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시를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건 벽을 마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공자)


 시
 - 옥따비오 빠스 

 뒤집어 엎어라.
 꼬투리를 잡고 늘어져라(비명을 질러봐, 더러운 년들아),
 두들겨 패라,
 입에 단물을 마구 들이 부어라.
 풍선처럼 부풀려서 터뜨려버려라,
 피와 골수를 마셔버려라,
 말라 비틀어지게 해,
 거세해버려라,
 짓밟아버려, 멋진 수탉처럼,
 목을 비틀어버려, 요리사처럼
 털을 꺼내버려, 투우처럼,
 수소처럼, 질질 끌고 가라,
 가르쳐준 대로 해, 시인아,
 말들을 서로 삼켜버리게 해라.


 오랜만에 대학 후배 ㄱ과 술을 마셨다. 한 때 문학청년이었던 그는 근면성실한 공기업 간부가 되어 있었다. 대학 시절엔 참 할 말이 많았는데, 이제는 자꾸만 말이 끊어졌다. 

 술기운으로 버틴 자리였다. 횡설수설 그 시간을 메우고 지쳐서 집으로 돌아왔다. 시(詩)를 잊은 그는 내 앞에 놓여 있는 벽이었다.

 왜 시를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은 벽을 마주하는 것과 같을까? 시(詩)라는 글자는 말(言)과 절(寺)이 합쳐져 있다. 즉 시는 절에서 쓰는 말이라는 것이다. 절에서는 쓰는 말은 고도의 비유와 상징으로 이루어져있다.

 조주 선사가 막 도착한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는 일찍이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는가?’ 그 스님이 대답했다. ‘예, 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조주선사가 말했다. ‘그래? 그러면 차 한 잔 들게나.’ 다시 조주선사는 다른 스님에게 같은 질문을 하였다. 그러자 그 스님이 말했다. ‘아니오, 와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조주선사가 말했다. ‘그래? 그러면 그대도 차 한 잔 들게나.’
 
 이성적(理性的)으로는 도저히 그 뜻을 알 수 없는 대화다. 선사들은 단어를 사전에 나와 있는 뜻으로 쓰지 않는다. 깨달음의 경지를 보여주는 수단으로 언어를 쓰는 것이다.

 왜 선사들은 말을 이렇게 할까? 우리 모두 공유하고 있는 뜻으로 언어를 쓰면 일상생활에서는 충분히 소통을 할 수 있겠지만 삶의 신비, 일상 이면에 있는 세계를 드러낼 때는 한계가 있다. 언어는 이성적이어서 과학적 논리적 세계만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모 고등학교에 인문학 강의를 갔다가 끝난 후 집으로 오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정류장 벽에 시가 붙어 있었다. 그 시를 보고 있는데, 인문학을 수강하는 여학생이 나를 보며 말했다. ‘선생님, 저 시 좋죠? 읽고는 두 번이나 눈물이 났어요.’ ‘아니야, 저건 시가 아니야!’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 

 나는 장래 희망이 문학인 그 여학생이 평소에 생각하던 시로부터 벗어나기 바랐다. 김수영 시인은 ‘시여, 침을 뱉으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태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思辨)을 모조리 파산(破算)을 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시를 감정의 분출로 생각한다. 김소월 시의 아류들을 시로 생각한다. 비유와 상징, 긴장미가 별로 없는 일상어의 감상적인 나열들. 이런 시들이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 역 벽, 공원 게시판에 많이 붙어 있다. 

 시는 최소한 우리의 상투적인 생각에 실금이라도 내야 한다. 누구나 뻔히 느끼는 감정을 글자들을 행과 연으로 나열하여 표현한다고 해서 시가 되지는 않는다.   

 문학이 꿈인 그 여학생이 벌써부터 시를 감상의 분출로 알게 되면 그녀의 문학 끼는 일찍이 고갈되고 말 것이다.
 
 중국 남북조 시대의 시인 도연명은 말했다. ‘바깥에 있는 것은 물색(物色)이고 내게 있는 것은 생각이니, 이 둘이 서로 부딪치고 어우러져서 시가 지어지게 된다. 만약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서로 관련되는 대상이 없다면 물색은 그저 한가한 소재거리에 불과하다.’

 언어는 세상이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이기에 ‘나만의  생각’으로 바깥의 사물을 만나지 않으면 우리의 사고는 언어에 갇히게 된다. 나의 언어가 없으면 우리는 나의 삶을 살 수가 없다. 시 읽기와 시 쓰기는 나의 삶을 살기 위한 치열한 몸짓이다.    

 그래서 멕시코의 시인 옥타비오 빠스는 ‘시’에 대해 노래한다.

 ‘뒤집어 엎어라./꼬투리를 잡고 늘어져라(비명을 질러봐, 더러운 년들아),/두들겨 패라,/입에 단물을 마구 들이 부어라./풍선처럼 부풀려서 터뜨려버려라,/피와 골수를 마셔버려라,/말라 비틀어지게 해,/거세해버려라,/짓밟아버려, 멋진 수탉처럼,/목을 비틀어버려, 요리사처럼/털을 꺼내버려, 투우처럼,/수소처럼, 질질 끌고 가라,/가르쳐준 대로 해, 시인아,/말들을 서로 삼켜버리게 해라.’

 말들을 서로 삼켜버리게 해야 한다. 말이 없는 세상, 침묵... 속에서 솟아나오는 언어. 시다. 진정한 언어다. 나의 생각을 말하려면 시를 알아야 한다. 시를 모르는 사람은 나의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무슨 말을 하든지 그의 말이 아니다. 소음일 뿐이다. 소음뿐인 인간 앞에서 우리는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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