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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한째 이야기, 개꼬리 3년 묵혀도 황모 못 된다(2)<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24)
글 정해랑/삽화 김윤기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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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1.05  19: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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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뒤, 돈도 없고 학벌도 안 되고 빽도 없어서 서울 근교 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에 취직했던 신돌석씨. 가진 거라곤 의리 있게 산다는 생활 신조 하나였던 그가, 27세 되던 1985년 전국의 공단지역을 휩쓸었던 노동운동의 폭풍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인생의 변화를 겪고, 의리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어느덧 이순의 나이가 되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러나 있을 수 있었던,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이야기는 과거만을 다루는 후일담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인지를,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정해랑

 

   
▲ [삽화 - 김윤기]

사실 신돌석씨가 아는 검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돌석씨의 동창 중에도 검사가 여러 명 있었다. 물론 최근에 동창회에서 보기까지 졸업한 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볼 일도 없었고, 보고 싶지도 않았다. 상대들은 더욱 그랬을 것이다. 아니 신돌석씨를 모르거나 아니면 알아도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신돌석씨가 그들과 알게 된 것은 전적으로 고교 평준화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교 평준화라는 것이 이런 사람 저런 사람과도 친구가 되게, 아니 친구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동창이 되게 하였다.

10여 년 전쯤에 오랜만에 동기 동창회에 갔다. 신돌석씨는 그 동안 동창회를 한다고 해도 가지 않았다. 별로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데는 열등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학교 다닐 때도 그다지 날리지도 못했고, 졸업 후에 소위 잘나가는 사람이 된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연락이 와도 나갈 마음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때는 아주 친했던 애들이 이런 기회에 모인다고 하면서 꼭 나오라는 연락이 왔다. 마침 시간도 있고 해서 가게 되었다.

역시 소위 ‘잘나가는 애들’이 많았다. 사업가, 의사, 검사, 고위직 공무원 등이 모였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그렇지 않은 애들도 많이 나왔다. 동창회에 자주 나왔던 애의 말을 빌리면 이런 적은 처음이라고 하였다. 누군가가 40대 중반이 넘어가면 슬슬 동창들이 모이게 된다는 것인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모임 장소는 민속주점이었다. 그 술집을 온통 빌렸는데 그런 주점들의 특성상 탁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 한 곳으로 집중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신돌석씨는 우선 안면이 있는 애들이 있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렇게 앉아서 술을 마시다 옆자리로 옮겨 갔는데 그러다가 검사가 된 한 친구가 앉은 자리에 합석하게 되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진동석이었다.

진동석은 고2 때 신돌석씨와 한 반이었다. 신돌석씨 바로 앞자리에 앉았는데 공부는 좀 잘했지만 신돌석씨 기억으로는 그다지 날리지는 못했던 친구였다. 다시 말해서 반장을 한다든가 또는 그 밖의 특기를 갖고 애들의 주목을 받던 친구는 아니었다. 그리고 성품도 비교적 순박한 편이었다. 그래서 공부를 결코 잘하지 못했던 신돌석씨와도 특별히 모나지 않게 어울렸다. 물론 학교에서 만이었다. 진동석과 학교 밖에서 어울린 것이라곤 탁구를 치러 두어 번 간 기억밖에 없었다.

고3이 된 뒤에는 다른 반이 되었고 거의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는 진동석이 이른바 명문대 법대에 들어갔다는 소리를 들었고 동기들 중 가장 먼저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검사가 되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 뒤에 만날 이유가 없었다. 언젠가 한 친구가 만났는데 술을 마시다가 학생들 욕을 하더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진동석과 깊은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때 그 친구는 당시 정부를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는 말을 했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 북한을 규탄하는 집회가 있었는데 진동석이 국민을 바보로 만들어서 정권만 유지하려고 한다고 말한 기억이 있었다. 신돌석씨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였고 그 기억이 계속 남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 말한 당사자는 잊어버렸을 것이다.

