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뒤, 돈도 없고 학벌도 안 되고 빽도 없어서 서울 근교 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에 취직했던 신돌석씨. 가진 거라곤 의리 있게 산다는 생활 신조 하나였던 그가, 27세 되던 1985년 전국의 공단지역을 휩쓸었던 노동운동의 폭풍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인생의 변화를 겪고, 의리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어느덧 이순의 나이가 되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러나 있을 수 있었던,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이야기는 과거만을 다루는 후일담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인지를,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정해랑


 

▲ [삽화 - 김윤기]

며칠 뒤 조철구를 장선우, 김배영 등과 함께 만날 수 있었다. 김배영은 장선우와 동갑이므로 신돌석씨보다 두 살 아래인 사람이었다. 장선우는 조철구의 학교 후배이지만, 김배영은 같은 학교 출신은 아니라고 하였다. 교도소에서 신돌석씨와 만나서 함께 노동운동을 하기로 의기 투합이 된 사이인 모양이었다.

조철구를 제외한 두 사람은 수배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때는 노동운동조직에 대한 추적이 심하던 때였으므로 함께 마음 놓고 앉아서 이야기할 곳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조철구가 자기가 아는 선배 집이란 곳으로 이들을 안내했다.

조철구를 비롯하여 장선우, 김배영 모두 이미 강철서신을 읽은 듯하였다. 신돌석씨가 다급하게 말을 하는데도 그들은 별로 놀라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이어서 마리안느 수녀를 만난 이야기를 하자 장선우가 적극적인 찬동의 표시를 하였다. 신돌석씨가 시원하고 정확하게 말하였다는 것이었다. 김배영은 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우리가 그 사람들 입맛에 맞춰서 운동을 할 이유가 있나. 신형이 너무 유하게 말해 준 거 아니야. 그들에게 우리 생각도 좀 심어 줬어야 하는데…”

신돌석씨는 김배영의 말을 들으니 좀 찔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신돌석씨는 과연 우리 생각이란 것이 무엇인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정도 이야기가 오고 갔는데도 조철구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조금 뜸을 들이다가 장선우가 대꾸했다.
“글쎄 그렇긴 하지만 우리를 자민투와 확실하게 구별해서 말한 건 잘한 거지.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많은 우호 세력이 불안에 떨고 있잖아.”
“우호 세력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기준으로 하면 안 되지.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지를 중심으로 말해야지.”

김배영이 다시 찜찜하다는 듯이 대꾸하였다.
“그런 점으로도 그렇지. 북한이야 민중을 굶기고 있잖아. 배 고픈 나라가 무슨 사회주의국가야. 그 때문에도 우리는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과 선을 그어야 돼.”
“네가 북한 민중이 굶는지 아닌지 봤어?”
갑자기 조철구가 끼어들었다. 뜻밖이었다. 언성이 약간 높은 채였다.

장선우와 김배영 둘 다 불만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이때까지는 두 사람은 조철구의 말이라면 거의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듯했었다. 적어도 신돌석씨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래서 서로 논의하다가도 조철구의 말이 결론이 되곤 하였다. 그런 만큼 조철구는 말을 아꼈다. 자신의 말이 비중이 있는 만큼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듯하였다.

그런 조철구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 신돌석씨에게는 익숙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와 더불어 신돌석씨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아주 먼 옛날의 일이었다. 마치 흑백 텔레비전의 한 장면처럼 아직도 남아 있는 오래 전 기억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쯤 되었을까. 신돌석씨가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누이동생 선옥이에게 하고 있었다. 북한 애들은 강냉이죽이나 먹는 주제에 그러면서도 굶고 있는 남조선 애들이 불쌍하다고 말한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신돌석씨와 선옥이는 깔깔대고 웃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옆에 있다가 소리를 버럭 지르는 것이었다.
“니들이 북한에 가 봤냐? 걔네들이 강냉이죽 먹는지 뭐 먹는지 어떻게 알아?”

너무나 뜻밖이었다. 아버지가 북한을 찬양할 사람이 아님은 물론이려니와 그나마 객관적으로 말할 사람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무슨 사연이 있는지 아니면 괜히 그러는지 공산당이라고 하면 이를 북북 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이 말이 너무나 충격적이라서 신돌석씨 머릿속에서 지금까지 떠나지를 않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무슨 까닭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그 뒤 들어 보지 못하였다.

