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소리 15

 

4.19부상학생
라영주군

 
장내각은 도무지 알쏭달쏭

누가 애국자며 누가 역적?

=폭동진압훈련을 한다니 참 가관이지=

썩은 것을 싹 도려내지 못 했어요

 

『처음에는 총알에 맞은 줄도 몰랐는데 두 번째 쏠 때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쏜 것인 경찰인지 헌병인지 뒤섞여 있었기 때문에 도무지 누가 쐈는지는 분명치 않아요. 두 번 다 가슴을 관통했으니 병원에 입원한지 삼일 후에사 정신을 차렸어요. 괘씸한 것은 그렇게 아주 가까운 거리의 정면에서 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어떤 사회에서도 볼 수 없을 겁니다. 또 당시 그렇게 총 맞아 죽은 학생들이 한두 사람이 아니더군요.』

피의 4월 19일-이 병원(세브란스 102호)에 입원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문밖에 한발자국을 나갈 볼 수 없이 지루하고 고통스러움을 참는 한 청년이 있다. 사월혁명 선봉의 희생자요. 역사의 증인이기도한 라영주(홍대 미술학도생=24세)군은 입원하기까지의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그 당시는 오직 증한 마음밖에 들지 않았고 18일 고대생 「데모」를 보고 그 이튿날 경무대 어구에서 이렇게 됐죠....』 입원실 남쪽 창밖을 바라보며 혹은 향수에 잠긴 눈초리로 나지막이 말하는 그는 그 나이의 씩씩한 젊음을 왜 병신이 되어 일어나 앉지도 못하며 절망적인 현실에 생존을 호흡하며 봄을 맞이해야 하는가를 더듬어 보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정권교체만도 기대가 컸지만 가만히 보자니 원흉 처벌 같은 처리가 아주 미지근하고 혁명을 완수해보겠다는 노력과 뒤처리가 흐리멍덩해요. 토이기혁명(1922년 터키 혁명)이 진짜였어요. 공백 상태가 길었어요. 특검이니 특별 재판소가 무슨 필요가 있어요. 모조리 총살시켜버렸어야 할 게 아닙니까? 장내각은 이정권 때에 내적으로 통하는 알쏭달쏭한 분자들이 섞여있는 것 같아요. 아주 혁신정권이 나섰더라면 또 달라졌겠지만 요는 썩은 것을 싹 도려 내지 못했어요. 그 뿐 아니라 죽일 놈도 슬그머니 놔주기도 했다지요...』

『4.19혁명 단체들의 간부나리들 가운데는 정치「브로커」도 끼어서 애국자연(애국자인척)한다니..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누워서 늘 생각하면 누가 애국자며 누가 역적인지 참 꼴불견들이 야요. 만고 (역적) 이승만이 이 땅에 살고 있었다면 나 같은 놈은 사형감이겠지요.』

이와 같이 차근차근 따지며 느끼는 대로를 솔직히 말 할 수 있는 정의의 투사 라군 앞에 기자는 무엇을 대답해야 옳을지 쑥스러워졌다.

『... 재일교포북송반대「데모」때 신문에서 그 상황을 짐작했는데 월북하겠다는 그들 교포들은 일률적으로 빨갱이 사상을 가진 자들이 아니고 그중에는 잘살아보겠다는 환상으로 조국 땅을 찾은 사람들도 있어요. 우리 정부는 덮어 놓고 아무 대책조차 없이 못가도록 「데모」만 한다는 것은 될 말입니까? 가령 현재 이곳 실업자들 가운데 북에서 받아들이겠다면 아마도 지원하는 자가 더러 나올 거예요. 무턱대고 「데모」만으로 무슨 효과가 있어요. 속말로 「앉은뱅이 용쓰는 격」이지... 요즘 3,4월 폭동설이라 하여 폭동진압훈련을 한다니 가관이지 「데모」를 진압시키기 위해서 아까운 예산을 소비해서 말이 됩니까? 그건 정권을 오래 유지시키려고 담을 쌓는 식이예요!』

