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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가해 역사 아닌 세계 평화 외치는 기행’<베트남 평화기행문> 김은지 제주평화나비
김은지  |  dkfkry5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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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02  20:2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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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평화기행팀 단체 사진. [사진-김은지]

2019년, 새해를 맞이하고 얼마 후 ‘나비기금과 함께하는 베트남 평화기행’을 다녀왔다. 초등학교 교사로 학생을 가르치고 있지만 학생 시절과 교사를 준비하며 공부했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베트남을 우리나라와 연관 지어 인상 깊게 기억한 적은 없었다. 터키를 한국의 형제의 나라로 알고 있고, 일본을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전쟁범죄 가해 국가로 알고 있지만 한국이 베트남에 행했던 가해 역사는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살아왔다. 

처음 베트남 기행을 접하게 된 것은 2016년 평화나비 활동으로 베트남을 갔을 때였다. 그 때 베트남에 아무런 준비 없이 가서 배우고 듣게 된 것은 충격적이었고 사실 잘 믿어지지 않았다. 돌아와서 더 공부하고 사람들에게 알리겠다고 다짐했던 나는 어느새 교사가 되었고 아무런 행동의 변화도 갖지 못했다. 그래서 더더욱 이번 기행을 꼭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다시 가서 제대로 배우고 느끼고 정리하고, 이 문제를 제대로 직면하고 알리겠다고 다짐하며 제주평화나비의 청소년·대학생·청년 친구들과 기행을 가게 되었다. 
  

   
▲ 붕따우,토럼 학살 위령비에서 참배를 마치고 설명을 듣는 기행팀. [사진-김은지]

베트남 기행은 총 6박 7일의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1~2일차는 호치민에서 시내를 돌아보고 전쟁박물관, 통일궁을 관람했고, 한국군 성폭력 피해자들의 아픔을 그린 다큐 「버려진 아이」를 제작하신 도안홍레 감독님과 실제 베트남 전쟁에 참전 생존자이신 반레 시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3~4일차는 푸옌성으로 이동하여 진행되었다. 3일차에는 푸옌성 위령탑에 가서 참배를 드리고 호아히엡남사 초등학교에 방문하여 자전거를 수여한 후 한베평화공원을 방문했고, 4일차에는 붕따우·토럼 학살 위령비에 가서 참배를 드리고 빈딘성 박물관을 탐방하였다. 5~6일차는 꽝남성에서 진행되었고 실제 피해자분들과 유가족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연꽃무늬로 덮여버린 하미마을 위령비, 퐁니 위령비, 주이응이어-주이하이-주이탄-빈즈엉 학살 통합 위령관, 당소 학살 가족묘에 참배를 드렸다. 

   
▲ 통합관에 있던 가족묘 앞에서 참배드리는 제주나비 친구들. [사진-김은지]

우리가 흔히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르는 그 시기를 베트남에서는 ‘America war in vietnam' 또는 항미 전쟁이라고 부른다. 그 전쟁이 미국에 의한 전쟁임을 분명하게 알고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피폐해진 땅에서 베트남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땅을 일구는 것이 아닌 전쟁의 역사를 남기는 것이었다. 베트남 곳곳에 세워진 한국군 증오비, 학살당한 사람들을 위한 위령비, 참전 전사들을 위한 위령탑. 이것들을 세우는 것이 전쟁이 끝난 베트남 사람들이 제일 먼저 했던 일이라고 한다. 이 많은 일정들이 아직도 생생할 정도로 한 장면 장면들이 모두 떠오르고 여전히 가슴에서 수많은 감정들이 올라오지만, 그 중 가장 함께 나누고 싶은 것들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 나눔으로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을 동남아의 물가가 싸고 휴양하기 좋은 관광지가 아닌 한국의 가해 역사의 피해자 나라로, 많은 사람들의 억울한 죽음과 그 한이 있지만 그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 자신들의 역사를 분명하게 기억하는 나라로 기억하길 바란다.
 