한 10명 정도 앉은 테이블에서 한 친구가 불쑥 진동석의 근황을 물었다.

“요즘은 어디에 계신가? 광주지검엔가 있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김광훈이라고 행정자치부인가 어딘가에 근무한다는 친구였다. 시작부터 비위가 상했다. ‘어디에 계신가’라니. 공무원 물을 먹으면 동창끼리도 말을 저렇게 하는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데 더 기분이 나쁘게 하는 것은 진동석의 대꾸였다.

“그걸 내가 임마 만날 때마다 말해야 하냐? 니들이 알아서 신문에서라도 봐야지.”

신돌석씨는 이 정도 되면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런 씨발놈 봤나? 야, 임마 니가 욘사마냐? 니 소식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오냐? 니 근황을 알아 두고 말하게. 웃기는 새끼네.”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말을 붙였던 김광훈이도 그렇고, 진동석이도 그랬다. 그리고 옆에 앉은 친구들도 그랬다. 듣기로는 그 중에는 진동석이한테 잘 보이려고 애쓰는 사업가들도 있다고 했다.

진동석이 일어섰다. 뭐라고 툴툴대는데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다른 자리로 가버렸다. 술좌석이 파하고 2차로 가고, 3차로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들렸다.

“신돌석이 대단하네. 진동석이도 신돌석이 말에는 찍소리 못하네. 고 새끼 고소하다.”

물론 반대 이야기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신돌석씨가 없는 데서 했겠지. 아무래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리가 시민들 위에 군림해도 유분수지. 친구들끼리도 그래야 하나? 이런 씁쓸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검사가 다 나쁜 기억으로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동창들 중에 또 한 사람 검사가 있는데 그날 동창회 자리에서 20여 년 만에 처음 봤다. 이름은 홍준석이었다. 홍준석과는 고등학교 때는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었다. 졸업한 첫해에 동창회가 열렸는데 그때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서로 아는 체를 했다. 물론 얼굴과 이름은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때 홍준석은 명문대 법대생이었고, 신돌석씨는 그냥 놀고 있는 처지였다. 동창들이 모여서 모교 운동장에서 축구나 한판 뛰고 술이나 마신다기에 그냥 나가 봤던 것이었다.

축구가 끝난 뒤에 1차를 학교 근처에서 하고, 좀 논다고 하던 김상원이라는 친구가 애들을 몰고 신촌엘 갔었다. 그때 애들이 ‘매미집’이라고 부르던 곳으로 갔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풍속인데 그때만 해도 대학가 근처에 한복을 입은 여자들이 술 따라 주는 방석집 또는 색싯집이라고 부르던 곳이 꽤 많았다. 그곳엘 한 열 명이 가게 되었는데, 홍준석과 신돌석씨가 모두 갔었다. 홍준석은 아마 처음 가보는 모양인데 술 취한 김에 얼떨결에 따라나선 것 같았다. 신돌석씨는 몇 번 친구들과 간 적이 있었다. 이날은 김상원이가 술을 산다기에 그냥 따라나선 것이었다.

거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런 집에 아가씨는 보통 세 명에서 다섯 명 정도였다. 그런데 간 사람이 열 명이었다. 하지만 이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애숭이들이고, 게다가 대부분 순진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한 녀석이 경험 좀 있다고 하면서 한 여자를 거칠게 다뤘다. 그러다가 싸움이 붙은 것이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밖에서 주인에게 왜 아가씨가 이렇게 적냐고 항의하던 김상원이, 안에서 싸우는 소리를 듣고는 주인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술병으로 술집 주인의 머리를 내리쳤다.

술집은 아수라장이 되고 경찰이 왔다. 대부분 술집을 빠져나와 도망을 쳤다. 신돌석씨도 도망을 친 뒤 멀찌감치서 보다가 김상원이 경찰에 끌려가는 것을 보고 할 수 없이 따라갔다. 그때나 그 뒤나 신돌석씨는 그럴 때 모른 척 도망가는 것은 남자로서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의리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약지 못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러겠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결과는 항상 그렇게 되었다.

