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뒤, 돈도 없고 학벌도 안 되고 빽도 없어서 서울 근교 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에 취직했던 신돌석씨. 가진 거라곤 의리 있게 산다는 생활 신조 하나였던 그가, 27세 되던 1985년 전국의 공단지역을 휩쓸었던 노동운동의 폭풍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인생의 변화를 겪고, 의리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어느덧 이순의 나이가 되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러나 있을 수 있었던,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이야기는 과거만을 다루는 후일담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인지를,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정해랑

 

▲ [삽화 - 김윤기]

논쟁은 점점 조철구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생각을 전달하는 식으로 가고 있었다. 조직에서 논의할 때 그렇게 토론이 전개되는 것을 신돌석씨는 여러 번 목격했었다. 어느 때는 저래서는 안 되는데 하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조철구의 말이 옳은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는 것이라고 으레 접어 두곤 했다. 하지만 김배영은 필사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배영의 문제 제기에는 날카로운 점이 많았다. 그래서 조철구는 그 제기를 자기 견해 속에 용해시키곤 하는 듯하였다. 하지만 김배영이 간혹 무리하게 문제를 제기하다가 스스로 혼란에 빠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북한의 친일파 청산이라든가 북한 지도부의 항일 무장 투쟁 경력 등은 평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것은 현 단계 우리의 혁명운동에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봐요. 과거를 팔아먹고 살 수는 없는 거지요. 육이오 이후 북한은 남한의 빨치산을 정전협정 논의의 대상에서 배제했어요. 이미 북한 스스로 남한 혁명에서는 보조 세력밖에 될 수 없음을 자인한 거지요. 그리고 대중들은 북한을 전혀 우호적으로 보지 않아요. 그런 가운데 남한은 자본주의가 상당히 발전했어요. 이제는 남한 혁명이 이루어지고, 그 뒤에 북한과의 관계를 정립해야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북한을 끌어들인다면 그것은 적을 이롭게 할 뿐입니다.”

김배영의 제기에 조철구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었다. 한참 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신돌석씨는 문제가 점점 복잡해진다고 느꼈다. 너무 거창한 문제를 다루는 것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였다. 그러고 있는데 조철구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북한이 정전협정 논의 대상에서 빨치산을 배제한 것인지 아닌지는 좀더 살펴봐야 할 것 같다. 그것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과연 해방정국에서 분단으로 이르는 과정에 존재했던 모순이 해결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고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야. 다시 말해서 그것이 말 그대로 과거의 일에 지나지 않느냐 하는 거지.”

“그럼 형은 북한의 민주기지론을 인정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남한에서 혁명운동을 해야 한다는 논리이군요.”

김배영이 조철구의 말을 자르고 단정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다.

“내가 그런 생각이 아닌 건 네가 잘 알 거다. 그런 식으로 몰아가는 건 수사관들이 취조할 때나 하는 거야.”

조철구가 작고 낮지만 다소 격앙된 어조로, 그러나 씁쓸한 듯한 웃음을 지으며 한마디 하였다.

“그건 내가 잘못했어요. 좀 지나쳤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형 말을 들으면 헷갈려요. 형은 과연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형 생각은 나와 같다가도 엔엘과 다를 바 없다고 느낄 때가 있거든요.”

김배영이 말하는 엔엘이라는 것은 자민투와 같은 흐름으로 민족해방론이라고 부르는 운동 노선을 일컫는 것이었다.

“맞아요. 배영이 말대로 나도 그럴 때가 있어요. 우리는 엔엘 같은 생각과 분명한 차별성을 가져야 하는 건데, 형은 안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헷갈려요. 형의 대부분 생각을 따를 수 있지만 그런 점에서는 뭔가 불분명하게 느껴지거든요.”

장선우가 김배영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신돌석씨도 뭔가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잘 정리되지 않았다. 신돌석씨는 김배영이나 장선우처럼 생각하지는 않았다. 누구와 다르냐 다르지 않느냐가 그렇게 중요한 걸까. 그건 좀 이상한 것 같았다.

