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뒤, 돈도 없고 학벌도 안 되고 빽도 없어서 서울 근교 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에 취직했던 신돌석씨. 가진 거라곤 의리 있게 산다는 생활 신조 하나였던 그가, 27세 되던 1985년 전국의 공단지역을 휩쓸었던 노동운동의 폭풍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인생의 변화를 겪고, 의리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어느덧 이순의 나이가 되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러나 있을 수 있었던,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이야기는 과거만을 다루는 후일담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인지를,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정해랑

 

▲ [삽화 - 김윤기]

그 날 이후로 최준용을 만난 일도 드물었지만 혹시 만나도 최준용은 그때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최준용은 확실히 단순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쿨하다’고 해야 할까. 공무원에 대한 미련을 딱 끊어 버리고 방향을 바꿨다. 강남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한다던 선배 따라서 부동산 일을 좀 하더니 공인중개사 시험이 실시되자 그걸 공부해서 합격하였다. 그리고 그 뒤 평촌에 사무실을 차려 놓고 공인중개사 일을 지금까지 하고 있다. 어쨌든 그에게는 전화위복인지도 몰랐다. 공인중개사가 그의 체질에도 맞는 것 같고, 그 덕에 돈도 좀 만진 것 같았다. 친구들 중에서는 가장 잘 사는 편이었다.

“야 세상 참 재미있다. 어떻게 내가 아니라 김동환이 먼저 빵에 가냐. 하긴 돌석이도 빵에 간 적 있지. 신돌석이라면 또 모르지. 하지만 김동환이 빵에 가다니 이상한 거 아냐.”

김동환은 중학교 시절에 모범생이었다. 한번은 김동환이 신돌석씨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최준용이 같은 애와 어울려서 어쩌려고 그러냐. 요즘 니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물론 중학교 때 얘기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윤흥식의 주선으로 두레박이라는 친목회에서 만났을 때는 서로간에 그런 거리감은 금세 사라졌다. 하지만 그래도 김동환은 뒤는 물론 옆도 잘 보지 않고 앞으로만 달려 간 사람이었다. 그만큼 사는 게 절박했다고나 할까.

최준용이 차를 다 마시자 윤흥식이 바로 일어나자고 했다. 더 이상 올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두 친구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지만, 그들 말고도 자동차 영업사원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 이름이 이상철이라고 하는 친구였다. 꼭 온다고 했다가 갑자기 일이 여의치 않게 된 모양이었다.

다방에서 나와서 붐비는 시장통을 지나 연립주택인 김동환의 집에 들어섰을 때 시각은 8시 40분이 되어 있었다. 김동환의 처는 친구들이 온다는 말을 미리 윤흥식에게 들어서인지 과일과 차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김동환의 처를 본 것은 결혼식 이후 처음인 것 같았다. 아니 결혼 직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였다.

김동환이 결혼한 것은 94년이었다. 서른 다섯 살에 결혼한 것이었다. 친구들 중 가장 늦게 결혼을 했다. 김동환은 결혼을 하기에 너무 좋지 않은 조건 속에서 살고 있었다. 홀어머니와 동생 넷 중 셋의 부양을 책임지고 있어야 했고, 기관사로 근무하다 보니 집을 비워야 하는 일도 잦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렇게 늦어지게 된 것이었다.

방 세 개에 널찍한 마루에 연결된 부엌이 있는 연립주택은 깨끗해 보였다. 하지만 그 집이 전세라는 말을 들을 때 김동환의 어려움이 새삼 가슴에 다가왔다. 철도공무원 생활 20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집 하나 마련하지 못했구나. 물론 집안의 어려움을 떠안다 보니 그랬을 것이지만, 반평생을 공직에 있었던 결과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아이들이 와서 인사를 했다. 이듬해에 낳은 아들이 지금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세 살 터울로 딸이 하나 있었다. 지금 유치원에 다닌다고 하였다. 인사하는 아이들을 보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났다. 이 애들은 무엇이 되고 싶을까. 아니 김동환은 애들이 무엇이 되기를 바라고 있을까.

“힘찬이는 이 담에 커서 무엇이 될래?”