   
▲ [삽화 - 김윤기]

경찰에 잡혀 간 사람은 김상원을 합해서 모두 다섯 명이었다. 절반이 잡혀 온 셈이었다. 사실 싸움은 김상원과 술집 주인 둘이서 한 것이므로 나머지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술집 주인이 열 명이 모두 술병을 들고 쳤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었다. 보아하니 대학생들인 것 같고 해서 돈 좀 뜯어내려는 수작 같았다. 경찰들도 그들의 주장이 억지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김상원만 진술서를 쓰고 나머지는 한 자리에 죽 앉혀 놓고 형사가 일장 훈계를 하였다. 그러면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뭐하고 있냐고 물었다. 세 사람이 이른바 명문대학생이었고, 세상에서 말하는 성적순에 따라 A, B, C 식으로 앉아 있었다. 그 다음이 신돌석씨였다. 말할 차례가 되자 신돌석씨는 난감해졌다. 그냥 놀고 있다고 말하기는 정말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다고 대학생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더 못 할 짓이었다. 그때 홍준석이 재빨리 말했다. 자기와 같은 대학에 다닌다고. 그렇게 되면 신돌석씨는 거짓말은 하지 않은 셈이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창피하면서도 홍준석이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기분이 흐뭇해지기도 하였다.

술집 주인은 한 사람당 10만원씩 100만원을 요구한 모양이었다. 결국 50만원으로 합의를 보았다고 하는데, 김상원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야 낼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신돌석씨 역시 그 시절에 단돈 몇 만 원이라도 낼 형편이 안 되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홍준석이 김상원을 찾아가 10만 원을 줬다고 한다. 도의적 책임이 있다고. 듣기로는 홍준석네 아버지가 고물상을 하고 있었는데 대단히 어려운 형편이었다고 한다. 그것 역시 홍준석을 오래 오래 좋게 기억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동창회 하는 날에 20여 년 만에 만난 홍준석은 신수가 훤해 보였다. 명함을 내미는데 어디 지청의 부장검사가 되어 있었다. 신돌석씨는 이 친구는 검사물이 먹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런 짧은 만남에서 그런 것을 확인할 길은 없었고, 다만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홍준석이 어린 날에 보여준 인품으로 보건대 크게 변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하였다.

신돌석씨는 이런 경험들 때문에 검사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요즘 사법 농단 사태를 보면 판사도 도낀 개낀 이었다. 검사가 원래 사람 잡아넣고 좀 더 많은 형량 주는 게 일이니 그렇다 쳐도, 판사는 안 그런 척하면서 그러니 어찌 보면 더 못된 인간들이었다. 물론 판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번 사법 농단을 보면 구조적으로 나쁜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법부였다.

그 중에서도 징용 끌려간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기는커녕 5년씩이나 재판을 하지 않고 묵혀 두어서 소송 제기자 네 분 중 세 분이 돌아가시게 만들다니 이놈들은 최소한의 인간애나 민족감정도 없는 놈들 아닌가? 그러면서도 재판에 개입하고, 바른말 하는 판사들 사찰을 하는 인간들이 이 나라 사법부의 핵심을 쥐고 있었다니 정말 통탄할 일이었다.

이런 생각 끝에 얼마 전까지 대법원 행정처 앞에서 노숙 농성을 하던 콜트 악기 지부장이 떠올랐다. 아직도 그가 노숙하던 천막이 그대로 거기 놓여 있다. 콜트 악기에서는 기타를 만들었는데, 사장이란 자가 폐업을 하였다. 위장 폐업을 철회하라는 소송을 제기하자 법원 판결이 가관이었다. ‘앞으로 올지 모를 경영상 어려움’ 때문에 폐업이나 정리 해고가 정당하다는 것이었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나? 지금 흑자라도 앞으로 올지 모를 경영상 어려움 때문이란다. 그러면 폐업이나 해고를 무제한으로 허용하는 것 아닌가? 노동자들이야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판결이었다. 지부장은 너무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가 있다. 금속노조에서 이런저런 회의 같은 데서 본 적이 있는데, 그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판사라는 인간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큰 줄기는 역시 김동학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시간이 흘러갔고, 소주병이 하나 둘 늘어났다. 신돌석씨는 김동학의 2심이 궁금했다. 그 뒤에 풀려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검사의 의도는 실패한 것일까?

