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화 / 재일동포, 대동연구소 소장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재일동포인 강민화 대동연구소 소장의 기고를 게재합니다. 이 원고는 필자가 지난 1월 18일 일본 도쿄에서 재일동포 통일운동관계자들 앞에서 한 강연 내용을 수정 보충한 것입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 등 표기법에서 한국식으로 수정했음을 알립니다. / 편집자 주

 

1. 3.1운동의 현재적 의미

1919년 3월 1일,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대한 우리 민족의 쌓이고 쌓인 원한이 폭발하여 “조선독립 만세”의 외침소리가 삼천리강산 방방곡곡에 울려 퍼진 때로부터 100년 세월이 흘렀다.

3.1운동은 조선의 노동자, 농민, 상인, 학생, 종교인 등 각계각층 군중들이 일제의 폭력적 진압에 맞서서 연일 독립 만세를 외친 거족적 반일항쟁이며, 이를 통해서 우리 민족의 애국애족의 정신과 기질을 세상에 널리 과시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당시 ‘민족대표’라고 불린 사람들이 군중과 동떨어진 채 자기들끼리 모여 앉아서 선언문을 작성하고는 그것을 낭독·공개하지도 않고 스스로의 행동을 총독부에 알리고 자수했으며, 일제에게 독립을 청원하는 것과 같은 우를 범했다. 그들은 또한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인임을 선언하노라”라는 ‘3.1독립선언문’을 작성해놓고도 그와 거리가 멀게 윌슨의 민족자결론에 기대를 거는 등 이념적인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었다.

그래서 3.1운동은 끝내 실패를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3.1운동은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온 겨레는 100년이 지난 오늘도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며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는 것이야 말로 그 뜻을 이루는 길이라는 결의를 새로이 하고 있다.

3.1운동에 관해서는 여러 각도에서 거론되지만 이 글에서는 그때 선열들이 발휘한 정신, 즉 민족자주에 초점을 맞추어서 보기로 한다.

2. 자주는 우리 민족의 기질이자 지향

우리의 민족사는 자주성을 위한 투쟁의 역사

새삼스럽게 민족자주란 무엇인가? 그것은 지난해에 발표된 4.27판문점선언에 명기된 것처럼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남측에서는 민족자주라고 하면 북측의 전유물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민족자주는 그 같은 표현을 쓰고 안 쓰고에 관계없이 남북을 불문한 우리 민족의 공통된 기질이자 지향이다.

우리 민족은 나라가 처한 지정학적 지위로 인해서 주변 열강들의 각축전에 농락당하거나 외세의 거듭되는 침탈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그로 인해서 생사의 기로에 서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 민족은 그 같은 침략과 강탈을 격퇴했을 뿐 아니라, 타민족에 동화됨이 없이 자기의 역사와 문화, 언어를 고이 간직해왔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민족사는 외세의 침략과 예속을 반대하고 민족의 자주적 존엄과 이익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어 본다면 BC 3세기 초 연(燕)나라 군대가 첫 고대국가 고조선의 서북지역에 침입하여 일부 변방지역을 강점했을 때 우리 민족은 그들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켰으며, 고구려 사람들은 598∼614년까지 네 차례에 걸친 수(随)나라의 공격을 격퇴했다.

또한 신라 지배층의 외세의존책 때문에 당(唐)나라 군대가 자기 강토를 침노했을 때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이 신라 민중과 힘을 합쳐 반당투쟁을 벌임으로써 민족의 존립을 지켜내었다.

그 이후도 고려사람들은 강감찬 장군의 지휘 밑에 압록강과 구성에서 수십만 거란군의 침공을 물리쳤다.

또한 임진왜란(任辰倭乱 1592∼1598) 때에는 임금과 신하들이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주했으나 우리 민족은 7년 동안에 걸친 거족적 항전 끝에 왜적을 격퇴하고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침략을 좌절시켰다.

우리 민족은 그 이후도 외적을 상대로 하는 끈질긴 투쟁을 벌였다. 셔먼호 격침투쟁(1866.6)과 신미양요(1871.6)는 그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우리 민족의 애국애족적 저항정신은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의해서 자기들이 망국노의 설움을 겪게 되어도 결코 꺾이지 않았으며 3.1운동과 6.10만세운동 등의 반일애국투쟁을 거쳐서 마침내 항일무장투쟁이라는 높은 형태의 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투쟁은 해방 후에도 나라와 민족 앞에 조성된 분열의 위기를 막고 완전 자주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투쟁으로 이어졌으며 그 근저에는 “우리는 우리의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겠다”(우사 김규식)는 등의 민족자주 정신이 확고히 관통되어 있었다.