“어쨌든 우리는 북한에 대해 제한적인 정보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지. 그런 상태에서 북한을 비판하는 것은 사실상 비난이 될 수밖에 없어. 우리는 여기서 할 일을 충실히 하면 되는 거야. 북한에 대한 비판은 민주화가 충분히 이루어지고 모든 정보가 개방된 뒤에, 좀더 분명하게 말하면 국가보안법이 철폐된 뒤에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해.”

조철구가 흥분이 가라앉은 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장선우는 뭔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계속 짓고 있었고, 김배영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형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반대 측면도 생각해야지요. 북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조건 찬양하면 운동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문제지요. 그것이 우리 운동을 적의 탄압에 그대로 내맡긴다는 것도 생각해야지요. 제 생각으로는 북한이 남한 운동에 관여할 수 있는 것은 53년의 휴전 협정으로 완전히 끝났다고 봐요.”

문제가 점점 어렵게 가고 있다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대화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은 신돓석씨로서는 정말 쉽게 오지 않는 기회였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들어봐야겠다고 신돌석씨는 속으로 다짐했다.

“글쎄. 마지막 말은 좀 검토해 봐야 할 것 같고, 뭣도 모르면서 북한을 찬양하냐 아니냐로 운동을 생각한다면 문제가 크지. 그 말은 맞아. 하지만 우리가 북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짧은 시간에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야. 겉으로 드러내고 말을 하기 어려웠을 뿐이지. 운동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 문제를 고민해 왔지. 내가 80년 봄에 시위를 할 때 잘 아는 선배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 운동을 핵심적으로 했던 선배는 아니야. 80년 봄에야 이 사람 저 사람 다 시위에 참가했으니까. 그 사람은 그저 열심히 정직하게 살려는 사람이었다고나 할까. 그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 북한이 쳐 내려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거야. 그럴 리가 없다고 했지. 그랬더니 자꾸 묻는 거야. 그래도 한번 가정해 보자구. 그런 질문을 자꾸 하니까 나 스스로도 의문이 생기더라구. 나는 왜 그런 문제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일까. 아니지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 다만 의식적으로 그 생각을 끄집어 내지 않는 것이라고 보아야겠지. 물론 어느 정도 혼란스러운 점도 없지 않았지만…”

▲ [삽화 - 김윤기]

신돌석씨는 조철구의 얼굴에서 문득 스쳐가는 비장감 같은 것을 보았다. 그는 신돌석씨를 쳐다보지 않았다. 눈의 초점이 없는 듯하였다. 그렇지만 뭔가 다짐하는 듯이 말을 했다.

“그해 봄에 연세대학교에서 강연회가 있었어. 서대숙이라는 재미학자가 와서 강연을 했는데, 정말 충격적인 말을 했지. 북한의 김일성이 진짜 김일성이라는 거야. 김일성이라는 사람이 항일유격대를 이끌었고, 일제도 두려워했다는 것은 이쪽에서도 했던 말이지. 그런데 이쪽에서는 북한의 김일성은 가짜라고 했었지. 물론 학교 교육에서는 아예 언급하지도 않았지만, 이 책 저 책에서 그런 말들을 했어. 해방 당시에 삼십이 조금 넘은 새파란 인간이 나타나서 소련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았다는 거지. 그런데 서대숙 교수는 그때 일본이 두려워하던 항일유격대 지도자가 바로 북한의 김일성 그 사람이라는 거야. 그리고 그때 항일유격대 지도자는 일제의 막강한 군사력을 피해 다니면서 싸워야 하니까 젊은 사람이 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말하면서 백발이 성성한 사람이 말 타고 다녀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 남한 어용학자들의 한심함을 비판하기도 했지.”

신돌석씨는 좀 멍해지는 느낌이 되었다. 김일성이라니. 그가 진짜고 가짜고가 문제가 아니라 그의 이름을 들먹이며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었다.

