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동심이란 진실한 마음이다 만약 동심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이는 진실한 마음을 가질 수 없다 (이탁오) 


 처음 애를
 - 센게 모토마로
   
 처음 애를
 풀밭 위에 내려놓고 서게 했을 때
 애는 땅만 바라보고,
 서거나 쪼그려 앉거나 하며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웃고 또 웃고 웃을 뿐이었다,
 무서운 듯 서서는 즐거워하고, 살짝 쪼그려 앉아 웃고
 그 우스운 모습이란,
 나와 애는 얼굴을 쳐다보고 웃었다.
 이상한 녀석이라고 주변을 살피며 웃었더니
 애는 살짝 쪼그려 않아 웃고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한 곳에서
 여유롭게 서기도 하고 쪼그려 앉기도 하고
 쪼끄만 몸을 흔들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한강에 투신한 20대 여성이 물에 빠진 채 휴대전화로 119에 구조 요청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응대에 나선 119 대원은 ‘한강에서 수영하면서 전화를 하는 것이 대단하다’면서 마치 장난 전화를 받는 듯한 취급을 했다고 한다. 이 여성은 사흘 뒤에 한강에서 결국 숨진 채 발견됐단다.

 119 측은 신고 접수자의 태도가 무성의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서도 투신자가 직접 신고를 하는 것은 워낙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변명을 했다고 한다.

 그 여성은 죽어가면서 얼마나 참담했을까. 세상사는 게 워낙 힘들어 물에 뛰어 들었지만, 막상 물에 빠지고 나니 죽는 게 너무나 두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죽어가면서 지르는 ‘비명’까지도 이 세상은 몰라주다니!

 전화를 받은 119 대원은 너무나 차분한 신고자의 말에 장난 전화가 아닐까 의심했다고 한다. 그 119 대원은 마음속으로 억울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재수 없게 걸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나는 죽을 지도 모르는 공포 속에서 아무도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는 참담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주말 농장에 다녀오느라 옷이 엉망이었다. 그런데 얼굴까지 창백하니 아마 사람들은 나를 노숙자로 생각한 것 같다. 

 제대로 발음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내가 뭐라 계속 웅얼대자 그들은 내 말을 아예 듣지 못한 척했고 그 후론 나를 투명인간 취급을 했다. 살아나서 다행이지 그때 만일 내가 죽어갔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자신이 살아 온 공동체가 자신이 가장 힘들 때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존재의 이유가 없을 것이다.

 왜 사람들은 ‘남의 마음’을 이리도 모르게 되었을까? 

 명나라 말 사상가인 이탁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성인의 가르침을 배웠고, 공자를 존경했으나 왜 공자를 존경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한 마리 개에 불과했다. 앞에 있는 개가 자기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같이 따라서 짖었다. 만약 남들이 내가 짖는 까닭을 묻는다면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쑥스럽게 웃거나 할 따름이었다.’

 우리의 교육이 이렇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지 않는다.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공부. 그렇게 해서 대학을 가고 어른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마음을 읽는 힘이 없다. 한강에 빠진 사람의 목소리를 장난 전화로 밖에 해석하지 못한다. 

 남의 마음을 읽는 힘은 누구나 타고난다. 배울 필요가 없다. 이것을 양명학의 창시자 왕양명은 ‘양지(良志)’라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는 이 선천적인 힘을 잃어버리는가! 이탁오는 말한다. ‘이 동심(童心)은 마음의 처음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동심을 잃게 되는 것일까? 처음에는 듣고 보는 것이 귀와 눈을 통해 들어오고, 그것이 마음의 주인이 됨으로써 동심을 잃는다... 지식과 지각의 범위가 나날이 더욱 넓어지고 도리(道理)를 배우는 과정에서 동심을 잃어 가게 된다.’ 

 센게 모토마로 시인은 노래한다. ‘처음 애를/풀밭 위에 내려놓고 서게 했을 때/애는 땅만 바라보고,/서거나 쪼그려 앉거나 하며/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웃고 또 웃고 웃을 뿐이었다,’

 처음 직립을 했을 때 원시인이 이랬을 것이다. 마냥 즐거운 아이. 이런 아이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살고 있다. 공부는 이 아이를 깨어나게 하고 자라게 하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 보이는 어른보다 더 큰 아이가 내 안에 살고 있을 때 우리는 누구나 지혜로울 것이다. 그냥 남의 마음을 알 것이다. 산천초목의 마음도 알 것이다.     

 흔히 인류의 종말을 얘기한다. 그만큼 다들 위기를 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답은 너무나 간단할 것이다. 우리 안에서 깊은 잠들어 버린 아이를 깨우기만 하면 될 것이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한 곳에서/여유롭게 서기도 하고 쪼그려 앉기도 하고/쪼끄만 몸을 흔들며/즐거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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