변 이외 의혹시설로 폐기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 현실적이다. 물론 여기엔 응당한 미국의 상응조치가 있어야 한다. 북한도 미국이 거부하는 제재해제와 다른 요구조건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비건이 북한과의 외교는 여전히 살아있다고 했다. 한반도 비핵평화가 단 한 번의 사건이 아닌 길고 험한 과정인 이상 살아 숨 쉬고 있다. 북미는 이제 협상테이블에 끝에 다시 앉은 서로를 확인했다. 하노이 이후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지금 북미간 거리가 싱가포르 이전처럼 멀어 보인다. 중재자이든 촉진자이든 우리가 어떠한 역할을 하건 싱가포르 선언 이전으로 돌아간다면 9월 평양선언은 과연 어찌되는지 궁금하다.

 

 

해군사관학교 경영과학 학사(OR)

국방대학교 국제관계 석사(안전보장학)

북한대학원대학교 북한학박사(군사안보전공)

현재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및 정외과 조교수(박사주임교수), 북한연구학회 이사,

한반도평화포럼 안보센터장, 국방부/통일부/연합사 자문위원,

예) 해군중령 (2011년 8월 19일 전역 / 군 근무20년)
- 국방부 북핵WMD담당, 대북정책기획담당, 대북협력정책담당
- 남북군사회담 10여회 참가(2007~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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