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변화, 균형

모든 예술은 사람살이를 담고 있다고 한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정서, 혹은 지향점이 고스란히 예술에 녹아있는 것이다. 여느 학문에 인간자체를 탐구하는 학과 즉, `인간학과`가 없는 것은 예술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크게 `동물적 본성`과 `사회적 본성`으로 나눌 수 있다. 동물적 본성이 사회적 본성의 바탕이 되는 것은 틀림없으나 우리가 고민하고 다루어야 할 부분은 사회적 본성이다. 인간이 동물적 본성만 따른다면 사회와 예술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사회를 만들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예술이 발생했다. 인간의 사회적 본성은 예술의 본성과도 흡사하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회가 가지고 있는 어떤 성격이 예술과 닮았다는 것일까?

사람은 생활의 균형과 안정감을 추구한다. 안정된 수입원이 보장되는 직장과 월급, 결혼과 가족, 집단소속 따위는 신체적,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일용직이나 계약직 같은 직업은 고정된 수입을 보장받기 어렵고 언제 해고될지 모르기에 불안감을 준다. 또한 어릴 적 안정된 가족관계 속에서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는 커서 심한 정서적 장애를 일으키는 확률이 높다. 노처녀, 노총각들이 떠밀리듯이 결혼을 하는 이유도 안정된 생활을 바라는 심리와 사회로부터 이탈된다는 두려움이 깔려있다. 동창모임이나 친목회에 참가하지 못하면 괜히 뒤떨어진다는 불안감을 가지며 작은 등산모임이나 낚시모임이라도 만들려고 한다. 불안하고 위험한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나 공권력이 존재하고 전쟁위험을 막기 위해 부단히 긴장해소와 평화를 부르짖는다. 가족 중 한 사람만 문제가 생겨도 안정감과 생활의 리듬은 깨진다. 미국이 테러와 탄저균 때문에 난리를 치며 전쟁에 매달리는 것도 결국 자기만의 안정감을 얻기 위함이다.

하지만 안정된 생활은 무료함을 주고 새로운 발전을 가로막는다. 고인 물이 썩듯이 말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자주 먹으면 질린다. 행복할 것 같은 결혼생활에 권태감이 밀려오고, 복지정책이 잘 된 북유럽에서 자살율이 높은 것은 새로운 관계를 찾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탈을 꿈꾸고, 새로운 변화를 찾아 헤맨다. 새롭고 흥미로운 세상을 찾아 가정이라는 둥지를 떠나고, 낡은 관습과 제도에 반항해 새로운 질서를 요구한다. 흔히 역사는 지키고자하는 사람과 바꾸고자하는 사람간의 끊임없는 싸움이라고 한다. 변화는 발전과 진보의 원동력이다. 변화는 삶의 활력을 주고 희망을 준다. 변화가 없는 삶과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그러나 변화는 불안하다. 그리고 언제나 극도의 긴장감을 유발한다. 변화는 마치 산 너머 무지개를 찾는 것처럼 갈증만 생긴다. 그래서 사람들은 또다시 안정감을 요구한다. 안정과 변화는 동전의 양면처럼 다르지만 결국 한 몸이다. 안정감을 기반으로 한 변화, 변화를 잉태한 안정, 고요함 속에 움직임이 있고, 혼란함 속에 엄격한 질서가 있는 것, 극단적인 요소를 하나로 묶는 것이 바로 통일이다.

중학교 미술교과서에 나오는 미술의 핵심 요소는 바로 `통일, 변화, 균형`이라는 원리이다. 흔히 삼각형 구도니, 사다리꼴 구도니 하는 것처럼 구도의 원리로 알고 있지만 사실 구도  뿐만 아니라 색채, 내용, 형상, 형태, 농담, 여백 따위의 모든 미술과정에 필요한 원리이다. 미술작품에서 안정감만 있으면 재미없고 지루하며, 변화만 있으면 산만함을 준다. 필요한 안정감과 변화가 적절한 관계로 통일되어 있어야 좋은 작품이 된다.

