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에의 고동 (4) 


신민당

북진통일 - 무력으로 실지회복한다는 이승만 박사의 통일방법이 현실성이 없어지자 UN감시하의 남북총선거가 통한방안으로 등장했다. 이독재치하 가장 강력한 보수야당이었던 민주당은 시대감각에 발맞추어 이 안을 들고 나왔다. 이에 민주당과 결별, 새로운 보수신당을 창당한 신민당의 소장파를 중심으로 새로운 통한방안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합법적인 정부다. 그러므로 UN한국감시단 이 선거를 관리할 수 없었던 북한지역에 대한민국의 헌법절차에 따라 선거를 치른 후 공석중인 국회의석을 메꾸어야한다」 이것은 종래 UN총회가 열릴 때마다 대한민국 국회가 되풀이 결의한 결의안이다. 그러나 이것은 UN총회에서 아무런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제는 법통과 「프로파간다」로서의 통한안을 내세울 시기가 아니다.

시계바늘을 뒤로 돌릴 수없는 것처럼 역사의 발전을 거역할 수는 없다. 팽배한 국민들의 통일의욕에 맞추어 현실적인 통일방안을 안출하자는 열의가 신민당의 소장파 사이에 움트기 시작했다. 지난해 12월말경 박준규 의원이 UN한국대표단의 한사람으로 도미했을 때의 일이다. 박의원은 현 단계에 있어서 보다 적극적인 통한방안을 수립해야 된다고 주장하자. 국내에 있던 신민당내의 소장의원들도 이에 호응, 종래의 수세적인 통한방안을 공세를 취해야 된다고 부르짖기 시작했다.

이들은 신민당이 정책기초에 「제한된 범위내의 남북한서신왕래 기자시찰단교환」을 삽입하려하였다. 이들은 제일차로 주비위원회 정책위 외무국방분과위원회에 상정, 당정책으로 채택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러나 공산당이라면 무조건 타협할 수 없다는 완고한 노장파와 정면으로 의견이 대립되게 되었다.

적극적인 통한안을 주장한 소장파는 정책위원회 전체회의 결당대회 중앙위원회 등 세차례의 격론을 벌인 끝에 다시 통한정책안 번의는 당내 각 기구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정책의 논의대상으로 남게 된 것이다.

「우리는 단일민족이요. 정신적이나 현실적인 면으로 봐서 통일은 지상명령이요. 역사의 시침을 뒤로 돌리려하지 말고 발전적인 통일방안을 세워야 돼요. 그러나 그 통일도 4.19민족혁명에 쓰러진 전사자들의 자유민권의 토대위에 이루어져야 돼요. 이 두 조건이 보장되는 범위내에서 활발한 통일운동을 전개해야 돼요.」 흥분에 싸인 박준규 의원의 말이다.

무조건 비타협적인 완고파를 원망하는 눈치다. 「통일에 대비해서 이북오도출신청년이라든지 젊은 학생층을 모아서 통일요원을 양성해야 될 것 아니오? 패배주의에 사로잡혀있기 보다는 젊은이에게 사상교육을 시켜서 통일에 대비해야 될 것 아니오.」 이제 흥분된 말이 점차 떨리기 시작한다.

확실히 원망보다는 이해성 적은 고루파가 안타까운 표정이다. 「요즘 각계에 통일론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는데 상호이해가 필요합니다. 무조건 통일론자는 UN감시하 통한론자를 반동이라 지적하고 UN감시하  총선론자는 무조건 통한론자를 공산당으로 몰고 있는데 이것은 경계해야 돼요. 통일 그 자체가 동포애와 민족애의 발로인데 서로 이해하지 않고 자기 고집만 내세우는 것은 옳지 않아요. 우리가 당내에서 논쟁할 때도 당내융화를 위해서 일단후퇴했는데 혁신계도 보수계의 통일방안을 이해해주고 보수계도 혁신계의 통한론을 알아주어야 합니다.」

당내 노장파에 시달린 나머지 호소하듯 부르짖는 말이다. 상호이해를 위하여 언제고 힘쓰겠다고 박의원은 다시금 결의를 표명하였다.

