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사랑을 일으키는 힘이고 무능력은 사랑을 일으키는 능력이 없다 (에리히 프롬)


 세월의 강물
 - 장 루슬로

다친 달팽이를 보게 되거든 
도우려 들지 말아라 
그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것이다. 
당신의 도움은 그를 화나게 만들거나 
상심하게 만들 것이다. 

하늘의 여러 시렁 가운데서 
제 자리를 떠난 별을 보게 되거든 
별에게 충고하고 싶더라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라.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아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모 고등학교에 강연을 가서 학생들에게 이 시를 읽게 했더니 한 학생이 묻는다. ‘그럼 다친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친 달팽이는 도와주지 말고 다친 사람은 도와 줘야 할까?

 나는 그 학생에게 말했다. ‘네가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려면 네가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해. 그래야 남들이 네게서 도움을 받게 돼. 네가 악취가 나는 사람이 되면 네가 아무리 남을 도와주고 싶어도 사람들은 네게서 악취를 맡게 돼. 도움을 줄 수가 없어. 남을 도와주고 싶을 때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봐야 해.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런 건 아닌지?’

 태양은 스스로 뜨겁게 타오르며 신나게 살아간다. 삼라만상은 그 빛을 받으며 살아간다. 가을이 되면 밤나무는 잘 익은 밤을 툭툭 땅에 떨어뜨린다. 다람쥐는 그 밤을 먹으며 살아간다. 우주 차원에서 보면 누가 누구를 도와주지 않는다. 삼라만상 각자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그 ‘자신의 길을 갈 뿐’으로 삼라만상은 서로 도움을 주며 살아가게 된다.

 나는 그 아이에게 말했다. ‘사람도 각자 자신의 길을 가야 해. 자신의 길을 꿋꿋이 갈 수 있어야 해. 그러면 예수가 얘기하듯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남을 도와주게 돼. 이때 우리는 진정으로 남을 도와줄 수 있게 돼.’

 ‘다친 사람은 도와 줘야 해!’라는 도덕을 갖고 살아가게 되면 마음 안에 그림자가 생기게 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이 다친 사람을 외면하며 살아가는가? 그때마다 깊은 마음속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생긴다. 그 그림자는 켜켜이 쌓이며 스스로 힘을 갖게 된다. ‘악마’가 된다. 자신은 하지 못하면서 다친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게 된다. 위선자, 이중인격자가 되어 버린다.

 오래 전 TV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란 주제로 열강을 하는 마이클 샌델을 보며 나는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는 주로 특별한 상황 속에서 어떤 게 정의인가 하는 논의를 했다. 황당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그런 특별한 상황을 몇 번이나 맞닥뜨리게 될까? 그가 정말 정의를 얘기하고 싶으면 미국이라는 제국(帝國)이 저지른 과거의 무수히 많은 불의들이 논의되어야 하고 지금 이 순간에 미국이 다른 나라에 대해 저지르는 불의들과 미국 내에서 무수히 일어나는 불의들이 논의되어야 하지 않나? 눈에 뻔히 보이는 불의들은 외면하고 어떤 특별한 상황을 상정하고서 정의를 얘기하는 것은 공염불에 불과하게 된다. 그런 논의를 자꾸 얘기하다보면 현존하는 불의들이 묻혀버리게 된다.  
 
 그래서 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많이 팔렸으면서도 정작 우리 사회의 정의에 대해서는 전혀 논의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도덕, 정의’라는 너무나 좋은 말들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실제를 가려버리는 것이다.

 정의, 의로움은 굳이 공부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 아닌가? 맹자가 말하듯 우리 마음 깊은 속에는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아는 본성이 있으니까.

 그래서 철학자 니체는 ‘도덕은 비도덕적이다. 도덕 자체가 부도덕의 한 형식’이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공정- 책임의 공포, 정의- 복수의 본능’인 것이다. 센델은 자신이 왜 그렇게 정의를 부르짖는지, 사람들은 왜 그렇게도 정의에 열광하는지를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진짜 자신들의 욕망을.   

 우리는 장 루슬로 시인처럼 ‘세월의 강물’을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다친 달팽이를 보게 되거든/도우려 들지 말아라/그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것이다./당신의 도움은 그를 화나게 만들거나/상심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삼라만상을 보며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나’도 세월의 강물이 되어 흘러가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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