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뒤, 돈도 없고 학벌도 안 되고 빽도 없어서 서울 근교 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에 취직했던 신돌석씨. 가진 거라곤 의리 있게 산다는 생활 신조 하나였던 그가, 27세 되던 1985년 전국의 공단지역을 휩쓸었던 노동운동의 폭풍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인생의 변화를 겪고, 의리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어느덧 이순의 나이가 되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러나 있을 수 있었던,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이야기는 과거만을 다루는 후일담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인지를,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정해랑

 

▲ [삽화 - 김윤기]

“이건 진보냐 보수냐가 아니에요. 나는 평생 보수로 살아왔어요. 내 친구들도 전우들도 다 그랬어요. 그런데 내 이야기 들으면 다들 진짜냐고 하면서 흥분해요. 내 목숨값, 우리 전우들의 핏값을 도둑질한 거잖아요? 이게 어디 보수예요? 야만이지. 우린 지금 보수를 반대하기보다 야만과 싸우는 거예요.”

월남 참전 개혁연대 소속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80세가량 되어 보이는 어르신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떨리기까지 하였다. 이 분과 신돌석씨가 마주 앉은 곳은 민중운동단체가 주최하는 후원회의 밤이 열린 곳이었다. 신돌석씨가 여기에 도착한 것은 오후 8시가 다 되어서였다. 너무 늦게 와서 그런지 앉을 자리가 마땅치 않았는데 마침 80이 넘어 보이는 어르신들이 앉아 있는 자리 건너편이 비어 있었다. 이렇게 하여 초면인 사람들과 이야기가 오고 가게 되었다.

이 분 들의 말에 따르면 월남에서 전사한 우리 국군이 5천 명이 넘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전사보상비가 미국 정부로부터 한국 정부에 넘어왔는데 그걸 당시 박정희 정부가 쥐꼬리만 한 수당만 주고 다 먹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려고 브라운 각서라고 하는 외교문서까지 조작했다는 것이 이 사람의 주장이었다. 역대 정부는 참전 용사들의 목숨값으로 경부고속도로를 지었다고 말하는데 당시 AID 차관만으로도 충분했다는 것이다. 박정희가 먹은 돈이 최순실이에게로 가서 해외에 은닉되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기어야 찾아내고야 말겠다고 하였다.

이런 이야기들은 항간에 떠돌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누구도 공식적으로 거론하기는 어려웠다. 만약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감옥에 가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수구세력으로부터 매국노라는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정치권에서는 물론이고 시민단체나 민중운동단체들도 이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하는 것은 꺼렸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더니 움직임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난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때 대통령이 출발하는데 광화문에 군복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경찰을 긴장시켰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들이 남북정상회담을 반대하는 성조기 부대인 줄 알았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들은 남북정상회담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을 들고나온 것이었다. 그 주최 측이라는 사람들을 이런 자리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월남전 참전은 신돌석씨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외삼촌이 월남전에서 전사했기 때문이었다. 한참 동안 신돌석씨는 월남전을 정의의 전쟁이라고 알았다. 어렸을 때는 물론이려니와 성인이 되어서까지 그랬다. 그러다가 노동운동을 하면서 다른 시각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의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성격에 대해 이해를 하면서도 우리나라가 참전을 통해 얻은 이익 등에 대한 생각은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분 들의 말에 따르면 그것도 아니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 또다시 해외 파병 문제가 거론되었다. 이라크 파병이었다. 그런데 이때는 민주적 성격을 지닌 노무현 정부 때였다. 신돌석씨는 이라크 파병 때는 확실히 반대의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때는 공장에 있을 때였다. 그리고 월남전 때와는 달리 일반 국민들도 이런저런 생각을 이야기할 때였다. 그런데도 노무현 정부라는 민주 정부에서 왜 파병을 했을가? 신돌석씨는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머리가 복잡해지곤 하였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신돌석씨는 여느 때처럼 기계를 끄고 손을 씻은 뒤 몇몇 사람과 식당으로 갔다. 여덟 명이 앉게 되어 있는 자리였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여섯 명씩 앉았다. 여덟 명이 모두 앉으면 좀 비좁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특히 덩치가 큰 사람이라도 끼게 되면 몸을 비틀기도 힘들 정도가 되기도 하였다.

