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경 / 농부

 

살구나무를 찾아서 살구나무 동산을 만들고 있다. 올해는 살구나무 마을을 만들려고 한다. 올해 우리 마을에는 많은 살구나무들이 새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인데, 나는 그것이 북측 회령 백살구나무이기를 바래서, 그것을 구하려 안타깝게 뛰어다니고 있다.

사라진 살구나무를 찾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살구나무를 잃어버렸듯이 아주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무엇을 위하여 그 많은 것들을 놓아버린 것일까? 여기 연재할 글들은 살구나무처럼 우리가 잃은 것들, 잊은 것들, 두고 온 것들에 대한 진지한 호명이다. / 필자

 

 

살구나무의 겨울눈이다. 저 작고 단단한 겨울눈 속에는 살구꽃도 있고 살구잎도 있다. 꽃도 잎도 열매도 없이, 마치 다 살기라도 한 듯 메마른 가지만을 내뻗고있는 나무이지만 저것은 틀림없는 살구나무다. 몸체의 표면적을 최소치로 줄이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 보일 맹아들을 단단한 껍질로 감싸고, 동지섣달 설한풍과 소한 대한 맹추위를 견디고 있는 것이다. 겉모습이 어떠하든 살구나무는 자신이 살구나무임을 잊지 않는다.

살구나무는 어디 있나?

살구나무를 찾아 헤매며 한 해가 깜빡 접혔다. 어머니 병구완으로 찾아보던 가지가지 책들과 자료들 속에서 살구를 발견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그렇게 만나진 살구는 무슨 운명처럼 마음을 붙잡아버렸다. 살구와 살구씨가 애타게 찾고 있는 특별한 효능을 지녔기 때문이었나? 그것만은 아니다. 살구가 갖고 있는 유다른 약리작용에 대한 주목은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발견의 기쁨을 가져왔지만, 정작 마음이 온통 붙들린 건 사라져버린 살구나무의 실존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다.

우리 살구는 제철에도 구하기 어려운 과실이다. 우리 땅에서 난 과일들은 물론, 지구 구석구석을 모조리 훑어온 듯 갖가지 수입과일들로 요란하여 없는 거 빼놓고 다 있는 대형마트의 진열대에서, 드물게도 살구는 없는 것에 속한다. 운이 좋으면 시골 장날 트럭 행상이 늘어놓은 과일전에서 제철에 잠깐 구경하는 것이 살구다. 이것은 살구를 구하는 사람에게 매우 묘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데, 살구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매우 친숙하여 아무데나 있을 것이라는 통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살구를 구하면서 알게 된 것은, 살구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살구를 아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는 이상한 사실이다. 살구에 대해 물으면 사람들은 과거를 이야기한다. 서울 출신 같은 말짱 도시내기를 제외하면 누구나의 과거 속에 살구나무가 있다. 우리집 앞마당에, 뒷집 울타리 옆에, 옆집 밭 가장자리에, 개울 건너 산 어귀에…. 살구나무가 있었다. 하지만 언제인지도 모르게 그 나무들은 사라졌다. 그래서 살구는, 살구나무는 사람들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살구나무는 고향의 나무라지?

복숭아를 《도(桃)》라하고, 매실을 《매(梅)》라 하며, 살구를 《행(杏)》이라 한다. 《도(桃)》와 《매(梅)》와 《행(杏)》은 모두 장미과에 속하는 핵과들로서, 우리 선조들이 남긴 글과 그림에 끊임없이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들이다. 흔하고 또 아름다워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것들이 그런 지위를 차지했을까? 그것들은 아주 오랜 세월 우리 선조들의 생활 속에 녹아들어 희로애락과 생로병사를 함께하며 우리의 정서와 문화를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선조들은 이상향을 《도원(桃園)》으로 명명했다. 서왕모의 복숭아를 훔쳐먹고 삼천 년을 살았다는 동방삭의 전설로부터 비롯된 불로장생의 꿈이 투영된 것이겠으되, 실제로 화려한 복사꽃이 만개한 언덕의 풍경은 아마도 감탄사가 절로 나올 선경(仙境) 그 이상이었으리라. 도원(桃園)이 이상세계를 상징한다면 매(梅)와 행(杏)은 현실세계를 아우른다. 하지만 매(梅)와 행(杏)은 현실세계에서 서로 다른 가치를 반영하며 갈라진다.

