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뒤, 돈도 없고 학벌도 안 되고 빽도 없어서 서울 근교 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에 취직했던 신돌석씨. 가진 거라곤 의리 있게 산다는 생활 신조 하나였던 그가, 27세 되던 1985년 전국의 공단지역을 휩쓸었던 노동운동의 폭풍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인생의 변화를 겪고, 의리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어느덧 이순의 나이가 되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러나 있을 수 있었던,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이야기는 과거만을 다루는 후일담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인지를,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정해랑

 

▲ [삽화 - 김윤기]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았다. 이제 사방이 어두워졌다. 하늘을 보니 초생달이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밝게 빛나는 별이 있었다. 초저녁이나 새벽녘에 이렇게 밝은 별들을 보면 궁금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곤 했다. 그런데 마침 옆에 진성우가 있었다. 진성우는 물리 선생이므로 물어 볼 만했다.

“진형 저 별이 뭐요? 저기 초생달 밑에서 밝게 빛나는 별…”

“아, 저거요. 목성이에요.”

앉아 있는 오른쪽에 교보빌딩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한국수출보험공사가 보였다. 이 길을 처음 와 보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주변을 자세히 본 적은 없는 듯하였다. 하기는 이렇게 차가 다니는 대로에 주저앉아서 사방을 둘러 본 일이야 있을 턱이 없었다. 이 길은 신돌석씨에게는 중학교 때부터 익숙했던 길이었다. 아니 중학교 때 주로 다니던 길이었다. 지금 있는 곳에서 조금만 뒤로 가서 오른쪽을 보면 양쪽으로 화신과 신신이 있었다. 신신 안에 있던 신신분식센터는 중학교 때 친구들과 종종 가서 놀던 곳이었다.

이어서 어느 의대 교수라고 하는 사람이 두번째 발언을 하였다. 교수라는 신분을 보거나 말하는 내용으로 보거나 일반 시민이 발언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이름도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았는데 잘 생각이 나지는 않았다.

그는 경호권을 발동해 놓고도 ‘경호권 발동하지 말게 해달라’고 한 국회의장 박관용의 말을 집중적으로 성토했다. 이 말대로라면 경위들이 국회의원을 들어낸 것은 불법적인 폭력이 아닌가? 아니라면 국회의장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박관용은 책임을 져야 하고, 국민들은 그 책임을 따져 물어야 한다고 하였다.

신돌석씨도 이번 사태에서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의 하나였다. 박관용은 마치 중립을 지키는 듯하다가 결국 탄핵을 의결하는 사회를 보았다. 그리고 경위들은 농성하고 있던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강제로 끌어냈다. 이런 과정을 보면 박관용이 적극적으로 경호권을 발동하여 탄핵 의결을 도운 것이다. 아니 탄핵이라는 것을 빙자한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셈이다.

그날 박관용이 열린우리당을 향해서 ‘자업자득’이라고 했을 때의 장면이 신돌석씨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는 마치 열린우리당과 대통령 측이 이렇게까지 오지 않아도 될 일을 했다는 듯이 분노가 치미는 표정으로 말을 하였었다. 신돌석씨가 보건대 사실상 탄핵을 찬성하면서 교묘하게 말을 돌리는 사람들이 대개 이런 식으로 말하였다. 그도 역시 그런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에 인터넷 언론에서 본 박관용의 아버지 이야기가 생각났다. 박관용의 아버지는 일제 때 순사였다고 한다. 열린우리당의 어느 의원에게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빼주면 친일진상규명법 통과를 도와주겠다고 했다는 기사가 실렸었다. 그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인지는 몰라도 일제 때 순사였다는 것은 맞는 모양이다. 그런 걸 보면 확실히 이번 사태는 반민족적이고 반민주적인 세력들의 총궐기의 성격을 띠는 쿠데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박관용이 문제는 어떻게 해서든 처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상하게 국민행동에서도 이 문제는 별로 언급하는 것 같지가 않아.”

신돌석씨가 한마디 하자 이근영이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래야 하지만 뭐 손 볼 놈이 어디 하나 둘이어야지.”