“나 기관사 될래요. 아저씨처럼 기관사 되어서 기차를 몰고 다닐래요.”

힘찬이를 데리고 김동환을 찾아 왔을 때 김동환이 묻고 힘찬이가 답한 말이었다.

신돌석씨는 어린 시절 광복절이면 꽃전차가 오던 기억을 떠올렸다. 신돌석씨네 동네에서 밑으로 밑으로만 걸어 내려가면 전차 종점에 닿았다. 거기에 광복절날 꽃전차가 왔다. 전차를 꽃으로 장식한 것이었다. 그때 그것을 운전하는 사람이 얼마나 멋있어 보였는지. 형과 둘이서 그것을 보면서 한없이 부러워만 했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형이 중학교에 다니고, 신돌석씨가 초등학교 4학년쯤 되었을까. 삼촌네 애 돌이었다. 삼촌은 그때 이촌동에 있던 아파트에 살았었다. 걸어서도 갈 만한 거리였지만 그때 말고는 간 일이 없었다. 가기 싫었었고, 삼촌도 반기지 않았다. 삼촌은 혼자 힘으로 야간대학이지만 대학을 나왔다. 그리고는 어느 정도 사는 집에 장가갔다. 삼촌이야말로 장가갔다는 말이 어울렸다. 삼촌은 완전히 그 집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는 마지못해서 조카 돌이라니까 갔다. 형과 신돌석씨도 가기 싫었지만 갔다. 분위기가 어색했다. 형과 신돌석씨는 밖으로 나와서 근처 건널목에서 기차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다.

“나 이담에 기관사 될 거다. 그래서 부산까지 갈 거다. 아니 그때 통일이 되면 백두산까지도 갈 거다. 외할아버지 계신다는 신의주에도 가 볼 거다.”

형이 말했다. 신돌석씨는 듣기만 했다. 그렇지만 형이 한 말이 괜히 신나게 들렸다. 그렇지만 형은 끝내 기관사가 되지 못했고, 그날 밤에 두 사람은 아들들을 찾다가 지쳐서 먼저 집에 간 아버지한테 한참 얻어맞아야만 했다.

“기관사는 돼서 뭐해. 힘찬이는 공부 잘 해서 다른 거 돼. 그래야 되지.”

뜻밖이었다. 김동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기관사가 된 것이었다. 김동환의 아버지도 기관사였다. 그러다가 김동환을 낳을 무렵에 그만두었다고 했다. 아니 아마도 짤린 모양이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김동환도 잘 모르는 듯했다. 어쩌면 남에게 말하기 싫어서 모른 척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중학교 다닐 무렵에 김동환의 아버지는 야채 장수를 했었다. 그러다가 아마 고등학교 때쯤 돌아가신 모양이었다. 그때는 신돌석씨가 김동환과 잘 만나지 않아서 정확하게는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런 일이 있어서 그런지 김동환은 기관사가 된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었고, 오히려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히 강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김동환은 공부를 잘했다. 공부를 잘하지 못해서 기관사가 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철도고에 갔고, 그래서 기관사가 된 것이었다. 그는 중학교 때 항상 반에서 1, 2등을 했었다. 중2 때인가는 전교에서 1등을 한 적도 있었다. 그때 노골적으로 싫어하던 담임선생의 표정이 신돌석씨에게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것 때문에 의기소침해진 탓일까. 아니면 과외를 하는 다른 애들에 비해 뒷심이 달린 때문일까. 그 뒤로는 전교 1등은 하지 못했지만, 항상 이름이 거론될 정도로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그는 노력파이면서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아마 인문계로 갔으면 일류대학에 가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라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철도고에 갔다. 그것이 그의 아버지가 원하는 바였고, 그가 원하는 바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어려운 그의 집 살림에 적절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때 김동환은 후회하는 듯한 말을 한 것이었다. 그것도 어린애를 앞에 놓고서.

