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수 / 정치학 박사(북한정치 전공) · 『수령국가』 저자 · 평화통일센터 하나 이사장

 

스스로 대국(전략국가)이라 칭하던 미국이 참으로 ‘쪼잔’하게 됐다. 불러도 대답 없는 북한을 뒤로 하고 자신들의 희망사항만 담긴 2019년도 1월, 혹은 2월에 제2차 북미정상회담 개최를 그렇게 기정사실화하고 싶으니 말이다.

전략은 없고, 그렇게 희망만 있다. 그 최소한의 필요충분조건에 해당하는 전략적 발상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그냥 내년 1월, 혹은 2월에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리기만을 바라고, 기정사실화한다. 상대방인 북은 ‘떡 줄’ 생각이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똥줄이 그렇게 타고만 있다.

사실 그 전략적 발상이라는 것도 생각해보면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니다. 자신들 스스로가 약속했던 대북제재 해제와 종전선언 약속이행이라는 그 전제조건을 보다 ‘분명하게’ 이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대도 그럴 생각 대신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통해서는 미국인의 북한 여행금지를 완화하겠다고 한 것이라든지, 비건(대북정책 특별대표)을 한국에 보내서는 자신들의 대북정책 통제장치인 워킹그룹에서 마치 선심이나 서듯 남북협력 사업에 대한 제재를 ‘(예외)면제’해주겠다고 제법 생색을 낸 것이라든지, 12월 22일(현지시각) 보도를 통해서는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전주에 UN에서 ‘북의 인권 탄압’을 비판하는 연설을 준비했으나 취소했다는 그것을 근거로 북에게 마치 대화의 조건을 마련하는 시그널이 되었다는 등, 비본질적인 접근으로 마치 본질적인 제약조건-대북제재 해제와 종선선언이 마련된 냥 호들갑을 떤 것이다.

더불어 여기에 부화뇌동된 청와대와 여권, 대북전문가들과 지식인들도 그 정도면 제2차 북미정상회담의 조건이 어느 정도 마련되었으므로(미국이 그렇게 최선을 다했으니) 이제는 북이 응답해야 된다는 조언들을 늘어놓는다. 청와대도 내심 이런 분위기를 기대하는 눈치이다. 결론적으로 참으로 안이한 정세판단이고, 북을 몰라도 너무나도 모르는 무지의 소치라는 사실이다.

본질은 누누이 말하지만, 그런 꼼수로는 북을 절대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 낼 수가 없다.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을 약속해놓았으면 이를 지키겠다는 그런 이행의지가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런 구태의연한 방식, 즉 북을 정상국가(혹은, ‘전략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불량국가, 깡패국가, 언젠가는 무너질 국가 정도로 상정해놓고 그렇게 요리하려 든다면 북은 절대 그러한 미국의 의도에 말려들지도 않을 뿐더러 더는 대화상대로도 취급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본질은 이렇듯 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태도와 그런 태도에도 끽소리 못하는 대한민국 정부와 여권, 청와대와 대북전문가들의 인식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해서 분명한 것은 위와 같은 그런 꼼수로는 절대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만은 확실하고 이는 곧 미국이 동시행동과 비례성의 등가교환문제를 ‘많은 것을 받고, 조금 생색내는 것으로는’ 도저히 성립되지 않는다는 그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데 있다.

다시 말해 철저하게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 합의했던 대로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이라는 그 원칙적 입장에서 모든 문제를 신뢰성 있게 풀어가야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고, 이는 다시 문재인 정부에게도 4월 판문점선언에서 확인한 대로 ‘민족자주와 자결의 원칙’에 입각해 미국이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대북제제 해제와 종전선언 약속이행을 위해-미국을 설득해야 함을 안내해주고 있다.

즉, 12월 답방무산을 통해 문재인 정부에게 보낸 분명한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캐치하고 그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말이다(해서 참모들은 엉뚱한 보고를 통해 다른 판단을 하게끔 대통령의 귀와 눈을 닫게 할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본질문제를 정확하게 짚어볼 수 있도록 조성된 정세국면을 제대로 보고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정도 해놓고 본 주제와 관련된 글로 들어가 보면 2018년 상반기 어느 날이 소환된다. 부산에서 진행된 남북·북미정상회담과 관련한 강연회가 그것인데 당시 이 행사는 민족사적 관심과 세기적 변화 동인이 관련되어있으니 당연히 가장 핫한 뉴스일 수밖에 없었다. 내심 대북전문가들이 무슨 말들을 쏟아낼까 싶어 참으로 궁금하기도 했고, 시기에 맞게 사람들도 참 많이 모였다.