“그런데 이번에 박관용이까지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 보면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해. 아무래도 미국놈들이 사주한 냄새가 난단 말이야.”

조형권이 끼어들었다. 그의 말은 이랬다. 사회를 보지 않을 것처럼 하던 박관용이 적극적으로 사회를 보고, 김종필도 가세하고, 망설이던 자들도 발의에 참가한 것을 보면 이들 모두에게 좀더 센 무엇인가가 다음을 보장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것이야 미국밖에 더 있겠냐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조형권의 첫마디를 들었을 때는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뭐든지 미국 때문이라고 보는 것 아니냐는 항의성 생각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뭔가 그럴 듯하다는 느낌이 왔다.

이야기는 더 진행되지 못했다. 다음 발언자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다음 발언자는 자신을 30대 직장인이라고 소개했다. 어디 회원이라고 했는데, 신돌석씨는 잘 모르는 단체였다.

“한나라당은 다함께 차차차로 차떼기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천막 치고 있는데, 한강이 쓰레기 처리장입니까? 차라리 만남의 광장에나 가서 천막을 칠 것이지.”

한나라당이 요즈음 당사를 나와서 천막을 치고 있는 것을 비꼬아서 한 말이었다. 한나라당은 당사를 매각해서 국고에 환수하겠다고 하는데, 사실 직원들의 가압류 신청 때문에 매각할 수도 없는 상황인데 쇼하는 것이라고 신문에서 본 적이 있었다.

“이 쓰레기 같은 새끼들…”

갑자기 쓰레기라는 말이 허공에서 떨어지는 듯하였다. 쓰레기, 쓰레기… 그 말과 아까 중국집에서 본 깡마른 노인의 얼굴이 겹쳐졌다. 이제야 생각났다. 그 자를 어디서 보았는지.

하지만 신돌석씨는 아직도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89년인 것 같다. 이른바 공안정국 때 신돌석씨는 가두시위를 하다가 잡힌 적이 있었다. 경찰서로 끌려갔다. 이미 그때쯤에는 그 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알려졌었기 때문에 신돌석씨는 다른 사람들과 분리돼서 취조를 받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검은 차에 실려서 어디론가 갔다. 그들은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귀에 익은 이름들이 그림에 있었다. 그리고 빈칸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두들겨 맞아도 모르는 걸 어쩌랴.

그러다가 누군가를 만나지 않았냐는 걸로 취조의 내용이 좁혀졌다. 그 누군가는 신돌석씨와 같은 현장에 있었던 조철구였다. 그 당시에 신돌석씨는 조철구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모른다고 했다. 그랬더니 조철구의 후배인 김배영을 만나지 않았냐고 했다. 신돌석씨는 무턱대고 모른다고 했다. 사실 김배영을 만나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그림처럼 조직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 신돌석씨는 하던 일의 대부분을 혼자서 알아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눈만 뜨면 파업 지원을 가야 하고 집회에 나가야 했던 때였다. 투쟁 현장에 단골로 가야 하는 신돌석씨로서는 어찌 보면 조직을 만들어서 논의나 하고 있다는 것이 한가하게 느껴지는 때였었다.

