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뒤, 돈도 없고 학벌도 안 되고 빽도 없어서 서울 근교 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에 취직했던 신돌석씨. 가진 거라곤 의리 있게 산다는 생활 신조 하나였던 그가, 27세 되던 1985년 전국의 공단지역을 휩쓸었던 노동운동의 폭풍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인생의 변화를 겪고, 의리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어느덧 이순의 나이가 되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러나 있을 수 있었던,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이야기는 과거만을 다루는 후일담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인지를,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정해랑

 

▲ [삽화 - 김윤기]

뷔페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제법 어두워진 뒤였다. 4층 건물 옆쪽으로 입구가 있는 주차장에는 만원이라고 쓰인 팻말이 가로막고 있었다. 뷔페가 들어 있는 건물의 경비원인 듯한 자가 뒤로 돌아 골목에다 차를 대라고 하였다. 차 주인이면서 운전을 하는 박길우가 자기가 주차를 하고 갈 테니 먼저들 내려서 들어가라고 하였다. 차에 탄 사람들이 모두 내렸다. 신돌석씨와는 모두 어렸을 때 한 동네에서 살던 사람들이었다.

신돌석씨는 이들과 자주 만나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 중 유태형 같은 경우는 거의 이십 년 만에 만나는 셈이었다. 그나마 자주 보는 것이 박길우였는데, 그도 1년에 한 번 보기가 어려웠다. 어떤 때는 3-4년 동안 못 본 적도 있었다. 박길우는 신돌석씨보다 세 살 위의 선배였다. 어려서부터 공장에서 금속 일을 하더니 지금은 영등포 어딘가에서 자그마한 철공소를 하고 있다. 박길우의 동생인 박찬우가 신돌석씨와 초등학교 동기였다. 그래서 그런대로 가끔 연락을 하고 지냈는데, 어쩌다 보니 박찬우와는 못 만나게 되고 오히려 박길우와는 연락을 하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오늘 여기 오게 된 것도 박길우의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박길우와 동갑인 동네 선배로 김동학이란 사람이 있었다. 신돌석씨와는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멀지도 않은 사이였다. 하지만 박길우와는 달리 20년 넘게 보지 못했다. 며칠 전에 박길우가 전화를 걸어서 김동학의 어머니가 팔순이라고 하였다. 어렸을 때는 주로 조부모님 환갑 잔치들을 했었다. 그러다가 성인이 되니 부모님 칠순 잔치들을 했다. 요즘은 팔순 잔치도 잘 하지 않는다. 그런데 팔순 잔치를 한다고 부른 것이었다.

이런 기회에 어린 시절 한동네 살았으면서 아직 연락이 닿는 사람끼리 한번 보는 게 좋지 않냐는 것이 박길우가 한 말이었다. 그 말이 틀린 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 점 때문이라면 굳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 시절 한 동네 살았다는 것을 인연으로 삼기에는 그때 기억이 신돌석씨에게는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김동학은 이미 환갑을 넘긴 사람이다. 어머니가 지금 팔순이라니 의아한 것이다. 그래서 연락을 한 박길우에게 물으니 김동학의 어머니는 계모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났다. 그런데도 김동학은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고 팔순 잔치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김동학이 효자이고, 인간성 하나는 정말 훌륭하다는 것이 박길우의 말이었다. 그를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그의 이력만 보면 인간성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신돌석씨는 물론 그가 인간성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왜 그는 그렇게 보이게 되었을까?

신돌석씨가 김동학의 모친 팔순 잔치에 오게 된 것은 아마도 그와 함께 겪었던 독특한 인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있다면 김동학의 모친에 대한 특별한 기억도 함께 작용하였을지도 모른다. 김동학과 겪었던 독특한 인연은 80년 여름에 있었다. 신돌석씨는 그와 술을 마시다 얼떨결에 함께 경찰에 연행된 적이 있었다. 이유는 오로지 김동학 때문이었다. 김동학은 그때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다가 잠시 쉬고 있는 상태였는데, 이전에 있었던 전과를 빌미로 삼청교육대 강제 입소 대상으로 되어 연행되었던 것이다.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신돌석씨는 그의 연행에 항의하며 덤비다 괜히 얻어맞고 함께 경찰서로 끌려갔었다. 물론 신돌석씨는 끌려갈 아무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심사를 받고 곧 풀려날 수가 있었다.