식당에는 대형 텔레비전이 설치돼 있었는데, 마침 정오 뉴스를 방송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라크 주둔 미군 중부사령관이 이라크에서 저항 세력들의 움직임이 게릴라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처음 인정했다는 소식이 보도되고 있었다. 부시가 지난 5월 1일에 종전을 선언한 이래 미국의 의도대로 전쟁이 되고 있지 않음을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뉴스에 따르면 불과 2주전에 미국의 대표적인 매파인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저항 세력들의 움직임은 게릴라전이 아니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좀 색다른 주장이 나온 것이다.

지금까지 미군 사망자가 148명인데, 이 숫자는 걸프전 때의 미군 사망자와 동일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종전 선언 뒤에만 33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뉴스는 이어서 ‘평화 정착’보다는 제2단계 전쟁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저 새끼들 또 무슨 짓 하려고 저런 소리하는 걸까?”

신돌석씨와 같이 프레스반에서 일하는 윤태형이 한마디 하였다. 30대 초반인 윤태형은 노조 일에도 열심이었지만, 민주노동당에서도 열심히 활동하는 인물이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별로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라크전쟁 문제는 시작도 하기 전에, 하느냐 마느냐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몇 번이나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 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느껴지는 것은 사람들은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자신의 바람에 따라 상황을 이야기하는 듯하다는 것이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겠어.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으니 이제 알라신의 형벌을 받아야지.”

도장반 소속의 김종성이 한마디 했다.

“아니 혹시 무기 소비가 부족해서 좀 더 전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

윤태형이 아까 하던 말을 다시 이어서 했다. 신돌석씨는 그런 견해에 동의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얼마 전에 부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도 점심시간에 텔레비전을 통해서 본 것이었다. 화면을 가득 채운 부시는, 미국은 테러리스트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권리가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 사전 조치도 취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하였었다. 그리고는 이라크에는 대량살상용 생화학무기가 반드시 숨겨져 있으며, 미국은 그것을 꼭 찾아내고야 말겠다고 했었다.

“저런 원숭이 같은 새끼. 석유 때문에 쳐들어가서 사람 죽이고는 뭐 스스로를 보호할 권리가 어째, 어떻게 하면 저렇게 뻔뻔스러워질 수 있을까, 정말 부럽다 부러워.”

그때 윤태형이 한 말이었다.

신돌석씨는 부시의 말을 들으면서 그 바로 며칠 전에 럼즈펠드가 이라크에 대량살상용 생화학무기가 꼭 있다는 증거를 갖고 공격을 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는 보도를 들은 것을 떠올렸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공격했단 말인가? 그렇게 무차별 공격을 해놓고도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해도 되는 것일까? 그리고는 또 반드시 찾아내겠다니. 정말 이라크전쟁은 아무리 눈 씻고 봐도 요만큼의 명분도 없는 전쟁이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었다. 노조가 활성화된 편이라서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신돌석씨의 현장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말 지금처럼 옳고 그른 것을 한쪽에 처박아 둔 경우도 없을 거야. 이전에는 그래도 그럴 듯한 명분이라도 만들었잖아. 걸프전만 해도 이라크가 먼저 쿠웨이트를 침공한 것이고. 그러니 미국의 명분이 먹혔거든. 그런데 이제는 미국하고 그 똘마니들 몇 나라만 찬성하고 대부분 반대하는데도, 그래도 지 마음대로 쑥대밭을 만들 수 있으니 말야. 미국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할 수 없이 끌려다니는 것만 해도 이전처럼 미국을 정의의 사도로 보는 것보다는 발전한 것인가. 정말 천벌을 받기는 받아야 하는데…”

신돌석씨가 한마디 하였다.