그들도 별 소득이 없으리라 생각했는지 하루가 지나자 취조를 멈췄다. 그리고는 그날 오후에 본래 있던 경찰서로 돌려 보내줬다. 이어서 다음날 즉결심판을 받고 구류 15일에 처해졌다. 정식재판을 청구하면 10일만 살고 나머지는 정식재판의 결과에 따라 살든지 말든지 한다고 해서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9일째 되던 날이었다. 이제 내일 아침이면 석방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정보과에서 다시 불렀다. 유치장에서 나와서 경찰서 뒷마당 쪽으로 돌아서 ‘통제구역’이라는 팻말이 놓인 계단을 지나 2층에 있는 정보과 사무실로 들어설 때까지 신돌석씨는 불안한 마음을 가누기 힘들었다. 이 자식들이 왜 다시 부르는 거지? 별거 아니겠지. 내일 나가니까 그 전에 이것저것 물어보겠지. 이런 마음으로 달래 보지만 그래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정보과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아주 인상이 고약한 사람이 들어서는 신돌석씨를 쏘아 보았다. 그가 바로 깡마른 그 노인이었다. 물론 그때는 노인이 아니라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신돌석씨는 그를 눈이 가려진 채 끌려간 곳에서 서너 차례 본 적이 있었다. 그가 어떤 위치인지 몰라도 신돌석씨를 취조하던 수사관들이 그가 들어서기만 하면 일어나서 맞이했다. 수사관들은 그를 ‘전무님’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뭐 이런 데 전무가 다 있나 해서 기억에 남았다. 경찰서에서 그를 다시 보게 되니 겁이 덜컥 났다. 물론 이곳에서도 정보과 계장을 비롯한 정보과 형사들이 그의 앞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야 이 새끼야, 김배영을 안 만났어? 이런 썅놈의 새끼가 있나.”

그의 욕지거리에 평안도 사투리가 배어 있었다. 신돌석씨는 외가가 평안도 출신이기 때문에 평안도 사투리를 자연스럽게 하지는 못해도 그 지역 방언을 다른 지역 방언과 구별할 수는 있었다. 오랜만에 더러운 욕을 듣는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재떨이가 날아와서 신돌석씨의 이마에 맞았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이어서 신돌석씨를 데리고 올라갔던 형사도 놀라서 옆으로 피하다가 의자에 걸려서 옆으로 넘어질 뻔하였다.

▲ [삽화 - 김윤기]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재떨이에 맞아서 피를 흘리고 있는 신돌석씨를 주먹으로 수도 없이 두들겨 팼다. 마침내 쓰러진 신돌석씨의 얼굴을 구둣발로 짓밟았다. 그러면서 쉴 새 없이 되풀이 하는 말이 쓰레기였다.

“이런 쓰레기 같은 새끼들은 거저 청소해 버려야 해. 쓰레기 새끼. 썅놈의 쓰레기. 너 같은 쓰레기들 그냥 한강에 갖다 버려도 누가 뭐라 하는 줄 아네. 아님 거저 난지도에 묻어 버리든지.”

한참을 그러다가 제 풀에 지친 듯 자리에 앉더니 창밖을 보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 네 놈이야 불쌍한 놈이디. 조철구나 김배영 같은 놈은 정말 악질 빨갱이야. 돌석이 너 같은 새끼가 그런 놈들한테 놀아나서 이런 일들이 생긴다구. 명심해. 다시 또 그놈들과 어울리다간 뼈도 못 추릴 테니. 알간? 요즘 우리가 너무 바쁜 게 네 놈한테 얼마나 다행인지 알고 알아서 겨. 이 쓰레기 같은 새끼야.”

말끝에 다시 억양이 높아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때 잡혀갔던 학생 출신 노동자 중 하나가 김배영과 신돌석을 동시에 만났다고 진술한 모양이었다. 신돌석씨는 언제 어떻게 만난 것을 말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만큼 김배영과는 수시로 만났는데, 대부분 집회나 파업 현장에서 만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자의 말대로 바빠서 그랬는지 신돌석씨를 이상한 곳으로 데리고 가지도 않았고, 더 이상 닦달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정보과에서 더 취조한 것도 아니었다. 정보과 형사들 말에 따르면, 그가 재떨이를 집어던지면서까지 광분하였던 것은 새로운 진술 때문에 수사를 다시 원점에서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30대 직장인이라는 사람의 발언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진보야당이 필요합니다. 전교조 선생님들의 시국성명이 왜 불법입니까? 시민 여러분 정말 촛불이 꺼지지 말아야 합니다.”

진보야당이라? 신돌석씨는 괜찮은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 그리고 자민련을 제끼고 민주노동당이 제1야당이 되는 것. 정말 바람직한 일이다. 열린우리당을 밀어야 하나, 민주노동당을 밀어야 하나 라는 고민에서 한발 벗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둘 다 밀어줄 수 있을까? 둘 다 안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아직 남아 있기는 하였다.