그 후 이 같은 투쟁은 외세에 의해서 나라가 갈라진 이후도 나라의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투쟁으로 이어지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주성을 위한 우리 민족의 투쟁은 이곳 일본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재일동포들과 어린 학생들이 도쿄, 오사카 등 각지에서 “일본당국은 우리가 제 나라 말과 글, 문화와 역사를 배우자는데 어째서 이를 가로막느냐”, “재일동포들에 대한 차별반대”를 외치며 행동을 벌이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어제까지 재일동포 1세들이 일본에서 온갖 민족적 차별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벌여온 투쟁이 오늘은 이 같은 형태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외세의 침략과 압력에 항거하며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을 지키려는 우리 민족의 줄기찬 투쟁은 우리의 민족사를 일관하고 있는 중요한 특징이며, 이 과정에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기질과 지향은 남김없이 발휘되었다.

민족자주 이념의 정식화

이전까지 민족문제에 관한 공인된 사상, 이념이라고 하면 민족주의나 민족자결론이 위주였다. 그러므로 민족자주는 어휘상으로는 존재했어도 그 자체가 생소한 것이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민족자주는 북측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러나 북측에서는 민족자주에 대한 정식화와 이념으로서의 정립이 자기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자부하고 있다.

북측의 입장에 의하면, 민족자주란 “민족 자체의 힘에 의거하여 민족의 운명문제를 풀어 나가려는 자각과 의지”(노동신문 2001.11.8) 또는 “자기 나라와 민족의 운명개척에서 나서는 문제들을 자신이 결심하고 처리하는 것”(김정일 ‘혁명과 건설에서 주체성과 민족성을 고수할 데 대하여’ 1997.6.19)이다.

북측은 서구민족론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 등에 의한 민족론의 난립 상황 속에서 민족은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발전되어온 공고한 인간집단이며 생활단위, 또는 사회역사적으로 형성된 공고한 인간의 결합체이자 운명공동체라고 민족의 본질에 대해서 규정했다. 또한 민족을 이루는 기본징표는 핏줄과 언어, 지역의 공통성이며 이들 가운데서 핏줄과 언어의 공통성이 중핵을 이룬다고 주장했다.

북측은 이 같은 견해와 입장에 기초해서 인간에게는 자주성이라는 고유한 사회정치적 생명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사회적 집단인 민족에게 있어서도 자주성은 생명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리고 민족적 자주성 상실의 정도는 외세에 대한 굴복이나 타민족에로의 동화, 변질로 나타나는데, 이는 곧 민족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민족의 자주권은 누가 선사해주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모든 민족은 자기 운명을 자주적으로 개척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부터 도출된 것이 바로 민족자주이다.

이 같은 견해와 입장에 기초해서 북측에서는 조국통일문제에 관해서도 그것은 사상, 체제 문제가 아니라 외세에 의한 인위적인 분단을 극복하고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의 자주권을 실현하는 문제, 즉 민족문제라고 주장한다.

북측에서는 민족주의와 민족자결에 대해서도 선진보성, 후제한성의 견지에서 보고 있다.

특히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자기 민족을 사랑하고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사상이며 그 자체는 원래 진보적인 사상으로서 발생했다고 본다. 때문에 진정한 민족주의와 부르주아지의 사상적 도구로서 이용된 민족주의를 명백히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애국애족의 사상이라는데 민족주의의 진보성이 있으며 진정한 민족주의는 곧 애국주의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리고 민족자결에 관해서도 그 긍정적 측면은 시인하고 있다. 그것은 남북의 정상들이 합의한 9월평양공동선언에 민족자주와 함께 민족자결이 언급된 데서도 알 수 있다.