김동학은 그때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다가 그만둔 상태였는데 밀린 임금을 받으러 갔다가 형사들에게 연행되었던 것이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나이트클럽 측에서 귀찮으니까 경찰에 찔렀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가능성이 높은 것이 아니라 김동학은 아주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김동학은 경찰서에 와서도 풀려나기만 하면 나이트클럽의 지배인을 그냥 두지 않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김동학이 그 뒤 나이트클럽 지배인을 어떻게 했는지 신돌석씨는 알지 못한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므로 아마 김동학이 그냥 넘어갔으리라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사실 김동학처럼 사는 사람이 말대로 실행했으면 살인을 해도 몇 번을 했을 것이었다.

▲ [삽화 - 김윤기]

신돌석씨는 그 후로는 삼청교육대를 잊어버리고 살았다. 가끔 삼청교육대가 언론에 보도될 때면 김동학 생각이 났고, 경찰서 형사계 사무실부터 보호실, 유치장까지 길게 쇠줄로 이어져서 끌려갈 시간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그리고 걸핏하면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맞아서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던 사람들. 그들을 누가 깡패라고 불렀던가? 그러던 중 얼마 전 방영된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본 삼청교육대는 정말 끔찍한 것이었다. 김동학도 그런 곳에서 그렇게 당하면서 보냈으리라는 생각을 하자 새삼 그에 대한 연민의 정이 솟구쳤다.

3층에 있는 뷔페로 오르는 엘리베이터는 매우 비좁았다. 그래서 뷔페도 작지 않나 생각했는데 막상 3층에 도착하고 문을 열고 들어서니 꽤 넓은 곳이었다. 어떤 개그맨이 운영한다고 했는데 이 부근에서는 잔치를 하는 뷔페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신돌석씨는 이곳에 처음 와 보지만 말은 많이 들었던 곳이었다. 언젠가는 라디오에서 광고하는 것도 들은 적이 있었다. 3층은 하나의 홀로 되어 있었다. 그 홀을 다 채우려면 상당히 많은 손님이 와야 할 것 같은데, 신돌석씨 일행이 들어섰을 때 자리가 거의 차 있는 것 같았다.

입구에서 옷에 자그마한 딱지를 붙이고 들어서자 시끄러운 음악이 홀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떤 여자가 마이크를 잡고 ‘어머나’를 부르고 있었고, 그 주위에서 여러 남녀들이 어우러져 춤을 추고 있었다. 갑자기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서 그런지 빈 자리가 어딘지도 쉽게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잠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김동학이 신돌석씨 일행을 먼저 발견하고 다가왔다.

“야, 오래간만들이네.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나이 들어서 만나면 사람들은 으레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게 말해야 예의라고 생각하는지 아무튼 그런 대화가 거의 공식처럼 굳어 있었다. 김동학이 먼저 발견한 사람은 유태형이었는데, 아마 그들은 가끔이라도 보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김동학은 신돌석씨를 발견하고는 손을 잡고 힘껏 악수를 하다가 그것으로는 부족한지 와락 끌어안았다. 아마 김동학도 신돌석씨가 느끼는 감정만큼이나 옛 기억들이 되살아나는 모양이었다. 나머지 사람들과도 하나 둘씩 인사들을 했는데, 김동학은 그들과 그다지 오랜만에 만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대했다.

김동학이 안내하는 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대가 정면으로 보이는, 문 가까운 곳에 있는 자리였다. 무대 앞으로 빙 둘러서 탁자들이 옆으로 놓여 있었는데, 그 뒤로 다시 문 부근에 열 명 정도씩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세 군데가 있었다. 그 중 가운데에 신돌석씨 일행이 자리를 잡고 앉은 것이었다. 자리를 잡고 조금 있는데 박길우가 들어왔다. 탁자에 놓여 있는 소주와 맥주를 따르면서 한편으로는 음식들을 가지러 일어나기 시작했다. 워낙 노래 소리와 반주 소리가 커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쉽지 않은 분위기였다. 김동학은 자리를 안내하고 조금 있다가 일어나서 무대로 나아갔다. 그때 어떤 젊은 여자가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을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 색깔이 조금 달라지면서 분위기가 좀 색다르게 느껴졌지만 밴드를 연주하는 사람은 그런 노래도 팔순 잔치 분위기에 묘하게 갖다 맞추었다.