베트남에서 가서 가장 처음 느낀 것은 베트남 사람들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호치민 시내를 살펴보면 건축물, 거리의 이름과 표지판, 심지어 공원의 이름에도 과거의 역사가 녹아있다. 베트남에서는 식민지 시절에 만들어진 건축물들도 용도를 바꾸어 지금까지도 그 공간을 활용하고 관리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식민지 시절에 조선총독부로 사용됐던 건물을 폭파시켜 없애버리는데 반해, 베트남에서는 식민지 시절 건물들을 잘 보전하고 남겨 지금까지 활용하고 있었다. 어떤 방식이 정답인가는 따질 수 없지만 역사를 남기는 방법의 차이를 볼 수 있다. 베트남의 위령비, 박물관을 돌아다니다 보면 베트남의 역사를 대하는 방식을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실제 베트남전은 UN, NATO, SEATO 등의 국가연합들이 참전을 거부했을 정도로 명분이 없고 더러운 전쟁이었다고 한다. 특히 전쟁 당시 사용됐던 화학 무기들을 보면 1920년 제네바협정에서 사용 금지 리스트에 올라간 살상무기들이 사용된 인간 살상무기 실험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쟁이 끝난 후 땅은 황폐하고 모든 국민이 가난한 상황에서 비상식량으로 가지고 있던 쌀 한줌들을 모아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참혹한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증오비, 위령비, 박물관을 지었다. 

특히 전쟁 증적 박물관에는 그 전쟁의 참상이 그대로 녹아있었다. 사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 죽어갔던 아이들, 사람들을 쳐다보는 것이 정말 괴로웠다. 몸이 떨려서 점점 사람들 뒤쪽으로 가서 얼굴을 가리며 힘들어 했다. 하지만 그 역사를 제대로 보지 않고 무섭다고 피하는 것이 너무나 미안해서 손가락 틈으로 하나하나 보며 마음에 새겼다. 

두 번째 기행 때도 여전히 힘들었지만 그 모습을 잊지 않으려고 모두 보았다. 평화나비 친구들과 평가 속에서 베트남의 역사를 기록하고 대하는 방식을 보며 우리가 역사를 바라보고 대했던 것을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가졌다. 베트남에 가면 무엇보다 호치민시의 전쟁 증적 박물관은 반드시 가봐야 할 것이다.    

   
▲ 도안홍레 감독님과 다큐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기행팀. [사진-김은지]

베트남 기행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도 기억에 남는다. 호치민에서는 도안홍레 감독과 반레 시인을 만났다. 도안홍레 감독의 다큐 「버려진 아이」를 통해 항미전쟁 때 성폭력 피해자분들의 이후의 삶과 그 자식들이 얼마나 한 많은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실제 피해자분들을 보며 일본군성노예제피해자 할머님들이 가장 많이 생각이 났다. 

할머님들은 스스로 피해자임을 밝히고 평화인권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계시지만, 베트남에 있는 피해자분들은 베트남 사회에서도 차가운 냉대를 받으며 침묵과 외면 속에 살고 계셨다. 우리 할머님들도 사회에 당당히 밝히기 전에 그러한 삶을 사셨고 그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기에 베트남 사회 속에서 피해자분들의 삶이 더 안타까웠고 너무나 죄송했다. 다큐를 보며 눈물을 흘렸지만 그와 동시에 눈물뿐 아니라 기행에 함께한 분들과 구체적인 행동과 방안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참 좋았다. 

일본군성노예라는 전쟁범죄의 진정한 해결을 위해서는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 내부에서도 함께 힘을 모으고 해결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처럼, 베트남 피해 문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베트남 내부에서도 해결을 위한 움직임이 필요하고, 가해국인 한국에서도 진정한 해결을 위한 진심어린 사과와 행동, 움직임이 필요하다. 어떻게 보면 가해국와 피해국 국민의 만남이었지만, 다시는 이 일이 반복돼서는 안된다는 평화를 향한 열망이 가득한 사람들의 연대를 느낀 시간이었다.  