매화가 선비의 꽃이라면, 살구꽃은 고향의 꽃이다. 매화가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서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며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다면, 살구는 아무래도 이름없는 백성들의 나무였나 보다. 매화가 선비들의 기와집 뜨락에 자리잡은 나무였다면, 살구는 초가집 울타리 옆에서 자라난 나무였고, 매화가 고고한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선비들의 관념을 충족시켜주는 나무였다면, 살구는 뛰어난 치유력으로 백성들의 가난한 체력을 지켜주는 나무였을 것이다. 그래서 행(杏)에는 원(園)보다는 촌(村)이 어울리는 음절이 된 것이 아니겠나. 살구가 고향의 나무로 대표된 것에는 대개 이런 연유도 있으리라 여겨지기도 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고향’이라는 말만 들어도 음률과 가사가 자동으로 떠오르는 이 노래를 언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딱히 알 수가 없다. 마치 엄마 뱃속에서부터 절로 알고 나온 것과도 같은 이 노래가 지어진 때가 1927년 무렵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1920년대는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과 최서해의 『탈출기』가 생산된 시대, 토지를 빼앗긴 이 땅의 농민들이 20년간 계속된 일제의 수탈을 견디다 못해 거개 고향을 뜨고, 처절한 식민지적 빈곤과 기아가 온 나라를 뒤덮었던 시대다.

역사적 배경을 알고 노래가사를 찬찬히 음미하다 보면, 암울한 식민지 세상에서 꽃나무에 빗대어 나라의 해방을 그리는 애절한 염원이 울려 나오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노래가 그려내는 꽃대궐이 단지 은유인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일제는 우리 꽃 우리 나무들의 말살을 획책하였다.

살구나무를 몰아낸 것은?

일제의 40년 식민지 조선지배의 특징은 다른 서구제국주의 나라들의 식민지 지배와 확연히 구별된다. 그것은 다른 식민지 지배 나라들이 행했던 사회•경제적 수탈에 더하여 민족말살정책을 감행한 데 있다. 즉,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에 대한 극단적인 사회•경제적 수탈과 함께 조선민족을 지구 위에서 소멸시키려 한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정책은 사회•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한국민족을 말살, 소멸시켜서 일본제국내의 공식•비공식적으로 차별받는 종속 천민신분층으로 만들 것을 목적으로 한국민족 말살정책을 강행하는 악랄한 정책을 집행하였다. 각종의 간악한 제국주의 식민지정책 중에서도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정책은 가장 폭압적이고 무단적이었으며 가장 악랄한 것이었다.

일제는 외교권 군사권의 강탈로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주권을 유린하였으며, 토지조사사업으로 대부분의 토지를 약탈하고 회사령으로 민족산업을 파괴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사회•경제적 수탈 체계를 확립하였다. ‘한 손’으론 이렇게 우리 민족의 사회•경제적 토대를 송두리째 집어삼키면서, ‘다른 손’으로는 조선교육령과 문화재 파괴 약탈로 대표되는 조선민족말살정책에 돌입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다시 보자.

일제는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민족말살과 식민지교육을 위한 첫 조처를 자행… 「조선교육령」의 기본내용은

①  조선인에 대한 교육은 일본제국에 충량(忠良)한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로 하며,
② 일본어를 보급하고,
③  조선에는 대학을 설치하지 않도록 하고, 필요하면 실업기능교육만 시킨다는 것.