“그런 소리 하면 뭘해요. 우리나라에서도 미국을 도와서 이라크에 파병해야 한다는 사람이 더 많은 판인데.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많으니…”

도장반 소속인 김종성이 한마디 하고는 옆에 앉은, 프레스반의 강진수를 힐끗 쳐다보았다. 강진수는 김종성의 눈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을 텐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밥만 먹고 있었다.

지금 한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는 사람들이 항상 같이 앉아서 먹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지정석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함께 식당까지 오는 것도 아니었다. 오늘만 해도 신돌석씨와 함께 온 사람은 윤태형뿐이었다. 그 밖에 함께 왔던 프레스반 사람들은 다른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런데도 같은 식탁에 앉아 먹는 사람들은 대체로 비슷했다. 그 까닭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자기 기계에서 걸어 나오는 시간, 손 씻는 데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 식당까지 오는 데 드는 시간 등을 합친 시간이 비슷한 사람들이 한자리에 앉게 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점심때 한자리에 앉는 사람이 대개 비슷하게 되었고, 점심시간에 나누는 대화는 이전에 하던 대화들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 [삽화 - 김윤기]

부시가 종전을 선언하는 날에도 지금 앉아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함께 텔레비전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윤태형도 있었고, 김종성도 있었다. 그리고 강진수도 있었다. 물론 신돌석씨도 있었다. 또 한 사람은 50대 초반의 박한영이었다. 금형반에서 일하는 금형공이었다. 그 밖에 한 사람은 지금 앉아 있는 사람과는 바뀌었다.

부시가 종전을 선언하였다는 방송이 보도되자 강진수가 신난다는 듯이 한마디 했었다.

“거 봐요. 내 말이 맞죠. 미국이 쉽게 이긴다고 했잖아요.”

다들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신돌석씨도 그랬다. 강진수를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생각도 났다. 하지만 참았다. 참는 수밖에 없지 않나. 저 자식은 자기 나라가 이긴 것처럼 좋아하는구나. 그런데 사실 강진수가 신나게 좋아하는 좀더 근본적인 이유는 이전에 바로 이 사람들과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이 이라크 파병을 호소하는 담화를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이때와 비슷한 사람들이 같이 앉아서 점심식사를 했었다. 담화문이 발표되자 윤태형이 흥분해서 말했다.

“도대체 남의 나라 가서 사람 죽이는 데 왜 우리가 나서는 거야. 노무현이 정신이 있는 거야.”

“노무현으로서도 고민이 됐겠지. 미국이 밀어붙이는데 무조건 안 된다고 할 수도 없는 거 아냐.”

김종성이 한마디 하였다. 김종성은 노조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도 노사모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게 말이 되냐. 그런 식이라면 무엇 때문에 노무현을 뽑았냐. 이전 대통령들과는 그래도 좀 다른 게 있어야 할 것 아냐. 노무현이 사실 여중생 압살과 촛불시위 덕에 대통령 된 거 아냐.”

윤태형이 흥분하여 한마디 하였다. 신돌석씨도 노무현의 발표를 들으면서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좀 심하게 표현해 보면 속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어려운 점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김종성은 윤태형의 말을 듣고는 얼굴이 굳어졌다. 뭔가 할 말은 있지만 지금은 참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런데 이런 어색한 분위기를 한방에 뒤바꿀 발언을 강진수가 하였다.

“이라크에는 당연히 파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당연히 파견해야 한다니. 적어도 신돌석씨의 사업장에서는 관리자들도 조심스럽게 말해야 할 내용이었다. 그런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하니까 전부 뒤통수라도 맞은 듯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왜 당연히 파견해야 한다는 거지?”

신돌석씨가 한마디 하고 나섰다. 도저히 그냥 듣고 앉아 있을 수가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야 국익 때문이죠. 어차피 우리가 거부할 수 없을 바에는 이럴 때 파병을 해서 이득을 얻어야죠.”

