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린 건 없지만 많이 먹어라”
모래라도 씹어 삼킬 나이였던 학창시절 친구의 집에 놀러 가면 친구의 어머니가 꼭 하시던 말씀이셨다. 실제로 차린 게 없는 건 아니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먹고 먹고 또 먹어도 뭔가 계속 나왔고 불뚝 나온 배를 두드리며 그만 먹으려 해도 어머니의 음식을 나르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차린 건 없지만 성의를 봐서 많이 드세요”
집들이 하는 신혼 부부 집에 가도 칠순 잔치하는 노부부의 식탁에서도 으레 빠지지 않는 말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우리 고유의 겸양어가 되었다. 그 말을 듣고 “가난한 살림 뻔히 아는데 상 차리느라 애 좀 썼겠네”하는 사람은 없다. “짠수(눈치)없는 잔말쟁이(잔소리꾼)이나 탁 없는(터무니없는) 꽝포쟁이(허풍쟁이)”로 몰리기 십상이다.

2018년 9월 19일 백화원 초대소로 문재인 대통령 내외를 초대한 김정은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께서는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보시는데 발전된 나라들에 비하면 우리는 초라하지 않나. 지난번 5월 달에 문재인 대통령 께서 우리 판문점 지역에 오셨을 때 장소와 환경이 그래서 제대로 영접을 못해드린 게 그게 그리고 식사 한 끼 대접 못해드린 게 ...우리 비록 수준은 낮을 수 있어도 최대 성의를 다해서...”

이 장면은 곧바로 남측으로 생중계됐고 주요 신문들은 타이틀을 뽑아댔다 “김정은 위원장 솔직 화법 숙박시설 초라해”. 솔직화법으로 북한 경제의 열악함을 인정하고 독재자 이미지를 상쇄하기 위한 포석 이라는 해석도 곁들였다.

백화원은 대동강변의 인공호수를 앞에 두고 100가지의 꽃을 피우는 정원을 가진 곳이다. 이태리에서 직수입한 통 대리석에 고급카펫과 샹들리에, 귀빈의 접대 공간으로는 세계적으로 빠지지 않는 고급스런 곳이다. 남측 언론의 데스크 중에는 탁 없지는 않아도 짠수 없는 이들이 좀 있다.

2018년 2월 7일 13년 만에 남측을 방문한 평창 동계올림픽 북측 응원단 오영철 단장의 첫 마디는 “남녘의 겨레에게 북녘 동포의 인사를 전합니다”였다. 우락부락한 중년의 사내도 더 정확하게는 권위적이고 사나울 것 같았던 북한의 사내도 저렇게 따뜻할 수 있구나 싶었다. 그의 한 마디는 분단의 두려움과 만남의 기대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데 충분했다.

선수단 응원을 위해 방남한 삼지연 관현악단의 구성도 심상치 않았다. 만수대예술단 산하 삼지연악단과 북한 대중음악의 교과서 모란봉악단 그리고 사상의 척후대, 혁명의 나팔수 청봉악단, 조선국립교향악단, 공훈국가합창단 등 북한을 대표하는 최정예 연주자들의 연합체였다. 그야말로 북한에서는 한 몫 한다는 예술가들의 총 출동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북한 최고의 지휘자로 육군 중장의 군사 칭호를 받았고 북한 음악가들의 최종 목적지라고 일컬어지는 인민 예술가 장룡식 공훈국가합창단 단장과 칠보산 전자악단 시절부터 남쪽 노래들을 편곡 했던 삼지연 악단의 윤범주가 공연 파트별로 지휘를 맡은 것도 주목할만한 일이지만 애초 모태가 된 삼지연악단의 규모가 50여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84인조 팝스 오케스트라 편성을 포함한 총 140여명의 구성 또한 남다른 일이었다.

남측 관객들이 불편해 할만한 노랫가사를 바꿔부르는 것도 (두 번째 곡 “설눈”아 내려라를 “흰눈”아 내려라로 세 번째곡 비둘기야 높이 날아라 2절 네 자란 보금자리 “평양”이 하도좋아를 “이땅이” 하도좋아로 일곱 번째 발표곡 달려가자 미래로 3절 “로동당세월우에”를 “이땅의 번영위해”로 현송월 단장이 부른 백두와 한나는 내 조국 3절 “태양조선” 하나되는 통일이어라는 “우리민족으로”)좋았고 삼지연 관현악단장 현송월이 직접 무대에 서는 것도 좋았지만 “우리네 평양 좋을시구, 사회주의 건설이 좋을시구”라는 가사가 포함된 노래 모란봉은 아예 선곡에서 제외시킨 반면 기악 연주를 제외한 21곡의 노래 중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포함한 13곡이 남측의 노래였다는 것이다.

모란봉악단의 김옥주, 청봉악단 중창조의 김성심, 김주향, 김청, 송영, 리수경, 로경미, 권향림. 이 공연에 참가한 모든 음악인들은 어릴 적부터 음악 수재로 자라 사회주의 혁명음악 즉, 사상성과 예술성이라는 음악의 양대 축을 오랫동안 교육받고 훈련받고 인정까지 받은 사람들이다. “음악은 정치에 봉사해야하며, 정치가 없는 음악은 향기가 없는 꽃과 같고 음악이 없는 정치는 심장이 없는 정치와 같다”는 김정일 위원장의 교시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충실하게 실천하는 예술 선전대의 최전선에 선 이들이 “한마디로 말하여 썩고 병든 사회이며 전도가 없고 멸망에 가까워 가는 사회(로동신문 2018.10.18.)”라고 여기는 자본주의 노래를 부른 것이다. 손님으로 찾아왔으니 손톱만큼의 흠도 남기지 않겠다는 예(禮)의 표시다.