결론은 실망 그 자체였다. 당시 드러난 현상 그 자체, 즉 남북·북미관계 분위기만을 반영하듯 발표자 대부분은 장밋빛 환상만 쏟아냈다. 비례해서 문 대통령(정부)에 대한 칭찬 일변도였다. 약간 불편했다. 문 대통령을 좋아하는 것은 그럴 수 있다지만, 본인들이 지금 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인사들도 아닌데 굳이 그렇게까지 문재인 정부의 전도사가 되어서야만 했을까? 그것도 정부 공식행사라면 모르겠으나, 민간학술행사에서 문비어천가만 남발한다? 참으로 좋지 않은 풍경이었고, 비(非)지식인적 모습이었다.

생각해봤다. 사랑의 색깔이 그렇게 문비어천가 밖에 없었을까? 하고 말이다.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봤으나 역시 ‘그건 아니’였다. 즉, 참된 지식인의 진짜사랑이 ‘비판적’에 있어야 함을 망각한, 그 결과가 정부에 참여하지 않은 지식인들조차도 관료들이 볼 수 없는, 즉 박제화된 보고서와 시스템, 그리고 정부정책 틀 안에서만 바라보고 진단할 수밖에 없는, 또는 권력의 속성상 최고 권력자가 듣고만 싶은 것만 전달하려는 출세주의자들의 준동도 변수가 될 수밖에 없는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둔 자각 속에서만 자기역할이 찾아질 수 있다는 그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그러하질 않았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당연히 정부 밖의 대북전문가라면 정부가 볼 수 없는 그런 시각과 내용을 비판적으로 조언하고 코멘트 해줬어야 했던 것이다. 앵무새처럼 정부정책을 그대로 해설해주고 더 첨언해준다면 그건 지식인도, 대북전문가라고도 할 수가 없지 않는가. 그 정도 역할을 하기 위해 그 고급스러운 정보·지식을 습득하고, 불편하게 인식할 수밖에 없는 그런 북의 속내를 읽어내고자 하는 노력을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해서 전문가의 책무는 달라야만 하는 것이다. 특히 정부에 참여하지 않은 전문가는 더더욱 그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다른’ 전령사 역할들을 하는 것이 학자들이고, 전문가들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어느 누구하나, 심지어 촛불시민혁명이 들어선 이 마당에도 북을 제대로 보려 하는 학자와 대북전문가들은 보이지 않는다. 내재적 접근을 포기하고, 오직 외재적 접근만으로 북의 그 마음을 헤아려 보려한다. 그러니 남북교류협력과 평화체제 구축의 상대방, 파트너로만 북이 보일 뿐이다. 철저한 도구적 관점과 기능주의적 접근방식만 있고, 그것도 희망적 사고방식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은 호응해 나오겠지...’ 그 정도의 대한민국 중심주의적 발상뿐이다. 북의 관점에서 그 정세국면과 그 결과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파악해주려 하지 않는다. 기껏 파악해주더라도 경제와 인민생활 향상을 위해 북은 그렇게 밖에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그런 진단과, 말만 되풀이 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정부와 여권관계자들, 언론과 대북전문가들 거의 대부분은 내년 초에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릴 것을 기정사실화한다. 하지만, 지금의 정세국면 하에서는 전문가는 다른 분석을 해줘야 하는 것이다.

