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문제 제기

금년 2018년 10월 26일은 안중근 의거 109주년이요, 2018년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중국 뤼순(旅順)에서 순국한 지 108주년이다. 내년 2019년은 1919년 3.1운동기념 100주년이다.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에서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결코 빼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처럼 안중근 의사는 갔지만, 안중근 의사는 남북한 모두가 존경하는 민족의 지도자이다. 그 이유는 안 의사는 우리 민족의 독립회복뿐만 아니라, 동양평화를 위해서 순국하였기 때문이다. 안 의사의 의거는 처음부터 끝까지 민족적 그리고 국제적 공공성을 띤 의거이지, 단순한 개인적 이익을 위한 테러리즘이나 단순 파렴치 형사범(刑事犯)이 아니다.

이 글은 현대 국제법적 관점에서 볼 때,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자리매김을 위한 기초연구작업으로서 안 의사 재판에 대한 국제법적 의미와 재평가를 검토한다.

II. 안중근 의사 의거 개요

안중근 의거가 일어난 당시의 국제정세는 하얼빈과 여순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와 일본의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전 이후로서 러시아의 남하 정책과 일본의 대륙진출 정책이라는 이 각축전에서,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만주경영에서 실적을 올리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 의거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의 하얼빈 역두에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사건이다.

당일 오전 9시경 미리 삼엄한 경계망을 편 하얼빈 역두에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열차가 멈춰섰다. 대기 중이던 러시아 대장성 대신 코코프체프가 수행원을 거느리고 기내에 들어가 그를 영접하였다. 약 20분 뒤 이토가 수행원을 거느리고 코코프체프의 안내를 받으며 열차에서 내려 군악을 울리며 도열한 의장대를 사열하고 이어 각국 사절단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받기 시작하였다.

이때 안 의사는 러시아 의장대 뒤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안 의사는 이토와 10여 보 떨어진 지점에 이르렀을 찰나 전광석화(電光石火)같이 브로닝 권총을 꺼내들고 그를 향해 3발 연속 발사, 명중시켰다. 안 의사는 순식간에 이토가 쓰러진 것을 확인하고, ‘대한민국 만세!’를 3창하고 태연자약하게 러시아 헌병장교에게 오전 9시 30분경 체포되었다.

거사 직후 체포된 안 의사는 역구내 러시아 헌병 분소에서 러시아검찰관의 심문을 받았다. 당일 저녁 오후 10시 10분 러시아는 일제(日帝)의 안중근 신병인도 요구와 자체의 판단에 따라 안중근을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에 넘겨주었다. 안 의사는 일본 영사관 지하 감방에 구금되었다.

그는 10월 30일 미조부치 검찰관에게 제1회 심문을 받는다. 이때 그는 이토를 단죄한 15가지 이유를 제시하였다.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중국 뤼순에 소재한 일본 법원(關東都督府 地方法院)은 일본 형법을 적용하여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 후 안중근은 2월 17일 고등재판장 히라이시를 찾아가 “군인의 자격으로 이토를 처단하였으므로 국제공법을 적용해야 하며 여순지방재판소에서 재판을 받는 것은 한일협약에도 위반되는 것으로 국제사회도 일본의 이러한 처사를 비난할 것”이라고 일제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안중근 의사가 상소를 포기함에 따라 제1심 판결이 확정되었고, 판결일로부터 약 1달 후인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심리과정에서도 안 의사는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을 하였다. “나는 개인자격으로 남을 죽인 범죄인이 아니다. 나는 대한국 의병참모중장(大韓國 義兵參謀中將)의 의무로 소임을 띠고 하얼빈에 이르러 전쟁을 일으켜 습격한 뒤에 포로가 되어 이곳에 온 것이다. 여순지방재판소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인즉, 만국공법(萬國公法)으로써 판결하는 것이 옳다.”

III. 안중근 의거의 국제법적 의미

여기서 국제법적 쟁점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의 국제법적 정당성, 당시 상황이 일본제국과 대한제국 의병 간에 교전상태에 있었는지 또 의병이 과연 무엇이며, 대한제국 의병 안중근과 이토에게 모두 교전자(belligerent) 자격이 있는 지로 모아진다.