초대자의 입장을 고려하고 초대받은 곳의 관객들에게 호응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노래를 선곡하는 건 배려이자 성의이고 모든 가수들이 갖춰야할 혹은 이미 갖추고 있는 덕목이다.

만약 이들이 생면부지의 땅 남측 서울의 공연장에 와서 평소의 레파토리인 강성대국, 선군정치의 노래만 부르고 거기다가 북한인민들은 다 아는 이 유명한 노래를 모른다느니 몰라서 호응하지 못하는 관객을 두고는 박수조차 잃어버린 경직된 기계라느니 평했다면 남한 국민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참고로 2018년 4월 1일 평양 대동강지구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남측 예술단의 공연 ‘남북평화 협력기원 남측 예술단 평양공연-봄이 온다’에서 남측 가수들이 부른 20여곡 중에 북한 노래는 공동 사회자 소녀시대의 서현이 부른 푸른버드나무(전동우 작사 황진영 작곡 김광숙 노래) 한 곡이었다.

2018년 4월 11일 동평양대극장에서는 어김없이 4월의 봄 친선 예술축전의 막이 올랐다. 김일성 주석의 탄생 70년을 기념하고 자주 평화 친선의 무대를 세계 진보적인 예술인과 함께 하기위해 만들어진 이 행사는 1982년 시작해 1985년부터 정례적으로 열리고 있다.

31회째를 맞는 올해에는 로씨야 월리나야 스쩨삐 까자크예술단, 벨라루씨국립음악아까데미야극장 고전발레단, 라오스국립예술단, 몽골전군협주단, 에스빠냐 플라멘꼬민속음악단, 재일조선인예술단, 프랑스 알베리크 마냐르 명칭 실내악단과 타이 요술단, 볼스까와 쿠바의 연주인들이 참여했다. 30회였던 2016년 4월 17일자 로동신문은 32년동안 연 1080개 국가에서(참가국 중복을 포함) 1800개 예술단 1만7000명이 참가 했으며 관람객은 239만명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예술단은 2007년 제 25회 참가자인 미국의 ccm 그룹 casting crowns 다. 복음성가로는 드물게 450만장의 음반을 팔았으며 그래미상을 수상했고 미국 복음주의 음악협회(Gospel Music Association)가 주관하는 비둘기 상(Dove Awards)을 세 차례 받은 그들은 애틀랜타 근처의 이글스 랜딩침례 교회 (Eagles Landing Baptist church)에 적을 두고 있는 신실한 기독교인들이다.

“평양공연에서 북한 관객들에게 ‘반갑습니다’를 처음 선사했습니다. 북한 관객들이 처음에는 우리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두 번째로 한국말로 북한 노래인 ‘반갑습니다’를 부르니까 더더욱 놀라더군요. 서로간의 마음의 장벽이 깨지니까, 박수까지 쳐주면서 함께 부르더라구요. 참 멋있는 경험이었어요(2007년 자유 아시아 방송 인터뷰).” 팀의 리더인 마크 홀(Mark Hall)목사의 말대로 2007년 4월 11일 동평양대극장에 울려 퍼진 그들의 노래는 단아하고 정갈하고 쓸쓸 하기도한 영성의 기도였다.

푸르른 하늘가에 희망의 나래펴고
한없이 자유로이 춤추며 날으네
비들기야 비들기야 더 높이 날아라
내조국의 푸른하늘 흐리지 못하게

High up in the blue sky
Wings of hope are spreading wide
A white dove is dancing
Flying free and happily

White dove
White dove
Flying higher and higher

Lest my country's clean and blue skies
Should be cloudy and grey

White dove
White dove
Flying higher and higher

Lest my country's clean and blue skies
Should be cloudy and grey

-비둘기야 높이 날아라 white dove fly high -

마크 홀(Mark Hall)과 메로디 디베보(Melodee Devevo)의 노래는 여린 기타 솔로의 반주에 실려 조선어와 영어를 넘나들며 춤추었다. 느릿하고 무겁게 흐르는 간주의 바이올린 선율은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된 북한이란 나라의 설움을 느끼기에 충분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소위 독재정권의 폭압아래 신음하는 북한의 민중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어쨌든 북한의 여성가수라면 누구나 한번쯤 부른다는 북한 최고의 명곡중 하나인 “비둘기야 높이 날아라”는 그렇게 미국으로 날아갔다. 노래는 평양의 한 스튜디오에서 녹음했고 캐스팅 크라운스는 미국으로 돌아간 후 곧바로 자신들의 음반에 이 노래를 수록했다. 복음성가를 부르는 그들의 주요 레파토리에서 빠지지 않는다. 그들은 내슈빌을 기반으로 한 애니 모세 밴드 (Annie Moses Band)와 함께 2009년 26회 4월의 봄 친선 예술 축전에도 초청받았다.

 

 

고단한 사람들의 일상에 희망의 언어를 들려주는 노래하는 사람

청년문예운동의 시기를 거쳐 노래마을의 음악감독.민족음악인 협회 연주분과장을 지냈고, 다수의 드라마.연극.독립영화 음악을 만들었으며 98년 1집 "사람이 사는마을"2000년2집"내 상한 마음의 무지개"2002년3집"위로하다.위로받다"2006년 4집 "기억과 상상"등의 앨범을 발표했으며 2010년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를 출간했다.

현재 시노래 운동"나팔꽃"의 동인으로 깊이있는 메시지를 통해 삶의 좌표를 만들어가는 음악을 지향하고있으며 성공회대학교에서 "노래로 보는 한국사회"를 강의하고 있다. (사)희망래일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수정,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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