그때가 언제였을까. 힘찬이가 학교 들어간 뒤이니 아마 신돌석씨가 구속되었다가 출소한 뒤일 것 같다. 93년쯤 되었을까. 힘찬이를 데리고 철도박물관에 오는 길에 김동환에게 연락해서 함께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눈 대화였던 것 같다. 신돌석씨는 그보다 앞선 때 아주 절박한 상황에서 그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91년 가을이었다. 그때 신돌석씨는 조직사건이 터져서 도망다니고 있을 때였다. 지금도 신돌석씨는 아주 가끔 도망 다니는 꿈을 꾼다. 꿈 속에서도 이런 생각을 한다. 이러다가 잡히면, 잡혀 버리면 지금 이 순간에 누리는 것도 다 소용없게 되는데. 아내도, 힘찬이도, 아름이도 만나지 못하는, 아니 유리창 너머로나 봐야 하는 순간이 올 텐데. 그러면서 온몸을 땀에 적신 채 뛰어간다.

도망 다니기 시작한 뒤 한 해가 가고 다음 해의 추석이 되었는데 갈 데가 없었다. 그때는 아내가 몸이 좋지 않아서 아름이만 데리고 친정에 가 있을 때였다. 그래서 힘찬이는 신돌석씨가 데리고 있었다. 그때 있던 옥탑방에서 추석을 맞이한다는 것은 너무 부담되는 일이었다. 추석이 되었는데도 집에 가지 않고 옥탑방에서 애와 함께 있다는 것은 정말 의심받기 딱 좋은 사람이었다. 같이 지내던 사람은 선배가 비워 놓은 아파트에 가 있기로 하였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곳에 같이 가기로 했으나, 나중에 곤란하다고 하였다. 거기에서 다른 사건 관련 수배자들도 만나서 같이 추석 연휴를 보내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김동환이었다. 그 전에도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다행히 연락처를 갖고 있었다. 김동환은 추석이지만 철도 공무원의 특성상 본가에 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그때 총각이었다.

▲ [삽화 - 김윤기]

그래서 추석 연휴가 끝날 때까지 그의 자취방에 함께 있었다. 출근하지 않을 때는 함께 집에 있다가 출근할 때는 같이 부곡역으로 갔다. 부곡역에 있는 의왕 차량기지에서 그가 근무할 때였다. 그가 일을 하고 있는 동안 힘찬이를 데리고 부곡역을 가로지르는 구름다리 위에서 기차가 오고 가는 것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기도 했었다. 힘찬이는 그때 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었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기차가 오고 가는 것을 보면 키득거리면서 좋아했었다. 밤바람이 차니 이제 그만 가자고 해도 계속 있겠다고만 했다.

“애 아버지는 사람들이 이기적이라고 할 때 제일 괴로워했는기라요. 우째 우리가 그런 소리를 들어야하냐꼬. 지금까지 공무원이라고 박봉에 시달렸는데 공무원 연금에서까지 빠져 버리면 말이 되나요. 공무원으로 들어온 사람을 맘대로 공무원 아니게 만들어 놓고 이건 말이 안 되지요. 그렇다꼬 월급이 더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김동환 아내의 경상도 억양이 섞인 말에 분노가 흠씬 묻어 있었다. 노동자는 어느 정도까지 요구해야 이기적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일까. 무엇이 이기적인 것인가. 노동자가 성인 군자가 되어야 하나. 아니면 아무 욕심도 없는 수도승이 되어야 하나.

“지하철공사로 간 동기들도 많다. 재수 좋았지. 거긴 국가기관이 아니고 국영기업체잖아. 월급이 많지.”

91년 가을에 찾아 왔을 때 부곡역 숙직실에서 힘찬이를 한 옆에 재우고 소줏잔을 기울이며 이런 얘기를 했었다. 그때 김동환의 말로는 자기들보다 거의 두 배쯤 되는 봉급을 받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무슨 파업이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신돌석씨는 그때 막 노동운동을 할 때이므로 설득력 있게 말하지는 못했다. 그저 흥분해서 했던 소리 또 하면서 중언부언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서로 잔을 주고받으면서 말로 싸웠다. 앞뒤도 없이. 그런데 이제 김동환이가 국영기업체 직원으로 신분이 바뀌는 것이다. 하지만 임금은 거의 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박봉 속에서 기대하던 공무원 연금만 날아가 버린 상태로 되고.