우리나라 일부 사람들이 바라는 안정은 변화를 수용한 안정이 아니라 그냥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일 뿐이다. 또한 변화를 부르짖는 사람도 현실에 대한 염증을 드러낸 것이거나 변화라는 허울을 쓰고 돈을 벌려는 경우도 많다. 올바른 변화는 먼저 자신의 변화와 희생으로 바탕을 삼아야 한다.

우리는 좋은 안정감을 맛본 적이 없다. 그래서 늘 변화도 선구자의 몫이었다. 사회가 변화를 바라는지 혹은 안정을 바라는지는 그 시대의 흐름과 정서,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 숱한 과정을 겪고 난 후라야 우리는 양극단을 화해시키는 통일이라는 완성작품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지의 주인공-여성


▶청춘의 푸른 꿈/김건혁/조선화/120*220/1993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북한화가 김건혁이 그린 <청춘의 푸른 꿈>이라는 조선화이다. 이 작품은 가로가 220cm, 세로가 120cm으로 비교적 큰 그림에 속한다.

이 작품은 농촌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벼를 배경으로 기뻐하는 처녀들의 희망찬 모습을 담은 것이다. <청춘의 푸른 꿈>이란 제목처럼 이 작품에 나오는 여성은 모두 처녀인 것으로 보인다. 여덟 명의 처녀들은 밝게 웃고 있지만 이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결코 밝은 것만은 아니다.

이 작품은 북한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대략 두 가지 정도의 내용을 역설적으로 담고 있다. 하나는 북한 젊은이들의 귀농을 교양하고 있다. 북한도 남한과 마찬가지로 젊은이들의 대도시 선호도가 높다. 도시는 농촌에 비해 아무래도 일자리도 많고 문화시설이나 생활수준이 높을 수밖에 없다. 도시로 젊은이들이 몰리면 농촌은 상대적으로 뒤 처지기 마련이다.

이 작품은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청춘의 꿈을 키우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밝게 형상화함으로서 대도시와 못지 않은 행복이 있다고 속삭이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주인공이 모두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점이다. 우리 농촌실정을 생각하면 뭔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우리 농촌에는 젊은 여성이 없다. 사회적으로 배우자가 없어 결혼을 하지 못하는 농촌총각의 문제는 심각하다. 40대면 젊은 편에 속한다는 농담도 있지만, 결혼을 못해 농약을 먹고 자살을 하거나 동남아나 조선족 여성과 국제결혼을 하는 경우도 많다. 작가는 현명하게도 농촌에서 꿈을 키우는 주인공을 젊은 남자가 아니라,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내세워 남성을 끌어드리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두 번째는 과학적인 농법과 증산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좌측 여성이 들고 있는 수첩과 우측에 보이는 푯말은 새로운 품종을 과학적으로 개발하여 성공했다는 암시를 던지고 있다. 주인공들이 마치 벼를 소중한 자식처럼 여기고 있는 듯한 표정과 행동이 이를 말해준다. 이 작품이 창작된 1993년은 홍수와 가뭄으로 북한의 식량난이 시작되는 때이다. 가뭄이나 홍수에 잘 견디고 병충해에 강한 새로운 벼 품종의 개발은 북한 사회의 주요한 목표일 수밖에 없다.

북한에서는 쌀을 대체할 식량으로 감자나 옥수수 농사를 중점적으로 짓는다고 한다. 산이 많고 평야가 적으며 일조량이 부족한 북한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고려할만한 일일 것이다. 우리나라 옛날 민간풍습에는 지독한 가뭄이 들면 음기가 강한 어린 처녀들이 달밤에 벌거벗고 뛰어다닌다고 한다. 결국 남성들도 어찌하지 못하는 극한 상황이 오면 여성들이 치마를 걷어붙이고 나서는 것이다. 대지는 어머니이고 여성이다. 이유야 어떻든 여성을 대지의 주인공으로 우뚝 세운 작가의 깊은 철학에 존경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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