“동학이 그놈도 독종은 독종이야. 자빠졌다가 일어나면서 그랬다는 거야. 내가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감호까지 13년 징역 살고 나와서 당신을 죽이러 찾아가는 거다 라구. 살 떨리는 말이지.”

박길우가 뭔가 시원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계장이란 작자가 이 자식이 어디서 공갈이야 하면서 더 때리려구 하는데 검사가 말렸다지. 아마 검사도 그 말에는 좀 겁이 났을 거야. 크크크.”

유태형도 마치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검사가 겁먹고 있는 것이 눈앞에 보이는 듯 박길우의 말을 이어 받았다.

“그리고는 어떻게 됐어요? 동학이형이 감호를 살진 않았잖아요.”

신돌석씨가 궁금증을 끝내 견디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그게 참 묘하더라. 변호사라는 게 죄 없다고 변호해주는 것만 하는 게 아니더구만. 말하자면 협상도 하는 거야. 그때 동학이 사건 변호사는 인권 변호사라고 하는데도 그런 일도 하더구만. 검사와 변호사가 그런 타협을 봤대. 감호는 떼고 뭐 죄명을 바꾼다지. 폭력행위 어쩌구 저쩌구 특별법이란 거였는데, 그걸 형법에 있는 단순 폭력으로 바꾼다는 거야. 그렇게 하면 판사가 징역 10월쯤 때리고 그러면 2심 끝날 때까지 거의 다 살아서 나가게 되는 거지. 기가 막힌 타협이더구만.”

신돌석씨 생각에도 참으로 묘한 결과인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동학이 이놈이 싫다는 거야. 자기는 죄가 없으니까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겠다는 거지. 그걸 달래느라고 변호사가 매일 만나고 동학이 엄마도 가고 마누라도 가고 친구들도 가고. 결국 동학이가 임신한 마누라 생각해서 그러겠다고 했지. 그때 동학이 마누라, 엄마하고 나하고 같이 면회를 했는데, 보안과장실에서 특별면회를 시켜주더구만. 검사가 아마 그러라고 한 모양이라. 동학이 그놈 그러겠다고 하더니 통곡을 하더라구. 세상에 이런 좆 겉은 경우가 있냐고. 원통해서 어떻게 사냐구.”

말을 마치면서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는 박길우의 이마에 맺힌 주름살이 왠지 더 깊어진 듯하다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그래도 세상이 많이 달라졌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이제는 그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당하지는 않지.”

유태형이 어두운 분위기를 바꿔 보겠다는 듯 한마디 했다.

“요즘 사법 농단이니 재판거래니 하잖아. 그거 양승태가 처음 아니야. 동학이 건도 재판 거래 아니야? 그걸 항상 당하고 살아왔던 게 서민들이지.”

박길우가 제법 그럴듯한 결론을 내렸다. 신돌석씨 생각에도 사법 농단이 지금 이야기되는 것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집회에서 본 것처럼 민초들이 직접 재판을 하지는 않아도 그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확실히 들었다.

“글쎄. 바뀌기는 바뀌었지만 진짜 바뀐 걸까 의심이 들 때가 많아.”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조인권이 한마디 했다. 그는 박길우나 유태형보다는 두 살 아래이지만 어렸을 때는 서로 친구처럼 지내던 사이였다. 신돌석씨보다는 위였지만 신돌석씨 역시 그를 형으로 여긴 적은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상하 구분이란 게 그렇게 대충 두세 살 터울로 왔다 갔다 했는데 지금 애들은 한 살 차이도 심하게 따지는 것 같았다.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보수적이 된다고나 할까? 조인권은 중학교 때쯤 이사를 갔는데 대학까지 나오고 대기업에 취직했다가 몇 년 전에 정리 해고되고 나서 뭔가 해보려고 하지만 잘 안 되어서 거의 실업자와 다름없는 상태로 있다고 들었다. 물론 신돌석씨와는 거의 왕래가 없었고, 박길우를 통해서 소식을 들은 정도였다.