“그 뒤 경찰에 연행되고 대공분실이란 곳에서 취조당할 때 일이었어. 구타를 당하고, 물고문을 당하면서 한참 동안 괴롭힘을 당한 뒤에 수사관 하나가 들어오는 거야. 그러면서 정말 걱정된다는 듯이 말하지. 고집부리지 말고 일단 다 인정해라. 그리고 나가서 부인해라. 정말 인간적으로 못 봐주겠다. 처음에는 진짜 나를 동정해서 말하는지 알았어.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자식들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이더라구. 그리고 나서 또 한 놈이 들어오더니 김일성과 전두환 중에서 누가 더 나쁘냐고 하대. 처음에 좀 어이가 없었는데 그냥 둘 다 나쁘다고 했지. 그런데 자꾸 묻는 거야. 솔직하게 남자답게 말해 보라구. 정말 서대숙 교수에게 들은 강연이 자꾸 생각나는 거야. 하지만 끝까지 버텼어. 그런데 나와 같이 들어간 친구 중에는 김일성은 항일운동한 사람 아니냐구 그렇게 진짜 말해 버렸지. 그 친구의 조서에는 김일성을 존경한다고 말했다고 적혀 버렸어. 그런데 그 자들의 요구대로 말하면 쉽게 끝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그 다음이 또 문제야. 김일성이 항일운동했다는 것을 누구한테 들었냐고 집요하게 묻지. 그러다 보면 애매한 선배들 이름이 나오는 거야. 그런데 그 뒤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어. 나중에 관변연구기관으로 간 어느 교수가 쓴 ‘독립운동사연구’라는 책에 일제 강점기 때 주요한 항일무장세력으로 광복군과 조선혁명군, 조선인민혁명군이 나오는데, 조선혁명군을 무정의 부대라고 하고, 조선인민혁명군에는 괄호를 치고 김일성이라고 나오거든.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3천 명 규모 정도 된다고 해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것으로 말하지. 그 뒤로는 들어가서 조사받으면 거기서 보았다고 말한 친구들이 생겼어.”

조철구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신돌석씨를 쳐다 보며 말을 이어갔다.
“신형도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거야. 우리나라에서 노동운동을 한다는 것은 혁명운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어. 그렇지만 고민이 먼저일 필요는 없어. 나야 학생에서 존재 이전을 해서 노동운동을 하게 된 사람이지만, 신형은 원래 노동자로서 노동운동을 하게 된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나 같은 먹물들은 먼저 고민을 하지. 알아야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이거든. 하지만 신형은 아니야. 몰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구. 하면서 알게 되는 사람이지. 존재가 지배계급과 적대적일 수밖에 없으니까.”

조철구가 하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감이 왔다. 사실 신돌석씨는 뭔가 설명할 수 없으면서도 조철구나 다른 학생 출신 활동가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았다.

“서대숙 교수의 강연이 우리의 사고를 바꾸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면 이번에 나온 강철 서신도 우리에게 충격을 준 거지. 하지만 서대숙 교수의 강연도, 강철 서신에 나오는 박헌영 비판도 선배들 중에서는 벌써부터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 정말 조심스럽게 말했고, 극소수만이 그 말을 들을 수 있었지만, 나도 학교 다닐 때부터 선배 중 일부에게 그런 말을 들어 봤는데 사실 신뢰가 별로 안 가더라구. 하지만 그것이 재미학자의 강의로 나오니까 달라지는 거야.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그만큼 민주화는 소중한 거야. 레닌이 그랬지 아마. 완전한 민주화가 될 때 살아남을 지배계급은 없을 거라구. 그렇지 부르주아는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민주주의를 자기 이윤을 창출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선에서만 필요로 하지. 그 이상의 민주주의는 억압할 수밖에 없어. 미국이 왜 전두환을 밀어 주었겠어.”

▲ [삽화 - 김윤기]

이야기가 조철구의 일방적인 강연식으로 흐르자 장선우는 언제나 그랬듯이 체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조철구의 말을 듣고 그것을 수용하려는 자세가 뚜렷해 보였다. 하지만 김배영은 뭔가 문제를 제기해서 이어나가려는 듯 심각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렇지만 강철 서신은 문제가 있다고 봐요. 박헌영이야 북한 내 권력투쟁에서 패한 것 아닙니까? 그것을 북한측 주장 그대로 간첩으로 몰아서야 되나요? 그런 식으로 하니까 사회주의국가에 대한 대중 신뢰가 떨어지는 거지요.”