이득이라니. 역시 강진수답다는 생각을 했다. 강진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신돌석씨는 강진수의 그런 점을 인정하였다. 결근이나 조퇴는 물론 지각도 한 번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근무시간에 농땡이 피는 적도 없었다. 불량을 만들어내는 일도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웠다. 주어진 일을 꼼꼼히 처리하면서도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지 않기 때문에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노조 활동에는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노조 활동에 적극적인 사람들은 조금 못마땅해 하기는 했지만 그것 이외에 드러나는 문제점을 딱히 찾아내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신돌석씨 역시 그런 강진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편이었다. 강진수는 성실하긴 하지만 자기 일 이외의 것에는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무거운 자재가 들어올 때도 강진수는 자기 일만 하다가 나이 든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면 그때 가서야 움직이려고 하였다. 물론 그는 싫다는 표정을 짓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형식적으로 자기가 욕 안 먹을 정도만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신돌석씨는 그가 대놓고 싫다는 의사를 표시하지 않기 때문에 더 얄밉게 느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었다. 강진수는 자기 때문에 다음 일 처리를 하는 사람이 곤란에 처해도 별로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음 사람의 작업량이 밀려 있어도 자기 작업량을 계속해서 뽑아냈다. 아무 생각이 없이 그러는 것인지 알면서도 일부러 그러는 것이지 헛갈릴 때가 많았다. 작업장 바깥에서의 생활 역시 그랬다. 함께 술을 마셔도 그는 자기 몫을 백 원 단위까지 계산해서 지불하곤 하였다. 좋은 생활 태도 같기도 했지만, 신돌석씨 체질에는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그러면서도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면서 순진한 듯 행동했다. 아니 어쩌면 순진한지도 모른다. 몸에 밴 개인주의 체질 때문에 순진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었다.

신돌석씨가 이런 류의 사람을 싫어하는 데는 타고난 성격 탓도 있지만, 자기 나름대로 이전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84년에 제대한 뒤 들어간 현장에서 노조를 만들 때의 일이었다. 85년 6월경 한창 노조준비모임을 만들고 준비를 할 때 갑자기 현장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때 준비모임에는 학생 출신인 조철구가 있었고, 지역 종교 단체를 통해 70년대 민주노조 출신들에게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 노동자 출신 활동가가 두 명 더 있었다. 이들 역시 이런 사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조립 3반이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오후에 일을 대충 대충하면서 농담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20대 초반들이었다. 그때는 중소기업체 직원은 거의 20대들이었었다. 그러므로 이직률도 심했고, 이직률이 심하다 보니 그저 지나치는 곳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신돌석씨 자신도 공장에 취직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가졌었다. 지금은 내가 여기서 월급 받고 살아야 하지만 언젠가는 이런 일 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들도 그랬던 모양이었다. 그러므로 일하다가 대충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곤 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사장이 조립3반에 들어서다가 그런 장면을 목격하였다. 사장이 호통을 치고, 그중 눈에 띄는 세 명을 당장 해고하라고 생산부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 시절에는 아주 흔하게 있는 일이었다. 사장이 작업장을 돌아볼 때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웠다고 해서 즉시 해고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문제는 이런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사용자도 그랬지만 노동자들도 그랬다. 그때까지 일했던 일당만 계산해 주면 내가 이런 데 아니면 다닐 데 없냐는 식으로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나갔다. 어떤 경우에는 월급을 계산해 주지 않아도 그냥 나갔다. 다음 달 월급날에 받으러 오라는 식이었다. 아니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대부분 그냥 갔다. 하지만 가끔 그러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말하자면 돈을 내놓으라고 게기는 것이었다. 그런 경우에는 돈을 받아갈 수 있었다. 역시 개도 짖어야 밥을 먹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때 해고를 당할 처지에 있던 사람들은 그 공장에 친구들이 많았다. 또 당시에는 노동자들이 구로동맹파업 등을 간략하게 왜곡된 형태로나마 뉴스를 통해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싸워야 한다는 인식이 아주 낮은 수준에서나마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일단 해고 통고를 받고 공장 밖으로 나간 뒤 점심시간이 지난 뒤에 작업장 안으로 담을 넘어서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자기들이 있던 조립 3반에 가서 파업을 하자고 선동하였다. 사실 이들이 말했던 것을 보면 ‘선동’이라고 말할 내용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파업을 하자고 사람들에게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들은 이때 ‘파업’이라는 말도 잘 몰랐다. 무조건 기계를 끄자는 것이었다.