‘내년 초’는 위에서 확인받듯이 미국의 희망사항이라는 것을 말해주어야 하고, 그 희망사항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북이 응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미국은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이라는 제1차 정상회담 합의정신으로 복귀함과 동시에, 동시행동·단계별 해결원칙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안내하고, 이 과정에서 또 대한민국은 정부 스스로가 규정한 지렛대 역할(혹은, 운전자 역할)로 판문점선언에 맞게-‘민족자주와 자결의 원칙’ 정신에 기초해 ‘종전선언’과 ‘대북제제 해제’를 미국에게 건의(설득)하고, 그걸 해결하기 노력해야만 제4차 남북정상회담도 열린다는 것을 정부에게 건의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기능과 역할을 다하는 것이 지금의 국면 하에 맞는 지식인(대북 전문가)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자신들의 기능과 역할은 놓아두고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면 반드시 ‘북핵’ 비핵화 로드맵이 짜져야 한다는 둥(그것도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가 아닌), 제4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 의제는 무엇이 되어야 하고, 보다 확실한 비핵화 답변을 들어야 한다는 등 그런 의견 제시만 있으니 정말 무책임한 것이다. 그렇게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 진도를 내기 위한 방도를 제시하기보다는 그냥 생각할 수 있는 수준에서의 얘기 정도를 남발하는 것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대북전문가가 될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지금의 남·북, 북·미 정세국면에서 가장 큰 장애가 북의 약속 불이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게 있고, 그런 미국을 판문점선언 정신-‘민족자주와 자결의 원칙’에 입각해 설득해 내지 못하는 문재인 정부에 있음을 건의하고, 그렇게 조언하고 직언하는 역할을 정부 밖에 있는 대북전문가가 취해줘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울 답방 건만 해도 그렇다. 연내 답방과 관련하여 ‘김정은 위원장의 결단에 달렸다’고 그렇게 인식하는 대통령에게 “대통령님, 김정은 국무위원장님의 연내 답방은 오히려 대통령님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버티는 미국으로부터 ‘제재해제’와 ‘종전선언’을 확약 받는데 성의를 다하고, 이로부터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결단을 이끌어 내셔야만 합니다.” 그렇게 조언하고 직언하는 참모와 대북전문가가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이와 관련해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해본다면 민족공조는 철저하게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원칙과 정신에 입각해야 한다. 만약 그런 인식을 확고히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남북(민족)공조가 강화되면 될수록 오히려 정부는 정부대로 시민사회는 시민사회대로 북 체제와 그 경제작동방식을 자본주의식으로 체제전환과 흡수통합이 가능하다는 인식으로 확장이 이어지고, 종국에는 그 공조마저도 파탄될 수밖에 없다는, 즉 뿌리 깊은 대한민국체제 중심의 우월주의로는 절대 남북관계 개선마저도 힘들다는 사실을 수용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철저하게 공존·공영·공리의 이념에 따라 차이를 인정하고 통 크게 하나 되는 그런 민족공조의 관점에서 모든 남북교류협력 사업이 진행되어야 하고, 그러면 서로 신뢰가 쌓이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남북관계가 보다 동질성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그 진리를 획득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북을 그냥 교류협력의 파트너, 또는 문재인 정부가 취하고 있는 '한반도 신경제지도' 성공조건만으로 활용하려 들고, 그런 인식 정도로 남북경협을 대한민국 경제의 성장 동력으로 이용하려 들겠다는 그런 시각으로는 절대 진정한 의미에서의 남북경협도, 신경제지도도 완성될 수가 없다.

그런 우려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북이 지금 핸드폰 가입자 수가 5백만 명 시대를 넘었고, 장마당 수도 증가(주1)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진작 이를 두고 대북전문가들이나 정부에서조차도 북 체제가 변화하고 있다는 결정적 징표 운운할 정도이니 이는 절대 정상적인 인식이지 않다. 비례해서 제대로 된 남북관계 개선도 바랄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인식에는 북 주민들의 생활이 나아지고 물질 문명화되면 자본주의적 삶에 대한 동경도 높아지기 때문에 반드시 북은 체제전환을 할 수밖에 없고, 또 좀 더 깊게 속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교류협력의 결과가 북 체제의 전환과 흡수통합이 가능하다는 인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지만 문제는 제 아무리 백번 양보해 위 요인들을 해석해 위의 변화-핸드폰 가입자 수와 장마당의 증대가 북이 변화하고 있다는 한 요인과 동기는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러한 변화가 북 체제 전환의 결정적 요인이다? 이렇게 단정 지어야 할 그 어떤 근거도 없다는데 있다.

오히려 역으로 보자면 장마당 활성화는 내각의 정책과 당의 통제 아래 이뤄지고 있는 것이고, 핸드폰 수 증가는 사회주의 발전노선이 정상궤도로 진입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변화현상을 자본주의체제로의 전환이라는 인식이라는 그 한 방향으로만 그 원인을 찾으려 하는 것은 참으로 몰이해적 북 인식하기에 다름 아니게 되었다.

