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경 / 농부

 

살구나무를 찾아서 살구나무 동산을 만들고 있다. 올해는 살구나무 마을을 만들려고 한다. 올해 우리 마을에는 많은 살구나무들이 새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인데, 나는 그것이 북측 회령 백살구나무이기를 바래서, 그것을 구하려 안타깝게 뛰어다니고 있다.

사라진 살구나무를 찾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살구나무를 잃어버렸듯이 아주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무엇을 위하여 그 많은 것들을 놓아버린 것일까? 여기 연재할 글들은 살구나무처럼 우리가 잃은 것들, 잊은 것들, 두고 온 것들에 대한 진지한 호명이다. / 필자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일에는 특별한 데가 있다. 아이들의 세계를 엿본다는 것은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갖는 가장 커다란 특권일 것인데, 아이들이 보여주는 천진한 솔직함은 때로는 사람을 감격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우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아이들은 숨길 수 없는 솔직함으로 사람들에게 가지가지 사색의 과제를 던져주는데, 요지는 아이들이 보여주는 세계가 놀랍도록 정직한 어른들 세계의 축약판이라는 사실이다.

일본사람이면 좋겠어요

대도시 아파트 단지에 거주하는 초등학교 고학년생이면, 이미 7~8년나마 공교육과 사교육을 두루 섭렵하여, 비록 제한적이긴 해도 자신이 속한 세계의 판 돌아가는 양태를 뜨르르 꿰고있다. 그래서 ‘노력’보다는 ‘요령’에, ‘생각하기’보다는 ‘답 찾아내기’에 능한 것이 칭찬받을 확률이 높다는 것쯤은 알고도 남으며, 제법 처세까지 익히는 단계에 진입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래봐야 아이들이란 표정까지 감추지는 못한다. 대개의 경우 별일도 아니어서 그저 알고도 모르는 척 넘어가게 되지만,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대놓고 천연스레 내보일 적에는 마땅한 대처방법을 찾느라 고심해야만 한다.

여덟 명의 5학년 아이들과 함께 한 역사공부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구석기 신석기 원시사회에서 시작하여 호랑이 담배 먹던 고대국가 시대를 지나, 고려, 조선을 넘어 일제 식민지를 막 빠져나오려던 참이었다. 5학년 아이들의 어줍잖은 역사공부라고는 해도, 매 수업마다 주어지는 토론과제를 놓고는 아이들도 자못 진지해지는데, 그 날의 돌발사건은 토론과제를 아예 바꾸게 만든 것이다.

교사: …. 이렇게 하여 우리는 마침내 민족해방이라는 감격을 맛보게 되었어.
정주: (느닷없이) 에이 참…… 아깝다….
교사: …………………??
아이1: 무엇이 아까운데?
정주: 해방이 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아이1: 뭐라구?? 말도 안돼. 그게 무슨 말이야?
아이2: 아쭈, 그걸 말이라고 해?
아이들: (중구난방으로) 와글와글~~~
교사: 자, 모두 그만 하고… 정주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정주: 아 그거야 해방이 안됐으면 지금 우리나란 일본일거 아녜요. 그럼 얼마나 좋아요?
교사: 음…. 그래? 그럼 어떤 점에서 좋은데?
정주: 우리가 일본사람이면 한국사람인 거보다 훨 좋죠. 엄청 잘 사는 나라 사람일 거니까요.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아이들이 흥분해서 너나없이 떠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수준에서의 규탄이라 할 수 있었지만, 정주는 기죽지 않았다. 정주는 어디에 내놓아도 돋보이는, 잘 생기고 똑똑하고 성적도 좋은 아이였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엄마친구 아들’에 해당하는 모든 것을 빠짐없이 갖춘 아이라 할까? 지지 않고 맞서는 정주를 상대로 아이들의 흥분은 쉬 가라앉지 않았다.

교사: 자 이제 그만들 하고… 그러면 오늘 토론 주제를 이 문제로 해볼까?
아이들: 네, 네! 그래요. 좋아요!
교사: 그럼 두 편으로 나눠야 하니까… 정주편에 누가 설까? 세 친구 자원해봐.
아이들: ………………. (침묵)
교사: 아무도 없어? 그럼 토론이 안되잖아. 이걸로는 못하겠네?
정주와 아이들: 아뇨, 해요 해요.
교사: 정주도?  1대 7인데 할 수 있겠어?
정주: (망설이다가) 하죠 뭐.

한판 붙어보자는 기세가 시작부터 충천했으니, 분위기만큼은 열띤 토론이었다. 정주는 혼자였는데도 밀리지 않았고, 아이들은 동일한 내용의 주장을 일곱 개의 입으로 토로했다. 아이들의 주장은 당위적이었고, 정주의 주장은 논리적이었다. 토론 자체만 두고 말하자면, 일곱 아이가 정주 하나를 어쩌지 못했다. 정주는 일본사람이면 좋은 이유를 여러 개 갖고 있었다. 그 아이가 알지 못하는 것은 단 하나,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 그것이었다.

