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빛이 능히 천년의 어둠을 거두듯 하나의 지혜는 능히 만년의 어리석음을 멸한다 (혜능)


 내 육체의 피뢰침이 운다 
 - 유하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진짜가 찾아옵니다. 그때, 아주 잠깐, 다른 세상, 다른 나를 보는 겁니다. 나는 내 몸과 대기와 대지의 주인이 됩니다. 아주 잠깐.- 김영하의 ‘피뢰침’ 중에서  

 비바람 몰아치고
 들판의 느티나무 뇌우 속에서
 낮은 소리로 혼자 울고 있다
 그 느티나무 아래 서 있는 나
 비를 긋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지금 벼락을 맞고 싶은 것이다
 온 머리채를 흔들며
 낙뢰를 부르는 느티나무
 수십만 볼트의 전류가 언제
 내 몸을 뚫고 갔는지 나는 모른다
 시의 유배지여, 기억하는가
 난 벼락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찰나의 낙뢰 속에서
 내 몸과 대기와 대지의 주인이 되는
 나여, 그 섬광의 희열 밖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비바람 불고, 느티나무 아래
 내 육체의 피뢰침이 운다
 내 전 생애가 운다, 벼락이여 오라
 한 순간 그대가 보여주는 섬광의 길을 따라
 나 또 한 번, 내 몸과 대기와 대지의 주인이 되련다 


 올해 대학 입시에서 아이가 지방대에 들어갔다며 한탄하는 어머니. ‘조금 더 공부를 열심히 시켜서 좀 더 좋은 대학에 보냈으면 하는 아쉬움이 커요.’

 대한민국에서 대학은 ‘신분’이다. 한평생 출신 대학이 따라다닌다. 그러니 어느 부모가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며칠 전 가출한 한 고등학생을 만나 오랫동안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의 부모님은 강남에서 잘나간다는 강사들을 집으로 초빙하여 그에게 고액 과외를 받게 했다고 한다. 점수가 오르지 않을 때는 체벌을 당했다고 한다. 그대로 있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아 가출을 했다고 한다. 그의 형은 고액과외를 받고 명문대를 나와 현재 모 대기업에 다닌다고 한다. 그들의 부모님에게 그의 형은 ‘성공 케이스’일 것이다.  

 그 아이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마음이 아팠다. 명문대를 나와 사회운동을 하시는 그 아이의 부모님은 왜 아들들을 그렇게 해서라도 명문대에 보내고 싶어 했을까?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분들 중에 자녀를 특목고에 보내고 명문대에 보내는 분들이 꽤 많은 것 같다. 그 분들은 진보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말로는 공교육이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왜 자신들의 자녀는 특별하게 키우고 싶어 할까? 특별하게 살게 하고 싶어 하는 걸까?

 나는 진정한 진보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그 자체로 존귀하다는 믿음. 보수는 ‘세속적 가치’를 인간보다 우위에 두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세속적 가치는 돈, 권력, 명예일 것이다. 이 셋 중 하나만 가져도 세상 살아가기에 얼마나 좋은가?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대접해준다.

 하지만 그것들을 갖고 정말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나는 오래 전에 인간은 세속적 가치, 그 이상을 가져야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 적이 있다. 

 그런 세속적 삶, 이외의 삶을 상상하지도 못하던 30대 중반, 나는 교육 운동(전교조)과 만나며 어떤 경이로운 삶을 예감했다. 

 교직을 그만둔 후 문학을 공부하던 어느 날 깊은 밤, 나는 ‘내 육체의 피뢰침이 우는’ 경험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진짜가 찾아옵니다. 그때, 아주 잠깐, 다른 세상, 다른 나를 보는 겁니다. 나는 내 몸과 대기와 대지의 주인이 됩니다. 아주 잠깐.- 김영하의 ‘피뢰침’ 중에서’ 

 이 때 내가 본 세상은 프랑스 철학자 라캉 식으로 말하면 ‘실재계(實在界)’였을 것이다. 라캉은 진짜 세계, 실재계는 언어의 안개에 가려져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언어가 구성한 가짜 세계일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진짜 세계를 보려면 언어가 끊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불교의 선사(禪師)들과 같다.  

 진짜를 본 사람이 환영(幻影)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한바탕 꿈’을 한평생 꾸며 살아갈 수 있을까? 돈, 권력, 명예가 아무리 좋아도 ‘내 몸과 대기와 대지의 주인인 진짜 세계’에는 견줄 수 없다. 그 뒤 내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난 벼락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찰나의 낙뢰 속에서/내 몸과 대기와 대지의 주인이 되는/나여, 그 섬광의 희열 밖에서/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비바람 불고, 느티나무 아래/내 육체의 피뢰침이 운다/내 전 생애가 운다, 벼락이여 오라/한 순간 그대가 보여주는 섬광의 길을 따라/나 또 한 번, 내 몸과 대기와 대지의 주인이 되련다’

 진짜 세계가 주는 강렬한 황홀을 체험한 사람은 자녀를 강제로 고액과외를 시키지 않을 것이다. 좀 더 좋은 대학에 보낼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의 깊은 마음속에는 진짜 세계를 보는 큰 힘이 있음을 알기에. 아이에게 한평생 속물적 가치를 추구하며 좀비처럼 살아가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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