『이북서 중학3년 때 남하하여 그동안 공산치하의 싫증도 당해봤으나 나쁜 것은 나빠도 생각할 점도 있어요. 언론자유가가 보장되는 한, 사는 날까지 할 말 좀 하고 살다죽겠어요.』

『장내각은 강력한 과감성이 모자라요. 자기암살 죄수가 수감된 형무소를 방문하는 것은 인격적인 면에서 존경(?)할 수도 있겠지만 가령 원흉 놓친 놈들을 경찰에서 잡을 능력이 없다는 것도 의심스러워요.- 이런 소리들은 아주 불쾌하거든요. 참말입니까?』

이렇게 흥분될 순간은 가슴의 상처가 몹시 아픈 모양이었다. 사월혁명 한 돌이 다 다가온 오늘 누구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 입원실 한 구석 「베트」위에서 대•소변마저 부자유스럽게 해가면서 모든 것을 참아야만 하는 것일까?

『금방은 어렵겠지만 만약 퇴원이 가능하다면 대학을 마치고 미술을 전공하는 한편 항상 정치일선에 나서지 않더라도 야당의 입장에서 정부의 하는 일을 비판•감시하겠어요.』

-라군은 거침없이 앞으로의 포부를 간추려 말했다. 라군은 더 말을 잇지 않고 굳게 입을 다물었다. 병원 밖은 이미 봄볕이 눈부시다.

 
라영주군 약력

▲황해도 황주 출신(당24세)

▲황주제일중학 중퇴

▲1.4후퇴 남하 경신고교 졸업

▲홍대 미술학부 재학 중 4.19 부상이후 현재까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중.

 

▲ 광야의 소리 15 [민족일보 이미지]

四.19負傷學生
羅永柱 君

 

張內閣은 도무지 알쏭달쏭

누가 愛國者며 누가 逆賊?

=暴動鎭壓訓鍊을 한다니 참 可觀이지=

썩은 것을 싹 도려내지 못했어요.

 


『처음에는 총알에 맞은 줄도 몰랐는데 두번째 쏠 때는 아주 가까운 距離에서 쏜 것인 警察인지 憲兵인지 뒤섞여 있었기 때문에 도무지 누가 쐈는지는 분명치 않아요. 두번 따 가슴을 관통했으니 病院에 入院한지 三日後에사 情神을 차렸어요. 괘씸한 것은 그렇게 아주 가까운 距離의 正面에서 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어떤 社會에서도 볼 수 없을 겁니다. 또 당시 그렇게 총 맞아 죽은 학생들이 한두 사람이 아니더군요.』

피의 四月十九日-이 病院(세브란스一○二號)에 入院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門밖에 한발자국을 나갈 볼 수 없이 지루하고 苦痛스러움을 참는 한 청년이 있다. 四月革命先鋒의 犧牲者요. 歷史의 證人이기도한 羅永柱(弘大 美術學徒生=二十四歲)君은 入院하기까지의 動機를 이렇게 말했다. 『그 當時는 오직 憎한 마음밖에 들지 않았고 十八日 高大生 「데모」를 보고 그 이튿날 景武臺 於口에서 이렇게 됐죠....』 入院室 南쪽 窓밖을 바라보며 혹은 鄕愁에 잠긴 눈초리로 나지막이 말하는 그는 그 나이의 씩씩한 젊음을 왜 病身이 되어 일어나 앉지도 못하며 絶望的인 現實에 生存을 呼吸하며 봄을 맞이해야하는가를 더듬어 보는 것이었다.

