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일 / 전 한신대학교 교수

 

서울의 어느 목사가 인천에 있는 교회의 설교부탁을 받고 막상 인천에 갔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어느 교회를 가야할지를 몰라 그냥 돌아 온 경우가 있었는데, 그 후 그 목사의 별명이 ‘올꾼이 목사’가 되었다. 

‘올꾼이’란 말은 함경도 사투리로 ‘얼간이’ 혹은 ‘멍청이’를 의미 한다. 얼간이 같이 멍청한 짓을 하는 인간을 보면 “올꾼이 용강 갔다 오듯”이라 한다. 이 말의 유래를 보면 평양 지나서 용강 부근에 김진사댁이 있었는데 그 집 머슴의 이름이 ‘승행복’이다. 그 머슴의 별명은 ‘올꾼이’이다. ‘올꾼이’란 전후좌우를 살필 줄 모르고 질주한다는 뜻이다.

하루는 김진사가 승행복을 불러 ‘오늘 용강 좀 갔다 와야겠다’ 말하고 막상 서찰을 써 용무를 시키려 하는 데 승행복은 하루 종일 보이지 않는다. 용강은 서울에서 인천 거리만큼 평양에서 떨어져 있는 마을이다. 

한참 저녁 무렵 승행복이 보이기에, ‘어디 갔다 이제 나타나느냐?’ 하니 ‘아침에 대감님이 용강 갔다 와야 되겠다. 그러시기에 그 즉시로 용강에 갔다가 이제 온 것입니다’라고 대꾸하면서 오히려 “주인이 노망이 들어 용돈도 주지 않아 점심도 굶었다”고 투정 댔다고 한다.

올꾼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를 두고 충직하고 우직한 머슴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 충직과 우직이 도리어 주인에게 도움이 안 될 때도 있다. 충직하고 우직한 자는 순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순결하고 충직한 것만으로는 타인에 피해를 줄 수 있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뱀같이 지혜로워라”고 했다.

올꾼이 일화는 실제로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1960년대 세계 해학 익살 대회에서 올꾼이 일화는 단연 수준급이었다. 1등은 예수가 간음한 여인을 살리는 이야기 즉,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였다. 두 이야기의 공통된 점은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 자체를 모른다”는 것이다. 이를 그럴싸하게 포장을 해 말하면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이다.

이토록 충직하고 우직한 이름의 상징인 ‘평양 용강 올꾼이’를 요즘 우리 주변에서 진보와 보수들 막론하고 흔히들 볼 수 있다. 먼저 진보 통일꾼들부터 보자. 평양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북한의 제도와 체제는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알 생각도 없이 평양을 ‘그냥’ 갔다 왔다 하는 통일꾼들을 ‘통일 올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양 올꾼이 주인은 올꾼이에게 지참할 서찰(메시기)을 챙기려 했으나 올꾼이는 전달하려는 서찰도 받지 않고 그냥 용강 군청 마당을 한 바퀴 돌고 온 것이다.

앞으로 철마는 힘차게 기적을 울리며 남북을 오갈 것이다. 여기에 백 번 평양을 갔다 온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북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속에 무슨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 북의 체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도 모르면서 알 필요도 없이 평양 갔다 왔다 하기만 한다. 북에 대한 모든 것의 모든 것은, 나아가 북을 바로 그리고 빠르게 이해하는 ‘첩경捷徑’은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에서는 불가접촉 금서이다. 그러나 평양 백번 갔다 와도 올꾼이 용강 갔다 오는 꼴이다.

지금 문재인 정부 하에서도 회고록은 금서이고 지참조차 할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백두산을 백 번 오르는 것보다 국가보안법을 고치는 것이 더 통일로 빠르게 가는 길이다. 회고록을 읽지 않고 북을 오간다고 하는 것은 마치 올꾼이 용강 갔다 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국가보안법이 통일꾼들만 올꾼이로 만들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국가보안법을 수호한다는 보수들 역시 얼간이 멍청이 짓을 하기는 마찬가지이고, 자기들도 국가보안법에 걸리는 짓을 하고 있다는 역설까지 저지르고 있다.

북한 유인물과 문서들을 읽을 수도 볼 수도 없기 때문에 지난 번 평창 올림픽 때에 김일성 가면 소동을 벌리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봄이 온다’는 북한 혁명 소설 ‘은하수’ 10장의 소주제이다. 심지어는 이 말이 길림 감옥에 갇혔던 김일성(김성주)이 석방될 날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쓰인 말인 데도 이 소설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 삼지도 못하고 있다.

