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법을 배우고 나서는 다시는 남한테 떠밀리는 일을 당하지 않았다 (니체)


 솔연(率然) 
 - 김남주
 
 대가리를 치면 꼬리로 일어서고  꼬리를 치면 대가리로 일어서고  가운데를 한 가운데를 치면  대가리와 꼬리가 한꺼번에 일어서고 
 
 뭐 이 따위 것이 있어  그래 나는 이 따위 것이다 
 
 만만해야 죽는 시늉하고 살아야  밥술이라도 뜨고 사는 세상에서 
 
 나는 그래 이 따위 것이다.


 ‘초한지’의 명장 한신은 젊은 시절 동네 양아치들의 가랑이 사이를 빠져나간 적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에게 크게 봉변을 당할 판이었다. 그는 ‘대망(大望)’을 위해 작은 치욕을 견뎌낸 것이다. 그는 그 후 그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는 천하의 대장군이 되었다.

 나는 철들고부터 너무나 많이 무릎을 꿇으며 살아왔다. 아무런 꿈도 없이 그냥 살기 위해 그렇게 했다. 그러다 전교조 활동을 하며 깨달았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교육사상가 루소는 ‘에밀’에서 에밀이 한 가지 기술을 익혀 살기를 바랐다. 장인이 되어 살면 한 평생 당당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30대 중반 나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가 아니라 ‘익을수록 고개를 빳빳이 드는 보리’로 살기 위해 사회과학과 문학 공부를 하러 다녔다.  

 강의가 끝난 후 동문수학하는 벗들과 술집에서 뒤풀이를 했다. 그런데 옆 탁자의 술꾼 하나가 ‘광주(광주항쟁)’를 폄하하는 발언을 했다. 광주 출신의 도반이 크게 분노를 했다. 그 술꾼의 멱살을 잡고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다 옆 탁자의 술꾼들과 패싸움이 일어났다.

 갑자기 내 온 몸에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올라왔다. 나도 주먹을 불끈 쥐고 패싸움에 합류했다. 오! 나는 불덩이가 되어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급기야 경찰이 출동하고 우리는 폭력범으로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광주 출신 도반은 주동자로 몰려 유치장에 갇히고 나머지 도반들은 훈방되었다. 집으로 가기 위해 새벽 전동차를 탔을 때 사람들이 나를 힐끗 힐끗 쳐다보았다. 피투성이의 나는 그들의 얼굴을 휙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일제히 내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렇게 당당하게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눈을 치켜뜨고 집으로 왔다. 

 얼마만인가! 이 당당한 삶은?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싸움을 하지 않았다. 우리 집이 워낙 가난해 남과 싸우면 안 된다는 철칙을 배웠던 것이다. 싸우면 치료비를 물어 줘야 해! 그러다보니 눈꼴사나운 것들을 피해 다녀야 했다. 얼마나 굴욕적이었던가! 

 학창 시절을 순한 아이로 보내며 켜켜이 쌓인 한(恨)이 그 패싸움에서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 같다. 교사 출신의 30대 중반의 사내가 패싸움을 하다니! 얼마나 무모한 짓이었던가! 하지만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면서도 온 몸에 뜨거운 기운이 솟아난다.

 현대 철학의 아버지 니체는 ‘힘의 의지’를 삶의 원초적 도(道)로 상정했다. 그 도에 따라 사는 인간을 ‘초인’이라고 했다. 나머지 시류에 따라 사는 인간들은 ‘최후의 인간(막장 인간?)’으로 명명했다.   

 초인은 ‘주인의 도덕’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아간다. 노예는 남이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아간다. 항상 주인의 눈치를 보며 주인의 심기를 헤아리며 살아가는 게 몸에 배인 사람이다.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중국 상산에 산다는 전설 속의 뱀 ‘솔연(率然)’이다.
  
 ‘대가리를 치면 꼬리로 일어서고/꼬리를 치면 대가리로 일어서고/가운데를 한 가운데를 치면/대가리와 꼬리가 한꺼번에 일어서고’ 
 
 ‘뭐 이 따위 것이 있어/그래 나는 이 따위 것이다’   
 
 ‘만만해야 죽는 시늉하고 살아야/밥술이라도 뜨고 사는 세상에서//나는 그래 이 따위 것이다.’ 

 술에 취하셔서 황소처럼 춤을 추시던 김남주 선생님의 생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초인’으로 사셨기에 선생님은 일찍이 가셨나 보다. 

 아직도 ‘이 따위 것’으로 살아가야 비로소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 사회는 너무나 슬프다. 하지만 이렇게 살지 않으면 우리는 마지막으로 눈을 감을 때 얼마나 비참할 것인가!    

 최근에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했다. 끝내 ‘최후의 인간’으로는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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