3. 우리 민족의 면모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은 민족자주

새삼스럽게 상기해 보는 김일성·문익환 회담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인 동시에 늦봄 문익환 목사의 방북 30년이 된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이라고 하면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에서 ‘느슨한 연방제’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이것이 훗날 6.15공동선언 2항에 명기된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안에 반영되었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때, 즉 1989년 3월 27일과 4월 1일의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김일성·문익환 회담에서는 그에 못지않게 주목할 만한 문제가 거론되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 마당에서 ‘주체사상 논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회담에서는 문익환 목사가 “주체사상이 뭡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서 김일성 주석은 “주체사상이란 어느 나라에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걸 강조하는 까닭은 우리가 약소국가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문 목사는 김 주석의 대답이 경쾌해서 자기 뒤통수를 호되게 내려치는 쇠방망이 같았다고 훗날에 말했다. 문 목사 자신은 주체사상에 대해서 개인독재를 정당화하는 사상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김 주석에게 주체사상도 그 강조점을 인민에게로 옮겨야 하지 않겠는가고 말했으며, 심지어 주체사상은 “통일의 걸림돌”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런데 김 주석은 조금도 불쾌한 내색을 하지 않고 주체사상은 인민이 주인이라는 사상이라면서 위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주체사상은 민족주의인가요?” 충격 속에 문 목사가 더 물었다. 그러자 김 주석은 “사회주의도 민족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도 민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저는 종교인들에게 말합니다”라고 말했다(문익환 전집 5권, 168∼169페이지 참조). 그리고 김 주석은 이때 나는 공산주의자이기 전에 민족주의자라고도 말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서 김일성 주석은 조국통일을 이루는데서 사상이나 이념, 체제보다도 민족을 중시했다는 것과 함께 당시까지만 해도 김 주석은 자기 나라, 자기 민족에 대해서 약소국가, 약소민족이라고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12북미정상회담이 진행된 의미

그런데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북미정상회담이 진행된 사실은 우리 민족이 이제는 더 이상 약소민족이 아니라는 선언이었다.

주지하는 것처럼 북미정상회담이 진행되기는 했지만 양국관계에서는 좀처럼 진전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교착상태에 빠진 것처럼 되었다.

일본에서만도 그렇게 된 원인과 관련해서 이 회담이 북의 비핵화를 위해서 열렸는데 북이 좀처럼 말을 안 듣는 바람에 미국이 강경하게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사실왜곡이다.

다시 한 번 6.12북미합의문을 확인해 보면 그 골자는 첫째로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이며, 둘째는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이며, 셋째가 비핵화 문제, 즉 북측의 비핵화가 아닌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이다. 그리고 넷째가 미군유골 반환문제이다. 이처럼 회담에서는 비핵화문제만이 다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자. 북미 양자는 예로부터 서로를 백년숙적처럼 생각해 왔으며, 1년여 전인 2017년까지만 해도 “늙다리 미치광이를 불로 다스리겠다”느니, “북을 완전파괴하겠다”는 거친 말들이 오고 갔었다. 이처럼 수십 년 동안이나 총칼을 맞대어온 적대관계가 쉽게 풀릴 리가 없다.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데 있다.

애당초 오랫동안 세계에서 ‘유일 초대국’으로 행세해온 미국에게 있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어떤 존재였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오직 지구상에서 하루빨리 없애버려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한 미국에게 있어서 자기들이 북과 동등한 입장에서 회담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미국이, 그것도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북의 최고지도자와 회담을 진행했으니 이는 분명 미국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북미간의 대화가 갓 시작된 현 시점에서 어느 정도 우여곡절을 겪는다 해도 그것은 미국이 북이라고 하는 적을 주권국가,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상황에서 생긴 현상에 불과하다. 어쨌든 민족자주는 어젯날의 약소국의 면모를 이렇게 바꾸어놓았다.

4. 남북의 정상들이 한 목소리로 강조한 합의내용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지난해 9월 1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자신과 문재인 대통령이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자주의 원칙을 다시금 확인했다고 말했다. 또한 같은 날 문재인 대통령도 5.1경기장에서 15만 관중들에게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자신은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주의 원칙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양 정상들의 이 같은 언급은 바로 4.27판문점선언과 9월평양선언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우선 4.27판문점선언에는 남북 정상이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주의 원칙을 확인하였으며 이미 채택된 남북선언들과 모든 합의들을 철저히 이행함으로써 관계개선과 발전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나가기로 하였다”고 명기되었다.

또한 9월평양공동선언에는 양 정상이 “민족자주와 민족자결의 원칙을 재확인하고, 남북관계를 민족적 화해와 협력, 확고한 평화와 공동번열을 위해 일관되고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로 하였으며 현재의 남북관계 발전을 통일로 이어갈 것을 바라는 온 겨레의 지향과 여망을 정책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명기되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9년 신년사에서 전 민족적 합의에 기초한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모색할 데 대해서 언급한 것은 바로 이 합의에 기초했을 것이다. 이는 좋게 나가는 남북관계가 평화, 번영에 머무르지 않고 온 겨레의 한결같은 염원인 조국통일에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진 참으로 의미 있는 언급이다.