“동학이 딸내미야.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다니다 조그만 식당을 내었다지 아마…”

그 나이쯤 됐을 것 같다. 그해 봄에 저 애가 엄마 뱃속에 있었으니까. 그해 봄은 1982년 봄이었다. 그때 신돌석씨는 군대에 갔다가 휴가를 나왔을 때였다. 동네 사람들이 김동학이 구속되었다고 하였다. 죄명은 폭력인데 동네 사람들 말로는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김동학은 한 대도 때리지 않고 말리기만 했는데 단지 전과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세상이 아무리 엉터리라고 해도 그럴 리가 있냐고 했지만 동네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말했다.

동네 사람들의 말이 맞기 때문인지 처음에 김동학은 경찰에서 불구속으로 조사받았다. 그러다가 사건이 검찰에 송치되면서 갑자기 구속되어 버렸다. 검사가 김동학의 전과를 보고 구속시켜 버렸다는 것이었다. 김동학은 그때 실형 전과만 세 개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 싸움을 하다가 상대가 잘못 맞아서 숨을 거두는 바람에 폭행치사죄로 3년을 살았었다. 그때도 일찍 손을 썼으면 초범이고 학생이니까 집행유예가 될 수도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법 절차에 무지한 김동학의 부모들은 그냥 발만 동동 구르다가 자식을 실형을 살게 만들어 버렸다. 그 뒤 두 번 더 징역을 살아서 실형의 합계가 6년이 된 상태였다. 게다가 삼청교육대까지 갔다 온 상태였다.

그런데 문제는 구속되었다는 사실에 있지 않았다. 김동학으로서는 처음 구속되는 것도 아니라 그까짓 징역쯤 잠시 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기가 누구를 다치게 하지도 않은 바에야 잘해야 1년이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김동학의 가슴에 퍼런 딱지가 붙었다.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뒤 만든 법으로 사회보호법이란 게 있었다. 상습 전과자를 사회로부터 격리하겠다고 만든 법이었다. 징역을 다 살고도 7년 혹은 10년을 감호 처분하도록 하였다. 김동학은 실형 합계가 5년 이상이었으므로 10년짜리 감호 딱지가 붙었다. 잠시 쉰다고 생각했던 것이 10년 이상을 살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누구라도 열불이 안 날 수 없는 일이었다. 김동학은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것을 부인하였다. 정확한 상황은 이렇게 된 모양이었다. 동네 가게 앞에서 술을 마시다 싸움이 벌어졌다. 그때 마침 김동학이 함께 있었다. 김동학보다 나이 어린 젊은 애들이었다. 김동학이 말리다가 끝까지 싸우겠다고 씩씩대는 한 친구의 뺨을 세 차례 때렸다. 그게 전부였다. 김동학은 처음에 그것은 시인했다. 그러면 잘해야 벌금이겠거니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리자 재판정에서는 그것마저 부인했다. 그리고 맞은 사람과, 그 사람과 싸웠던 사람 역시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해 주었다.

신돌석씨가 휴가 나왔을 때는 김동학의 1심 선고 공판이 열리기 며칠 전이었다. 그 전 공판에서 김동학은 징역 3년에 보호감호 10년을 구형받은 상태였다. 선고 공판이 열리던 날 신돌석씨는 동네 사람들과 함께 공판을 보러 갔었다. 그때 배가 부른 상태였던 김동학의 처도 보았고, 재판정에서 씩씩거리면서 소리를 쳐대던 김동학의 어머니도 보았다. 김동학의 처는 그때 처음 보았지만, 어머니는 물론 그 이전부터 알고는 있는 사이였다.

김동학의 어머니는 동네에서 왈짜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자기 자식들에 대해 누가 손찌검이라도 하는 날이면 부지깽이라도 들고 뛰어나오는 성격이었다. 전처 소생인 김동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동학의 어머니는 친자식 의붓자식 가리지 않고 마구 패고 욕을 했지만, 남이 자기 자식들을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았다. 그런 성격 때문에 김동학의 어머니는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였었다.

동네 사람들은 어머니의 그런 성격 때문에 김동학이 그렇게 되었다고들 하였다. 고등학교 때 폭행치사로 들어갈 때도 피해자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큰소리만 쳐대는 바람에 합의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 어머니의 평소 행동으로 보면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역시 이런 문제에는 의리가 있었다. 똑같이 없는 자의 설움을 겪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공판마다 함께 몰려다니면서 위로를 해주곤 하였다.

“김동학 무죄.”