조립반은 기계가 별로 돌아가지 않고 수작업이 많은 곳이었다. 또래들이 많아서 일단 행동이 쉽게 일치되었다. 그들은 그냥 작업장 바깥으로 사람들을 몰고 나갈 생각이었다. 나가서 무엇을 할 것도 아니고, 이 더러운 회사 한꺼번에 그만둔다는 식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계획이 바뀌었다. 누군가가 다른 반 사람도 몰아서 나가자고 한 모양이었다. 이들의 행렬이 조립 3반에서 2반으로 그리고 1반으로 이어져 갔다.

조립 1반에는 노조준비모임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중 안형남이라고 하는 여성 노동자가 있었다. 종교단체에서 교육을 받은 활동가였다. 하지만 그 자신도 교육을 받은 적만 있었던 정도일 뿐 파업이나 시위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프레스반으로 와서 같이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는 활동가인 박용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박용수는 신돌석씨와 동갑이었는데, 회사에 들어온 지는 두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역 내에 이곳저곳의 사업장을 다녔고 종교단체를 통해서도 많은 교육을 받아서 꽤 경력 있는 활동가였다.

그는 이 지역에서 오래 살았고, 활동도 오래 했기 때문에 비록 사업장 근무 경력은 짧아도 아는 사람이 많았다. 조철구가 중심이 되었던 프레스반과 도장반의 친목회가 조립반 쪽으로 급속히 확대되어 노조준비모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입사한 뒤 연결고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박용수는 안형남에게 이야기를 들은 뒤 즉시 조철구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두 사람은 역할 분담을 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학생 출신인 조철구는 파업이 확대되면 드러나게 되어 있었으므로, 이 사건을 조철구가 주동해서 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것을 신돌석씨는 그 바로 뒤에 조철구에게서 들어 알게 되었다.

조립반에서 시작된 대오는 별로 불어나지 않으면서 프레스반과 도장반쪽으로 왔다. 대오는 크게 불어나지 않았지만, 모든 작업장에서 기계가 멈춰지고 구경을 하게 되면서 사실상 파업이 시작되었다. 이때 프레스반이 조철구를 선두로 해서 모두 기계를 끄고 대오에 합류했다. 그러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급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프레스반에는 노조준비모임에 들어가서 노동법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횃불‘이라고 하는 친목회도 있었다. 또 무엇보다도 시위 전문가인 학생 출신 조철구가 있었다. 한 사람이 상황을 얼마나 다르게 진전시킬 수 있는지를 신돌석씨는 그때 실감나게 목격했다. 아마도 그래서 정보기관이나 경찰에서 그런 활동가라는 사람들을 대중과 분리시키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신돌석씨는 뒤에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활동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또 그들이 대중과 결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저 대오를 지어 작업장 안을 돌아가기만 하던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불만이었던 임금 문제, 작업장 환경 문제 등이 서툰 말들로 만들어져서 외쳐졌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관리자들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프레스반에서 이 대오에 합류하지 않은 사람이 둘 있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이재수와 가장 나이가 어린 최광선이었다. 이재수는 그 당시 30대 중반이 된 노총각이었는데, 반장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술을 너무 좋아해서 금형기사가 되려다가 못 된 그런 사람이었다. 조철구와 신돌석씨는 그와 자주 어울렸었다. 횃불이라는 친목회를 만들 때도 그를 넣어서 좌장으로 모실까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그의 생활 태도를 본 뒤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는 그저 좋은 사람일 뿐 어떤 목적을 위해서 자신을 절제한다는 생각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좀 심하게 말하면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술에 취해서 얼어 죽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또 한 사람 최광선은 스물두 살 먹은 친구였다. 성실한 것으로 따지면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였다. 반장은 물론 그를 좋아하였고, 생산과장이나 사무실에서도 좋아하였다. 그 직장에서만 4년이 넘게 근무하고 있었다. 최광선이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예상된 일이었다. 그는 회사의 규칙에 어긋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사람이라고 다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를 욕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를 심하게 욕하는 사람이 있었다. 원형민이라고 하는 친구였다. 최광선보다는 한 살 더 많은데 입사 시기는 비슷하다고 하였다. 둘 다 아주 어린 나이에 그 공장에 들어온 셈이었다.

