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내적 혁명이 사회 제도적 혁명으로 발전할 때 제대로 된 혁명이 가능하다 (D.H. 로렌스)

 

 그 방을 생각하며
 - 김수영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렷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앗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 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풍성하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 보면 무수히 많은 ‘혐오’를 만난다. 분명히 자전거 도로로 가고 있는데, 앞에서 ‘젊은 여성’이 걸어온다. 앞을 보지 않고 핸드폰만 들여도 본다. 조심조심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며 천천히 간다. 그녀는 어디로 튈지 모른다. 간신히 그녀의 옆을 무사히 스쳐지나간다. 내 안에서 ‘여성 혐오’가 웅얼거린다.    

 육교를 만나 좁은 자전거 길로 힘겹게 오르는데, ‘젊은 남성’이 마주보며 자전거를 끌고 내려온다. 분명히 나를 본 것 같은데, 과감히 내려온다. 마주친다. 그는 가만히 서 있다. ‘내가 비키라는 거야?’ ‘위에서 내려오는 녀석이?’ 내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 나온다. “야! 네가 비켜야지.” 그는 그제 서야 멀뚱한 얼굴로 자전거를 들고 옆으로 비켜선다. 내 안에서 ‘요즘 젊은 것들 혐오’가 신음 소리를 낸다.  

 공원에서 의자에 앉아 쉬면서 핸드폰을 켜고 뉴스를 검색한다. 댓글들을 보다 보면 무수히 많은 ‘노인 혐오’를 만난다. ‘틀딱’이라는 신조어를 자주 본다. ‘틀니를 딱딱 거리는 노인’ 노인에 대한 극혐을 드러낸다. 댓글을 읽으며 나도 동의하게 된다. 이제 막 노인층에 들어가는 동창 카톡방에 들어가 보면 멀쩡한 녀석들이 어찌 그리도 가짜 뉴스에 잘 속는지 ‘노인 혐오’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다. 

 보행자 입장에서 ‘자전거 족’을 보면 어떨까? 일상적으로 인도를 침범하여 편안히 걷지도 못하게 하는 자전거 족들이 얼마나 혐오스러울까? 횡단보도에서도 옆을 쌩 지나쳐가는 자전거 족들은 보행자들에게 혐오를 넘어 공포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어떤 입장이 되더라도 다른 입장들을 혐오하게 되어있을 것이다. 만인이 만인과 싸우는 약육강식의 정글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요즘 갑자기 등장한 ‘혐오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누가 우리를 서로 싸우게 할까? 누가 우리를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전쟁터로 몰아갈까? 

 사실 세상을 바꾸면 간단히 해결된다. 도시를 만들 때 널찍하게 만들면 된다. 모든 길에 자전거 도로와 인도를 넉넉하게 만들면 된다. 노인들과 젊은이들이 누구나 여유롭게 살 수 있게 해주면 된다. 적어도 북유럽 정도의 복지 국가를 만들면 된다. 

 해결책은 이리도 간단하지만 우리 사회를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 이런 복지 국가를 만들 의향이 없다는 게 문제다. 그러다보니 세상은 바뀌지 않고(혁명은 안 되고) 우리끼리 진흙탕 싸움을 해야 한다.      

 우리 사회를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들을 지키기 위해 우리들을 서로 싸우게 부추긴다. 

 박정희의 군사독재 시절엔 국민들에게 ‘빨갱이’ ‘전라도’를 혐오하게 했다. 박정희 독재만 바꾸면 간단히 해결될 텐데. 우리는 혁명은 하지 못하고 서로 싸워야 했다.

 지배 세력은 이제 다른 혐오로 우리를 통치한다. 우리를 갈가리 찢어놓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남과 여, 젊은이와 늙은이, 수도권과 지방...... 우리는 서로 혐오하며 ‘헬조선’을 온전히 받치고 있다.    

 철학자 아도르노는 단호히 말한다. ‘잘못된 세상에서는 올바른 삶이 없다!’ 그렇다. ‘헬조선’에서는 누구나 잘못 살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혐오하지 말아야 한다. 서로 뭉쳐 ‘헬조선’을 바꿔야 한다.   

 김수영 시인은 노래한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우리는 혁명은 하지 못하고 있지만 자신의 방이라도 바꿔야 한다. 그러면 적어도 우리는 ‘혁명의 에너지’를 남을 혐오하는데 쓰지 않게 된다. 우리는 적어도 자신의 헛헛한 가슴을 채우기 위해 남을 혐오하지는 않게 된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풍성하다’

 그렇다. 고통을 자신이 온전히 감내하게 되면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풍성’하게 된다.   

 혁명은 세상만 바꾼다고 되지 않는다. 먼저 혐오로 물들어 버린 우리 마음을 혁명해야 한다. 온전해지는 마음으로 우리 함께 이 세상을 바꿔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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