신돌석씨는 이 사람의 발언이 끝나자 화장실에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덧 자리에 앉은 지 두 시간이 가깝게 되었다. 뒤로 걸어 나와서 도중에 인도 쪽으로 빠졌다. 화장실을 가려면 아무래도 종각역으로 가는 것이 가장 확실할 것 같았다.

종각역 근처까지 내려와 보니 아까 사회자가 종각을 넘어서 종로3가까지 대열이 불어났다는 말은 역시 사실이 아니었다. 지난주도 그랬고, 지지난 주도 그랬지만 경찰이 저지선을 만들어 놓고 있는 곳을 넘어서 시위 대열이 확장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이전 경험으로 봐도 그런 대열은 물리력을 행사해서 뚫지 않는다면 넘어설 수 없었다. 힘으로라도 뚫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냥 돌아가거나 안으로 들어와서 빈 구석을 찾는 법이다.

종각역 입구쯤에서 플래카드를 내걸고 노래하는 여자가 있었다. 지체장애인 무의탁노인돕기 자선공연이라고 씌어 있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데도 여자는 기타를 치며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왠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사람이 착하다고 해서 올바른 것은 아니라는 것은, 이제 신돌석씨는 40년이 좀 넘는 인생 속에서 확실히 알고 있었다.

종각역에 들어가서 화장실을 찾고 있는데 어디선가 밴드가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보니 밀레니엄 플라자라는 이벤트홀이 있었다. 그곳에서 신돌석씨가 그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그룹이 노래를 하고 있었다. 부르는 노래로 보아 아마 록그룹인 듯하였다. 30여 명쯤 되어 보이는 10대 소녀들이 팔짝팔짝 뛰면서 열광적으로 소리를 지르는가 하면 노래를 따라 하기도 하였다. 어쩌면 수만 명이 모여 있는 촛불집회 바로 근처에서 영 딴판의 일에 관심을 쏟을 수 있는 것일까? 그들에게 화가 나다가도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나타난 하나의 현상일 것 같기도 하였다.

또 이런 걸 보고 요즘 청소년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지나치게 획일적인 사고일 것이다. 그래봤자 이들은 정말 한 줌밖에 안 되지 않는가? 다만 신돌석씨는 탄핵반대집회들에 참석해 보면서 3-40대가 많다는 사실에 고무되면서도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썩 많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얼마간 불만이었다. 다른 세대가 많으니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대학생들의 정치 무관심을 보여 주는 것인지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까 중국집에서 했던 대화가 갑자기 떠올랐다. 오늘 수구세력들도 집회를 한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근영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이런 말을 했었다.

“싸가지 없는 새끼들, 수구 꼴통들 모조리 감옥에 처넣었으면 좋겠다.”

“아니지. 그런 꼴통들이 몇 십 명 정도 모여서 탑골공원 앞에서 집회를 하고,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킬킬대고 비웃으면 그게 더 좋은 것 아냐? 왜 그 놈들한테 국민의 혈세로 먹여주어야 하나.”

조형권이 느글느글하게 웃으면서 했던 말이었다. 신돌석씨는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놈, 저런 놈 다 있어도 좋은 거다. 다만 그놈들이 찌그러져 있게만 할 수 있다면. 그런데 그런 날이 오려면 얼마나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할까?

▲ [삽화 - 김윤기]

화장실을 찾아가니 입구 바깥까지 길게 줄이 늘어져 있었다. 한 줄로 서다 보니 그렇게 줄이 길어지기도 하였다.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많이 온 모양이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뭔가 들떠 있는 것 같았다. ‘너흰 아니야’를 흥얼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도 참 다양했다. 어린아이부터 70대 이상의 노인까지. 남자란 남자는 다 모인 것 같았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다 집회에 참석한 것일까? 아니면 그냥 지나가던 사람일까? 지나가던 사람이라면 이렇게 많을 리가 없으리라. 또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기다리지 않고 그냥 가 버릴 것이다. 집회에 참석하려는 사람이니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노인들까지도 집회에 참석한다는 사실이 뭔가 세상의 변화를 보는 듯하다고 흐뭇해하려는 순간 신돌석씨는 참으로 희한한 일도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니 어쩌면 뭔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가 찾은 듯한 느낌일지도 몰랐다.

