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일 / 전 한신대학교 교수

 

사람의 권리 인권(人權)에 대해 동물권(動物權)이 지금 언론에 문제시 되고 있다. 동물권 단체 케어 대표 박소연 씨가 동물들을 안락사 시킨 것이 문제시되었기 때문이다. 1월 19일 박소연 씨는 기자회견을 통해,

"구조하지 않으면 죽는다"면서 "구조를 하지 말라는 것은 죽도록 내버려 두라는 이야기다. 동물권 단체로서 동물들의 고통과 죽음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비참한 동물들의 현실을 외면하겠다는 것과 같다. 전쟁터나 재난 현장에서 구조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현장에 가보지 않은 사람들의 속 편한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했다.

계속해서 "동물보호소가 처한 딜레마는 그들이 직면해있는 복지 문제, 즉 이 모든 길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지의 문제에 항상 부딪히고 있다"며 "선택적 도태가 필요하지만, 제도가 뒷받침해주지 않는 한 숨을 수밖에 없다. 숨지 않도록, 그리고 비난으로 끝나지 않도록 이제는 선진국과 같은 법과 제도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번 사안에서 정부는 동물보호법 처벌 수위만을 강화하겠다는 입장만을 내놓고 있고, 각 정당들은 안락사가 대안이 아니라며 안락사를 비난하기에만 열을 올린다"고 지적하며 "대안 없는 비판은 무의미하다. 안락사가 나쁘다면, 안락사가 없는 사회를 만들면 된다. 강아지 공장과 패션을 없애고 캘리포니아처럼 유기동물을 입양할 수 있는 법 개정을 하면 된다"고 말했다.

김일성 주석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가장 의문으로 남는 곳이 있다. 그것은 엄동설한 굶주림 속, 야생동물들이 눈앞에 지나가는 데도 절대로 안 잡아먹는다는 불문율이 있다. 유격활동을 하던 만주 산악지대와 백두산 일대에는 산림이 많아 야생동물 군집지와도 같은 곳이다. 유격대원들에게는 가장 좋은 양식일 테인데 왜 그랬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백인들이 인디언들을 말살시키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인디언들의 주 양식인 버펄로를 멸종시켜버리는 것이었고, 이 작전은 대 성공을 거두었다. 인디언 멸종의 주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백인들의 버펄로 멸종을 손꼽는다. 그 만큼 야생동물은 인간이 수백만 년을 살아온 기간, 특히 유목수렵 시기엔 주 양식이 되기에 충분했었다. 그런데 항일유격대는 왜 야생동물들에 손을 대지 않았을까?

임진왜란 때만 하더라도 먹을 것이 없어서 들판의 쥐와 개구리 씨가 말라버렸고 심지어는 인간끼리 서로 잡아먹기도 했다.

그러나 짧지도 않은 15년 동안이나 활동한 항일유격대원들은 풍찬노숙 굶주림 속에서도 산이나 들에 널브러져 있던 야생동물들을 잡아먹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항상 이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던 차에 김영수의 자전적 소설 ‘노고단은 알고 있다’(대일문화사, 1996)에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김영수는 소설 제목에서 암시하고 있듯이 남부군 출신으로 이현상과 함께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 전향한 인사이다. 소설의 상권은 이현상과의 만남, 그리고 전향 과정을, 그리고 끝내는 이승만 보수 세력들에 의해 버림받는 과정을 책에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의 관심사는 그의 소설 일부분 가운데 지리산 빨치산들과 야생동물에 관련된 부분이다. 소설 171쪽에 “늦가을이 지나 겨울이 다가오면서 지리산에는 무수한 동물들이 야산으로 내려왔다. 어떤 때는 부대 마당까지 내려와 무엇인가 주워 먹고 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고기가 없어서 먹지 못하면서도 지리산 산사람들은 동물을 잡는 일이 없었다. 꿩, 산토끼, 오소리, 노루, 뒷산에는 멧돼지가 우리가 보는 앞에서 유유히 놀고 있었다.”

“초겨울인데 눈이 몹시 왔다. 서설이었다. 눈길을 밟으면서 최홍준 대대장과 2대대를 방문했다. 노루 세 마리가 우리 앞에서 유유히 도망가지도 않고 열매를 쪼아 먹고 있었다.  ‘대대장 저거 한 마리 잡읍시다’ 하니깐 껄껄 웃으면서, ‘김 동무, 산사람들의 첫째 철칙은 산에 사는 동물을 절대로 살생하지 않는 거요. 생명을 산에서 같이 이어가는데 저 불쌍한 것을 왜 죽이겠소. 차라리 부락에 가서 소나 끌고 와 잡아먹는 것이 낫지.’”