판사의 선고가 있자 방청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탄성을 지르며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법정을 관리하는 사람이 당황하면서 손을 내저어 조용히 하라고 소리쳤고, 법정에 나와 있던 검사가 똥 씹은 듯한 표정을 짓다가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 판사 역시 서둘러서 법정을 빠져나갔다. 김동학은 방청석을 돌아다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김동학의 어머니는 김동학을 향해 달려 나갔으나 교도관들의 제지를 받아서 중간에서 멈추어야만 했다. 김동학에게 무죄를 선고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다른 피고인들은 이미 선고를 하고 법정 밖으로 내보냈었다. 김동학이 교도관들에게 이끌려 수갑이 채워진 채 법정 밖으로 나갔다.

모두 법정 밖으로 나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했다. 지난번 공판에서 증인까지 검사의 추궁을 부인하자 어느 정도 기대는 했지만 그래도 무죄가 나오리라는 생각은 못 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김동학의 어머니는 애당초 구속이 말도 안 된다면서 숨이 가쁜지 가슴을 쓸어내리곤 하였다. 오늘 밤에는 동학이와 함께 잔치나 벌여야겠다고 이야기들을 하면서 호송차 앞으로 몰려갔다. 호송차 앞에서 한참을 기다리자 김동학이 나왔다. 그런데 김동학의 표정이 아까 선고를 들었을 때와는 달리 그리 밝지는 않았다. 왜 그러냐고 그의 아내가 소리쳐 묻자 김동학이 ‘못 나가, 오늘 못 나가’라고 소리치다가 교도관한테 끌려서 차에 올랐다.

김동학이 무죄를 선고받고도 나오지 못한 것은 감호 10년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날 오후 구치소로 면회를 가서 김동학의 어머니와 아내가 그에게 듣고 온 바에 따르면 그랬다.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아마 10년 이상의 구형을 받은 사람은 무죄가 되어도 2심을 받기 전에는 출소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영문도 모른 채 그냥 못 나온다는 소리만 들어야 했다. 김동학의 어머니와 아내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김동학의 어머니는 대놓고 법원에서 큰소리를 치며 이놈 저놈 닥치는 대로 잡아먹을 듯이 대들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더욱 딱한 것은 그의 아내였다. 시어머니를 말리면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이따금씩 눈물만 자아내는 모습에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찼다.

▲ [삽화 - 김윤기]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다음날 일찍 면회를 하러 갔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김동학이 검찰청으로 취조 받으러 갔다는 것이었다. 신돌석씨 동네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교도소 밥 좀 먹은 사람들이 적잖게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김동학 같은 단순 폭력범을 1심까지 마쳤는데 검사가 다시 불러 취조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인가? 무죄 선고를 2심에서 뒤집으려고 하는 검사의 대응이라는 것이었다. 무죄 선고는 검사가 앞으로 승진하는 데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무죄를 뒤집으려고 면회까지 하지 못하게 계속 검찰청으로 불러낸다는 것은 순진한 서민들로서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김동학의 가족과 동네 사람들이 가졌던 기쁨과 흥분의 순간은 순식간에 분노와 불안의 분위기로 돌변해 버렸다. 그리고 며칠 뒤 불구속으로 재판을 받았던 피해자가 검찰청에 불려갔다. 그는 피해자이지만 또 동시에 다른 싸움의 가해자였기 때문에 사실은 이 사건에서는 김동학보다 더 무거운 형량을 선고받아야 할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과가 없기 때문인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그런데 검찰청에 불려가더니 그 자리에서 구속되어 버렸다. 그가 왜 갑자기 구속되었는지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동네 전체가 뒤숭숭해지더니 누군가가 김동학이 변호사를 사야 한다고 제안을 했다. 동네에서 모금이 시작됐다. 누군가 이전에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인권 변호사가 있다고 하여서 그의 도움을 받자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군인이었으므로 돈을 낼 처지가 못 되었다. 당시에 돈을 벌고 있던 형에게 돈 좀 낼 것을 당부하였다. 형은 금형 기술자로 공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김동학과 비슷한 나이였지만 김동학이 껄렁껄렁하게 사는 것을 싫어하여 가까이 지내지 않는 편이었다. 형이 돈을 냈는지 안 냈는지를 확인하지 못한 채 신돌석씨는 휴가를 마치고 귀대하였다. 그 뒤에 전개된 일에 대해서는 아주 개략적인 것 말고는 들은 바가 없었다.