   
▲ [삽화 - 김윤기]

“삼성 바이오닉스 분식 회계 한 거 봐라. 천문학적 숫자야. 그런데 아무런 징벌도 없잖아. 주식거래 정지시키는 듯하다가 금세 풀어주고. 이재용은 집유로 나오더니 인도까지 가고 평양도 가고 누가 봐도 이제 처벌은 없는 거라. 없는 놈들한테 요만큼 자유가 생겼다면, 있는 놈들은 무진장 자유가 주어진 그런 세상이 된 것 같아. 재벌들의 경우 불법 저지른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도 정부가 꼼짝을 못하잖아.”

조인권이 좀 흥분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하여튼 문재인이 하는 짓이 그렇지. 그 주위 놈들도 그렇고. 원래 배고픈 놈이 권력 잡으면 더 설치는 법이라니까.”

역시 듣고만 있던 강필성이가 끼어들었다. 강필성이는 박길우, 유태형보다 한 살 아래였는데 조인권과 마찬가지로 서로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그는 어린 시절 살던 동네 근처에 여전히 살면서 재개발된 아파트 단지에서 생맥주집을 하고 있었다.

신돌석씨는 이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진짜 민주화가 되기는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과는 달리 요즈음은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시사 문제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다. 그들에게 사실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함부로 아는 체하다가는 당하는 수도 많았다. 물론 가짜뉴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엄청난 정보의 홍수에 사람들이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방향이 문제였다. 영 이상한 방향으로 그런 사실들이 써먹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야, 그게 왜 문재인 탓이냐? 썩어빠진 구세력들이 문제지.”

조인권이 얼마간 흥분한 어조로 반박했다.

“그럼 언제까지 구 정권 탓만 할래.”

강필성도 지지 않고 맞섰다.

이들의 말싸움을 보면서 신돌석씨는 세월이 흘러도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에 박정희와 김대중이 대선에서 맞붙었을 때 동네는 둘로 갈라졌다. 박정희를 지지하는 세력은 주로 경상도 출신이거나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이었다. 신돌석씨는 아버지가 경상도 출신이고 어머니가 월남한 사람이었으므로 박정희 지지 쪽이었다. 반면에 김대중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전라도 출신들이 많았다. 희한한 것은 조금 배웠다는 사람들은 김대중 지지가 많았고, 찢어지게 못 살면서도 박정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신돌석씨 동네는 피난민들이 많아서 그런지 못사는 동네인데도 김대중 지지보다 박정희 지지가 많았다. 물론 그때는 이쪽저쪽도 아니거나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 하는 사람도 많았고, 또 양쪽이 그렇게 심각하게 감정적으로 붙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때 조인권과 강필성이 말싸움을 했던 것을 보았던 기억이 났다. 아주 희미한 기억이지만 둘이 아주 심하게 다투었기 때문에 기억이 났다. 조인권은 그 동네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나중에 대학에 간 사람인데 그때도 동네 애들 중에서는 가장 공부를 잘하는 애로 통하였다. 그런 그가 말하면 대체로 다른 애들은 그냥 들어 주었다. 한데 강필성이 악을 쓰면서 반박을 했던 것이다. 강필성이 뭘 알아서 그랬을 리는 없고 아마 부모들 영향을 받아서 그랬을 것 같다.

“야야 시끄럽다. 또 정치 얘기냐. 그놈이 그놈인데 뭘 떠들어.”

박길우가 좌장답게 말싸움이 번져 나가는 것을 말렸다.