『그 當時에는 政權交替만도 期待가 컸지만 가만히 보자니 元兇處罰같은 處理가 아주 미지근하고 革命을 完遂해보겠다는 努力과 뒷處理가 흐리멍덩해요. 土耳其革命이 진짜였어요. 空白 狀態가 길었어요. 特檢이니 特別 裁判所가 무슨 必要가 있어요. 모조리 銃殺시켜버렸어야 할게 아닙니까? 張內閣은 李政權때에 內的으로 通하는 알쏭달쏭한 分子들이 섞여있는 것 같아요. 아주 革新政權이 나섰더라면 또 달라졌겠지만 要는 썩은 것을 싹 도려 내지 못했어요. 그 뿐 아니라 죽일 놈도 슬그머니 놔주기도 했다지요...』

『四.一九革命團體들의 幹部나리들 가운데는 政治「브로커」도 끼어서 愛國者然한다니.. 歷史의 「수레바퀴」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누워서 늘 생각하면 누가 愛國者며 누가 逆賊인지 참 꼴불견들이 야요. 萬苦 李承晩이 이 땅에 살고 있었다면 나 같은 놈은 死刑감이겠지요.』

이와 같이 차근차근 따지며 느끼는 대로를 솔직히 말 할 수 있는 正義의 鬪士 羅君앞에 記者는 무엇을 對答해야 옳을지 쑥스러워졌다.

『... 在日僑胞北送反對 「데모」때 新聞에서 그 狀況을 짐작했는데 越北하겠다는 그들 僑胞들은 一律的으로 빨갱이 思想을 가진 者들이 아니고 그중에는 잘살아보겠다는 幻想으로 祖國 땅을 찾은 사람들도 있어요. 우리 政府는 덮어 놓고 아무 對策조차없이 못가도록 「데모」만 한다는 것은 될 말입니까? 假令 現在 이곳 失業者들 가운데 北에서 받아들이겠다면 아마도 志願하는 者가 더러 나올거에요. 무턱대고 「데모」만으로 무슨 效果가 있어요. 俗말로 「앉은뱅이 용쓰는 格」이지...

요즘 三,四月暴動說이라하여 暴動鎭壓訓鍊을 한다니 가관이지 「데모」를 鎭壓시키기 爲해서 아까운 豫算을 消費해서 말이 됩니까? 그건 政權을 오래 持續시키려고 담을 쌓는 式이예요!』

 
『以北서 中學 三年때 南下하여 그동안 共産治下의 싫증도 當해봤으나 나쁜 것은 나빠도 생각할 점도 있어요. 言論自由가가 保障되는 限, 사는 날까지 할 말 좀 하고 살다죽겠어요.』

『張內閣은 强力한 果敢性이 모자라요. 自己暗殺罪囚가 收監된 刑務所를 訪問하는 것은 人格的인 面에서 尊敬(?)할 수도 있겠지만 가령 元兇놓친 놈들을 경찰에서 잡을 能力이 없다는 것도 疑心스러워요.- 이런 소리들은 아주 不快하거든요. 참말입니까?』

이렇게 興奮될 순간은 가슴의 傷處가 몹시 아픈 모양이었다. 四月革命 한 돌이 다 다가온 오늘 누구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 入院室 한 구석 「베트」위에서 大•小便마저 不自由스럽게 해가면서 모든 것을 참아야만 하는 것일까?

『금방은 어렵겠지만 만약 退院이 可能하다면 大學을 마치고 美術을 專攻하는 한편 恒常 政治一線에 나서지 않더라도 野黨의 立場에서 政府의 하는 일을 批判•監視하겠어요.』

-羅君은 거침없이 앞으로의 抱負를 간추려 말했다. 羅君은 더 말을 잇지 않고 굳게 입을 다물었다. 病院밖은 이미 봄볕이 눈부시다.


羅永柱君 略歷

▲黃海道 黃州 出身(當二十四歲)

▲黃州第一中學 中退

▲一.四後退南下 儆新高校卒業

▲弘大美術學部在學中 四.一九負傷以後 現在까지 세브란스 病院에 入院中.

<민족일보> 1961년 2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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