김동학이 어머니를 모시고 신돌석씨 일행이 앉은 자리로 왔다. 많이 늙었지만 옛날의 모습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훨씬 얼굴이 좋아 보였다. 고생으로 찌들었던 때와는 달리 기름기가 좀 돈다고 할까? 김동학의 어머니가 신돌석씨 일행에게 나가서 노래 한 곡 하라고 권했다. 모두들 손을 저었지만 하도 강권하는 바람에 박길우가 나가서 노래를 불렀다. 몇 명이 나가서 함께 춤을 추었다. 신돌석씨도 원래 노래를 부르고 놀기를 좋아하였지만 왠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았다. 팔순 잔치에만 오면 그랬다. 팔순 잔치가 아니라 칠순이나 환갑 잔치 아니 생일상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이승을 떠난 아버지, 어머니 생각이 나서 그랬는지 아무튼 신돌석씨는 이런 데만 오면 원래 기질이 발휘되지를 않았다.

박길우가 노래를 마치고 돌아온 뒤 몇 사람이 더 노래를 부른 뒤에 디스코 메들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무대에는 김동학의 가족처럼 보이는 사람들만 있는 것 같았다. 가족이 아니라 친구나 친지들로 보이는 사람들은 무대에서 벗어나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하나 둘씩 밖으로 빠져나가는 모습들도 보였다. 저 사람은 김동학 어머니, 저 사람은 김동학 동생, 저 사람은 김동학의 누구식으로 사람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김동학의 어머니는 팔순인데도 춤은 잘 못 추지만 서서 박수를 치며 노래를 따라 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였다.

“그런데 저 여자는 누구야?”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자가 옷차림에 어울리지 않게 열심히 디스코를 추고 있었다. 한복 입은 여자들이 모두 넷이 있었다. 둘은 김동학의 어머니와 딸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있었는데, 열심히 추는 여자와는 달리 그냥 몸만 조금씩 흔드는 중이었다. 열심히 추던 여자가 김동학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마주 보며 몸을 흔들어댔다. 처음에는 멈칫하던 김동학 어머니도 함께 따라 추기 시작했다.

“누구긴 누구야, 김동학 마누라지.”

박길우가 말했다. 신돌석씨는 임신 상태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법원 안팎을 왔다 갔다 하던 젊은 새댁을 떠올렸다.

“그림 좋구만.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손잡고 디스코 추고…”

누군가 껄걸 웃으며 말했다.

“그게 어때서?”

박길우가 조금 날카롭게 대꾸했다.

“아니 뭐 어떻다기보다…”

조금 머쓱해졌는지 앞에 말한 사람이 말꼬리를 흐렸다.

“동학이네 집안 재미있는 집안이다. 온 집안 식구가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노래방에 간다지 아마. 나이트클럽에는 안 가는가 몰라.”

누군가가 잘 안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부럽구만…”

신돌석씨는 정말 부러웠다. 비아냥거리거나 고상한 잣대로 볼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족들이 어울려서 그렇게 노는 일은 얼마나 좋은가? 시어머니의 얼굴도 본 적이 없는 마누라를 생각하면 이런 그림이 부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동안 디스코 시간이 이어지다가 사회자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케익을 자르는 순서였다. 그리고 가족들이 손에 손을 잡고 ‘어머니 은혜’를 부르기 시작했다. 신돌석씨는 괜히 마음이 안 좋아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누군가가 이제 그만 가는 게 좋겠다고 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그냥 가기가 뭣했는지 주변에 있는 소줏집에서 2차를 하게 되었다. 거기서 신돌석씨는 자신이 그 동안 몰랐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주로 박길우가 말했고, 중간 중간에 다른 사람들이 보탰다.

“그때 검사 새끼 정말 악질이었지.”

이렇게 시작된 박길우의 말을 간추려 보면 이랬다.

검사는 그 후로도 김동학을 계속 불렀다. 김동학은 검사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단식을 시작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모아준 돈을 보태서 변호사가 선임되자 그때서야 검사는 면회할 시간을 주었다. 그렇다고 검찰청으로 부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변호사를 선임하기 전에는 불러서 하루 종일 있다 가게 만들었다면 변호사가 선임된 뒤에는 오전 혹은 오후 중에 불렀던 것이다.

김동학에게 맞았다고 하는 피해자가 구속되게 된 것은 위증죄라고 하였다. 검사는 피해자에게 한편으로는 너도 감호소로 보내겠다고 협박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사실대로만 말하면 아무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달래면서 사실을 말하라고 추궁하였다. 결국 견디지 못한 그는 김동학이 말리면서 따귀 세 대를 때렸다고 진술하였다. 그가 사실을 시인하자 검사는 곧바로 위증을 했다고 덜컥 구속시켜 버렸던 것이다.