조철구는 한동안 방바닥을 가만히 내려 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엔엘과 다르냐 아니냐는 중요한 게 아니야. 내 생각은 단정을 할 정도로 명쾌하지 않아. 나는 그걸 인정하지. 내 개인의 한계이기도 하고, 우리 운동의 한계이기도 해. 한계를 무시하고 자꾸 명쾌할 것을 기대하다 보면 엉뚱한 곳으로 빠지기 마련이지. 그렇지만 분명하게 정리된 것이 없는 건 아니야. 나는 이른바 엔엘이라는 것의 기본 사상, 즉 민족해방 그리고 그것의 구체적 내용인 반미자주화와 자주통일은 우리 운동의 정통이라고 생각해. 그건 잘못 된 게 아니야. 그것이 변화된 현실 속에서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고민해서 해결해 나가야지. 안이하게 옛날식을 되풀이하고 따라 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거나 그래서 좌편향 우편향을 왔다 갔다 하는 식은 안 된다는 거지. 반미자주화나 통일운동의 중요성은 난 조금도 과소평가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북한이 빨치산을 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아. 그 점에 대해서는 좀더 연구해 봐야겠지만 많은 빨치산들이 전향하지 않는 걸 봐도 알 수 있어.”

북한이 빨치산을 버렸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날 중요한 논점은 아니었지만 일치된 견해로 모아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러고 나서 한참이 지난 뒤 김영삼 정부 때 이인모를 북으로 송환하였고, 그 뒤 김대중 정부 때 비전향 장기수를 송환하고 북에서 그들을 극진히 대접하는 것을 보면서 이때의 논란을 떠올려 본 적이 있었다.

그 날의 대화가 그 뒤에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신돌석씨는 분명하게 기억할 수 없었다. 아마도 뚜렷한 결론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철구와 김배영의 이견은 신돌석씨가 보기에 그 뒤에도 완전히 해소된 것 같지는 않았다. 장선우 역시 그랬다. 조철구의 의견에 많이 동조하다가도 김배영의 의견에 따라 말하기도 했는데, 그도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대로 살아온 것 같았다. 이견들은 있었지만 평행선을 계속 달린 것은 아니었다. 그 뒤에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것은 이들의 생각에 강력한 영향을 주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신돌석씨는 이들보다 훨씬 더 많이 변한 것이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미처 변한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어느 때는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자신의 생각 속에 동시에 있을 수 없는 것이 한꺼번에 있는 경우도 있었고, 그런 것이 다른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 갑자기 발견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 [삽화 - 김윤기]

한번은 누이동생 선옥이네와 신돌석씨네 가족이 함께 포천의 산정호수와 철원 일대로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산정호수에 있는 콘도에서 일박을 하고, 그 다음날 철원으로 갔다. 선옥이 남편이 주로 안내자 구실을 했다. 그는 전철역 지하상가에서 옷 장사를 했는데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그때 무슨 이유 때문인지 상가가 모두 쉰다고 했다. 그래서 신돌석씨도 연차 휴가를 내고 함께 가게 되었다. 선옥이 남편이 9인승 승합차를 갖고 있는데 그걸 끌고 가겠다고 하였고, 콘도도 예약이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기타 비용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처음에 아내가 선옥이로부터 제안을 받았다고 했을 때 좀 꺼려졌었다. 내 힘으로 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누이동생과 매제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도움으로 놀러간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기로 마음을 먹은 아내와 들떠 있는 힘찬이, 아름이 앞에서는 가지 말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가족 나들이도 못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산정호수에 있는 콘도에 여장을 푼 뒤 호수를 한 바퀴 둘러보고, 배도 타고, 김일성 별장이라는 것도 둘러보면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마냥 좋아하는 힘찬이와 아름이를 보니 힘들더라도 가끔 한 번씩은 야외에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내도 기분이 좋은 것 같았고, 선옥이네 식구도 매우 좋아 보였다. 그런데 그런 기분이 다음날 철원에 가서 제2땅굴이라는 곳을 둘러보고 나온 뒤 깨져 버렸다.