원형민도 입사 초기에는 최광선 못지않게 성실한 사람이었는데, 한 1년 지난 어느 날 사고를 당해서 손가락 두 개가 잘려나간 뒤부터 성격이 거칠어지고 불성실하게 되었다고들 하였다. 그는 술을 좋아하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는데, 그 때문에 신돌석씨와는 아주 잘 어울리는 사이였다. 횃불 모임에도 그는 참석하였다. 하지만 노조준비모임에는 그의 불성실함 때문에 가입시키지 않았다. 신돌석씨는 그를 참석시키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제안을 했는데, 조철구나 박용수는 그런 친구는 경계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의 가입을 반대하였다. 그래서 결국 그에게는 노조준비모임이 비밀에 붙여지게 되었다. 파업이 일어나자 원형민은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그러면서 최광선에 대해 욕을 해댔다. 사내 자식이 그렇게 살아서 되겠냐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도 원형민과 같은 생각을 하였다.

▲ [삽화 - 김윤기]

그 날 파업은 조립반에서 시작되었다가 프레스반, 도장반을 거치면서 대오가 갖추어져 갔고, 권선반 등도 합류하면서 회사 운동장으로 집결하였다. 이때부터 조철구의 지휘 아래 노래도 부르고, 새로 배우기도 하면서 그 날 저녁까지 파업은 계속되었다. 노조준비모임은 드러나지 않는 선에서 파업을 뒷받침해 나갔다. 그리고는 일단 해산한 뒤 다음날 점심시간부터 다시 파업을 하기로 하였다. 계속 파업을 해야 한다는, 다시 말해서 철야농성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도 일부 있었지만, 곧 노조를 결성할 예정이었고 그것이 더 중요하므로 이 선에서 압력을 넣은 뒤 일단 다음날 다시 해서 마무리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사실 노조준비모임에서는 파업이 일어나자 노조결성의 열기를 확대할 수 있는 호기로 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오랜 시간 공들여서 준비했던 것이 깨지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없지 않았다.

다음날 점심시간 뒤에 다시 파업은 시작되었다. 전날에 파업을 시작했던 조립반은 오히려 나서기를 꺼리면서 주춤주춤하였다. 횃불 친목회로 뭉쳐져 있던 프레스반이 주동이 되어 운동장으로 나서자 이어서 도장반, 조립반, 권선반 등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회사에서는 어제 좀 그러다가 말 것으로 알았던 모양이었다. 그때는 노동자들의 파업 준비도 어수룩하였지만, 회사측의 대처도 허둥지둥 그 자체였다. 당황한 회사측은 협상을 하자고 하였고, 대표로 뽑혀간 몇 사람들과 협상은 진행되었다. 이어서 경찰도 왔는데, 그 당시에 그 지역에는 기동대라는 것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몇몇 전경이 왔고, 대공과 형사가 왔다. 회사측은 거의 대부분 파업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노동자들은 너무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식사 개선, 작업복 및 장갑의 충분한 지급 그리고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 잔업 금지 등이 눈에 보이는 개선이었다. 노조준비모임에서는 그 이상의 요구는 노조를 결성한 뒤로 미루기로 하였다.