“정말 치사한 자식이지. 자기가 요구하는 대로 말하면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하고선 구속을 시켜 버린 거라. 변호사 말로는 그래야 재판정에서 다시 뒤집히는 일이 안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거라나.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더라.”

박길우는 그 오래 전 일이 다시 생생히 되살아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소주잔을 입에 가져갔다.

“동학이가 검사한테 불려 가서 한 이야기 들어보면 기도 안 찬기라. 무조건 불라는 거야. 사람을 팼다고. 안 팼다고 하니까 나중에는 슬리퍼를 벗어서 마구 때리더라지. 그러고는 피해자가 검사실로 들어온기라. 웅천이라고 우리 후배 아니냐. 그 뒤 동네 떠버렸지만. 그 녀석이 울면서 왜 자기가 이 고생을 해야 하냐고 하더라지. 그래서 오히려 동학이가 웅천이는 풀어 주라고 사정했다더만 그래도 그냥 구속해 버린 거지.”

유태형의 말이었다. 유태형도 박길우와 동갑내기로 그 당시 상황을 박길우 못지않게 알 만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하면서 동학이형을 잡아넣으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요? 단지 자기 승진에 지장 있다고 하기에는 좀 심하잖아요? 원수 진 것도 아니고…”

신돌석씨는 알 것도 같았지만 그래도 뭔가 확실한 것 같지 않아서 한마디 물었다.

“그렇지. 원수진 건 없지. 하지만 원수가 될 수도 있어. 그놈들은 그런 놈들이야. 자기 승진에 방해가 되면 그건 원수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놈들이지. 한번은 동학이한테 그러더라나. 네가 사실대로 불면 감호는 떼 주겠다. 그러면 한 3년 살고 나오면 되잖냐고. 그래서 동학이가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해 봐라. 검사님 같으면 3년 동안 징역을 살겠냐? 3년이 장난인 줄 아냐? 그랬더니 옆에 있던 계장이란 자식이 영감님하고 너하고 같냐고 하면서 갑자기 발길로 차서 포승줄에 묶인 채로 뒤로 자빠졌다는 것 아니냐? 그런 놈들이야. 지금 같으면 가만 안 있지. 그런데 그때는 그렇게 당해도 어디 가서 한마디 할 데도 없었지.”

▲ [삽화 - 김윤기]

영감님이라… 새삼스럽게 들리는 말이었다. 판사나 검사를 영감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시절에.

사실 신돌석씨는 김동학이 구속되는 때까지만 해도 검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특별한 생각을 가질 까닭이 없었다. 신돌석씨 주변에는 검사는 물론이려니와 검사라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알고 지낼 가능성이 있는 사람조차 없었다. 신돌석씨가 검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알게 되었던 것은 어린 시절에 라디오에서 하던 반공 프로를 통해서였다. 그때 그 프로에서는 이른바 사상 검사라는 사람이 나왔는데 상당히 멋있는 인물로 그려져 있었다. 나라를 위해서는 사생활도 포기하고 불철주야로 뛰는 사람이었다. 때로는 권력층의 압력도 받았지만 굴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수사관들이 영감님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신돌석씨는 어린 시절에 그가 나이가 굉장히 많은 줄 알았었다. 그러나 신돌석씨가 고교 시절 무렵쯤 그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왔는데 나이를 계산해 보니 영감님이란 소리를 들었을 때 서른 전후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신돌석씨는 그런 사실을 접하면서 조금 어리둥절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생각은 갖지 않았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신돌석씨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었다. 자신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알았던 그 검사가 4. 19민주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던 마산 의거를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했다는 것 등을 들으면서 이전에 알고 있었던 사실들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새파랗게 젊은 사람에게 ‘영감님’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도 함께 떠오르게 되었다.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김윤기(金允起)

<전시> 1993 개인전(그림마당 민) 외 단체전 다수
         2013 ‘내 앞에 서다’전(세종문화회관)
< 기획> 2006 조국의 산하전 ‘평택-평화의 씨를 뿌리고’(대추리)
        2009 평화미술제 ‘대지의 꽃을 바다가’(제주현대미술관)
        2012 통일미술전 ‘하나는 다른 많은 것을 이룬다’(국회의원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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