김동환 아내의 경상도 억양을 들으니 만났던 기억이 났다. 김동환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던 때였던 것 같다. 94년 6월 24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 날짜를 신돌석씨가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그때 철도 지하철 연대 파업이 난 것이 6월 23일이었으니 그 다음 날쯤일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김동환의 아내가 신돌석씨가 일하던 사무실로 찾아왔다. 남영동에 있던 사무실이었다. 그 사무실에서 신돌석씨는 외국인 노동자 문제 프로젝트의 조사 요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임시로 고용된 아르바이트였다. 신돌석씨는 그때 구속되었다가 집행유예로 풀려 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지역에서 알게 된 선배 학출 노동운동가의 소개로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당장 먹고 살 일도 해야 했고, 그곳에서 어느 정도 감각이 있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서로의 필요가 맞아 떨어져서 일하게 된 것이었다.

김동환의 아내가 찾아온 것은 너무 뜻밖이었다. 알고 보니 윤흥식이 알려 준 모양이었다. 김동환의 아내는 남편이 노조 지부사무실에 간다고 나갔는데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뉴스에서 경찰이 농성하는 기관사들을 연행했다는 소식이 나왔고, 이웃에 사는 동료 부인들의 말로도 잡혀간 것 같다는 것이었다. 김동환의 아내는 그때 결혼한 지 3개월 정도 되었었고, 식을 올리기 전부터 애가 있었는지 임신한 티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상태였다.

그 해 6월 23일에 철도노조와 지하철노조가 함께 연대파업을 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철도노조가 한 것은 아니고, 철도노조에 소속되어 있던 기관사들이 만든 임의조직인 전기협이 파업을 한 것이었다. 그때 철도노조는 간선으로 위원장을 뽑았는데 간선으로 선거인단을 뽑고 또 간선을 통해 위원장을 뽑았기 때문에, 조합원의 뜻에 따라 바꾼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였었다.

그때 철도노동자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근로기준법에서 금지하는 변형시간근로제를 중단하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는 요구였다.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치면서 분신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근로기준법이 지켜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영세사업장이 아니라 국가가 운영하는 철도청의 공무원들이 그런 대접을 받았었다. 변형시간근로제는 사용자 임의대로 주 48시간을 변형시켜서 근무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야수당이나 특근수당 등을 전혀 주지 않는 것이었다. 이것은 노조가 조금만 조합원의 이익만 생각해도 나서서 해결할 문제였다.

그러나 그때의 철도노조는 그야말로 관료화된 어용노조 그 자체였다. 그래서 드디어 밑으로부터 전기협이 결성되었고, 다른 직종 사람들도 가담하면서 철도노조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다가 드디어 파업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정확하게 말하면 이들이 처음부터 파업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이때까지 이들이 한 것은 비번 때 돌아가면서 노조지부사무실에서 농성을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이들을 오로지 불법행위를 할 우려가 있다는 자의적 판단으로 경찰을 동원해서 강제 연행한 것이었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이때 경찰은 구속영장조차 발부받지 않은 상태로 임의적인 연행을 하였다는 점이었다. 이때는 군사독재정권도 아니었고, 이른바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권 때였으니 더욱 기가 막힌 일이었다. 이런 상태가 되니 농성을 하다 연행되고 해산당한 노동자들은 즉각 파업을 선언하게 되었다.

여기저기에 연락을 해서 김동환이 안양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돌석씨는 김동환의 아내와 함께 안양경찰서로 갔다. 그러나 면회는 할 수가 없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면서 울먹이는 김동환의 아내를 달래면서 반나절을 보낸 뒤 풀려난 김동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김동환의 아내가 또 전화를 했다. 김동환이 소식이 없는데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철도노동자들은 노조지부사무실에서 강제 해산당한 뒤 기독교회관에서 농성을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정부는 경찰을 투입해서 이들을 강제 연행하였다. 기독교회관에 경찰을 투입한 것은 군사독재정권 때도 없던 일이라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김동환이 여기에서 또 연행되었는지 몰라 걱정을 하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때 농성한 사람들은 검수조합원들이 중심이 되었다고 하였다. 김동환은 비상상태에 대처하기 위한 회의를 위해서 은밀한 장소에 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 [삽화 - 김윤기]

신돌석씨가 94년에 일했던 연구소에서는 대학 신문의 기자들에게 노동문제에 관한 원고 청탁을 많이 받았었다. 마침 철도 지하철 연대파업이 있었기 때문에 그 문제에 관해서 청탁이 많았다. 신돌석씨는 김동환을 소개해 주었다. 김동환이 어느 대학 신문에 실은 글의 제목이 ‘철마는 달리고 싶다’였었다. 인텔리 활동가들처럼 논리적이지는 않았지만, 분노에 차 있고 생활상이 생생하게 담겨져 있었다.