다음날 오전에 철원으로 가서 고석정을 둘러 본 뒤 제2땅굴이라고 하는 것을 보러 갔다. 신돌석씨는 고등학교 때 일선 견학을 간 적은 있었지만, 땅굴에 직접 들어가 보기는 처음이었다. 땅굴의 규모나 길이 등을 보고 정말 놀랐다. 그런데 그 놀라움이라는 것이 신돌석씨 스스로 생각해도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펼쳐져 나갔다. 땅굴에서 발견된 물품을 전시해 놓은 곳이 있었다. 면장갑 등이었다. 이런 장갑으로 이렇게 깊게 땅을 계속 팠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이 얼마나 훼손되었는지를 말하는 곳이었다. 다시 말해서 북한 정권이 불쌍한 인민들을 강제로 동원해서 고된 일을 마소 부리 듯하며 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돌석씨는 생각이 그렇게 가지를 않았다. 이런 고통스러운 일도 견뎌 내면서 하는 사람들 앞에 왠지 숙연해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이전에 갖고 있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미처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것이 발견되는 것이었다.

땅굴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양평 어딘가에서 식사를 하였다. 신돌석씨는 아무래도 땅굴을 본 느낌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장비로도 그렇게 긴 땅굴을 팠다면 정말 대단해. 그러니까 그들을 무력으로 밀어붙이면 된다는 생각은 착각일 거야.”

신돌석씨의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선옥이가 언성을 높였다.

“오빤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 대단하다니. 강제로 시켰으니까 그러는 거지. 그걸 하는 사람이 기계지 어디 사람이야.”

선옥이의 말이 너무 컸기 때문에 아내와 선옥이 남편 모두 놀란 듯하였다. 아이들은 옆쪽에서 떠들면서 먹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강제로 시킨다고 그런 일이 다 되냐.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게 있으니까 할 수 있는 거지.”

신돌석씨가 한마디 대거리를 하자 선옥이는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긴 뭘 우러나와요. 김일성 부자만 살찌고 백성들은 그저 죽어나는 곳인데. 오빠는 그런 세상이 좋다는 거예요?”

“당신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인간적인 게 아니잖아요.”

험악한 분위기를 무마하려고 마음먹었는지 아내가 끼어들었다. 이어서 바로 선옥이 남편도 한마디 하였다.

“왜 그렇게 흥분하고 그래? 처남 말에도 일리가 있잖아. 그리고 처남이 언제 북한이 좋다고 그랬어? 괜히 흥분해서 난리야.”

선옥이 남편은 해병대 출신으로 극우보수적인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성격은 극우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과도 잘 어울리는 전형적인 상인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말한 것은 분위기를 전환시켜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내가 괜히 흥분하는 거예요? 오빠 말하는 거 들어봐요. 땅굴 판 사람들을 마치 영웅인 것처럼 말하잖아요.”

신돌석씨는 얘가 왜 이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 듣기에 충격일 수도 있는 말을 자신이 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무래도 선옥이가 아버지나 형을 닮아서 무조건 반공정신만 투철해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거의 병적일 정도로 반공을 내세웠다. 정권의 논리에 무조건 따르는 무식함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였다.