돌발적인 주제로 즉흥적으로 진행된 아이들의 토론이 보여주는 세계는 우울했다. 오로지 돈과 출세를 위해, 오로지 공부할 것을 강요 받는 세상에서, 일제 문구류로 필통을 꽉꽉 채우고, 일제 팬시용품에 눈과 마음을 홀리며, 아파트 단지마다 골고루 뒤덮인 사꾸라 나무 그늘 아래서 일제 만화에 푹 빠진 채로, 일제 게임기를 붙들고 일제 게임을 하는 생활환경에서, 일본이라는 나라가 아이들에게 부(富)의 상징이요 아련한 판타지가 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정주와 같이 생각하는 것을 어찌 부자연스럽다 할 것인가. 오히려 정주에게 맞서 우리가 한국 사람이어서 좋은 이유를 목울대를 세워가며 열심히 토로하는 아이들이 눈물 나게 고맙지 않은가.

토론평가를 해주는 것으로 수업을 마치면서 아이들에게 물었다. “너희들 일본사람이면 안 좋지만 미국사람이면 좋지 않겠냐?” 순간적으로 여덟 아이들의 얼굴에 망설이는 기색이 확연하다. 아니나 다를까, ‘일본사람’을 ‘미국사람’으로 바꾸니 1대 7이던 비례가 4대 4로 변한다. 정주가 미국사람으로 바꿔탔음은 물론이다. “이런… 미국사람으로 토론할 걸 그랬네?” 아이들이 와아 웃는다.

그들은 어디서 만나는가?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뉘라서 아이들을 탓하겠는가? 칼을 품고 재무장에 박차를 가하는 자위대 창설기념행사와 일왕의 생일잔치가 대낮에, 이 땅에서, 성대하게 열리고, 거기에 참석하여 얼굴을 팔고 축배를 드는 정치인들이 후안무치하게 승승장구하는 마당이다.

우리 역사를 난도질했던 「조선사 편수회」가 다시 똬리를 틀고 들어앉기라도 한 듯, 일제치하 식민지 시기가 근대화와 선진화의 적실한 기회였다고 주장하며, 대놓고 ‘뉴라이트하게’ 「조선총독부」를 대변하는 낯두꺼운 학자들이 우후죽순 무리를 이루며 행보하는 시절이다.

일본 제국주의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던 사사까와 료이치가 만든 〈사사까와 재단(일본재단)〉이 내민 돈을 받아 넣고 뭔가를 연구하는 대학교수들, 일본 문부성 장학금이 불어넣은 일본유학 열풍에 옳다구나 휩쓸린 철없는 학생들이 부나비처럼 현해탄을 날아다니는 형편이다.

끝내는, 국민투표로 통과된다면 미국의 52번째 주로 편입되는 것도 가능하다고 떠드는 넋 나간 정치인이 온갖 미디어에 인기 연예인처럼 얼굴을 내미는 세태다. 그렇게 사람의 정체성을 투표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정치인을 따르는 무리들이 현실과 사이버를 무대로 종횡무진 활보하는 판국이다.

5학년 정주와 그 정치인은 어디에서 만나는가? 둘은 자기의 이익이 어디에 있는가는 알아도, 자기가 누구인지는 결코 모른다는 데서 극적으로 마주친다. 아이들의 세계란 의심할 바 없이 정직한 어른들 세계의 축약판이다.

대 끝에 대 나고, 싸리 끝에 싸리 난다

아이들과의 역사공부는 하나의 질문으로 시작된다. “역사란 무엇이며, 역사를 왜 공부하냐?” 초등학생은 몰라도 중고등학생쯤이면,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거나, ‘역사는 미래를 알기 위한 도구’라거나 하는 유명 경구를 비슷하게는 읊을 수 있게 된다. 나는 그런 종류의 말랑말랑하고 두루뭉술하고 묘연한 정의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어서, 내 나름의 정의를 아이들에게 말해주곤 한다.

“역사란 ‘내가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것이다. 역사는 ‘내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들어보지 못한 정의의 현실감 때문인지, 낮은 목소리에 실린 힘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되, 문득 긴장하는 낌새가 역력한 아이들을 보면, 매번 새로운 기대가 생겨난다. 기껏해야 ‘○○학교 ○학년 ○반 ○○○’ 라는 유치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실질적 자각에 다다르기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정체성 자각이라는 과제에 있어서 역사란 알파요 오메가가 아니라 부분조건이자 필요조건 이상이 못된다는 것이 문제다.

사람의 정체성이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기보다 온 몸에 스며드는 것이다. 자각은 어떤 한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 한 순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세월을 두고 온 몸에 스며들어있는 「무엇인가」의 힘이다. 바로 그 「무엇인가」는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오감으로 받아들여 반복해서 누적되어 온 모든 것과, 그것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육감과 사고까지를 포함하는, 익숙하고 친밀한 것에 대한 종합적 인식’이라 할 것인데, 이런 서투른 풀이를 ‘문화’라 말함은 다른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힘이 있을까?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힘을 만들어주고 있을까? 복숭아꽃 살구꽃보다 벚꽃이 더 친근한 아이들의 온 몸에 스며드는 것은 무엇일까? 오래된 일이지만, “엄마 연탄집게가 뭐야요?” 하는 질문을 아이로부터 받았을 때 느꼈던 까마득한 현기증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대 끝에 대 나고 싸리 끝에 싸리 난다’ 했다. 어른들 세대가 대였는지 싸리였는지는 아이들이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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