-일제는 이 목적달성을 위하여 공립학교뿐만 아니라 사립학교의 교원과 교과과정, 교과서를 총독부의 지시에 따르도록 제도화….
-한국어시간을 줄이고 일본어시간을 대폭 증가….
-날조과장된 일본역사를 강제로 학습시켜 일본숭배사상을 주입시키고,
-한국사를 왜곡하고 날조하여 한국민족은 고대부터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받아온 타율적이고 정체적인 민족이며,
-오늘날 한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역사적•필연적 귀결이라는 의식을 주입….
-한국민족의 민족성은 본래 사대성과 당파성이 강한 결점을 가지고 있다고 교육하여 패배의식을 주입….
-한국민족의… 유구한 민족사를 알지 못하도록 하면서 민족말살정책을 지원하기 위하여 우리의 민족문화유산을 대대적으로 약탈하고 파괴….

-1910년 총독부 안에 ‘고적조사반’을 만들어서 서울•개성•평양•부여•공주•경주 등지의 수많은 고분과 산성, 고적을 파괴하고 수많은 출토품들을 약탈하여 일본으로 실어갔다.

-총독부의 고급관리들이 일본인 골동품상과 결탁하여 헌병경찰의 호위를 받으면서 관제도굴단을 조직하여 경주•공주•부여와 전국 각지의 고적들을 도굴해서 수많은 금관들, 금•은•옥의 부장품들과 불상 등의 미술품들을 약탈하여 일본으로 실어갔다.

-1910년 11월부터 헌병경찰을 동원하여 전국의 서점•향교•서원은 물론이요 서적을 다수 보관하고 있는 개인집까지 수색하여 우리의 고전들을 약탈하였으며,
-그 가운데 약 20만여책을 불태워버리고 일부는 일본으로 실어갔다.

-일제강점기에 침략자들이 파괴하고 약탈해간 민족문화 유산들은 도저히 그 품목을 낱낱이 들 수 없을 정도로 대량이었다.

위 백과사전은 후술로 일제의 이런 시도가 성공하지 못하고 좌절되었다고 자기위안 하였으나, 현실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단적으로, 우리의 고대사가 《잃어버린 고리》로 남아 지금도 여전히 그 복원에 대한 쟁론이 멈추지 않는 것도 그들의 만행의 후과이며, “조선놈은 ~하다”는 갖가지 자학적이고 자폐적인 어구들이 무슨 주술처럼 정착된 것도 그로부터 생겨난 일이다. 거기에 더하여 나는 《살구나무의 실종》도 또한 동일한 경로로 파악하게 된다.

일제가 ‘다른 손’으로 자행한 민족말살행위는, 정체성 소멸을 목표로 우리 머리 속에서 역사와 언어를 지우고, 우리 행위 속에서 민속과 문화를 제거하는 일이었으며, 우리 자연과 생활공간에서 민족적 상징들을 몰아내는 일이었다. 그들이 자행한 일들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일제는 국권을 빼앗은 후 궁궐 안에서부터 사꾸라를 본격적으로 심게 하였다. 1908년 창덕궁에 사꾸라를 심고, 1909년에는 고종이 있던 덕수궁에도 사꾸라를 강제로 심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1907년부터 1909년까지 각 관청과 학교, 통감부 관저, 용산의 일본군사령부내, 각 대신들의 관사는 물론 인천의 주안염업시험장과 관측소, 수원의 모범농장과 농림학교에까지 사꾸라를 심게 하였다.

1910년 8월29일에는 꾸우찌농상공부장관과 야마가따신정무총감, 데라우찌 총독이 모여앉아 “일한병합의 대성업을 이룬 것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하여 신무천황제일인 4월3일을 기하여 조선 전토에서 관민을 총동원하여 제1차 기념식수를 진행”하기로 결정, 총독관저의 뒤뜰을 식수장으로 정하여 관리들과 친일파들에게 초청장까지 발급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일제는 해마다 신무천황의 제사일을 식수절로 정하고, 사꾸라를 대대적으로 심을 것을 조선사람들에게 강요하며 저들의 《사꾸라문화》를 주입시키려고 책동하였다.

일제 때 뽑히고 불태워지는 수난을 당한 꽃은 무궁화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우리 생활과 문화 속에 고향의 꽃으로 무궁화보다도 깊이 자리잡은 복사꽃 살구꽃은 예외였을까? 일제가 자행했던 민족말살정책의 세부를 들여다보자면, 그 꽃들도 무궁화와 조금치도 다름없는 운명이었음을 넉넉히 추정할 수 있다.