당시에는 박갑동이라는 사람이 쓴 ‘박헌영’이라는 책이 한창 유행하고 있었다. 신돌석씨도 읽어 봤었다. 남로당을 대표하는 박헌영을 다루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맹목적인 반공적 시각이 아니라 그를 어느 정도 우호적으로 그렸다는 점만으로도 이 책은 의미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신돌석씨도 학출 활동가들이 권해서 읽어 보았었다. 그런데 그 책에서는 박헌영에 대한 재판은 완전히 조작된 것처럼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박헌영은 재판 과정에서 냉소적으로 임했다고 묘사되어 있었다. 물론 박갑동이란 사람이 그 현장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랬다고 들었다는 정도였다.

“박헌영이 미국이 심어 놓은 간첩이 아니더라도 결과적으로 간첩과 다름없는 짓을 했고, 그렇게 된 것이 자신과 자신의 파벌의 이익을 전체 운동의 이익보다 우선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전부터 있었던 말이었어.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몇몇 선배들한테 학교 다닐 때부터 들은 적이 있었어. 그때는 긴가 민가 했었는데 그러다가 ‘남로당 연구’라는 책을 보면서 그것이 우리 운동을 보는 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 박헌영을 종파주의로 보고 그것이 결국 미제의 간첩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고 보는 북한의 시각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해. 강철 서신은 그것을 운동권 전체에 확산시켰다는 데서 의미가 있다고 보아야 할 거야. 강철 서신이 문제가 되는 점은 다른 데 있다고 생각해. 김구나 이순신을 박헌영과 대비해서 이상적인 인간형처럼 그렸다는 거야. 김구나 이순신은 개인적으로 훌륭한 인격자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이 역사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는, 이상형의 인간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야. 김구는 좌익 쪽에 테러도 많이 가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어. 그의 사상은 극우적인 데가 있지. 물론 마지막에 삼팔선을 베고 누워서라도 분단을 막겠다고 한 그의 충정은 높이 사줘야 하지만 말야. 또 이순신은 봉건체제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사람이지. 군사독재가 그의 한계인 맹목적인 충성심을 오히려 훌륭한 점인 것처럼 부각한 거지. 그가 애민정신을 갖고 당시의 난민들을 조직해서 군대를 보충해 갔다는 점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을 하지 못하거나, 일부러 지나쳤다고 봐야 할 거야. 그런데 강철 서신에서 이들을 보는 관점은 이전의 군사독재가 보는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아. 이런 시각은 사람들의 품성, 의지만을 중요시하게 되고, 결국 국가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자를 마치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이상형처럼 그릴 수도 있지.”

조철구의 말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장선우의 표정은 조철구의 말을 열심히 듣는 성실한 수강생의 그것으로 변해 있었고, 김배영은 침묵을 지키면서 듣고 있었지만 여전히 뭔가 이견이 있는 듯하였다.

“박헌영에 대해서는 내가 공부를 좀더 해봐야 할 것 같네요. 그건 그렇다 치고 북한을 이상사회라고 보고 그것을 알리는 것이 노동자들의 혁명의식을 고취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봐요.”

“그 점은 나도 동감이야. 운동은 이상사회를 정해 놓고 그것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모순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라고 한 말이 생각나네. 북한을 알리는 것은 동포애를 알리고, 적대의식을 제거하는 데는 의미가 있지. 현재 그곳을 이상사회라고 말해 봤자 노동자 대중과 괴리만 될 거야.”

신돌석씨가 보기에 조철구와 김배영이 오랜만에 의견의 일치를 본 것 같지만 어감은 어딘지 좀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점은 생각해 봐야 될 거야. 북한과 남한의 친일파 척결에 대한 태도의 차이 말이야. 그런 점에서 우리는 역사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거지. 북한에서 친일파가 거의 척결되었다는 것과 그에 비해 남한에서는 척결은커녕 오히려 온존 강화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 아니야? 이런 점은 노동자들에게 꼭 알려야 할 거야. 물론 대중에게 설득력 있는 내용으로 말해야 하겠지만…”

우리 나라에서 친일파가 처벌받지 않고 그대로 기득권을 누리면서 산다는 것은 신돌석씨도 많이 들어온 이야기였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친일파가 청산되었다는 말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왠지 호기심이 생겼다. 친일파 이야기가 나오자 또 흐릿하게 떠오르다가 분명하게 잡히는 장면이 있었다.