그놈이 그놈이라. 요즘에는 사사건건 양쪽으로 갈려서 논란을 벌이게 되고, 그러다가 대다수 사람들은 그놈이 그놈이라는 것으로 마무리를 한다. 신돌석씨는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정치허무주의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 와중에서도 수구세력은 악착같이 구토를 회복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는 것이다. 대중들이 정치에 허무를 느낄수록 아마 그 가능성이 커질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그건 그렇고 그 검사놈 그 뒤 어떻게 됐나? 혹시 본 적 있어?”

신돌석씨는 이야기의 줄기를 다시 잡아 보려는 생각도 있지만 진짜 궁금하기도 하여서 박길우에게 물었다.

“글쎄 모르지. 어디 가서 잘 살고 있겠지. 검사 출신인데 변호사 했을 테고 잘 먹고 잘 살지 않을 턱이 없잖아.”

박길우가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변호사들 잘 사는 거야 관습헌법에 보장된 거야. 전관예우라나 그것도 그렇고. 그 자식들은 뇌물도 먹고 횡령도 하는데 지들끼리 감싸주는 데 뭐가 문제겠어.”

조인권이 뼈 있는 말을 했다. 관습헌법은 수도 이전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헌법재판소에서 할 때 판결의 근거가 되어서 유행했던 말이다. 조인권의 말을 듣고 강필성이 뭔가 한마디 하려고 하다가 참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 [삽화 - 김윤기]

“근데 내가 그 인간 한 번 본 적이 있어. 직접 본 것은 아니고, 텔레비전에서 말야. 시청 앞에서 뭔 집회인지 하는데 인터뷰를 한다구 하더라구. 북한 인권 어쩌구 하는 것 있잖아.”

유태형이 어눌한 말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다들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그 인간이 틀림없어. 그 눈매하고 내가 잊을 수가 없거든. 사실 그때 나도 한 번 불려 갔잖아. 싸운 게 맞냐구 하면서. 나는 보지 못했다고 해서 어영부영 넘어가기는 했었는데…”

유태형이 불려갔다는 이야기는 신돌석씨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박길우는 이미 아는 이야기 같았고, 나머지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듣기만 했다.

“개 꼬리 삼 년 묵혀도 황모 못 된다더니. 그 자식 그런 데나 쫓아다니는구만. 태극기에 성조기까지 같이 흔들고 이스라엘 국기까지 흔드는 놈들 집회 말야. 지가 양심이 있으면 어떻게 인권 운운하나.”

조인권이 강필성이한테 거 보라는 듯이 큰소리로 말했다. 박길우도 유태형도 그냥 심각한 표정만 짓고 있었고, 강필성은 상황이 불리하다고 느꼈는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신돌석씨는 조인권의 말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개 꼬리 삼 년 묵혀도 황모 못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그놈의 개꼬리들이 여전히 설치는데. 하지만 신돌석씨는 이제 그것이 개 꼬리라는 것을 사람들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희망은 있다고 생각했다. 이만해서 분위기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아까 못 부른 노래나 부르러 갑시다. 오랜만에 길우형 ‘쨍하고 해뜰날’도 한번 들어보지.”

그럴까 하면서 박길우가 호탕한 웃음을 웃었다. 유태형도 따라 웃었고, 조인권도 강필성도 따라 웃었다. 오늘은 정말 좋은 소득이 있는 날이었다. 개 꼬리 삼 년 묵혀도 황모 못 된다는 진리를 들었으니.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김윤기(金允起)

<전시> 1993 개인전(그림마당 민) 외 단체전 다수
         2013 ‘내 앞에 서다’전(세종문화회관)
< 기획> 2006 조국의 산하전 ‘평택-평화의 씨를 뿌리고’(대추리)
        2009 평화미술제 ‘대지의 꽃을 바다가’(제주현대미술관)
        2012 통일미술전 ‘하나는 다른 많은 것을 이룬다’(국회의원회관)

 

 

글 정해랑/삽화 김윤기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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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19-01-06 13:58:38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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