이런 사실들을 알게 되면, 「고향의 봄」, 「봉선화」, 「찔레꽃」과 같은 우리 꽃을 소재로 한 노래들이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창작된 것이 우연이라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해방직후 전국 곳곳에서 사꾸라 나무들이 베어져 나간 것도 이런 야만적인 정책에 대한 민족적 울분의 표현이요 식민지 잔재청산의 의지였을 것이니, 단순한 감정폭발이나 분풀이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살구나무의 실종

그러나 수난을 끝내야 했던 살구나무는 돌아오지 않았고, 사라졌어야 했던 사꾸라는 다시 화려하게 부활하였으니, 박정희 정권 때의 일이다. 역사 속에 친일과 군사독재의 표상으로 자리매김된 박정희 정부가, 1965년 굴욕적인 한일협정과 함께 한 일이 온 나라를 다시 사꾸라로 뒤덮는 일에 시동을 건 것이다. 진해에도, 전군가도에도, 뽑혀져 나갔던 자리에서 사꾸라가 부활했고, 국사를 논한다는 국회주변 윤중로에도 사꾸라가 빼곡히 들어섰다.

이 때의 《사꾸라 심기》를 추진한 주체들의 면면에는, 정부와 함께 일본인, 일본 기업인과 언론인, 재일교포, 한일친선협회라는 단체, 심지어 야꾸자까지 등장한다. 식민지 지배시기에 강압적으로 자행되었던 조직적인 《사꾸라 심기》가 친선이란 허울을 쓰고 자발적인 것으로 둔갑하여 진행된 것이다. 한일협정 반대시위를 1차 인혁당 사건이라는 국가변란기획으로 몰아 진압한 서슬퍼런 군사정권의 위세 앞에서 그 누구도 입을 벌릴 수 없었으리라.

그렇게 시동을 건 《사꾸라 심기》는 온갖 신문 방송 잡지들이 입을 모아 홍보하는 《사꾸라 축제》로 확산일로를 걸어, 50여년이 흐른 지금에는 전국 방방곡곡 도로와 천변, 공원과 교정들을 점령하여, 구태여 길 떠나지 않아도 사꾸라 군락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쓸개를 빼놓은 정부와 관광수입에 눈먼 지자체와, 북치고 장구치며 홍보에 앞장선 미디어들의 지대한 공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어쩌다 거론되는 문제제기도 ‘꽃은 꽃으로만 보아야 한다’느니, ‘사꾸라도 알고 보면 제주가 원산지’라느니 하는 얄팍한 논리와 무지한 주장에 부딪혀 국수주의자로 몰릴까 우려하게까지 되었으니, 가히 의식의 전복이라 할 만하다. 일제 식민지배자들이 이 상황을 목도한다면, 과거 40년에도 완성하지 못했던 민족말살정책의 부분적인 성공을 축하하며 무덤 속에서라도 축배를 들지 않겠나?

그리하여 나는 사꾸라의 창궐과 살구나무의 실종을 100년이 넘게 진행되어온 하나의 맥락으로 인지하게 된다. 우리가 잃은 것이 살구나무 뿐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천 년을 두고 누적되어 온 살구나무가 상징하는 모든 것을, 살구나무와 더불어 잃은 것이다.

 

 

서울에서 성장하고 학교 다님.
몇 가지 자영업을 전전하고,
산에 다니면서 글쓰기를 시작함.
오랫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다,
2015년 입농(入農)하여 농부가 됨.

 

2005년 암벽등반 수필집으로 등단
2005년 제13회 한국산악문학상 수상 (월간 「사람과 산」 주관)
2006년 중앙일보 산악칼럼 연재
2007년 월간 「사람과 산」 등반기 연재      
2013년 계간 「삶창」 밥 이야기 연재
2015년 (사)겨레하나 주관 ‘개성공단 사람들’ 독후감 공모전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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