신돌석씨의 외삼촌은 월남에서 전사하였다. 맹호부대 장교로 월남에 갔다가 유골이 되어 돌아왔다. 아버지가 외가를 싫어하고 외할머니도 아버지를 싫어해서 신돌석씨는 외가 사람들과 자주 만나지 못했다. 더욱이 외가는 부산에 있었으므로 그렇지 않아도 서로 왔다 갔다 하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외삼촌이 살아 있을 때에는 꼭 그랬던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신돌석씨는 어린 시절에 군복을 입고 찾아 왔던 외삼촌을 몇 번 본 기억이 있었다. 특히 월남에 가기 전에 와서 아버지와 술잔을 나누던 것은 아주 생생하게 기억되었다. 그때 신돌석씨는 아버지와 외삼촌 앞에서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로 시작되는 맹호부대 노래를 목청껏 부른 뒤 용돈을 받았었다. 그 뒤 외삼촌이 유골이 되어 돌아온 뒤에도 한 두 차례는 서울에 올라온 외할머니, 외사촌형과 함께 외삼촌이 묻혀 있던 국립묘지에 갔던 적도 있었다.

▲ [삽화 - 김윤기]

외삼촌의 묘소에 성묘하러 갔던 어느 날이었다. 그때 외사촌형은 어느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신돌석씨는 아마 초등학교 6학년쯤 되었던 것 같다. 성묘를 마치고 국립묘지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경찰 묘역에 가게 되었다.

거기에서 신돌석씨는 매우 반가운 이름들을 발견하였다. 그 당시 동아방송에서 한창 방송하고 있던 ‘특별수사본부’라고 하는 실록 드라마에서 나오는 수사관들 이름이었다. 신돌석씨와 형은 그 연속극을 무지무지하게 좋아했다. 그 드라마가 방송될 때에는 만사를 제쳐 놓고 라디오 앞에 앉아서 귀를 기울였다.

처음 시작할 때 사이렌 소리와 함께 ‘이 드라마는 검군경찰의 수사 기록과 법원의 판결 및 증언을 토대로 엮는 수사실록이다’라는 말로 시작되었는데, 얼마나 들었던지 이 말을 4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외울 정도였다. 이 프로는 해방 직후에서부터 6.25 때까지 남로당의 프락치 활동을 추적하고 관련자를 검거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검사와 수사관들을 사생활을 팽개친 채 오로지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좌익 무리들과 싸우는 사람들로 묘사했기 때문에, 신돌석씨와 형은 그들을 영웅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6.25 때 폭파된 한강 다리를 건너다가 강에 빠져 익사했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런데 그들의 무덤을 그곳에서 발견하였으니 감개무량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신돌석씨와 형의 태도를 외사촌형이 냉소적으로 받아넘겼다.
“이 사람들이 뭐하던 사람들인 줄 알아. 독립투사들을 잡아다가 고문하던 일본 고등계 형사들이었어. 그 중에서도 아주 악질적인 자들이지.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다가 해방되니까 재빨리 공산당 잡는다고 하면서 살아남은 거야. 그들이 빨갱이로 만들어 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정말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아마 이순신이 매국노라고 해도 그렇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닐 거야, 아닐 거야. 외사촌형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일 거야. 그렇게 훌륭한 사람들이 그럴 리가 있나. 신돌석씨는 스스로를 달래가며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외사촌형의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드라마에서도 그 사실 자체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내용들이 있었다. 수사관 한 사람이 남로당 프락치였던 경찰을 체포하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수사관에게 그 경찰이 이런 말을 했었다. 나는 너처럼 일본놈 밑에서 경찰을 하진 않았노라고. 그때 그 수사관은 씩씩거리기만 했었다. 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별 생각 없이 넘겼었다. 그런데 외사촌형의 말을 듣고 나니 그 대목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김윤기(金允起)

<전시> 1993 개인전(그림마당 민) 외 단체전 다수
         2013 ‘내 앞에 서다’전(세종문화회관)
< 기획> 2006 조국의 산하전 ‘평택-평화의 씨를 뿌리고’(대추리)
        2009 평화미술제 ‘대지의 꽃을 바다가’(제주현대미술관)
        2012 통일미술전 ‘하나는 다른 많은 것을 이룬다’(국회의원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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