1. 테러리즘이 아닌 민족자결권에 기초한 “불법적 식민지배통치”에 대한 정당한 저항 행위

안중근 의거는 일반 국제테러리즘과는 다음과 같이 차이가 있다. 우선 안중근 의거는 민족자결권에 기초한 대한제국의 일본식민제국으로부터 국권회복과 동양평화 수립이라는 국제사회의 정의 실현 등 인류적 불의에 대항한 보편타당성을 가졌던 것에 비하여, 테러리즘은 특정 종교적 동기나 금전적 동기 등 국제 사회의 전반적 동의를 받을 수 없는 목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둘째, 안중근 의거의 대상이 일본 제국주의의 핵심 인물인 이토에 한정되었음에 비하여, 일반적 테러행위는 불특정 무고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셋째, 안중근 의거에서 볼 수 있듯이 안중근 의사는 의거 이후, 자신의 의거 입장을 당당히 밝혔다. 이에 반하여 9·11 테러 사태와 같은 일반적 테러행위는 추측만 난무할 뿐 행위의 명확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넷째, 안중근 의거는 동포들의 독립의지를 고취하였음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피압박민족들의 민족 자결권 회복에 큰 동기를 부여하였다. 피압박민족의 민족자결권은 국제법적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에 비해 일반 테러리즘은 특정한 파괴행위에만 국한된 경우가 많다.

다섯째, 안중근 의거는 1949년 제네바 국제인도협약의 1977년 제1추가의정서 제1조 제4항의 국제적 무력충돌(대한제국 의병참모중장과 일제식민열강 총대장 간의 교전)에 해당되며, 동시에 일제식민지강점에 대해 민족자결권에 기초한 저항행위로서 충분히 그 정당성이 부여될 수 있다.

동 제1추가의정서 제1조 4항은 “...유엔헌장 및 유엔헌장에 따른 국가간 우호관계와 협력에 관한 국제법원칙선언에 의하여 보장된 민족자결권을 행사하기위하여 식민통치,외국의 점령 및 인종차별정권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무력충돌을 포함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2. 합법적인 교전행위

1909년 10월 안중근의 의거 전후 당시에 한일 간 의병항전을 전시상태로 볼 수 있는지 평가한다. 의병운동은 1904년 러일전쟁승리부터 일제조선병합(1910)을 거쳐 해외독립군 전투로 이행하였다. 이 시기는 우리나라가 주권국가로부터 일본 식민지로 전락해가던 시기이다. 이런 조건 속에서 민족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과감히 일어나 항전(抗戰)한 것이 한말의 의병운동이다. 그러나 일본의 무력으로 식민지화의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의병운동은 해외독립군 전투라는 더욱 고차원적인 항전으로 이행돼갔다.

더구나 1895년 10월 민비시해사건과 동년 11월 친일내각에 의한 단발령 강행 이후 의병운동은 분명히 일본을 적대적 당사자로 보았고, 일본도 한국의 의병을 적대적 당사자로 보아 쌍방은 무력으로 투쟁한 결과, 두 당사자 사이에는 적대적 무력충돌이 있었다. 의병들은 조직적인 저항운동을 행하였다. 안중근 의사도 조직화된 의병부대의 간부로서 이토를 살해한 것이라고 진술한 바 있다.

안중근 의거는 피압박민족의 의병대장이 국제법상 민족자결권에 기초해 식민지지배에 대한 최후의 저항수단으로서 요인 저격이라는 군사행동을 통해 민족해방운동을 수행하는 방식인 “민족해방전쟁”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또 안 의사 의거 당시 한일 간에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식민지 해방전쟁의 일환인 교전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현대 국제법적 관점에서 볼 때도, 1977년의 제네바 제1추가 의정서가 채택되면서 민족해방전쟁은 1949년 제네바 4조약 공통 제2조가 의미하는 “국제무력충돌”로 인정되고 있다. 이 경우 민족해방전쟁은 1949년 제네바조약 및 1977년 제1추가의정서에 의하면 합법적인 교전행위로 볼 수 있다.

3. 안중근 의사의 교전자격 문제

현대 국제법상 전쟁 개념과 교전자의 개념기준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볼 때, 의병은 민간이 주체인 점, 자발적인 점, 정의감이 동기인 점, 국가의 요청이나 승인을 받을 수 없는 급한 상황에서 일어난 점이 공통 요소이다. 이러한 의병의 개념에 가장 근접하는 것은 비교적 국제법상 군민병(群民兵·partisans)이라고 볼 수 있다. 교전자인 군민병도 포로로서 대우를 받음은 분명하다.

위의 이론을 안중근 의사에 적용시키면, 당시 한일 간은 이미 교전상태에 있었고, 당시 안 의사는 의병단체에 소속된 간부장교로 있었고, 그가 이토를 사살한 것은 의병전쟁(義兵戰爭)의 일환으로 행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 국내 형법 적용은 불가하다.