철저한 희망적 인식의 한 단면이고, 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려는 대한민국 대북전문가들의 한 민낯에 다름 아니다. 즉, 북을 북 자신이 설정한 사회주의 강국건설을 존중하고 이해해주기보다는 언젠가는 자본주의체제에 백기항복하고, 개혁개방을 통해 체제전환을 할 것이라는 그런 기대와 희망만 녹여져 있을 따름이다.

그렇지 않고-그 희망적 사고를 한 꺼풀 벗겨내고 조금만 더 사회과학과 그 이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그들이 채택하고 있는 사상과 철학에 이 문제를 접근시켜 보고자 한다면 핸드폰 가입자 증가수와 자본주의적 지표의 증가와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정상적인 사회주의 발전노선을 따라가고 있다는 그런 인식을 해야 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못살아야 한다는 사회과학 이론적 근거가 없을뿐더러, 그러므로 이 문제는 사회주의체제에서 핸드폰 증가는 체제후퇴로서의 자본주의로의 회귀가 아니라 사회주의체제에 더 근접하고 접근해가고 있는 그들의 노력과, 지극히 정상적인 궤도를 따라 돌고 있는 그들의 국가정책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사회주의체제 하에서의 물질문명 고도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말이다.

이는 조금만 우리가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생각만 해 봐도 금방 알 수 있는 문제이다. 동시에 이는 우리가 사회주의체제를 인정하는가 안하는 그것과는 상관없이 역사발전 단계로서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체제를 극복해낸 체제라 했을 때 사회주의체제는 자본주의체제보다 더 잘 살고 문명한 사회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사회이론으로서 그렇다는 말이고, 오히려 기간 사회주의국가가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더 문제였기에-우리가 그런 사회주의체제를 인정하고 안하고와는 상관없이 앞으로는 사회주의가 더 많은 물질문명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그런 인식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북에서 핸드폰 가입자 수 증가는 자본주의체제로의 전환가능성 지표를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체제가 가난하지 않고, 과학적 물질문명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지극히 정상적인 체제로서의 물질문명국가가 되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분석해줘야 하는 부분도 분명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핸드폰 가입자 수 증대가 자본주의체제로의 체제전환이라는 억지논리가 만들어지지 않고, 실제 핸드폰 가입자 수 증대는 북이 자신들이 설정한 사회과학적 이론에 부합하는 사회주의체제로 진입하고, 그 건강성이 증명되고 있다는 가설을 성립시켜 북은 원래대로 사회주의체제가 더 많은 물질문명 혜택을 누려야 하고(아니, 더 누려야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핸드폰을 더 많이 사용해야 하는 것이 그들이 설정한 이론에도 부합한다고 설명해 줄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설명해내어야 할 것은 그렇다면 왜 이제까지 그렇지 못했던 이유와 근거를 설명해내어 국민들이 불필요한 오독과 오해를 하지 않게끔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의 대북전문가라는 사람들은 ... 핸드폰 사용자 수 증가가 왜 자본주의체제를 동경하는 이유가 되어야 하고, 체제이탈의 중요한 지표가 되어야 한다고 그런 궤변을 늘어놓는 이론적 불구자가 되어야 하는지가 지금 이 촛불정부 하에서도 되풀이 되어야만 할까?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궤변도 그런 궤변이 없는데 말이다. 지독한 희망적 사고이고, 이런 것들로 자꾸 환상을 가지게 되면 종국에는 북에서 인민생활향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폭동이 일어난다는 것과 같은 주의·주장을 남발되게 되고, 그런 말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국민들은 또 그렇게 잘못된 인식으로 북을 이해해 가야만 한다. 악순환의 되돌이표는 그렇게 만들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제발 부탁드린다. 북 체제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과 고무 찬양하는 것과는 하등 인연이 없음을 직시해내자. 적대적 공존과 체제경쟁을 해야 했던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그런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이제는 GNP와 GDI가 수십 배 차이가 나지 않는가? 무엇이 두려워서 그 진실과 팩트에 눈을 감아야만 한단 말인가? 대한민국체제의 건강성에 대해 그렇게도 자신이 없는가?