그 자였다. 재떨이를 던지던 바로 그 자였다. 아까 중국집에서 만났던 그 자가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신돌석씨는 어찌해야 하나 망설였다. 85년에 해고되었을 때 해고자들이 모여서 하던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00섬유의 이아무개 전무라는 놈, xx금속의 박아무개 부장이라는 놈, 그리고 대공과 민아무개 형사라는 놈, 이 세 놈만큼은 우리가 손 좀 봐야 한다. 그런 놈들은 두고두고 기억해서 늙어 죽기 전이라도 하늘이 무서운지를 알게 해주어야 한다

언급된 관리자들이나 형사는 노동자들을 악랄하게 대한 자들이었다. 특히 여성 중심 사업장인 00섬유의 이아무개 전무라는 자는 노조원들에게 호스로 물을 뿌리면서 현장 밖으로 쫓아내기도 하였고, 남자 노동자들에게 여성 노동자들을 성추행하도록 사주해서 노조 활동을 못하게 할 정도로 악랄한 놈이었다. 또 고향에 연락해서 부모들을 협박하여 데려가게 하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충격을 받아서 돌아가신 부모도 있을 정도였다.

대공과 민아무개 형사라는 자는-사실 그 지역에 대공과라는 것은 없고 정보과 3계였는데 자기가 대공과라고 불렀기 때문에 노동자들도 다 별 생각없이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노조활동을 하던 노동자들이 연행되기만 하면 두들겨 패고, 물고문 등을 하기를 일삼던 자였다.

해고자들의 생각은, 언제까지 우리가 당하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도 그 이름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지금 안 되면 나중에라도 그 자식 대에라도 뜨거운 맛을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신돌석씨 역시 그런 생각에 동감이었다. 신돌석씨는 요즈음에는 그런 응징을 모든 방면에 확산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민주적이고, 반민족적인 또 반민중적인 행위를 한 자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른다는 것, 그 대가가 꼭 폭력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하다못해 사람들 사이에서 왕따 당하게 만드는 것이라도,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져 갔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신돌석씨는 줄을 벗어나 그의 뒤를 따라갔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일행이 없이 혼자 가고 있었다. 뭐라고 말할지 정해 놓은 것은 없었다. 화장실로부터 좀 떨어진 곳까지 갔을 때 신돌석씨는 그를 불렀다.

“여보시요. 나 누군지 알죠?”

목소리가 너무 떨렸다는 생각을 하자 스스로에게 좀 못마땅한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여유 있게 할 수는 없을 것인가? 상대는 신돌석씨를 모르는 것 같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멀뚱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신돌석씨도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자가 아니었다.

신돌석씨는 미안하다는 말도 제대로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재빠른 걸음으로 다시 화장실 쪽으로 갔다. 그 사람 역시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었다. 걸어가면서 신돌석씨는 아까 중국집에서 그 자를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이, 그 자에게 그 자리에서 어떤 행동을 취하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스러웠다.

볼일을 보고 종각역 밖으로 나오니 자선공연을 하던 사람이 여자에서 남자로 바뀌어 있었다. 이들은 역사 발전과는 무관하게 자신들의 착한 마음을 마음껏 표현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제는 이런 사람들을 보아도 여유 있게 대할 정도가 되었다는 사실이 흐뭇했다. 이전 같았으면 아마 화가 나거나 적어도 짜증이 났으리라.

집회 장소로 가보니 자신을 대한민국 대표 아줌마라고 하는 사람이 나와서 발언을 하고 있었다. 아줌마의 발언이 끝나자 사회자가 자원봉사자들을 소개하였다. 소개받은 자원봉사자의 대표가 참가자들에게 부탁하는 발언을 하였다.