“살아 있다는 생명에 대한 애착이랄까? 미신일까 산사람들은 종교는 안 믿고 있었지만 이상한 금기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일종의 생명체와 동병상련 사상일지도 몰랐다.”

“무서운 지리산의 겨울과 이북에서 파견된 나는 이현상 부대에 대한 기대와 불안 속에 전 지리산은 조용했다.”(172쪽)

김영수의 자전적 소설 ‘노고단은 알고 있다’는 상.하권으로 나뉘는 데 위에 소개한 내용은 상권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저자와 소설에 대해서는 여기서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 다만 변절을 한 빨치산이기는 하지만 유격대원들이 왜 야생동물을 잡아먹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돼 오랜 의문이 이 소설을 통해 해소되었다.

빨치산들이 야생동물을 잡아먹지 않는 것은 불문율이고 금기이고 이들의 종교 같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간의 감정에는 동정(sympathy)와 공감(empathy)이란 것이 있다. 동정이란 동정을 하는 주체와 동정을 받는 객체가 구별되는 것이지만, 공감은 그것이 구별되지 않는 것이다. 과부가 과부 사정 안다는 것은 공감이고, 과부 아닌 사람이 과부를 아는 것은 동정이다. 야생동물과 동정을 하느냐 공감을 하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공감은 유대 관계, 즉 공감대를 형성한다. 유격대와 야생동물 간의 공감대를 읽으면서 박소연을 다시 생각한다.

케어 박소연 씨는 자기가 얼마나 동물을 동정하고 있는가를 강변하고 있는 것 같다. 자식이 부모를 안락사 시키기는 쉬워도 부모가 자식을 그렇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이유도 동정과 공감의 차이이다. 동물을 한없이 동정했다는, 그래서 그 동물의 행복권을 위해 안락사 시켰다는 것이다. 동물들 가운데는 자기 자식들을 보호한다는 착각으로 적의 위협이 있을 때에 잡아 삼키기도 한다. 토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이다. 마치 공감을 하는 것 같다. 원시인들 가운데서도 조상의 살을 먹는 것이 조상과 함께 영생한다고 믿는다. 이것도 하나의 종교 의식으로 말이다.

종교는 아편이라고 하는 공산주의자들에도 종교가 있는가? 김영수는 야생동물에 대한 생각을 산사람들의 종교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우리 민속에 의하면 산에는 산신령이 있고 동물들, 특히 호랑이를 산신령의 화신으로 여기는 신앙이 정신사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민간신앙 속에 박혀 있는 동물에 관한 사상을 ‘보호’의 차원이 아니고 거의 신격화 돼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현대 과학의 ‘가이아’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온 지구는 생명체 자체라는 사상 말이다. 가이아 이론을 서양 기독교 세계관이 용납할 리 만무하다. 그러나 앞으로 지구의 사활은 가이아 이론 수용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북이 앞으로 통일을 해 나가는 마당에 동물에 대한 견해마저도 다를 수 있다. 이를 좁혀 나가는 것도 통일의 첩경일 수 있다.

박소연 케어는 위에서 동물을 안락사 시킨 자기를 탓할 것이 아니라 동물이 상업화돼 당하는 고통과 참혹함에 눈을 돌리라고 한다. 유발 하라리는 고발하는 자본시장에서 동물들이 지금 겪고 있는 처참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고발한다. “닭은 자기가 사는 곳을 정찰하고, 사회적 위계를 결정하며, 둥지를 짓고, 스스로 털을 고르겠다는 강한 충동을 느낀다.”(사피엔스 484)

그러나 상업적 부화장의 컨베이어 벨트에 있는 병아리들은 수컷과 완벽하지 않는 암컷으로 분류된 다음 이들은 가스실에서 질식사 당한 다음 자동 절단기 속으로 떨어지거나 그냥 쓰레기통에 들어가 눌려서 질식사 한다. 이렇게 부화장에서 매년 수억 마리가 죽는다. 하다못해 닭들의 사육 공간을 30센티에서 20 센티로 줄이자는 논란은 우리의 귀를 의심케 한다. 우리의 아들 김용균이도 저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죽어 갔다. 병아리들의 운명과 하나 다를 것 없다.

