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잃어버리지 말라 자기의 본질에서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다른 건 다 잃어도 좋다 (괴테)


 자화상 
 -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 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우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만양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독립운동가 김 알렉산드리아는 체포되어 현장에서 즉결 처형되었다고 한다. 죽기 전 13걸음을 걷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13걸음을 걸으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조선 13도의 해방과 자신의 실존적 삶이 하나로 합치된 눈부신 순간들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삶 속에서 매순간 무언가를 선택한다고 생각한다. 현대인은 풍요로운 삶 속에서 선택의 어려움에 처한다는 얘기도 한다.

 김 알렉산드리아도 매순간 선택했을까? 독립운동을 할까? 친일을 할까? 고뇌에 차서 다시 결심을 하고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섰을까?

 나는 사람은 ‘선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어떻게 살지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에는 각자 자신의 길을 갈 뿐이라고 생각한다.  

 김 알렉산드리아의 깊은 내면에서는 어느 순간, 인간 해방이라는 불꽃이 타올랐을 것이다. 그녀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 불꽃이 밝혀주는 길로 걸어갔을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 이르러서도 마음의 불꽃은 똑같이 타오르고 있었을 것이다.

 친일을 한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은 어떨까?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애비는 종이었다.’라고 정의를 내린다. 그렇게 정의를 내렸기에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라고 확신하기에 이른다.

 무엇이 그를 종의 자식으로 규정하게 했을까? 그의 깊은 내면에서 자신은 종의 자식이라고 규정하게 한 힘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그는 그 힘에 이끌려 ‘바람이 부는 대로’ 살아갔을 것이다.

 이미 자신의 삶은 정해져있었기에 그는 그 길을 갔을 뿐이었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라고 슬프게 노래하며.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이마 우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병든 수캐만양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자신의 삶을 혐오하며.

 서정주 시인의 깊은 내면에도 인간 해방의 불꽃이 타올랐을 것이다. 어쩌다 그 불꽃을 외면하게 되었을까? 아무도 그에게 내면의 불꽃을 얘기하지 않았을까? 그는  세상의 바람이 내면의 불꽃을 꺼뜨리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을까? 

 인간은 삶의 어느 순간에 자신의 길에 대해 결단을 내리는 것 같다. 깊은 내면의 불꽃으로 살 것인가? 세상의 바람으로 그 불꽃을 꺼뜨리며 살 것인가? 운명처럼 정해지는 것 같다.

 자신 안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라! 이 말을 한 평생 듣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강한 바람만 느끼며 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사는 게 한 바탕 봄날의 꿈처럼 느껴질 것이다. 삶이 뜬 구름처럼 마냥 흘러 갈 것이다.

 자신 안의 불꽃으로 사는 사람은 삶이 항상 생생할 것이다. 천지자연의 운행과 함께 그의 삶도 운행할 것이다.  

 우리 안에 세상의 바람이 절대 꺼뜨리지 못하는 불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우리 사회는 한 인간에게 한평생 세상의 거센 바람을 맞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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