신돌석씨가 아버지에 대해서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 고향에도 딱 한 번 가봤었다. 그것도 아버지가 저 세상으로 간 뒤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다 말다 하면서 빈둥거릴 때 고모가 고향에 함께 가자고 해서 따라 나섰었다. 아버지 사촌형이라는 분이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그 분이 집안 종손이라고 했다. 형이 가야 하는데 그때 형은 직장을 다니느라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아니 그것보다는 아마 형은 가자고 해도 가지 않았을 것이다. 형은 아버지 집안이라는 것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었다. 물론 신돌석씨도 생전 가 보지도 않은 아버지 고향을 생각하는 일도 없었고, 그 집안이란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고 자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처럼 부정하는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신돌석씨에게 당숙이 되는 그 분의 빈소는 집안에 차려졌다. 시골집답게 마당은 좀 넓었지만 집은 퇴락하였고 방은 몇 개 있었으나 비좁은 것들뿐이었다. 시골이라서 그런지 빈소에는 동네 사람이 많았다. 또 집안의 종손이기 때문에 그런지 집안사람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많이 와 있었다. 신돌석씨가 도착한 것은 저녁 늦게였는데 알 만한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고모는 몇 사람과 아는 것 같았다. 인사를 나누고 빈소에 가서 조의를 표한 뒤 마당 한 구석에 있는 곳에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고모를 보고 몇 사람이 와서 앉았다. 고모가 신돌석씨를 소개했다. 아무개의 아들이라고 하자 그러냐고 시큰둥한 반응들을 보였다. 신돌석씨가 느끼기에 정말 유쾌하지 않은 대접이었다. 고모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오자고 했는지 야속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몇몇 사람이 고모와 신돌석씨가 앉은 자리에 와서 인사하고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다른 자리로 가곤 하는 일이 몇 번 이어졌다. 그리고는 자정이 가까운 때쯤이었던 것 같은데 신돌석씨와 고모는 문간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에도 세 사람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고모가 그들과 아는 체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신돌석씨는 그 옆에 앉아서 좀 따분하게 시간을 보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밖에서 술 취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개백정의 아들이 왔단 말이지. 어디 얼마나 잘 살고 있나 상판때기 한번 보자.”

신돌석씨는 남의 상가에 와서 웬 주정인가 하는 정도만 생각을 했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고모의 낯빛이 파랗게 질리는 것이었다. 그와 더불어 다른 여자들도 하던 말을 멈추고 고모의 눈치만 살살 살피고 있었다. 처음에는 왜 그런지 의아하게만 생각했는데 조금 시간이 흐르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점점 자신과 관련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밖이 소란해졌다. 누군가 주정을 부리고 다른 사람들이 말리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런 중에 술 취한 사람의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아까 말한 개백정이란 말도 들렸고, 그 밖에도 원수, 한, 죽여, 살려내 따위의 말들이 들려왔다. 다른 사람들의 제지로 그는 끝내 밖으로 끌려 나갔고 다시는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지만 영 언짢은 일이었다.

다음날 올라오면서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고모에게 물었다. 고모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네가 알아서 좋을 일이 아니라는 투였다. 그러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겠던지 한참이 지난 뒤 몇 마디를 내뱉듯 말했다.

“네 아버지는 겉똑똑이였어. 나이 들어서는 그렇게 술주정뱅이가 됐지만 옛날에는 그런대로 잘난 체도 좀 했지. 네가 네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아서 걱정이다. 그저 중간만 갔어도 됐는데, 자기가 뭐라고 반공투사라나 뭐라나 하면서 남들 눈에 피눈물을 나게 하냐 말이야. 그때 진짜 빨갱이는 열 명 중 하나도 안 됐지. 하지만 그 사람들 편을 들거나 아니면 할 수 없이 편을 들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이 열 명에 여덟, 아홉 명은 됐어. 그런데 그 사람들을 다 죽이겠다고 설쳐 댔으니. 그리고는 어떻게 동네에서 살겠어. 별 수 없이 고향 떠나 사는 비참한 신세가 됐지. 그게 다 네 외삼촌이란 사람을 만나서 그렇게 된 거야. 그 사람이 추켜세우니까 괜히 우쭐해 가지고 그런 거야. 그런데 니네 외삼촌은 그 뒤 군인이 됐잖아. 네 아버지는 그것도 못 되고 도대체 뭐냔 말야. 네 아버지를 이해하기 힘든 건 네 할아버지가 일본에서 고학하고 온 분인데 일찍부터 좌익사상에 물들었었지. 나는 얼굴도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아무튼 해방되고 좀 있다가 사라졌어. 그러니 아버지는 빨갱이이고, 그 아들은 빨갱이 죽인다고 설쳐대니 집안이 뭐가 되겠어. 그런데 동네에 그런 집이 적지 않게 있었어. 식구끼리 갈라진 집들. 그래도 지주 집안들은 다 마무리되던데 우리처럼 빈농 집들은 그것 때문에 갈가리 찢어지더라구.”

