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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투쟁을 호소하는 나팔소리이다”[친절한통일씨] 전사 김남주 시인 25주기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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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13  14: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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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사였던 김남주 시인. 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사진출처-김남주기념사업회]

“70년대의 한국문학을 김지하가 버텨냈다면, 80년대 한국문학을 버티고 있는 것은 김남주이다.”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김남주를 1980년대 시대의 상징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박정희 정권에 이어 전두환 정권하에서 핍박받은 전사이자 시인인 김남주. 하지만 1980년 이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들에게 시인 김남주는 생소하다. 군부독재에 저항하며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에 나선, 지금은 백발이 성성한 50~60대들에게서만 가슴에 사무친 이름인 것도 현실이다. 

촛불혁명으로 정권이 교체되고, 한반도 평화 격변기인 오늘, 13일 김남주 시인 25주기에, 다시 김남주의 시를 꺼내본다.

그러나 나는
면서기가 되어
집안의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했다
황금을 갈퀴질한다는 금판사가 되어
문중의 자랑도 되어주지 못했다.

나는 항상 이런 곳에 있고자 했다
인간적인 의무가 있는 곳에
용기있는 사람이 필요한 곳
착취와 억압이 있는 곳 바로 그 곳에

말하자면 나는 이런 사람과 함께하고자 했다
해가 뜨나 해가 지나 근심 걱정 잠 안오고
춘하추동 사시장철 뼈 빠지게 일을 해도
허리띠 느긋하게 한번 쉬어보지 못하고
맘 놓고 허리 풀어 한번 먹어보지 못하고
평생을 한숨으로 지새는 사람들과 함께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고
나라로부터 받아본 것이라고는
납세고지서 징집영장밖에 없는

김남주 시인이 ‘함성’지 사건으로 투옥된 뒤 고향 해남으로 내려와 쓴 시 ‘그리고 나는’이다. 김남주는 1946년 10월 16일 전라남도 해남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남주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머슴 살던 주인집의 눈이 성치 않은 딸이었다. 이러한 가계사와 가난이 김남주 시의 토양을 제공했다는 평가이다.

김남주는 어려서부터 영특했다고 한다. 삼화초등학교와 해남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호남 명문인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김남주의 아버지는 김남주가 금판사가 되거나 못 돼도 면서기가 되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10대 김남주는 금판사, 면서기와 거리가 멀었다. 1964년 박정희 정권이 한일회담과 베트남 파병을 추진하던 당시, 그는 획일화된 입시교육에서 무기력한 태도를 보이던 당시 학교와 학생들에게 실망해 입학 1년 만에 자퇴했다.

그리고 1969년 23살에 독학으로 대입 검정고시를 치러 전남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그는 3선 개헌 반대운동과 교련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 야욕과 폭압성에 저항하는 반정부 운동권의 길을 가기 시작한 것이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김남주는 친구 이강과 함께, 전국 최초의 반유신투쟁 지하신문 ‘함성’지를 제작해 광주 일대에 배포했다. 그리고 1973년 전국적인 반유신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지하신문 ‘고발’을 제작했다. 

이 사건으로 김남주는 박석무, 이강 등과 함께 체포,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혐의로 제1심에서 징역 10년, 항소심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투옥 8개월 만에 석방됐다. 그리고 전남대에서 제적됐다.

   
▲ 고 김남주 시인의 부인 박광숙 씨와 아들 토일 씨. 지난 9일 열린 25주기 추모제에서 가족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추모연대]

아버지가 바라던 ‘금판사’, ‘면서기’가 아닌 혁명을 꿈꾼 김남주는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이는 무력한 낙향이 아니었다. 김남주가 유신체제에 저항하면서 ‘전봉준 정신’을 따르겠다고 맹세했듯, 낙향은 저항을 위한 잠시 물러남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농촌 현실의 구조적 모순에 직면하게 됐다.

시인 김준태는 당시를 두고, “고향에 내려간 김남주는 드디어 저 한민족의 지평선, 한민족의 영원한 어머니일지도 모르는 대지의 한복판에다가 자신의 ‘귀향의 의미’를 되살린다”며 “그는 이 땅의 원형질, 투박스러우나 질기고 끈적진 삶의 밑바닥, 막걸리 사발과 애증의 연대를 만나고야 만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김남주는 시인으로 등단했다. 1974년 계간 ‘창작과 비평’에 ‘진혼가’, ‘잿더미’ 등 8편의 시를 투고했다. 당시 ‘창작과 비평’ 주간이던 염무웅은 “김남주의 시들은 바로 이 죄어드는 현실 한복판에서 솟아오른 가장 찬란한 예술적 형상이자 싱싱하게 살아 있는 정신의 가장 힘찬 발언이었다”라고 회고했다.