어쨌든 민족자주가 이제는 어느 한쪽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민족공동의 공동재산이 된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번에 남북이 합의 본 ‘민족자주’와 6.15공동선언 발표 후 온 겨레가 통일이념으로 들고 온 ‘우리 민족끼리’와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미 본 것처럼 4.27판문점선언에는 남북의 정상들이 민족자주의 원칙을 확인하고 이미 채택된 남북선언들과 모든 합의들을 철저히 이행함으로써 관계개선과 발전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나가기로 하였다고 명기되었다. 그리고 이해 9월 평양에서는 국경절 70돌을 기념해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빛나는 조국’ 공연이 진행되었는데, 그때 “우리 민족끼리 통일의 새 역사를 써가자”는 슬로건이 배경대에 등장했다. 이처럼 우리 민족끼리는 지금도 살아 있다.

결국 지금의 평화와 번영, 통일의 새 시대는 6.15통일시대의 계속이며 따라서 두 선언들에 관통된 민족자주 역시 우리 민족끼리의 계승이라고 볼 수 있다.

5. 일제 식민지통치의 완전 청산과 조국통일문제

민족자주를 위한 우리 민족의 투쟁이 어젯날에는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고 민족해방을 이룩하기 위한 투쟁으로서 벌어졌다면 오늘은 외세에 의해서 강요당한 분단 상황을 극복하고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투쟁으로서 벌어지고 있다.

이 글이 3.1운동 100주년에 즈음한 글인 만큼 필자는 일제 식민지통치가 완전히 청산되어야 한다는 문제를 조국통일문제와 결부시켜서 마지막에 몇 가지 언급하고자 한다.

지금 남북을 불문한 우리 민족과 일본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에 있다. 그리하여 일본에서는 과거청산이 진행되기는커녕 일제가 과거에 저지른 죄행에 대해서 공공연히 정당화되는 것과 같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또한 그러한 가운데 “한국이든 조선이든 모조리 죽여라” 등의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를 비롯한 배타적 풍조가 판을 치고 있으며 어린 아이를 비롯한 재일동포들이 그 희생양이 되어 일상생활은 물론 생존까지 위협받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일본이 저지른 지난날의 죄행을 이 글에서 모두 늘어놓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늘도 우리가 겪고 있는 분단의 고통에 관해서는 일본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 강조하려는 것이다.

이미 여러 기회에 지적된 것처럼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더라면 오늘처럼 국토와 민족이 분단되지 않았다.

역사에는 “만약에”가 통하지 않지만, 만약에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면 이 지역이 미국과 당시 소련에 의한 전후처리의 마당이 되는 일도 없었으며, 따라서 이 전후처리 때문에 한반도가 38도선 이북과 이남으로 분할되는 일도 없었다. 또한 이 38도선이 전후처리를 위한 일시적인 분할경계선으로부터 국경선처럼 되었다가 훗날에 전쟁을 겪고 군사분계선이 되어 분단이 고정화되는 일도 없었다.

결국 일본의 대조선 식민지 통치는 당시에 “해방된 조선에 통일되고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가 탄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1946년 7∼9월에 걸쳐 미국의 대통령특사로서 조선에 파견된 웨데매이어)는 속셈을 품고 있던 미국에게 ‘전후처리를 위한 조선상륙’이라는 절호의 구실을 제공했던 셈이다.

일본의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중의원의원은 2018년 6월 14일 강연에서 “오늘의 남북분단의 원인(遠因)에는 일본의 식민지정책이 있었다”고 말했다(산게이신문 2018.6.14). 또한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총리는 2018년 11월 16일 경기도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일본이 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하고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에 돌입한 결과 조선반도가 분단되었다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말했다(중앙일보 일본어판 2018.11.19). 이처럼 일본사람들 자신이 분단의 책임을 시인한 것은 긍정적으로 볼만한 일이다.

결국 일본당국이 지금 추구하고 있는 ‘대북 적대시정책’은 오늘 남북을 불문한 우리 민족 전체에 대한 적대시로 여겨지고 있는데, 이러한 속에서 일본의 책임을 추구하고 그들에게 똑똑한 사죄와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목소리, 재일동포들에 대한 온갖 민족적 차별과 박해의 중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온 겨레의 의사를 하나로 해서 더욱 높아갈 것이다.

그 표시로서 일본에서의 재일동포들에 대한 민족적 차별과 박해에 대해서 북측은 물론 남측동포들 속에서도 규탄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는데 일본당국은 이를 결코 무심히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소제목 수정,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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