동물 가운데 가장 지능이 높다는 산업화 된 돼지의 경우를 보자. 축사가 너무 좁아서 걷거나 몸 돌릴 수조차 없는 곳에서 자라야 하며 암퇘지는 출산 후 4주 동안 이런 우리에 갇혀 있어야 한다. 소들의 경우는 비좁은 공간에서 자라다 사육장으로 그대로 끌려가 도축된다.

그러나 식품가게에 가서 이들 동물들의 고기를 살 때에 그 포장이 너무 잘 되어 그것들이 어떻게 도축돼 여기까지 왔는지를 모르고 사 배를 불린다. 이들 동물들이 산업화 상품화되는 과정을 모두 본다면, 한 번 상상이라도 해 보자.

김영수에 의하면, 빨치산들도 동네에서 잡아 온 가축들은 먹을 수 있다고 한다. 빨치산들에게도 어떤 원칙은 있었던 것 같다. 산신령을 믿는 신앙은 아니라고 할 때에 그렇다고 다른 차원의 원광법사의 세속 5계의 ‘살생유택(殺生有擇)’에도 해당되는 것 같지도 않아 보인다. 야생동물과 가축을 유격대가 구별했다고 해서 이를 두고 살생유택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항일유격대의 야생동물관은 그보다 다른 차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 다른 곳에서 이유를 찾아야 할 것 같다. 인민은 물이고 유격대는 물고기와 같다는 공감대 같은 원칙이 있었던 데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야생동물의 처지들을 인민들의 처지로 보았을 때에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산에 살아온 그대로 ‘산사람’들에겐 야생동물들이 자기들과 같은 처지로 보였을 것이다.

앞으로 통일이란 이런 공감대의 확산에서 자연스럽게 이룩되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저 백인들과 일본이 우리를 과연 언제 천지개벽이 되는 날이 와 우리와 같은 공감대를 갖게 될 것인가?

저들이 우리와 공감대가 있다면 어떻게 2천만 인구가 부모 처자식과 헤어져 70여 년 이상 떨어져 사는 데도 통일을 방해하고 있을까? 분명 저들은 우리를 컨베이어 벨트에서 분류되는 병아리 정도로 밖에는 보고 있지 않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케어 박소연 문제의 정체가 분명해 졌다. 다름 아닌 ‘케어 (Care)’라는 말 자체에 있었던 것이다. 동물을 ‘케어’, 우리말로 ‘돌봄’이란 어디까지나 인간이 주체가 되어 약한 동물을 돌본다는 동정의 어감이 강한 표현이다. 항일유격대가 야생동물에 대한 태도는 ‘케어’가 아니다.

유격대장의 말을 다시 들어 보자. “김 동무, 산사람들의 첫째 철칙은 산에 사는 동물을 절대로 살생하지 않는 거요. 생명을 산에서 같이 이어가는데 저 불쌍한 것을 왜 죽이겠소”. 이 말은 감히 인간이 동물을 향해 케어 한다는 즉, ‘돌본다’는 생각조차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케어(care)가 아닌 서로의 형편과 사정을 나누는 ‘쉐어(share)’에 있었다. 항일유격대는 야생동물을 ‘돌보는’ 자세가 아니고 같은 신세에 처하여 사정을 ‘나누는’ 자세였다. 얼마나 큰 차이인가?

이 마당에 창세기에서 신이 인간에게 청지기로서 자연을 돌보라고 한 말이 귀에 거슬리게 들린다. 인류가 이 말 한 마디 때문에 자연에 보호자인양 노릇을 하면서 자연을 마음대로 파괴하고 안락사 시키는 지경까지 온 것이다. 박소연은 동물의 청지기라고 자처한 것처럼 보인다. 자연은 결코 인간의 보호 대상이 아니다. 

항일유격대가 긴 세월 동안 밀림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와 비결이 야생동물을 ‘케어’가 아닌 ‘쉐어’ 하는 자세 때문이 아니었을까?

북은 남에 대하여 남은 북에 대하여 서로 ‘돌본다’는 생각조차 하지 말고 버려야 한다. 햇볕정책을 더 이상 말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과 북 서로 ‘케어’가 아닌 서로 ‘쉐어’ 하는 자세로 전환할 때이다.

지리산은 아직 차다. 그때 겨울의 산사람들과 함께 지내던 야생동물들은 행복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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