   
▲ 당소 학살묘에 참배를 드리러 가기 위해 걷는 기행팀. [사진-김은지]

많은 피해자와 유가족 분들을 만났지만 이번에 만난 사람들 중에는 당민코아 아저씨 이야기를 하고 싶다. 당소 가족 학살의 유가족인 당민코아 아저씨는 당시 대학생활을 하던 중 가족들의 학살 소식을 듣고 집으로 향한다. 당소 가족 학살은 마을의 초입에 위치하고 있던 집에서 한국군들의 학살의 시작되자 아저씨의 아버지는 북을 쳐 마을 사람들에게 죽기 직전까지 알리고 가까스로 도망간 조카가 사람들을 대피시켜 그 마을에는 당소 가족들만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집에 도착하자 한국군들이 가매장한 가족들이 있었고 지금의 아내와 함께 시신들을 수습해 9개의 가족묘를 만들고 가족묘를 베트남어와 영어로 설명해 놓는다.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이 알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사실 베트남 기행에서 피해자분들을 만나면 가슴 아픈 학살 이야기를 몸을 떨며 듣게 되고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 나를 덮쳐왔다. 

그 아픔에 피해자분들에게 다가가 죄송하다는 말도 건네지 못하는 괴로움에 빠지곤 했는데, 당민코아 아저씨는 우리들을 만나자 마자 “약 50년이라는 시간이 지날 동안 당신들은 무엇을 했나요?”라고 물었다. 그 물음은 지난 기행에서 빈호아 학살 생존자이셨던 도안응이아 아저씨가 “오늘은 나의 가족이 모두 한국군에게 죽은 날이에요. 나에게는 아주 슬픈 날이죠. 어떤가요? 여러분도 나처럼 슬픈가요?”라고 물으셨을 때처럼 내 가슴을 쿵 내려앉게 했다. 

기행을 통해 제대로 알고 싶었고 알리겠다는 다짐으로 왔지만, 어떤 것도 그들의 아픔을 전적으로 공감하고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들의 물음에 본질적인 해결의 답을 드릴 수도 없었다.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죄송합니다”라는 사과와 “당신들의 말을 믿습니다”라는 믿음과 흘리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흘러버리는 눈물뿐이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마음속으로 다짐하게 되었다. 오늘을 잊지 않겠다고, 기억하고 이 문제를 흘러가버리게 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 쯔엉티우 할머니의 증언을 듣고 있는 기행팀. [사진-김은지]

눈물을 흘리는 나에게 똑같이 눈물을 흘리며 손을 잡아주신 럽 아저씨와 학생들이 울자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야. 너희는 잘못이 없어.”라고 더 속상해 하시던 쯔엉티우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많은 시신들 속에서 엄마를 지나쳤다고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아직도 그 날을 떠올리며 아이처럼 펑펑 눈물을 흘리시는 탄 아주머니를 가슴에 담으면서 우리나라의 공식사과가 가져올 베트남 피해자분들의 평화를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마지막으로는 진심이 담긴 사과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비문을 연꽃무늬로 덮어버린 하미학살 위령비와 평화캠프를 통해 한국 청년들이 직접 길을 만들며 세운 퐁니 위령비를 통해 사과와 관련된 생각을 했다. 하미마을은 원래 주변에 주둔했던 한국군과 사이가 좋게 지내고 있어 마을의 어떤 사람도 한국군이 모이라고 했을 때 학살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먹을 것을 나눠주는 줄 알았지만 하미마을에서는 135명의 민간인이 학살을 당한다. 그리고 학살 후에 탱크로 그 시체들을 한 번 더 갈아버렸다. 