▲ 통일에의 고동 [민족일보 이미지]

統一에의 鼓動 (4) 


新民黨

北進統一 - 武力으로 失地恢復한다는 李承晩博士의 統一方法이 現實性이 없어지자 UN監視下의 南北總選擧가 統韓方案으로 登場했다. 李獨裁治下 가장 强力한 保守野黨이었던 民主黨은 時代感覺에 발맞추어 이 案을 들고 나왔다. 이에 民主黨과 訣別, 새로운 保守新黨을 創黨한 新民黨의 少壯派를 中心으로 새로운 統韓方案이 論議되기 始作하였다.

「大韓民國이 韓半島에서 唯一合法的인 政府다. 그러므로 UN韓國監視團 이 選擧를 管理할 수 없었던 北韓地域에 大韓民國의 憲法節次에 따라 選擧를 치른 後 空石中인 國會議席을 메꾸어야한다」 이것은 從來 UN總會가 열릴 때마다 大韓民國國會가 되풀이 決議한 決議案이다. 그러나 이것은 UN총회에서 아무런 實質的인 效果를 거두지 못했다. 이제는 法統과 「프로파간다」로서의 統韓案을 내세울 時期가 아니다.

時計바늘을 뒤로 돌릴 수없는 것처럼 歷史의 發展을 拒逆할 수는 없다. 팽배한 國民들의 統一意慾에 맞추어 現實的인 統一方案을 案出하자는 熱意가 新民黨의 少壯派사이에 움트기 始作했다. 지난해 十二月末頃 朴俊圭 議員이 UN韓國代表團의 한사람으로 渡美했을 때의 일이다. 朴議員은 現段階에 있어서 보다 積極的인 統韓方案을 樹立해야 된다고 主張하자. 國內에 있던 新民黨內의 少壯議員들도 이에 呼應, 從來의 守勢的인 統韓方案을 攻勢를 取해야된다고 부르짖기 始作했다.

이들은 新民黨이 政策起草에 「制限된 範圍內의 南北韓書信往來 記者視察團交換」을 揷入하려하였다. 이들은 第一次로 籌備委員會 政策委 外務國防分科委員會에 上程, 黨政策으로 採擇하기로 決定을 보았다. 그러나 共産黨이라면 無條件 妥協할 수 없다는 頑固한 老壯派와 正面으로 意見이 對立되게 되었다.

積極的인 統韓案을 主張한 少壯派는 政策委員會 全體會議 結黨大會 中央委員會 等 세차례의 激論을 벌인 끝에 다시 統韓政策案番議는 黨內各機構를 한바퀴 돌아 다시 政策의 論議對象으로 남게 된 것이다.

「우리는 單一民族이요. 精神的이나 現實的인 面으로 봐서 統一은 至上命令이요. 歷史의 時針을 뒤로 돌리려하지 말고 發展的인 統一方案을 세워야 돼요. 그러나 그 統一도 四.一九民族革命에 쓰러진 戰死者들의 自由民權의 土臺위에 이루어져야 돼요. 이 두 條件이 保障되는 範圍內에서 活潑한 統一運動을 展開해야 돼요.」 興奮에 싸인 朴俊圭 議員의 말이다. 

無條件 非妥協的인 頑固派를 원망하는 눈치다. 「統一에 對備해서 以北五道出身靑年이라든지 젊은 學生層을 모아서 統一要員을 養成해야 될 것 아니오? 敗北主義에 사로잡혀있기 보다는 젊은이에게 思想敎育을 시켜서 統一에 對備해야 될 것 아니오.」 이제 興奮된 말이 漸次 떨리기 始作한다. 

확실히 원망보다는 理解性 적은 固陋派가 안타까운 表情이다. 「요즘 各界에 統一論이 活潑히 벌어지고 있는데 相互理解가 必要합니다. 無條件 統一論者는 UN監視下 統韓論者를 反動이라 指摘하고 UN監視下  總選論者는 無條件 統韓論者를 共産黨으로 몰고 있는데 이것은 警戒해야돼요. 統一 그 自體가 同胞愛와 民族愛의 發露인데 서로 理解하지 않고 自己 固執만 내세우는 것은 옳지 않아요. 우리가 黨內에서 論爭할때도 黨內融和를 爲해서 一旦後退했는데 革新系도 保守系의 統一方案을 理解해주고 保守系도 革新系의 統韓論을 알아주어야 합니다.」

黨內 老壯派에 시달린 나머지 呼訴하듯 부르짖는 말이다. 相互理解를 爲하여 언제고 힘쓰겠다고 朴議員은 다시금 決意를 表明하였다.

<민족일보> 1961년 3월 10일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