파업이 끝나고 며칠 뒤 전격적으로 조철구가 해고되었다. 불법적으로 작업 중단을 주동하여 사칙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그가 해고되면서 작업장 내에 그가 대학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고, 사실이 좀 과장되어 전해지기도 했다. 그가 광주사태 주동자로 남한산성에서 징역을 살고 나온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시위 주동자로 징역을 산 적은 있지만, 광주민주화운동에 직접 관련된 사람은 아니고 더욱이 남한산성에서 살았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이야기가 퍼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마 회사측에서 노동자들이 두려워할 만한 내용으로 각색해서 퍼뜨리는 것 같았다.

노조준비모임은 해고에 대한 항의를 조철구 개인의 출근투쟁으로 제한하기로 결정하였다. 노조준비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조철구 자신도 그렇게 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이어서 사흘인가 뒤에 좀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파업 때 초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조립반의 두 사람과 박용수가 해고되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해고가 아니라, 견습 기간이 끝난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3개월 동안 견습으로 채용하고 나서 정식 채용 여부를 결정할 수가 있었다. 그래도 근로기준법에 어긋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3개월이 되지 않은 채 파업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 두드러졌던 사람들이 정식 채용되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었던 것이다.

박용수는 조철구와 역할 분담을 할 정도로 조심하기는 했으나, 아마 파업을 계기로 경찰이나 노동부 등이 회사와 함께 신원 조회를 한 모양이었다. 박용수가 지역 내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을 가능성은 많이 있었다. 그는 여기저기 회사에서 작은 분규에 관련된 일이 많았고, 종교단체에서 교육받았다는 사실도 정보기관에서 알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박용수와 두 사람이 해고되었으므로, 조철구 혼자서 하던 출근투쟁이 네 사람이 하는 출근투쟁으로 바뀌었다. 네 사람은 회사 앞으로 와서 유인물을 돌리고 아침마다 시위를 하였다.

▲ [삽화 - 김윤기]

이들의 출근투쟁은 노조결성을 위한 토대 마련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현장의 분위기가 매우 고조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들이 노동부에 진정해서, 지금까지 회사 측의 교묘한 방법 때문에 받지 못했던 밀린 임금을 받아내는 일이 생기자 사람들의 관심은 더욱 드높아졌다. 그 내용을 보면 이런 것이었다. 이 회사의 취업규칙에는 4대절, 즉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에는 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회사는 취업규칙을 공개하지 않은 채 이 날에도 근무를 하게 했다. 노동자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평일과 다름없이 근무했었다. 당시에는 일요일을 제외하면 노동자들이 놀 수 있는 날은 음력 설과 추석 휴가뿐이었다. 그 외에 노총 창립 기념일로 근로자의 날이라고 하던 3월 10일이 있기는 하였다. 물론 월차 휴가, 연차 휴가가 있었지만, 생산직 노동자가 그것도 중소기업에서 이런 날을 찾아 먹는다는 것은 그만둘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때 알려진 취업규칙에 따르면 4대절은 원래 휴일이므로 특근수당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정상근무하는 날의 일당만 받았던 것이다. 특근수당으로 150%씩 더 받으니 1년에 6일 정도의 일당을 더 받게 되는 셈이었다. 최저생계비에도 훨씬 못 미치는 임금을 받던 그때의 노동자들로서는, 특히 장기근속자의 경우 적잖은 돈을 받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이 돈을 받고는 자세한 내역을 적어서 유인물로 출근투쟁 때 노동자들에게 돌렸고, 노조준비모임도 노조만 만들어지면 이 돈을 모두 받을 수 있음을, 그 외에도 얼마든지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음을 선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노동부에 사장이 불려 가서 이와 관련된 진술서를 썼다는 내용을 적은 유인물은 많은 노동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다.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김윤기(金允起)

<전시> 1993 개인전(그림마당 민) 외 단체전 다수
         2013 ‘내 앞에 서다’전(세종문화회관)
< 기획> 2006 조국의 산하전 ‘평택-평화의 씨를 뿌리고’(대추리)
        2009 평화미술제 ‘대지의 꽃을 바다가’(제주현대미술관)
        2012 통일미술전 ‘하나는 다른 많은 것을 이룬다’(국회의원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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