고모는 말을 마치며 한숨을 지었다. 차창 밖을 바라보는 고모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 [삽화 - 김윤기]

그때 이 말로 사태의 핵심은 거의 파악이 된 셈이었다. 하지만 신돌석씨로는 거기에 살을 붙인다든가 평가를 할 아무런 능력이 없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신돌석씨는 그때의 일들과 고모의 말들을 곱새겨 보곤 했었다. 그리고 그 뒤 이래저래 듣고 알게 된 일들을 종합해 보면 아버지는 극우단체에서도 행동파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외삼촌은 극우단체에서 군에 들어간 경우였다. 아버지 고향에 가본 것이 지금부터 40년 전 일인데 그때는 한국전쟁이 종전된 지 20년 좀 넘을 때였다. 그러므로 희생자의 가족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을 때였던 것이다. 상가에 찾아와서 난리를 피운 사람도 아마 희생자의 가족이리라 여겼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일제 말기부터 사회주의운동을 한 분이었던 것이 확실하였다. 자신의 가족에 그런 사연이 있다는 것을 신돌석씨는 그때 처음 알았고, 그 의미를 한참 뒤에 그것도 오랜 시간이 걸려서 알아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아버지, 할아버지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사느라 시간을 내기 어려웠고, 그러다 보니 어느덧 나이가 들어서 쉽게 움직이기도 어렵게 되었다.

노동운동을 시작했을 때 고모가 말한 ‘겉똑똑이’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발목에 감겨드는지 몰랐다. 그리고 나중에 고모는 자신과 조철구를 두고 아버지와 외삼촌을 연상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처음 그 생각을 할 때는 아버지가 걸었다는 길과 자신의 길이 정 반대에 서 있다는 것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가 천하에 다시없는 부끄러운 아버지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다가 더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가 불쌍해졌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연민과도 통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자기가 아버지의 죄과를 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이 분단 때문에 생긴 것이고, 분단 구조의 말단 하수인에 지나지 않았던 아버지를 용서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데에는 또 다른 까닭이 있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한 채 개천에 빠져 죽었을 때 빈소에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형이나 신돌석씨는 연락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는지 궁금했다. 형과 신돌석씨는 아마도 작은아버지나 고모가 연락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은아버지나 고모는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다. 어쩌면 그것도 아닐지 몰랐다. 누군가 아버지가 무얼 하고 지내는지를 살펴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해본 적이 있었다. 그 모든 것 중 어느 하나도 분명한 것은 없었다.

그 날 찾아온 사람들 중 한 사람은 그 이전에도 아주 가끔씩 아버지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땐가는 찾아와서 아버지와 다투고 간 적도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버지한테 얻어맞고 간 것이었다. 그 사람은 아버지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집으로 찾아왔기에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구두 수선 점포로 자신이 안내해 줬기 때문에 기억이 뚜렷했다. 그리고는 아버지와 술 한 잔 하는 자리까지 따라가서 옆에서 놀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아버지가 술잔을 땅에 팽개치고 그 사람을 패기 시작했다. 술집 주인이 달려들어서 말릴 때까지 그 사람은 반항도 하지 않고 맞기만 했다. 그 사람이 왜 맞았는지, 또 왜 맞고만 있었는지를 신돌석씨는 그 뒤에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 사람이 얻어맞기 전에 했던 한마디는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형님이야 그래도 김대장 누이 하나 건졌잖아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김대장 누이라면 대원들 모두 침을 질질 흘렸잖아요.”