김남주는 1975년 광주 최초의 사회과학서점 ‘카프카’를 열어 광주 지역 사회문화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1977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해남농민회’와 ‘민중문화연구소’를 열었다. 

그리고 1978년 서울에서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준비위원회에 가입해 전위대로 활동하다 1979년 10월 ‘남민전’ 조직원으로 체포, 1980년 대법원에서 15년 형을 확정받아 오랜 투옥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1988년 10년 만에 석방될 때까지 김남주는 ‘혁명적 저항시인’의 상징이 됐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

-종과 주인

김남주의 시는 남성적이다. 어찌 보면 과격하다 할 정도이다. 시인은 사회변혁의 주체라는 그의 사상이 시에 고스란히 녹여있는 것이다. 그가 밝힌 시론은 ‘시화 혁명’이라는 글에 담겨있다.

그는 “시가 혁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준비하는 문학적 수단”이며 “시는 그 자체의 독자적인 형식과 내용을 가지고 혁명에 봉사하는 것이지 기계적으로 혁명의 종속적인 도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첫째, 가난하고 착취당한 피지배계급에게 지배계급이 저지른 죄악상을 폭로하기 위해 혁명적 이데올로기의 대중화에 기여한다는 것과 둘째, 폭로에 끝나서는 안 되고 의식화된 대중을 조직적으로 묶어 세우는 데까지 기여해야 한다”며 시인의 역할을 강조했다.

세계적인 혁명시인 브레히트, 네루다, 아라공, 마야코프스키, 하이네 등에게서 배운, 그의 시 쓰기는 이육사, 김수영의 계보를 이어온 셈이다. 

“시는 생활의 궁핍과 고달픔에서 오는 대중의 자포자기적인 감정의 산물인 푸념과 넋두리 따위를 대중의 정서에서 없애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인습적으로 몸에 지니고 있는 봉건적, 가부장제적인, 개인주의적인, 패배주의적인, 무정부주의적인, 자유주의적인 정서도 배제시켜야 합니다. 그 대신 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다른 감정, 다른 정서를 주도적으로 표현하고 그것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가야 합니다. 여기서 다른 정서, 다른 감정이란 말할 필요도 없이 대중의 진보적이고 전투적인 측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는 투쟁을 호소하는 나팔소리입니다.”

이에 김남주는 시의 형식은 민족주의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인은 혁명의 개념이라든가 내용과 성격 및 형식 그리고 혁명의 기본문제 등이 교조주의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각 나라의 특수한 역사적 구체성의 다름에 의하여 그것들도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기에 ‘종이 주인의 모가지를 베어버리’고 ‘민족해방 없이는 민족의 자유, 민족의 통일이란 있을 수 없다’며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최후의 깃발처럼 내걸리라, 겨레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다”를’ 외쳤던 것이다.

10년의 옥고를 치르고 밖으로 나온 김남주는 ‘솔직히 말하자’, ‘학살’, ‘사상의 거처’, ‘조국은 하나다’ 등의 시집을 냈다. 그리고 김남주는 1994년 2월 13일 49세의 일기로 별세, 광주 망월동묘역에 영면했다. 

   
▲지난 9일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고 김남주 시인 25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사진제공-추모연대]

김경윤 ‘김남주기념사업회’ 회장이 “우리 시 문학사상 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첨예한 의식과 혁명적 순결성으로 ‘자유와 해방’을 노래했던 그의 시들은 우리 문학이 자유와 평등과 해방의 이념을 향해 나아갈 때마다 어둠 속에서 길을 밝히는 별빛처럼 우리의 머리 위에 빛날 것”이라고 추모했듯, 김남주의 시가 오늘에 주는 울림이 크다.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김남주

내가 심고 가꾼 꽃나무는 
아무리 아쉬워도 
나 없이 그 어느 겨울을 
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땅의 꽃은 해마다 
제각기 모두 제철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늘 찾은 별은 
혹 그 언제인가 
먼 은하계에서 영영 사라져 
더는 누구도 찾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오늘 밤처럼 
서로 속삭일 것이다. 
언제나 별이 

내가 내켜 부른 노래는 
어느 한 가슴에도 
메아리의 먼 여운조차 
남기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의 노래가 
왜 멎어야 하겠는가 
이 세상에서...... 

무상이 있는 곳에 
영원도 있어 
희망이 있다. 
나와 함께 모든 별이 꺼지고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내가 어찌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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