지하철 노조 파업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부가 노조와 공사간의 자율적인 교섭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임금가이드라인 정책은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임금교섭을 할 때마다 임금가이드라인이란 것을 지킬 것을 강요하여 왔다. 그러므로 지하철노조는 사실상 단체교섭권이 박탈되어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하철 노동자들은 지난 4년간 임금이 20.7% 오르는 데 그쳤다. 이 동안 물가는 정부 발표만으로도 29.9% 올랐다. 그러므로 지하철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은 지난 4년 동안 오히려 삭감된 것이다. 이런데도 지하철 노동자들은 주변 사람들이 자기들더러 이기적이라고 말한다면서 사실을 왜곡하는 텔레비전이나 신문만 보면 불이라도 지르고 싶다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김동환이 쓴 글의 일부분이었다. 불과 3년 전에 김동환은 지하철 노동자들에게 이기적이라고 했는데 실천이 그를 이렇게 변하게 만든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역시 노동자는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과정에서의 생각의 변화를 김동환에게 한 번 물어 볼까 하다가 괜히 곤란한 질문을 하는 것 같아 그 뒤 언급을 하지 않았다.

차를 마시고 과일을 좀 먹다가 함께 모은 영치금을 전달하고 그 집을 나섰다. 부곡역까지 걸어가는데 김동환 마누라의 말이 자꾸 뒤통수를 간질거렸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철도노조를 거짓말하는 집단으로 맹그니까 애 아빠 그거 못 참아 했던 거라예. 참말이지 애 아빠 맘 고생 많이 했심더. 대선 때 노조에서, 민노당 지구당에서 욕을 먹으면서도 노무현을 밀었는데, 겨우 돌아온 게 이거라예. 차라리 그때 민노당 권 후보를 미는 건데 그랬나 보다 싶더라구예. 아님 이회창이가 됐더라면 실컷 싸워보구 억장이 무너지지야 않았겠지예.”

안타까운 일이었다. 물론 권영길을 미는 사람도 있었고, 노무현을 미는 사람도 있었다. 김동환은 자기 나름대로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김동환의 선택이 잘못 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를 밀었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이회창이 됐으면 오히려 싸우는 데 편했을 거라는 생각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일 것이라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갑자기 노래하는 술집에 가고 싶어졌다.

“우리 오랜만에 만났으니 한잔하고 가자. 기왕이면 노래하는 술집이 좋겠다.”

신돌석씨가 술 한 잔 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를 가져 올 걸 그랬네. 나는 이 근처에서 한 잔 할 줄 알고 차를 두고 왔지. 노래하는 술집이라면 우리 동네로 가는 게 좋지. 내가 아는 데도 많으니까. 여기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아. 전철로 몇 정거장만 가면 된다. 내가 한 잔 살게.”

최준용이 가자는 곳은 아마 단란주점일 것이다. 신돌석씨가 말하는 노래하는 술집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젠 그런 술집은 없다. 어디 바닷가 포구에나 가면 있을까. 고교를 졸업한 직후인 77년과 78년에는 친구들이 모이기만 하면 노래하는 술집으로 갔다. 막걸리나 소주를 마시면서 젓가락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는 곳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런 집이 많았지만 단속 때문에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 얼마 전부터 박정희 정권은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했다. 물론 술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이웃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니 못하게 한 것을 무조건 탓할 수는 없지만, 무엇이든 국가가 규제하려고 하는 그 버릇은 정말 지금 생각하면 징그러울 정도였다.