김대장은 외삼촌을 일컫는 말일 것이라고 신돌석씨는 나중에 짐작했었다. 그렇다면 김대장 누이는 어머니를 가리키는 것이다. 아버지와 외삼촌은 뭔가를 같이 한 사람이고, 그 과정에서 처남 매부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짐작을 하게 만드는 것들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지금은 꽤 시간이 흘렀지만 서울역 광장에서 군복을 입은 채 살벌한 표정으로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른바 북파공작원이라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가스통에 불을 붙이며 시위를 한 적도 있었다. 이들은 명예회복과 보상을 요구하였다. 이들이 이런 행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 전부터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었다. 이들은 오히려 생활에 불이익만 받고 산다고 하였다. 이들의 과거와 현재를 담은 특집 프로를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적도 있었다. 그때 그 프로에서 신돌석씨는 그 사람을 봤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찾아 왔었고, 아버지의 빈소에도 왔었던 그 사람을 본 것이었다. 그 사람은 많이 늙어 있었다. 하긴 아버지보다 아래이긴 했어도 비슷한 연배이니 그때 이미 70대가 되었을 것이다. 그 프로에서 그 사람은 북파 공작원의 실상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증언하고 있었다.

아버지도, 선옥이도, 그 사람도 북한을 증오하고 남한의 지배 체제를 옹호해 왔지만, 사실 아무런 혜택도 누리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생각이 앞으로 변할지 어떨지 알 수가 없다. 물론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니 변할 수가 없을 것이고, 선옥이는 아직 살아갈 날이 많으므로 얼마든지 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선옥이는 최근의 정세 변화에 따라서 상당히 달라진 인식을 보여주기도 했다. 신돌석씨가 관심을 갖는 또 다른 부류는 여전히 그런 생각을 고수하는 사람들과 심지어 수구 쪽으로 오히려 다가간, 서명운동을 방해하던 여자 같은 사람들이다. 

그 여자는 앞에 말한 사람들과는 달리 건물주이니 계급적 이익이 다르다. 하지만 20년 전에는 오히려 자신의 계급적 이익에 반해서 민쭝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기도 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변해 가는 것일까?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사람이 우리를 도와주고 변해 가는 동안에 우리가 그 사람을 우리 쪽에 있게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신돌석씨는 그럴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저 그 여자가 하는 호프집에 가끔 가보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역 단체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신돌석씨의 경험으로도 안 되는 사람은 안 된다. 하지만 안 될 것 같다가도 되는 사람이 있었다. 무조건 한계만 짓고 보는 것은 문제가 아닐까?

▲ [삽화 - 김윤기]

서명대를 정리해야 할 6시가 되었다. 신돌석씨는 건너편 전철 역 위로 광장을 벌겋게 물들이는 해를 바라보았다. 이제 저 해가 떠있는 한 우리 세대와 자라나는 세대에게는 더 이상 비밀은 그 본모습을 감춘 채 숨어 있지는 못할 것이다. 그 비밀이야말로 극소수를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거꾸로 된 사실을 진실로 믿게 만들어 온 것이었다. 이제 정말 아주 오래 된 비밀은 그 진상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그 비밀을 드러나게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자 신돌석씨는 갑자기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가벼운 흥분마저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김윤기(金允起)

<전시> 1993 개인전(그림마당 민) 외 단체전 다수
         2013 ‘내 앞에 서다’전(세종문화회관)
< 기획> 2006 조국의 산하전 ‘평택-평화의 씨를 뿌리고’(대추리)
        2009 평화미술제 ‘대지의 꽃을 바다가’(제주현대미술관)
        2012 통일미술전 ‘하나는 다른 많은 것을 이룬다’(국회의원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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