그런데 보수는 물론 평양 공연을 준비한 당사자들도 이 사실을 모르고 이 말을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이 말의 맥락을 알았더라면 진보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고, 보수가 알았더라면 짐작하건데 그냥 있지 않았을 것이다. 김일성 가면 그 이상의 높은 격을 갖는 것이 ‘봄이 온다’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다 올꾼이 같은 멍청이들을 지금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있다.

얼마 전 자한당 원내대표 나경원 의원은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하락하자 “동이 튼다”고 했다. 이 구절도 북한 혁명가요 ‘조선의 별’의 한 구절이다. 제2절 “짓밟힌 조선에 동이 트리라” 나경원의 말은 이 혁명가요의 한 구절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경원 역시 맥락도 모르고 이 말을 쓴 것 같다. 만약에 북한 가요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조선의 별’을 보기만 하고 읽기만 했어도 이 말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나경원 말 한 맥락을 보면 전혀 문제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국가보안법은 이런 전혀 맥락이 다른 어구를 “따옴표”로 떼와 억지로 덮어씌우기 방식으로 국보법을 적용해 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나경원의 말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한국 검찰이 예외 없이 법을 집행한다면 나경원의 말은 국가보안법 위반이다. 따옴표로 말을 떼와 국가보안법에 걸려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죽기까지 했다.

직접 경험한 예를 들어 본다. 2004년 개천절 행사로 북한에 갔을 때 보통강 호텔 노래방에서 북한 여성이 수첩에 적어 준 북한 가요가 문제가 돼 실형을 받았다. 불온 유인물 지참으로 실형을 받았다. 독일에 있는 어떤 분을 만나지도 않았는데도 만났다고 실형을 선고했다. 일본 식당에 앞자리에 앉았던 생면부지의 사람 때문에 회합통신을 했다고 실형을 받았다. 이 모든 사례들은 글을 쓴 사람의 실제 경험들이다.

이 정도면 나경원의 말 문제 되지 않을까? 물론 아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국가보안법 때문에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얼간이가 되어 가고 있는 현실을 개탄할 뿐이다.

지금 국가보안법은 진보와 보수를 망라한 누구나 걸려들 수 있는 실로 법자체가 얼간이 같은 멍청한 ‘올꾼이 법’이다. 이런 법을 그냥 두었다가는 대한민국 성원 진보 보수를 망라한 모두를 얼간이로 만들 것이다. 이런 얼간이 법을 앞으로 가장 많이 이용할 수 있는 주체는 누구이겠는가? 일본이다. 아베가 우리를 보고 ‘어리석다’고 했다. 우리가 올꾼이와 같은 하는 짓을 환히 들여다보고 하는 말이다. 이 올꾼이 법을 최대한 이용해 우릴 이간질시켜 집어 삼킬 날을 호시탐탐 엿보고 있다.

이런 법이 가장 큰 피해를 주는 곳이 문학이다. 일제와 큰 전쟁을 겪은 우리나라 같은 곳에서 국가보안법만 없었더라면 문학인들이 한없는 상상의 날개를 펴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올꾼이 법 국가보안법은 지금 작가들의 상상력을 위축시키고 마비시키고 있으며, 철학자들은 모두 좀비로 변해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회고록을 읽으라고 했더니, 이것 역시 국가보안법에 해당한다고 실형을 때렸다. “적을 알기 위해 적을 알아야 한다”는 말도 국가보안법에 저촉된다. 참 세상에 이런 법은 함무라비 법 이래로 전무후무한 법이다. 보수들도 제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이 법을 껴안고 있으려 한다.

서두에 말한 그 목사는 평생 자기가 ‘올꾼이 목사’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자기 아호로 삼았다고 한다. 노장 사상의 우직하고 어눌한 것이 올꾼이의 정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평양 용강 올꾼이는 노장의 제자 감이 아니다. 그는 주인의 ‘말’만 들었지 ‘말귀’을 알아듣지 못한 얼간이이다.

과연 지금 국가보안법이 말하려고 하는 ‘말귀’란 무엇인가? 도대체 말도 말귀도 성립 안 되는 것이 그것의 정체인 것 같다.

예수는 자기가 하는 짓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행동하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무엇을 보려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부는 갈대냐 공중에 나는 새냐”고 힐난한다. ‘광야의 소리’ 요한의 소리는 듣지 않고 할 일 없이 광야를 헤매 도는 무슨 운동한다는 제자들을 나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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