   
▲ 하미 위령비 앞에서 묵념을 드리는 기행팀. [사진-김은지]

그러한 하미 마을에 한국 월남참전전우복지회의 지원으로 하미마을에 위령비를 세우는데, 마을 사람들이 적은 비문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여 위령비 짓는 것을 중단하고 베트남과 관련한 한국정부 지원 사업을 하지 않겠다고 압력을 넣어 결국 그 비문을 세우지 못하게 한다. 마을 사람들을 비문을 절대 내릴 수 없다고 하여 눈물을 흘리며 그 비문을 연꽃무늬로 덮게 되었다. 

반면 퐁니 위령비는 평화캠프를 참여했던 청년들이 나무를 심고 흙을 옮겨 위령비를 세웠다고 한다. 물론 더운 날씨 때문에 제대로 일하진 못했다고 실제 평화캠프를 참여했던 분께서 과거를 회상하셨지만 마을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도움을 주고 함께 완성했다고 했다. 이 두 위령비의 사례 중에 어떤 것이 진심이 담긴 사과일까? 우리가 베트남에 건네야 할 사과는 어떤 모습일까?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 할머님들이 한국 사회에서 한일합의를 통해 큰 상처를 받으신 것처럼 연꽃무늬로 비문을 덮는 것은 그들에게 3차 학살이었을지 모른다. 사과라는 말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빈다는 의미이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용서를 비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피해자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해자가 선을 정해서 사과하고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진정 받아들일 수 있는 공식적인 사과와 국가적인 잘못을 인정하고 법적인 배상을 해야만 진정한 사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 정부가 해야 할 우선적인 사과는 전쟁으로 인해 가해자가 되어버린 한국군에 대한 국가적 책임의 사과이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들은 국가적 참전 결정으로 타국에 가 군인 신분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면서 자기 스스로에게도 엄청난 트라우마가 될 학살, 전쟁을 경험하게 된다. 그 경험에 내몰린 그들을 가해자라는 시선으로만 본다면 전쟁의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 것이다. 

참전 결정으로 인해 참전한 군인들에게 국가 책임의 사과가 있어야 그 사과를 받아 안고 베트남 전쟁 피해자들에게도 사과가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는 한국의 전시작전권이 그 때도, 지금도 미국에게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받아야 할 진정한 사과와 해야 할 진정한 사과가 함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과할 일들은 모두 ‘전쟁’이라는 참혹하고 무서운 역사의 결과이다. 
  
반레 시인의 <그대 아직 살아있다면>이라는 책에 항미전쟁 당시 연락원이었던 할아버지와 주인공 청년의 대화가 나온다. 청년은 도대체 목숨까지 걸어가며 소식을 전하는 지, 그 소식을 안다고 하여 무엇이 달라지는 지를 묻는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우리 민족이 알아야 할 재난이고, 그 속에서 우리 동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한다. 청년이 우리가 아무리 외쳐도 미국과 정부는 듣지 않는다고 하자 그는 “재난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는 이유는 적의 무리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다. 죽은 사람들이야 우리가 그들을 위해 싸우는 소리를 들을 수 없겠지만 우리 살아남은 자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의 역사 속에서 전쟁이 있었고 그 전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피해를 입었다. 어떤 나라가 가해를 했고 피해를 입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있었고, 그 전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그 전쟁을 막는 것과 전쟁에서 겪었던 피해에 대해서 제대로 규명하고 사죄와 배상이 오고 가도록 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라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방관자가 아닌 주체로, 살아남은 자로서 할 수 있는 책임을 해나가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베트남 기행은 참여하는 사람들의 기억이 모이고 그것들이 쌓인다고 생각한다. 기행을 통해 함께 간절함의 연대를 이어나가고, 그 연대를 통해 세상을 조금씩 바꿔나가는 힘을 발휘하여 세상이 전쟁 없고 평화로운 세상으로 가는 힘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한국의 가해 역사를 배우는 기행이 아닌 세상에 평화를 외치는 기행으로 이 기행을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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