안중근 의거에는 만국공법인 전시에 적용되는 국제인도법인 “육전의 법 및 관습에 관한 협약(1899) 및 동 부속서 육전법 및 관습에 관한 규칙”에 명시된 포로의 대우에 관한 규정(제3조-20조)을 적용받아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안중근 의사는 교전자격을 갖추었고, 따라서 포로의 대우를 받아야 할 것이다.

4. 일본 형법 적용의 문제점

설사 하얼빈 사건을 단순한 형사범죄로 보더라도 안중근 의거에 대한 적용법이 한국법인가 아니면 일본법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1909년 당시 대한제국의 신민인 안중근 의사에게 한일 둘 중의 국내 형법을 꼭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대한제국의 형법을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 검찰 측에서는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을 근거로 하여 적용법규는 일본 형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 카마다 관선 변호사조차도 검찰 측의 주장을 반박하고, 한국 형법 적용을 주장하였다. “한일협약은 한국이 장래에 갖게 될 고유한 권리의 실행을 위임한 것이지, 형벌법 제정까지 위임한 것은 아니다. 광무 9년의 한일협약은 메이지 42년의 법률 제52호의 결과 관동 도독부 지방법원이 한청통상조약(韓靑通商條約)에 인정된 한국의 영사재판권을 대행함에 그쳐야 하며, 본 건에 적용될 형법은 한국 형법이어야 할 것으로 믿는 바이다…재판의 관할권문제와 형법의 효력문제를 구별하지 않는 논지이다.” 그러나 법원은 이 사건에 적용될 법은 일본법이라고 판단하였다.

생각건대,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에 따라 한국은 자신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한 것이지 주권을 상실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영사재판이 문제된 사안에 있어서 한국이 일본에 위임한 것은 사법권의 일부에 속하는 영사재판권인 것이지 당해 재판에서 적용할 법에 대한 판단까지 위임한 것은 아니다.

5. 재판의 공정성 문제

본 사건은 국내 차원의 단순한 형사사건이 아니고, 민족내전도 아니다. 일본의 식민제국주의에 맞선 민족해방전쟁의 지도자가 교전 시에 주요 요인을 저격한 것은 국제적 성격을 띤 무력충돌이다. 그런데 안중근 재판은 정치재판이었다. 일본 외무성은 안중근을 사형에 처하도록 뤼순(여순)법원에 지시하였다. 안중근 사법처리에 관한 방침은 일본 정부와 뤼순법원 간에 사전 밀약함에 따라 이후 재판은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이에 관동도독부 지방재판소(일본법원)의 재판 과정심리에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1) 재판부의 구성, 검찰단의 구성, 사선 변호사 선임 제한, 촉박한 재판일정, 일본사람으로만 구성된 통역, 언권(言權) 제약 등은 재판의 공정성을 담보하기에는 미흡하다고 본다.

2) 일본법원이 정치범을 인정하지 않은 실수를 하였다. 정치범은 신념의 차이로 송환되는 경우 박해를 받기에, 일반 국제법상 “정치범 불인도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러시아가 정치범인 안중근을 박해가 충분히 예상되는 일본 당국에 넘겨준 것도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다.

3) 안중근 의사의 의거(범행지)가 하얼빈 역두(당시 동청철도 및 역두는 러시아 국가영역)이다. 러시아의 영역고권에 따라 1차적 형사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는데, 일본측에 넘겨준 것은 설명이 되지 않고 있다.

 

 

고대 법대 졸업, 서울대 법학석사, 독일 킬대학 법학박사(국제법)

-한국외대 법대 학장, 대외부총장(역임)
-대한국제법학회장, 세계국제법협회(ILA) 한국본부회장.
엠네스티 한국지부 법률가위위회 위원장(역임)
-경실련 통일협회 운영위원장, 통일교욱협의회 상임공동대표,민화협 정책위원장(역임)
-동북아역사재단 제1대 이사, 언론인권센터 이사장 (역임)
-민화협 공동의장, 남북경협국민운동 본부 상임대표, 평화통일시민연대 상임공동대표
동아시아역사네트워크 상임공동대표, SOFA 개정 국민연대 상임공동대표(현재)
-한국외대 명예교수, 네델란드 헤이그 소재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재판관,
대한적십자사 인도법 자문위원, Editor-in-Chief /Korean Yearbook of International Law(현재)

-국제법과 한반도의 현안 이슈들(2015), 한일 역사문제 어떻게 풀 것인가(공저,2013), 1910년 ‘한일병합협정’의 역사적.국제법적 재조명(공저, 2011),“제3차 핵실험과 국제법적 쟁점 검토”, “안중근 재판에 대한 국제법적 평가” 등 300여 편 학술 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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