”3월 13일에, 해산해 주십시오 하니 23분 만에 거리가 깨끗해졌습니다. 오늘도 그때와 같이 적극적으로 해산에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23분 만에 해산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86년 때의 개헌집회나 87년 6월 항쟁 때, 그리고 그 뒤의 집회들이 떠올랐다. 그때들과 비교하면 작년의 여중생 추모 촛불집회나 올해의 집회는 사뭇 달랐다. 특히 올해의 탄핵반대집회는 더욱 그런 것 같았다. 각자의 주장은 있지만 지도부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그래서 한나라당이나 조중동에서는 누군가 뒤에서 조종한다는 말을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신돌석씨가 보기에 80년대 말이나 90년대 초에 비해 오히려 조직은 적었다. 조직되지 않은 사람들인데도 이렇게 움직였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의 앞날이 밝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 아닐까?

”난 오랫동안 우리가 이루어야 할 목표를 위해서는 엄청난 피를 흘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지요. 그런 생각만 하면 머리가 아팠어요. 하지만 이번 탄핵반대집회를 보면서 어쩌면 그보다는 훨씬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단합된 민중의 힘이 수구세력을 고립시키면서 말이에요.“

아까 집회 도중에 이근영이 일어나서 조선일보 쪽을 다녀온 뒤에 한 말이었다. 그쪽으로 가보니 수구세력들도 집회를 하는 모양인데 천명이나 되면 잘 될 정도가 경찰에 둘러싸여서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신돌석씨의 일행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웃음들을 터뜨렸었다. 신돌석씨는 이근영과 같은 생각은 미처 못해봤는데 그럴듯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신돌석씨도 요즘처럼 대중에 대한 신뢰가 저절로 솟아오르는 때도 없었던 것 같았다.

이어서 사회자가 마무리 발언을 하였다. 촛불을 명동성당으로 옮기기로 하였다고 하였다. 신돌석씨 생각으로는 기막힌 절충이었다. 촛불을 끌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공식 선거운동 기간이 시작되었는데도 집회를 지속해서 고건 대행체제와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것도 어려웠다. 명동성당으로 옮겨서 촛불은 유지하되 당분간 집회는 자제하려는 계획인 모양이었다.

▲ [삽화 - 김윤기]

시계를 보니 8시 44분이었다. 목성은 이미 교보빌딩 뒤로 사라지고 없었다. 신돌석씨는 이근영, 진성우, 조형권 들과 함께 일어나서 쓰레기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상쾌한 밤이었다. 청소를 하는 동안 스피커에서는 ‘너흰 아니야’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날의 집회 이후 수많은 집회가 있었다. 광우병 집회 때는 집회 문화 자체가 엄청나게 바뀐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박근혜 당선 무효 투쟁 집회, 세월호 추모 집회, 마침내 박근혜를 탄핵시킨 집회. 그러나 그 이후에도 주말마다 아니 평일에도 집회, 시위, 농성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촛불혁명을 되돌려 놓으려는 자들이 나날이 불어나고 있다.

사법농단규탄 집회가 마무리 되어갈 즈음 신돌석씨는 옆에 놓여 있는 설치물로 갔다. 사법농단 판사를 내가 탄핵하고, 그들에게 형량을 내가 선고할 수 있도록, 법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퍼포먼스를 하는 설치물이었다.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내가, 우리가, 민중이, 국민이 나서서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를 모두 통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광화문 일대를 행진하고 있는 성조기 부대들을 바라보았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훌라송을 부른다는 것이다. 물론 가사는 바꿔서 불렀다. ‘빨갱이는 물러가라 훌라 훌라’ 이런 식이다. 해가 지면서 그 수는 현저히 줄었지만 소수는 남아서 여전히 악을 쓰며 사법농단규탄집회 부근을 돌아다니면서 그런 노래를 불렀다. 신돌석씨는 아주 오랜만에 ‘그래도 너흰 아니야’를 흥얼거렸다. ‘그래도 너흰 아니야, 너흰 아니야, 너흰 나랄 걱정할 자격 없어’를 새삼 부르면서 뒤풀이는 어디 가서 하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