▲ [삽화 - 김윤기]

그런데 두레박 친구들이 잘 가던 안국동에 있던 술집은 희한하게도 주변에 주택이 없었다. 큰 건물에 둘러싸여서 노래를 불러도 밖에서 별로 시끄럽지가 않았다. 함께 나온 중학교가 그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만나서 술을 마시다가 단골이 되어 버렸다. 아주 가끔은 매미집이라는 곳에 갈 때도 있었다. 이때 매미집은 대학교 근처에 많이 있었다. 신촌에 많았고, 중대앞 연못시장에도 있었고, 경희대 입구에도 있었다. 그 밖에도 여기저기 있었는데, 이런데 갈 때는 으레 최준용이 앞장을 섰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너무 부담이 돼서 별로 많이 가지는 못했다. 그런 곳에 가면 결국 시계들을 풀고 다음날에 돈을 모아서 갚는 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최준용이 잘 부르던 노래가 있었다. 아니 새로운 노래는 대부분 최준용이 와서 불러서 친구들에게 알려 준 것들이었다. 그 중 하나가 갑자기 떠올라서 노래하는 술집에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 노래의 제목은 ‘할렐루야 송’이라고 하였다.

연애 못하고 죽은 놈(독창) 할렐루야(합창) 이대 앞에다 묻어 주(독창) 할렐루야(합창)

이런 식으로 부르는 노래였다. 이 노래가 좋은 점은 얼마든지 가사를 지어서 부르면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기차 못 타고 죽은 놈 할렐루야. 동환이 앞에다 묻어 주 할렐루야.

김동환이는 이때 벌써 철도청에 취직한 상태였다. 재수생이거나 백수 상태 혹은 공장에 들락날락하던 다른 친구들과는 달랐다.

그러면 동환이도 이어받았다.

재수 못하고 죽은 놈 할렐루야. 흥식이 앞에다 묻어 주 할렐루야.

매미집 못가고 죽은 놈 할렐루야. 준용이 앞에다 묻어 주 할렐루야.

그때 신돌석씨한테는 뭐라 그랬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였다. 아마 술 못 마시고 죽은 놈이라고 했을 것이다. 흥겨운 기분이니까 불렀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었다. 술주정 속에서 결국 죽은 아버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전자전일까. 형은 의식적으로 거의 술을 마시지 않는데, 신돌석씨는 술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정도였다. 어쩌면 술이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은 아닐까 생각될 때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신돌석씨도 이제 환갑이 되다 보니 요즈음은 술 이기는 장사 없다는 말이 새삼 되새겨지곤 하였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신돌석씨는 문득 목청껏 한번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동환이와 함께 한번 목이 터져라 불러 보고 싶어졌다. 얼마 안 걸릴 거다. 동환이가 출소하면 어디 시골에라도 가서 주막집을 골라서 한번 불러야지.

노가리 못 까고 죽은 놈 할렐루야. 노무현 앞에다 묻어주 할렐루야…

그날 노래 부르는 술집에는 못 갔고, 횟집 어딘가를 갔던 것 같다. 그 뒤로도 많은 세월이 흘렀다. 김동환은 그때 출소한 뒤 해직되었다가 복직하고는 노조운동에는 소극적이었다. 무엇이 그를 괴롭게 하였을까? 마치 볼모로 잡힌 듯이 반노동정책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항거하기 어려운 현실이 노동자들에게는 민주 정부를 더 어렵게 만들 때도 있었다. 물론 이명박근혜 정부보다 힘들다고 생각할 수는 없겠지.

스마트폰에 뉴스가 떴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민노총이나 전교조가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또 시작인가? 노무현 정부 때의 암울한 기억을 떠올리다가 신돌석씨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이 아무리 힘든 길일지라도.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김윤기(金允起)

<전시> 1993 개인전(그림마당 민) 외 단체전 다수
         2013 ‘내 앞에 서다’전(세종문화회관)
< 기획> 2006 조국의 산하전 ‘평택-평화의 씨를 뿌리고’(대추리)
        2009 평화미술제 ‘대지의 꽃을 바다가’(제주현대미술관)
        2012 통일미술전 ‘하나는 다른 많은 것을 이룬다’(국회의원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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