물론 북도 인민생활향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북 체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주성’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인민생활향상이 제 아무리 당면과제라 하더라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주’의 문제를 훼손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는 북의 정신도 같이 제대로 봐줘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야만-그러한 인식으로 계속 북을 봤더라면 북은 열 백번도 더 체제전환이 일어났어야 했고, 폭동이 일어나야만 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같은 이유로 지금 북이 2020년까지 달성하기로 된 제5개년 국가발전전략의 그 성과가 미흡하더라도 김정은 체제가 휘청거리거나 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는 그런 판단과 진단은 틀릴 수밖에 없으며, 또 김정은 정권은 이유 불문 미국과, 대한민국과 자신들에게 불리한 비핵화를 하면서까지 대화와 협상에 나설 것이라는 그런 망상은 정말 북을 몰라도 정말 모르는 인식의 한 파편밖에 되지 않음을 자각해낼 수가 있어서 그렇다.

북은 그렇게 자신들이 설정한 인민생활향상이 계획대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하여 폭동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 국가이다. (흘려온) 시간도 충분히 이를 증명해준다. 분단 이후 60여 년간 그들은 늘 그런 상황 하에서도 폭동대신, 자주와 수령중심의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해왔다. 그렇기에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듯이 마찬가지로 이는 2020년도에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식민지 민중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을 저버리지 않는 한, 또 그런 인민적 동의가 철회되지 않는 한 말이다. 인민생활향상보다 더 앞선 원칙은 북 스스로가 택한 ‘자주’를 지켜내겠다는 철학이념이 있기 때문이다.

즉, 제아무리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다 하더라도 자주의 문제와 바꾸지 않겠다는 그 북의 입장과 태도를 보지 않는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북 사회의 본질을 보지 못한 것과 같게 된다. 그렇지 않고 자꾸 희망적 사고로만 보려한 결과가 지금까지 보려고만 했던 그런 북의 모습이라면 이제는 그런 망상에서 좀 벗어날 때가 되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일어났더라면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이 몰락할 때 체제전환이 일어났어야 했고, 1990년대 고난의 행군 때 폭동이 일어났어야 했고, ‘아랍의 봄’ 때도 체제전환이 일어났어야 했다. 그러나 북은 그때나 지금이나 자기가 설계한 그 사회주의 궤도 따라 나아가고만 있다. 그런 북을 이제는 보자.

해서 결론은 핸드폰 가입자 증대가 사회변화의 한 지표가 될 수는 있겠으나, 그 어떤 대북전문가가 말한 것과 같이 그 지표의 변화가 체제전환과 같은 그런 지표의 변화로 진단하는 것은 체제이탈자 수(탈북민)로 체제전환을 예측하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음이고 이론적 오류임을 간파해내자. 그 반대편, 물질문명국가로서 사회주의국가체제가 더 잘 작동시키기 위한 그들의 국가정책으로 봐주고 이해하자. 그래야만 맞는 해석이고, 그렇게 해석이 맞아야만 제대로 된 대북정책이 나올 수 있음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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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장마당의 증가도 중요하지만, 장마당에서 거래되고 있는 품목 등이 중국산에서 북한산으로 채워진다든지, 그렇게 중국까지 가세하여 국제적인 제재가 작동되고 있었지만, 품목수도 늘어나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이는 장마당에 의한 자본주의적 지표가 증가한 것이 아니라 북한식 사회주의제도를 보완하는 ‘개건’적 실리사회주의 경제체제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는 측면도 분명 있는 것이다.

 

 

저서로는 『수령국가』(2015)외에도 『사상강국: 북한의 선군사상』(2012), 『세습은 없다: 주체의 후계자론과의 대화』(2008)가 있다.

강의경력으로는 인제대 통일학부 겸임교수와 부산가톨릭대 교양학부 외래교수를 역임했다. 그리고 현재는 부경대 기초교양교육원 외래교수로 출강한다.

주요활동으로는 전 한총련(2기) 정책위원장/전 부산연합 정책국장/전 부산시민연대 운영위원장/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사무처장·상임이사/전 민주공원 관장/전 하얄리아부대 되찾기 범시민운동본부 공동운영위원장/전 해외동포 민족문화·교육네트워크 운영위원/전 부산겨레하나 운영위원/전 6.15부산본부 정책위원장·공동집행위원장·공동대표/전 국가인권위원회 ‘북한인권포럼’위원/현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부산지역본부 운영위원(재가)/현 사)청춘멘토 자문위원/6.15부산본부 자문위원/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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